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사/한국/개항기 이후
1. 개요
단군 이래로 계속 이어져 온 우리나라의 전통 과학사를 탈피하고 서양의 과학과 문물을 도입하기 시작한 시대. 서양의 발전된 과학과 문물도 중요하지만, 단군 이래로 내려온 한국 과학사의 전통도 중요했다. 그러나 이 시대의 지식인은 한국 과학사의 전통을 유지하는 것보다 일단 발전된 문물을 배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여겼고, 결국 한국의 과학이 서양의 과학에 가려져 오랫동안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2. 역사
1876년 개항~1945년 광복까지의 한국 과학사를 서술한다. 이 시기별 역사는 문맥이 통하는 시기를 기준으로 하며, 기본적으로 10년 단위 또는 주제별로 서술한다.
2.1. 개항기
2.1.1. 서양 과학과 문물의 시찰
1876~1885.
1876년 2월 강화도 조약이 이루어지면서 본격적으로 개항이 이루어졌고, 이에 따라 여러 발전된 나라에 문물과 과학을 배워 오려는 수신사 활동이 활발했다.
강화도 조약의 당사자답게 가장 먼저 수신사 활동이 이루어진 것은 일본이었다. 1876년 7월부터 일본에 수신사를 보내게 되는데 이 수신사는 두 차례에 보내게 된다. 1차 파견이 김기수 외 75명, 2차 파견이 김홍집 외 57명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일단 외교적으로 파견한 것에 불과했고 제대로 된 시찰단 파견은 1881년부터 이루어진다. 1881년에 파견된 "신사 유람단[1] "이 그것인데, 이 신사 유람단이 파견된 과정이 굉장히 이상하다. 신사 유람단을 보낸 주역인 통리기무아문은 이들을 동래부 암행어사로 속여놓고 그 다음 바로 도쿄로 보내 버린 것(...) 이 때 일어난 신사척사운동 때문에 기밀스럽게 진행되었다고 한다.
파견된 신사 유람단은 74일 간 머무르면서 일본의 문물을 시찰하고 보고서로 써서 고종에게 보냈는데 '''이 보고서의 양이 무려 100책[2] 이었다고 한다.''' 이때 파견된 조준영, 박정양, 엄세영, 강문형, 조병직, 민종묵, 이헌영, 심상학, 홍영식, 어윤중, 이원회, 김용원은 통리기무아문의 관직에 앉아 개화 정책을 추진했다고 한다.
1881년에는 청나라에 김윤식을 중심으로 한 영선사가 청나라의 발전된 군사 기술을 배우기 위해 파견되었다. 파견된 사람은 15~20살의 영재 학도와 기술 장인이었다. 이들은 톈진에 있는 기기창에 가서 무기 기술을 배워오려고 했는데 반 정도가 중간에 귀국하고 정부가 제대로 된 지원을 해주지 않았을 뿐더러 청나라 정부가 정작 중요한 기술은 가르쳐주지를 않아서 별로 수확이 없었다.
1883년에는 민영익과 보빙사 일행[3] 이 출발했다. 보빙사 일행은 미국에서 40일 동안 머물며 세계 박람회, 병원 등을 보기도 했다. 이때의 미국은 조선에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보빙사 일행을 더욱 잘해 줬는데 미국 대통령 체스터 앨런 아서를 만나 보기도 했고[4] 공짜로 6개월 동안 유럽 여행을 보내주기도 했다. 보빙사 일행은 이 이후 개화파로 활동했으며 유길준은 1889년 서양 기행문 서유견문을 쓰기도 했다. 보빙사 일행은 조선 최초의 세계 여행을 했다는 기록을 가지고 있다.
2.1.2. 서양 과학 도입의 시작
1885~1893.
과학적 성과가 많이 일어났다. 사람들은 서양 문물과 과학을 대부분 이 시기에 알게 되었고 후에 일어날 서양 과학 전면 도입의 시초가 되었다. 특히 전신망(전선)이 설치되기 시작한 것은 매우 괄목할 만 한 일인데, 전신망 관련 부분은 연도를 초록색으로 입력했다.
- 1885년: 최초의 서양식 국립병원 제중원[5] 이 세워졌다. 제중원 항목 참조.
- 1885년 8월: 서울-의주를 잇는 서로전선이 이어졌다. 서로전선 사이에 6천여개의 전봇대가 설치되었는데 비용 부담은 청나라에게서 빌린 돈으로 했으며 전신 사무소도 청나라가 운영했다.
- 1888년: 서울-부산을 잇는 남로전선이 이어졌다. 남로전선은 서로전선과 달리 우리나라 정부가 운영했으며 전신 부호도 한글이었다.
- 1890년: 1885년 충청도에서 시작된 우두법 의무 접종이 전국에서 이루어졌다.
