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난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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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홍난파(洪蘭坡)'''
'''본명'''
홍영후(洪永厚)
'''호'''
난파(蘭坡)
'''본관'''
남양 홍씨[1]
'''출생'''
1897년 4월 10일
경기도 남양군 둔지곶면 활초동
(현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활초리)[2]#
'''사망'''
1941년 8월 30일(향년 44세)
경기도 경성부 휘경정 경성요양원
'''종교'''
개신교(장로회)
1. 개요
2. 작품
2.1. 동요
3. 친일행적
4. 여담


1. 개요


한국바이올리니스트이자 작곡가, 지휘자.
일제강점기에 널리 애창되었던 가곡 <봉선화>와 동요 고향의 봄의 작곡가이기도 하며, 일제강점기 하의 한국 음악계에 큰 업적을 남겼다. 다만 후술할 친일 논란 때문에 그 명과 암이 뚜렷하게 갈리는 인물.
경기도 남양군 둔지곶면 활초동(現 화성시 남양읍 활초리)에서 태어나 5세 때 상경, 14살이 되던 해인 1910년 황성기독교청년학관 중등부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음악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1913년 근대 이후에 설립된 최초의 전문음악기관인 조선정악전습소 서양악과에 입학하여 1년 동안 김인식에게 바이올린을 배웠고, 졸업 후 조선정악전습소의 교사로 활동하던 중, 1917년 동경음악학교에 입학하여 문학, 미술, 음악의 3가지 분야에 걸쳐 잡지 발간 등의 문예활동에 주력했다.

2. 작품



2.1. 동요



3. 친일행적


미국 유학흥사단에 가입한 일로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에 연루되어 검거되었고, 72일간 혹독한 고문을 받으면서 전향 협박을 받았다. 결국 건강악화 끝에 그는 공개적으로 전향서를 쓰고 기소유예로 풀려나게 된다. 이듬해 6월 18일, 홍난파는 직전에 기소유예로 풀려났던 이묘묵(李卯默)을 비롯하여 정영도(鄭英道)·김여제(金與濟)·김여식(金麗植)·전영택(田榮澤)·류형기(柳瀅基)·이명혁(李明赫)·박태화(朴泰華)·차상달(車相達)·하경덕(河敬德)·갈홍기·현제명 등 12인의 흥사단원과 김기승(金基昇)·김노겸(金魯謙)·노진설·이기윤(李基潤)·최봉칙(崔鳳則) 등 5인의 동우회원 등 17인과 함께 공식적으로 전향성명서를 발표하고 친일단체 대동민우회(大同民友會)에 가입하였으며#, 8월 18일 위 사람들과 함께 흥사단에서 출단 처분을 받았다.#
또한 '모리카와 준(森川潤)'으로 창씨개명하고 일제에 아첨하는 음악을 여럿 작곡하면서 친일행적을 남겼다.[3] 이후 1941년 고문 후유증으로 별세하였다.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편찬한 친일인명사전에서는 2009년 11월 홍난파의 행적에 대해 수록했으나, 대통령 직속 산하기관인 친일진상규명위에서는 '홍난파가 자의적으로 했는지 타의적으로 했는지 좀 더 따져야 한다.'면서 보류처리를 했다. 하지만 2010년 11월 홍난파의 후손이 '홍난파를 친일인사 명단에서 제외해달라'며 낸 소송을 돌연 취하함에 따라, 결국 등재되었다.
이와 같이 그의 친일 행적에 대해서 왈가왈부가 있다. 보수적인 양악계에서는 "친일을 하지 않았으면 작품 활동은 물론 생계를 이어나갈 수 없었다"며 옹호론을 펼치기도 한다.[4] 물론 이에 대해선 생활고와 각종 위협에 시달리면서도 일제에 대한 저항 정신을 굽히지 않은 예술가들을 반례로 들며 반박하는 의견 또한 강하다.
하지만 이러한 논란과는 별개로 홍난파의 친일 행적에 대해선 이미 1993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펴낸 <친일파 99인>과 같은 여러 친일파 고발 책자에서 음악가 대표로 크게 소개되었기에 오래전부터 알고 있는 사람이 많았다.

