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주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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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석주명 (石宙明)
본관
광주 석씨
출생
1908년 10월 17일 대한제국 평안남도 평양부
사망
1950년 10월 6일 대한민국 서울특별시[1]
국적
대한제국

호접선(蝴蝶仙)[2]
1. 개요
2. 생애
2.1. 가족 관계
2.2. 여러 가지 일화
2.3. 안타까운 죽음
3. 저서
4. 여담


1. 개요


석주명(石宙明, 1908년 10월 17일[3] ~ 1950년 10월 6일)은 일제강점기나비 연구가이자 생물학자, 곤충학자, 동물학자, 언어학자,[4] 역사학자, 박물학자이다. 한국의 생물분류와 제주어의 연구를 주도한 한국 박물학계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2. 생애


1908년 10월 17일 (음력 9월 23일) [5] 평안남도 평양 이문리(里門里)에서 태어났으며 광주 (廣州) 석씨 평양파의 30대손인 석승서(石承瑞)와 전주 김씨 김의식(金毅植)의 3남 1녀 중 2남으로 자라났다.
일본 가고시마고등농림학교(鹿児島高等農林学校)[6]를 졸업하였다. 집이 평양에서 대단히 큰 요릿집을 한 터라[7] 어려서는 매우 유복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그는 총 13년 동안이나 중학교 교사로 있었는데 처음에는 함흥의 영생고보 생물교사로 부임하여 2년간 재직하였다가 나중에는 그의 스승인 원홍구[8]를 따라서 개성 송도고보에 재직하면서 전국 각지로 나비 채집여행을 떠났다. 나중에 그는 영국 왕립 아시아 협회의 의뢰를 받아서 한국의 나비들의 동종이명 총 목록을 작성한 조선산 접류 목록 (A Synonymic List of Butterflies of Korea)을 1940년에 출간함으로써 전 세계적인 나비학자로 우뚝 서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일본의 나비학자들이 대충 연구하여 종류만 921종으로 늘려놓은 나비를 독자적으로 연구하여[9] 정확하게 250종으로 분류하였다. 특이한 나비를 보면 그걸 잡으러 몇 시간이나 쫓아 산과 들을 헤매기도 했다고 한다. 배추흰나비16만 마리나 사육하며 개체변이를 연구하기도 했고, 국내 대부분의 나비 이름은 그가 지어주었다. 특히 지리산을 헤매며 지리산팔랑나비를 발견한 사례는 유명하다. 동시대에 교류한 학자로는 조복성 선생이 있으며, 그가 발견한 나비의 종류와 이름은 '조선산 나비목록' 등에 저술되어 있다.
또한 그는 '조선적인 생물학'을 주창하면서 당대의 여러 분야의 학자들과 함께 국학 운동을 전개하여 펼쳤던 민족주의자이기도 하면서 학문적인 성과물은 세계의 학자들로부터 객관적으로 평가받아야 한다는 것을 인정한 국제주의자이기도 하였다.

2.1. 가족 관계


석주명의 여동생 석주선(石宙善 1911~1996)도 유명한 인물로, 한복 등 한국의 전통의상 및 장신구 연구의 선구자였다. 1.4 후퇴 때 피난을 가면서 자신의 자료들과 함께 석주명의 나비 표본 및 연구 문서들을 함께 챙기려 했는데, 석주선의 자료는 옷이란 특성상 부피가 너무 커서 모두 가져갈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석주명의 나비 자료만 챙기고 자신이 연구한 복식 자료는 보따리에 싸서 편지를 써놓고 기둥에 매달아 놨는데, 피난에서 돌아와 보니 남겨뒀던 옷은 단 한 벌도 남아있지 않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석주선은 처음부터 다시 옷들을 모아야 했고, 이렇게 모은 옷들은 단국대부속박물관에 기증했는데, 기증자의 이름을 따 석주선기념박물관을 세웠다.
고지식한데다[10] 개방적이고 활달한 성격이었던 부인 김윤옥과[11] 사이가 매우 나빠서 불화가 심했다. 결국엔 딸 1명만 남긴 채[12] 1년에 걸친 재판 끝에 결혼 4년 만에 이혼했다.[13] 당시 신문에서는 '꽃을 모르는 나비학자'라며 그의 사생활을 가십거리로 다뤘다. 훗날 딸의 증언으로는 자세한 것을 다 밝힐 수는 없지만, 고모 석주선이 오빠를 감싸주는 것 때문에 둘 사이를 악화시켰다고 한다. 특히 부인 김윤옥과 시누이 석주선 간 관계는 매우 나빴다. 물론 근본적인 원인은 석주명이 고지식하면서 가정에 무관심한 것이지만.
특히 석주명은 완벽주의자에다 고집이 너무 강해서 부부관계뿐만 아니라 대인관계도 영 좋지 않았다. 제자들에게도 잘 해주면서 질책을 많이 하다 보니 역시 관계가 좋지 않았다. 휘하의 실습생들에게도 갑질을 하여 그들이 석주명의 갑질에 빡친 나머지 갑질하지 말고 사과하라며 시위까지 했는데, 석주명은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오히려 더 심하게 질책했다. 결국 휘하 실습생들이 화가 치밀어 집단으로 그만 둔 탓에 석주명은 휘하에 실습생이 한 명도 없어 혼자서 연구해야 할 정도였다. 지금보다 훨씬 상하관계에 엄격하던 시절에 이럴 정도였으니 얼마나 심했는지 알 수 있다.