- 1891년: 서울-원산을 잇는 북로전선이 이어졌다. 서로전선과 남로전선으로 조선으로 가는 길과 영향력을 확보한 청나라와 일본은 북로전선이 이어지면 러시아가 영향력을 얻게 될 수 있어 반대했기 때문에 원산까지만 이어졌다. 이는 1899년이 되어서야 함흥까지 이어졌다.
2.1.3. 서양 과학의 전면 도입
1894~1909.
갑오개혁이 일어난 후에는 여러 가지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전차 도입, 군사 기술 확보 , 태양력 시행 등이 있다. 지금까지의 시기 중 가장 많이 개화를 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겉치레였다. 이 시기에 개화를 제대로 했더라면 과장을 섞어 일제 강점기가 없을 수도 있었다. 그래도 최소한 부국강병이 되었을 것이고 이렇게 힘없이 일제 강점기가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 전차 도입은 1899년 5월 17일에 개통되어 달리기 시작했는데 한성 전기 회사에서 운영했다. 한성 전기 회사는 그뿐만 아니라 전등, 전화 관련 업무도 책임졌는데 돈이 없어서(...) 미국에 매각되었다. 사실 미국의 압박이 있기도 했지만...
- 군사 기술 확보로는 군기창의 확대와 군사 기술 개발 등이 있다. 1902년에는 양무호[6] 를, 1903년에는 광제호를 구입했다. 하지만 일본 등 다른 열강에 비해서 힘이 훨씬 약했다.
- 태양력 실행은 이 문서 참조.
2.2. 일제 강점기
2.2.1. 의학
일제는 한일합방 이후에 한국의 전통문화를 억압했지만, 한의학은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일제는 한의사의 개업까지 허용했다. 이렇게 일제가 한의학에 유화적이었던 이유는 조선인에게 사용되는 의료비를 한의학을 통해 절감하기 위함이었다. 즉 일본인에게는 고급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고, 한국인에게는 한의학처럼 낮은 의료서비스를 제공하여 비용을 절감하려 한 것이다. 이 경향은 2차대전때 더 심해져서 한의학 연구라는 명목으로 한국인들에게는 특별히 한의학적 의료를 처방하였다.
2.2.2. 교통과 건설, 통신
2.2.3. 기타
조선어학회 같은 곳이 그랬듯, 1920년대 독립운동에서는 실력을 키워 독립을 얻어야 한다는 주장이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여기서 실력을 키워야 할 대상에 과학이 들어있었고, 그래서 이때 활발한 과학 대중화운동이 벌어졌다.
과학 운동의 시작은 발명학회의 탄생과 궤를 같이 한다. 동경고등공업학교로 유학을 갔던 김용관은 일본의 발전된 과학기술력을 보고 일본 국력의 밑바탕은 과학기술의 생활화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일본에서 돌아온 후 1924년 '''발명학회'''를 설립하였다. 처음의 발명학회는 얼마안가 문을 닫게 되지만, 김용관은 포기하지 않고 자금을 모아 1931년 다시 발명학회를 세우게 되고, 이어서 과학 잡지인 '과학조선'을 창간하고 4월 19일을 과학의 날로 정하게 된다.[7]
윤치호 등의 사회지도층과 민족주의자들까지 합세해서 활발히 시행되던 과학 운동은 후에 2개의 노선으로 갈라진다. 발명학회의 설립 당시에 김용관은 과학 운동의 목표를 '발명 정신을 고취시켜 특허를 많이 내는 것'에 둔 반면, 과학의 날 행사를 본격적으로 주관하던 과학지식보급회는 '대중에게 기초과학을 보급하고 기초과학연구가 일어날 수 있게 하는 것'에 두었기 때문이다. 결국 과학 운동은 2개의 노선이 갈라져 서로 싸우다가 일제의 탄압 심화로 인해 종결된다.
3. 과학자
3.1. 개항기
일본이나 다른 나라에 수신사 일행으로 참여한 대부분이 이 시기의 과학자가 되었다. 사실 경술국치 이전까지는 과학 학위를 가진 사람도 없었고,아예 과학자라는 개념이 없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개화파가 과학자 정도가 될 것이다. 이 문서의 이 문단 참조.
3.2. 일제 강점기
4. 관련 문서
[1] 신사 유람단이라고 해서 여행 간 것이 아니다! 이 명칭이 굉장히 헷갈리기 때문에 바꾸자는 말도 나오고 있고 현재는 조선 시찰단, 일본 문물 시찰단 등으로 부르고 있다.[2] 이때의 책은 현재의 권 개념과 같다.[3] 민영익, 유길준, 홍영식, 서광범, 변수, 최경석, 오례당, 고영철[4]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 참조.[5] 설립 당시 이름은 광혜원[6] 화물선을 개조한 것. 당연히 제대로 쓸 수 없었고 이듬해 광제호 구입의 원인이 되었다.[7]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77&contents_id=5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