4. 여담


친일 논란 외에도 지나친 서양음악에 대한 빠심이 지적되곤 한다. 특히 조선 전통음악과 서양음악을 비교하며 쓴 논설에서는, 전통음악을 구닥다리라고 찍어누르고 서양음악이 우월하다고 자뻑하는 내용이 있을 정도. 이 때문에 국악인들 가운데에는 홍난파의 친일 행위와 상관없이 "사대주의 성향의 음악가였다"고 비판적으로 평하는 이들도 있다. 실제로 홍난파의 작품들에는 그 곡이 친일용 곡이었던 아니건 간에 대부분 (일본을 거쳐 걸러 들어온) 서양음악의 요소가 너무 짙게 배어 있는데, 어느 정도 민요 등 전통음악 요소를 접붙이기 해보려고 했던 안기영이나 채동선, 김성태 등의 작품들과 비교해도 그 차이를 확실히 느낄 수 있다.[5]
윤치호 일기에 따르면 이런 이야기도 있다. 홍난파는 윤치호에게 250원이나 지원을 받았음에도 또 편지로 "바이올린을 사게 250원을 더 달라"고 부탁했고, 윤치호는 "내 아들이라도 그런 요구는 승낙할 수 없다"고 거절한다. 그러자 홍난파는 편지로 "조선의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억압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자기 재능을 계발할 만한 수단이 없는 조선의 천재들과 영웅들의 운명을 비관하며 "볼셰비키들과 공산주의자들은 정당한 약탈자들이다"라고 강변했다. 또한 "부자들이 혼자서 자기 재산을 누릴 수 없는 때가 올 거다"라는 협박까지 했다고 한다. 이때 윤치호는 자신의 일기에 "공부하라고 돈을 보내줬더니 바이올린이나 켜고 있으면서, 돈을 더 보내주지 않는다고 나를 욕하는 천하의 개쌍놈"이라고 홍난파를 씹었다. 단 윤치호는 자기 외의 모든 사람을 다 싫어했다.
홍옥임(洪玉姙)이라는 조카[6]가 있었는데, 옥임은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 재학 중이던 1931년에 친구 김용주(金龍珠)와 동반자살을 하여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바 있다. 옥임과 용주의 비극적인 이야기는 훗날 콩칠팔 새삼륙이라는 뮤지컬로도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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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흉상은 1968년에 남산 KBS 사옥 앞에 세워졌다가 1976년에 여의도로 이전할 때 현재의 KBS홀 자리 맞은편으로 같이 옮겨졌으나 2003년에 민족문제연구소가 홍난파의 친일 경력을 문제삼자 KBS 측에서 자진 철수하여 2004년부터 종로구 홍파동에 있는 옛 저택[7]으로 옮겨져 지금에 이르고 있다. 1987년 독립기념관 광복의 동산에 세워진 '홍난파 선생과 감나무'란 비석도 있었으나, 2015년에 같은 이유로 철거되어 단죄문이 설치됐다.
단국대학교 죽전캠퍼스에 '난파음악관'이 있다.

[1] 토홍계 24세 후(厚) 항렬.[2] 인근의 남양리·시리·안석리와 함께 남양 홍씨 집성촌이다.[3] 주로 문학인 이광수 등이 작사한 것을 작곡해 지휘·연주하거나, 방송국에 대동아공영권을 찬양하는 노래들을 지휘, 연주했다거나 하는것 등이었다.[4] 홍난파 뿐만 아니라 조두남, 안익태, 현제명, 이흥렬, 김성태, 김동진 등을 비롯한 대다수의 일제강점기의 음악가들 상당수가 모두 친일행위를 했다. 90년대 월간 <객석>이란 클래식 음악잡지에서는 이들을 옹호하면서 "채동선은 부자라서 친일하지 않았다"는 기사를 쓰기도 했다.[5] 그리고 창가 등을 위시한 일본음악의 영향력에서도 자유롭지 못했다는 비판도 있는데, 가령 가장 유명한 노래 중 하나인 고향의 봄의 선율 구조는 도(C) 음을 기음으로 하는 요나누키 음계로 구성되어 있다.[6] 형 홍석후의 딸. 홍석후는 에비슨의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1기생 7명 중 하나인데, 박서양, 김마리아(1번)의 숙부인 김필순이 동기이다. 그리고, 그 에비슨은 유한양행 창업주 유일한 회장한테 "연세대학교에서 경제학 교수를 해달라"는 요청을 한 적이 있다. 사실 한반도의 근대 방역 전문가가 에비슨이었고, 스페인 독감을 제대로 경험했을 유일한이 할 선택이 무엇이었는가를 생각하면, 여기의 인연도 좀 더 빠를 일. 여담으로 유일한은 위의 윤치호와도 인연이 있다.[7] 해당 집터가 항일 언론인 어니스트 베델 자택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