2.2. 여러 가지 일화


공부를 아주 열심히 했다. 공부할 시간을 아끼기 위해 점심 시간에도 땅콩을 먹으면서 걸어다니며 공부를 했다고 한다. 이는 교사가 되고 나서도 연구에 열중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14][15]
일제강점기에 일본 학자의 오류를 바로 잡을 정도로 학문적 성취를 이룬 터라 생전에 학자로서 자부심이 대단히 강했는데 신분이 교사라 주변에서는 '기껏 교사 주제에 잘난 척은...' 이러면서 냉소를 보냈다. 어느 날 도쿄에서 온 고생물학자가 그를 찾아 온 뒤로는 주변의 평이 확 달라졌다고 한다.[16]
지독한 일 중독자였다. 학교에서는 연구실과 교실 사이의 왕복 시간을 아끼기 위해 학교 측에 요청해 자신이 맡은 학급을 연구실이 있던 박물관으로 옮기기까지 했다. 집에서도 방문한 손님을 10분 이상 만나지 않았고, 연구에 방해되지 않도록 서재의 문을 걸어 잠그고 서재와 안방을 연결하는 벨을 달아 볼일이 있으면 그걸로 부인을 불렀다고 한다. 문제는 이러다 보니 부인이 벨 호출을 정말 싫어하였고 부부관계가 크게 벌어졌다는 것. 게다가 부인이 아파서 병으로 누워 있을 때도 간호는커녕 나비 채집을 하러 가버리니 명백한 불량가장이었다.
짧은 시간에 수많은 나비 표본을 확보한 비결은 학생들에게 여름방학 때 200마리나 되는 나비 채집 숙제를 내는 것. 이것이 초딩 곤충채집 여름방학 숙제의 시초가 됐다고 한다. 물론 학생들은 곤충 채집한다고 고생한 터라 이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일설에 의하면 부전나비과 중 '긴지 부전나비'[17]가 있는데, 이 나비는 자신의 두 번째 스승이었던 오카지마 긴지(岡島銀次)교수를 존경하는 뜻에서 지었다고 한다. 석주명이 조선의 나비를 연구하게 된 계기를 마련해주기도 했을 정도로 교육자로서 인품이 훌륭하였다. 계몽사 어린이 그림위인전기 석주명(계몽사)과 사계절에서 사계절 아동문고로 펴낸 석주명 위인전에 의하면, 여름방학에 오카지마 긴지 교수는 대만에 곤충채집 여행을 갔다. 비오는 날 제자들에게 다 좋으니 곤충을 채집하고 오라고 하자 다른 학생들은 다 못 잡았는데 석주명만이 하루살이들을 잡아왔다고 한다. 비를 피해 나무 그늘에 날아온 하루살이들을 삼각지(삼각형 기름종이)에 일일히 담아서 보여주자 오카지마 교수는 감명받아 끈기 있는 석주명 학생을 눈여겨 보았다. 학업을 마치는 4학년이 되자 석주명을 집에 초대하여 "다른 사람의 손이 닿기 전에 조선인으로서 조선의 나비 연구에 착수해야만 하네. 10년만 필사적으로 해보게."라고 조언하자 노력해 나비박사가 되었다는 훈훈한 이야기도 전해진다.

