환구단
1. 개요
'''환구단은 유교의 천자가 하늘인 상제(上帝)와 오방제(五方帝)에게 바치는 제사를 지내는 제단이다.''' 환구는 예기에 기록된 천자가 행해야 할 천제(天祭)이다. 이 제사의 본단을 환구단(圜丘壇, 圓丘壇)이라고 부른다.
환구단은 중국의 황제가 유교의 예법에 따라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장소다.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자국 이외의 국가들은 모두 오랑캐로 보며 오직 자국 군주만이 환구단을 짓고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우리나라같이 유교를 수용하고 외왕내제의 성격을 가진 나라들은 모두 환구단을 짓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일반적인 동양 전통건축물과 달리 환구단은 둥글거나 혹은 원에 가까운 팔각정 같은 형태를 한 경우가 많다. 이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이라고 해서, 동양에서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관념이 있었기 때문에, 땅에 있는 일반적인 기와집 건물들은 사각형이 대부분이지만 이것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건물이므로 둥글게 지은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선 환구단은 원구단으로도 불린다. 圜이 '둥글 원', '돌 환' 두 가지 훈음으로 읽으면서 생긴 혼란이다. 원구단이라고도 이 항목에 들어올 수 있다. 기사 참조. 하지만 그 이유는 사실은 매우 간단하다.[1]
서울특별시 중구 소공동 웨스틴 조선호텔 앞에 대한제국 시절의 환구단 유적이 남아있다. 원래는 거대한 규모를 가진 대한제국의 성역(聖域)으로 지정되었던 곳이었으나 일제가 1913년에 호텔 신축을 이유로 철거하여 환구단 본단(本壇)은 없어지고, 대신 환구단의 상징물 격인 '황궁우(皇穹宇)' 만 남았다.
1.1. 삼국시대
우리나라는 중국에서 유교가 전래되기 전에도 다양한 종류의 하늘에 지내는 제사가 있었다. 부여, 고구려, 백제 등 여러 왕조에서 동맹, 수신, 영고 등 행사에서 하늘과 오방의 신,[2] 각국의 건국자들에게 제사를 올렸다.
지금의 경주시 나정 자리로 추정되는 신라의 신궁 역시 제사 지낸 대상이가 정확히 누구인지 논란이 있지만, 황궁우와 유사한 천원지방을 묘사한 팔각형 건물 터가 나왔기 때문에 천신 숭배 시설이 아니었을까 하는 설도 있다.
시간이 흘러서 유교, 도교, 불교가 전파되어 전통문화와 융합하면서 도교식 제사인 초제[3] 나 불교식 행사 겸 제사인 팔관회, 연등회 등이 등장했다.[4] 특히 유교식 제사가 가장 중요하게 자리잡아 환구단, 종묘, 사직,[5] 방택[6] 등 유교적 제사시설을 이 땅에 세웠다.
1.2. 고려시대
'''상천(上天)의 덕은 무성(無聲)이며'''
'''생물이 그로인해 살아갑니다.'''
'''나라의 근본은 식량에 있으며'''
'''사람이 그로인해 살아갑니다.'''
'''봄을 맞아 수확을 기대하며 제사 드립니다.'''
'''상제(帝)의 은혜가 아니면 민(民)이 어떻게 살아가겠습니까?'''
고려왕조 시절 원구단에 사용한 상제의 축문. 이규보가 썼다. 동국이상국집 전집 40권 중 발췌.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인 중국식 환구단은 고려 성종 때 최초로 지어졌다. 궁궐의 남쪽에 지어졌고 고려사를 보면 원구단의 건축 기록을 알 수 있다.'''봄이 때 맞춰 오는 것은'''
'''남교(南郊)[7]
에서 제사지냈기 때문입니다.''''''황열조(皇烈祖)[8]
를 생각건대''''''공이 막대하여 나라를 세웠습니다.'''
'''저 하늘과 같이 제사지내니'''
'''예의가 옛 가르침에 맞습니다.'''
'''이제 강림하셔서 자리에 앉아 주십시오.'''
'''저흴 도와 매 해 풍년이도록 도와 주십시오.'''
- 동국이상국집 전집 40권 중 발췌. 배제(配帝) 태조 왕건에게 바치는 축문.
하늘의 신 "상제(上帝)"와 오제(五帝), 그리고 배제(配帝) 태조 왕건에게 제사지내며 기우제를 지냈다. 국왕이 즉위할 때, 왕태자를 책봉할 때도 종묘와 환구단에 제사지내 하늘과 건국자에게 이 소식을 고하였다.
