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의 봄
위쪽은 한국식, 아래쪽은 북한식(~3분 2초)이다.
1. 개요
일제강점기인 1926년 이원수 시인이 발표한 동시이며, 동요는 이일래(본명 이부근)작곡 버전과 홍난파 작곡 버전 두 종류가 있다. 이 중에서 세간에 알려진 버전은 홍난파 버전. 일본어 버전도 있다.
시대가 시대인 만큼 일본식 운율인 7·5조가 사용되어 일본인들에게도 친숙한 느낌을 준다고 한다. 비슷한 7·5조 노래로 '학교#s-9'과 '섬집 아기'가 있다.
또한 본래 우리말 문법을 지켜서 쓰면 "내가 살던 고향은"이라고 하는 게 적합하나, 일제강점기였다보니 일본식 문법인 "나의 살던"으로 된 것으로 보인다.
가사는 서정적이지만 곡조는 섬집 아기처럼 우울한 느낌이 드는데, 어두컴컴한 곳에서 혼자 듣다 보면 좀 무서워진다(…). 하지만 묘하게 착착 감기는 곡이라 초딩때 배우는 노래인데도 성인이 되어 잊어버리는 경우는 별로 없다.
이원수는 이 동요를 중학시절인 10대에 지었는데, 그 1절은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 / 울긋불긋 꽃대궐 차린 동네 /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이다.
이 노래의 배경이 되는 곳은 당시 이원수가 살고 있던 '''창원시'''. 지금의 모습으로는 상상하기 어렵지만 1980년대 말까지만 해도 창원은 옛 마산시 등에 비하면 시골에 가까웠다. 당시 이원수가 살고 있었고 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소답동 일대는 더더욱 그렇다. 예를 들어 바로 옆 동네인 명곡동만 하더라도 1990년대 초반은 그야말로 허허벌판이었다. 그래서 창원 팔용동 남산에는 '고향의 봄 도서관'에 이원수 문학관이 있다. 그러나 이원수가 노래한 '꽃피는 산골'은 팔룡산 쪽이 아니라 골짜기의 반대쪽 면인, 현재 창원역 뒤에 있는 천주산이다. 이 곳의 진달래는 산 사면을 따라 울긋불긋 피어올라가는 모습을 보인다. [1]
2011년 초 이원수가 고향의 봄을 쓴 곳이 확인되었다. 창원시 마산합포구 오동동 71번지라고 한다. ‘고향의 봄’ 탄생지는 마산 오동동 71번지
여담으로 영구와 땡칠이 시리즈의 세번째 작품인 영구람보에서는 엔딩곡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예전에 고교야구 대회에 재일교포 야구단이 초청받아 참가했었는데 경기에서 재일교포 팀이 승리할 경우 한국의 여러 고교팀이 각자 학교의 교가를 트는 것과 달리 이 고향의 봄을 틀었었다.[2]
일제강점기 시기에 지어진 노래이다 보니 북한에서도 불리고 있는 노래며 여기선 '동네'가 아니라 '동리'로 부르고 있다. 이런 점이 고려되었는지 2018 제1차 남북정상회담에선 오연준이 만찬장에서 불렀고 환송식 공연에서도 감동적으로 활용되었다. #
북한에서 송출하는 V15 난수방송의 21호 탐사대원 개시곡으로 쓰이고 있다.
이 노래를 기념하여 경상남도 양산시에 고향의봄로가 있으며, 창원시 마산합포구 산호공원[3] 에는 고향의 봄 노래비가 건립되어 있다.
만주어 버전도 있다. #
2. 가사
2.1. 한국어 원 가사
(1절)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리인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
(2절)
꽃동네 새동네 나의 옛고향
파란 들 남쪽에서 바람이 불면
냇가에 수양버들 춤추는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2.2. 일본어 번역 가사
(1절)
我が生まれた故郷 花咲く 山里
桃の花 あんずの花 赤ちゃん つつじ
色とりどり鮮やかな 花の宮殿[4]
その中で 戯れた時が 懐かしい
--
(2절)
花の里 鳥の里 我が故郷
青い草[5]
南から 風が吹けば川の ほとりの 柳が 踊り躍る[6]
その中で 遊んだ時が 懐かしい
3. 패러디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1970년대 전후부터 "나의 살던 고향은 XX교도소"로 개작한 노래가 유행했다.
대개는 그 지방에 있는 교도소의 이름을 따거나 아니면 인천교도소라고 불렀는데[7] 사실 인천에는 교도소가 없으며 현재 인천지방법원 옆에는 인천구치소가 있다. 이 인천구치소가 예전에는 인천소년교도소라는 이름으로 있었고 소년범을 수용했으며 지금도 형기 5년 이하 초범수형자(기결수)가 일부 수용되어 있다. 대구에서는 달성군 화원읍의 화원교도소를 넣어 부른다. 구미도 인천교도소를 넣어 부르며 서울 송파구 일대에서는 성동구치소라고 부른다 물론 교도소와 구치소의 차이를 아이들이 알 리가 없었으니...
지역마다 가사는 다르지만 내용은 거의 대동소이하게 '''XX교도소에 수감됐던 죄수가 꽁보리밥 먹다가 10년만에 출소 혹은 탈옥(...)을 해서 집에 와보니 아내는 도망갔다'''는 내용이다. 대개 다음과 같은 가사로 불렸다. 물론 지역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혹은 2번째 행이 '''썩은 밥에 개구리 반찬 그립습니다'''로 치환되는 경우가 있다.
[1] 이원수가 태어난 곳인 양산시에서는 지은 곳은 창원이지만 묘사한 모습은 양산이라면서 역시 시비(詩碑)를 세웠다.[2] 영화 '그라운드의 이방인'에서 자세히 묘사된다.[3] 고향의 봄을 썼던 오동동 자취방 뒷산이면서 이원수 선생의 모교인 마산용마고등학교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4] 직역하면 '알록달록 선명한 꽃 궁전' 한국어 가사와 다르다.[5] '파란 풀'로 번역되었으며 일본어로 '들'은 '野原(のはら)'. 박자를 맞추기 위해 조금 바꾼 듯 하다.[6] 직역하면 '냇가의 수양버들이 춤추고 춤추네'. '춤추는 동네'라는 명사 서술어가 동사 서술어로 번역되었다.[7] 전두환 잡혀 들어갈 시절엔 안양교도소라고 불렸다.[8] 대구 지역에서 구전되던 가사[9] 서울 북부에서 구전되던 가사. 1970년대엔 서울교도소였고, 전두환이 잡혀갈 때 안양교도소라고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