위에 보듯이 봄 여름 등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동국이상국집에 실린 제문을 보면 고려는 상제, 오방제, 배제(配帝)[9] 에게 각각 제문을 올리고 제사 지냈다.
환구단은 원 간섭기에 들어서고도 어떻게든 살아남았다. 이는 원이 한족 왕조가 아니어서 천제에 대해 무관심했기 때문이다.
1.3. 조선
고려가 무너지고 조선 왕조가 건국된 후 태조 이성계는 환구단 폐지를 요청하는 유학자들의 상소를 거부하고 환구단을 "원단"으로 이름만 바꾸어 계속 시행한다.
이후 원단은 태종 대에도 유지가 되나 명의 압박, 내부의 성리학자들의 항소로 인해 결국 폐지된다. 나중 세조대에 잠시 부활하나 오래못가 폐지된다.[10]
하지만 폐지 후에도 남교(南郊)[11] 의 제단이란 뜻인 '남단(南壇)’ 또는 ‘풍운뇌우단(風雲雷雨壇)’으로 이름만 바꾸고 제사를 계속 지냈다. 그러나 사대부들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천자만이 할 수 있으므로 제후국인 조선에서 이를 거행하는 것은 안 된다며 끊임없이 반대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왕들은 계속해서 제사를 지냈다.용산에 원조 환구단 있었다? 아시아경제
1.4. 대한제국
아관파천 이후 고종은 1897년에 경운궁[12] 으로 환궁하면서 본래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던 중국풍 별관이자 조선왕실의 별궁인 "남별궁"을 부수고 그 자리에 몇백년 만에 다시 환구단을 짓는다.[13]
1897년(광무 원년) 고종은 이 곳에서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낸 후 대한제국 황제로 즉위하게 되고, 이 때부터 환구단은 대한제국의 자주 독립과 국가 평안을 기원하는 신성한 장소로 부상하게 된다. 대한제국은 기본적으로 동지(冬至)와 새해 첫날에 제천(祭天) 의식을 거행하였다.
1899년에 환구단 내에 '황궁우(皇穹宇)' 를 설치하여 안에 신위판(神位版)을 봉안하였고 1902년에는 고종 황제 즉위 40년을 맞이하여 '석고단(石鼓壇)' 을 설치하였다.
1.4.1. 건축
1.4.1.1. 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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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구단 정문은 원래 황궁우의 남쪽 지금의 조선호텔 출입구가 있는 소공로변에 위치하였는데, 1960년대말 철거된 이후 오랫동안 소재를 알지 못하였다. 2007년 강북구 우이동에 있는 그린파크 호텔을 재개발하는 과정에서 호텔의 정문으로 사용하고 있던 문이 원래 환구단의 정문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2009년 정문의 이전 복원을 하게 되었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평삼문이고, 가운데 칸이 특별히 넓고 양 측칸을 좁게 조정하였다. 기둥 위에는 출목을 갖춘 이익공식 공포를 사용하였고, 대한제국 황실의 문장이었던 오얏꽃 문양과 봉황문 등을 장식으로 사용한 점도 특별하다.
1.4.1.2. 황궁우(皇穹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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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 환구단 안에 세워진 환구단의 상징물로 팔각 3층 건물이다. 안에는 신위판들이 봉안되어 있고 천장에는 경복궁 근정전의 칠조룡(七爪龍)과 다른 팔조룡 조각이 새겨져 있다. 중국에서는 삼조룡은 백성, 사조룡은 제후, 오조룡이 황제인데 경복궁 칠조룡은 상수로 여겨지는 홀수로 오조룡보다 상급인 칠조룡인데 이는 대한제국 황제와 황족(皇族), 황실을 상징한다. 짝수인 황궁우의 팔조룡은 팔작지붕과 더불어 어떠한 의미인지는 확실치 않다. 일제의 환구단 철거 이후에도 그대로 존치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왔다. 주변에 조선호텔 등 여러 고층 건물들이 들어서버린 위치가 위치인지라 삭막함 사이에서 홀로 아늑한 멋을 풍긴다. 서울 상공을 통해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빌딩숲 속으로 아기자기하게 보여 갸륵한 느낌이 난다는 사람도 있다.
2011년 10월 3일 KBS 9시 뉴스를 통해서 황궁우에 관한 보도내용이 방송되기도 하였는데, 뜻밖에도 황궁우 정원이 모래바닥으로만 되어있는 한국 전통방식이 아닌 잔디 형식의 일본식 조경으로 꾸며져 있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논란을 일으켰다. 이것은 일제가 과거에 호텔을 짓는 목적으로 환구단 본단을 철거하고 황궁우만을 남기게 되고나서 생겼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게다가 일제가 환구단 입구 주변에 여러개 세워놓았다는 석등(石燈)도 논란대상으로 올랐으며 문화재청은 추후 일제가 세웠던 일본식 석등들을 모두 철거할 예정이라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그 밖에 일제가 남겨놓은 잔재들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 뿐 아니라 팔각정 역할을 하는 황궁우 역시 미세하게 기울어져 있다는 분석도 제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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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에는 일본식 정원이라고 지적받았던 잔디를 들어내고 대신 전통방식에 따라 마당을 전부 마사토로 포장했다. 그리고 석등과 가로등, 조형수 등을 철거해 변형된 모습을 바로 잡았고, 환구단 주변에 산재된 난간석, 지대석 등 석재 유물을 한 곳에 모아놓았다. 황궁우 기단의 포방전 중 노후되고 파손된 부분을 전통 전돌로 다시 까는 등 정비하고 시멘트로 채워졌던 자연석 박석 줄눈을 해체, 마사토로 줄눈을 채웠다.
다만 아직도 갈 길은 멀었는데 애초에 환구단 옆에 웨스틴 조선호텔이 있어 공간이 부족해 호텔이나 환구단 둘 중 하나를 옮기지 않는 이상 완전복원은 사실상 불가능하되 현재의 기술로 환구단 크기 정도의 건물을 옮기는 건 가능하다. 그나마 살아있는 황궁우도 내부시설 등이 고증과 많이 멀다. 일월성신의 위패도 시멘트 블럭 위에 놓여져 있는 실정.(2013년 1월 기준)
1.4.1.2.1. 위패
제1단: 황천상제(皇天上帝), 황지기(皇地祇),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
제2단: 대명(大明), 야명(夜明)
제3단: 북두칠성(北斗七星), 오성(五星), 이십팔수(二十八宿), 오악(五嶽), 사해(四海), 명산(名山), 성황(城隍), 운사(雲師), 우사(雨師), 풍백(風伯), 뇌사(雷師), 오진(五鎭), 사독(四瀆), 대천(大川), 사토(司土)
1.4.1.3. 본단(本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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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기 이전 본단의 보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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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D 복원도.
환구단의 본단으로 황궁우와는 다르게 매끈한 황금색 지붕이었다. 아쉽게도 일제가 허물어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1.4.1.4. 석고단(石鼓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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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구단 입구에 있으며 고종 황제 즉위 40년을 기념하여 1902년 환구단에 설치되어 있는 북이다. 광화문 옆 해치를 조각한 석공의 작품이라고 한다. 이름의 뜻은 '돌로 만든 북', 즉 '돌북'이며 제천(祭天)을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어 몸체에는 화려한 용(龍)의 무늬가 새겨져 있다. 황궁우와 함께 일제의 환구단 철거 이후에도 존치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져 왔다.
1.4.1.5. 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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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구단 삼문. 대문으로 보이는 건물이 웨스틴 조선 호텔. 저 곳으로 내려가면 답도가 있다.
1.4.1.6. 답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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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구단 답도. 환구단과 황궁우를 잇는 계단이었다.
1.5. 일제강점기
1910년 8월에 한일병합이 체결된 후 대한제국은 없어져버렸고 황제와 조정이 없어진 이상 환구단은 더 이상 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과거의 환구단은 1913년 일제가 환구단 자리에 '조선철도호텔'을 신축한다는 조선총독부의 훈령에 따라 결국 일제에 의해 철거됐고, 황궁우와 석고단만 남긴 채 영역도 축소되었다.
환구단이 철거된 자리에 조선철도호텔이 들어섰는데, 이 호텔은 해방 후인 1968년 현재의 웨스틴 조선호텔로 이어 나가게 된다.
1.6. 대한민국
1945년 광복 이후 제정복고는 되지 않았다. 왕실도 국교도 없는 민주공화정을 채택한 대한민국에 더 이상 환구단이란 국가시설은 필요하지 않았다. 과거의 환구단은 단지 문화재로 남았을 뿐이라 1967년 사적 제157호로 지정되었다.
제단(祭壇) 자체를 복원하지 못한 채 황궁우와 석고단을 중심으로 옛 환구단 시설의 흔적을 남겼는데, 이후 서울 도심이 발달하고 도로가 근처에 새로 나는 등 변화 속에서 시간이 멈춘 듯 지금 같은 모습으로 그 자리에 서 있다.
웨스틴 조선호텔 앞에 위치한 탓에 처음 방문한 외국인이나 환구단을 모르는 사람들이 문화재가 아니라 조선호텔의 정원이나 부속물이라고 여긴다는 말들도 있었다.
웨스틴 조선호텔 앞에 있기는 하지만, 엄연한 국가문화재이자 보호시설이기 때문에 문체부 또는 문화재청과 서울시 등에서 관리감독하므로 신세계조선호텔이 환구단 시설에 손을 댈 권리가 없다.
일각에서는 아예 웨스틴 조선호텔을 이전하거나 황궁우를 옮겨 고증하여 환구단 본단(本壇)을 복원하자고 촉구하기도 하였다.
환구단 철거 이후에 환구단의 정문인 '환구대문' 또한 흔적도 없이 철거된 줄 알았지만 2007년 서울 강북구 우이동 삼양교통 차고지 앞에 있는 '그린파크호텔'에서 발견되었다. 이런 영문을 모른 채 호텔 측에서 아예 환구단 정문을 시내버스 출입구로 사용했다고 한다. 발견되었을 당시 현판은 없었고 '백운문'이라는 현판이 대신했는데, 건축방식을 조사해보니 환구단 정문이라고 밝혀졌다. 다행히도 우이동 그린파크호텔이 재개발되면서 제자리로 이전, 2009년에 완전 복원을 하였다. 기사
환구단은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연중무휴로 무료 개방된다.
신령의 위패를 모신 황궁우 내부는 구에서 운영하는 문화유산탐방 및 생태체험 프로그램을 이용해야 볼 수 있다.
국립고궁박물관에서 2015년 5월 5일부터 2015년 12월 31일까지 "황제국의 상징 환구단과 환구제" 특별전을 개최했다. 대한제국 환구단에서 사용하던 유물 몇 가지는 최초 공개이며, 황궁우 내부 모형도 전시되었다.#
2. 전근대시대 동아시아의 사당 목록
3. 같이보기
[1] 본래 환은 원의 이체자로 구별 없이 쓰여서 이 건물이 세워질 때는 원구단이 맞다. 그러나 이 글자가 구한말 화폐 단위의 이름으로 쓰이자, 동그라미 원과 화폐로 쓰이는 원슬 구별하고자 음이 '환'으로 바뀌었다. 이 글자는 실생활에선 화폐 이외에는 쓸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환으로 완전히 독음이 굳어버렸다.[2] 동, 서, 남, 북, 중앙의 신들. 다른 이름으로 오제(五帝), 오방제라고한다.[3] 도교의 신과 별의 신에게 지내는 제사. 신라 시대부터 조선 중기까지 존재하였다.[4] 불교의 천신인 제석천을 주존으로 모신 절인 제석원/제석사를 짓기도 했다.[5] 땅의 신과 농사의 신에게 지내는 제사와 그 제단을 의미한다.[6] 원구가 하늘에 제사하는 곳이라면 방택은 땅에 제사하는 곳이다. 보통 둘을 같이 설치한다.[7] 전통적인 환구단을 세우는 위치.[8] 열조는 태조의 존칭, 황은 황제란 뜻이다.[9] 배제의 제는 신을 뜻하는게 아닌 군주를 뜻한다. 즉 같이 제사 지내는 황제(皇帝), 태조 왕건을 말한다.[10] 이 때부턴 소격서의 초제와 마니산 참성단의 단군제를 올릴 때 옥황상제 위패를 놓아 눈 가리고 아웅식 천제를 지냈으나 초제는 이단인 도교의 제사라며 유학자들에게 지속적으로 공격받다 임진왜란을 거치며 완전히 사라졌고, 참성단 제사도 비록 단군을 기린다는 유교적 효 이념을 내세워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면했지만 역시 잦은 공격을 당했다.[11] 남쪽 교외라는 뜻으로 환구단은 남쪽 외진곳에 설치한다. 고려도 '남교'란 표현을 썻으며 중국의 천단도 북경성 남쪽 교외에 있다.[12] 덕수궁의 옛 이름이다.[13] 남별궁을 부숴 환구단을 세운 이유는 더이상 중국과 사대관계를 맺지 않고 동등한 위치에 서겠다는 뜻을 나타내려고 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