2.3. 안타까운 죽음


그러나 그의 업적은 결국 안타깝게도 허망한 죽음으로 물거품이 되었다. 1950년 10월 6일 서울 수복 전 미군의 폭격으로 불타버린 국립과학관의 재건을 논의하는 회의에 참석하러 가던 중 친구가 "고구마를 삶았으니 먹고 가라"고 붙잡는 통에 시간을 지체해서 허겁지겁 뛰어갔다. 그러다 대낮에 술을 마시던 국군 무리 중 1명과 부딪혔는데 그 자가 양복을 입은 석주명을 보고 "저기 인민군 소좌가 간다." 하며 붙잡아 총으로 쏴 죽였다. 그리고 "빨갱이 두목을 잡아 죽였다." 하고 낄낄대며 시신을 가마니로 싸서 개천에 던졌다고 한다.
행인들 중에는 석주명을 알아본 사람들도 있었지만 총 든 자들의 기세가 무서운 동시에 술에 취해 있어서 그들이 말도 못 알아듣고 자기들까지 같이 총으로 죽일까봐 나서서 변호해주지 못했다고 한다. 죽기 직전 그는 "오해 마시오. 나는 공산당이 아니오. 나는 석주명이라 하는 나비 학자요!!"라고 외쳤지만, 술 취한 사내는 "아니야! 평안도 사투리를 쓰니 북한 공산군 장교야! 뭐 어쨌든 잘 됐다. 나비나 인민군이나 다 같은 버러지들이지."라고 우기며 석주명을 사살했다. 석주명은 자기 말대로 나비밖에 몰랐고 딱히 정치적 행보를 하지 않았다. 그냥 사회가 극도로 불안정하던 시기에 길거리를 걷다가 술 취한 미친놈들에게 총을 맞고 사망한 것. 그렇게 국내 생물학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은 이렇게 허망하게 총에 맞아 사망했다. 이때 석주명의 나이는 43세(만 41세)에 불과했다.
시신은 그 군인들이 가마니에 싸서 강물에 던져버렸다. 이후 회의가 끝나도록 돌아오지 않는 그를 찾던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발견되었는데, 주민들로부터 사실을 안 가족들과 친구들은 오열했다고 한다. 실제로 6.25 당시엔 전쟁으로 인한 혼란스러운 사회여서 술 취한 군인들에게 북괴뢰군으로 몰려 살해당한 사람들도 있었고, 북괴뢰군이 아닌 걸 뻔히 알면서도 죄 없는 사람들을 북괴뢰군으로 몰아 죽여 출세하고 물건을 약탈하거나 여자를 납치해 강간하는 등 그런 악질 쓰레기 군인들과 경찰들, 우익청년단이 즐비했었는데 석주명도 그 전쟁의 혼란스러운 사회에 휘말려 죽은 피해자였다. 참으로 불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사건은 해외 신문에 보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석주명을 살해한 군인들의 정체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군인이 아니라 우익청년단의 소행이라는 의견도 있다.[18] 석주명 말고도 워낙 전쟁 중에 어이없게 사망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지만, 왠지 이쪽에 관한 연구나 조사는 미비한 편이다. 아무래도 이런 놈들이 대한민국 국군의 고위직으로 올라갔거나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었을 가능성이 있어 아무도 조사하려 하지 않았다. 이제 와서 조사하기에는 너무 늦었고. 하지만 이런 놈들도 나라를 지켰다고 애국자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불편해하기 때문이라는 게 제일 적당한 이유일 것이다. 우익 정권에서는 그의 죽음의 과정이 매우 불편했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그에 대한 언급을 피해왔다. 혹은 그 군인들을 몰래 숙청하고 사건을 은폐했다는 설도 있다.
실제로 1980~1990년대에 석주명 박사를 다룬 어린이 위인전이나 동화책에서는 석주명 박사가 모은 나비 박물관을 북한군이 불태웠고, 석주명 박사가 그 나비 표본들을 구하러 뛰어들었다가 불에 타서 죽었다 라는 식으로 엉터리 왜곡을 한 내용들이 수두룩하게 실렸다(...)

3. 저서


  • 조선나비이름의 유래기
국립생물자원관 정보마당 생물다양성 E-Book에서 스캔본 열람 가능.
한국산 나비에 대한 잘못된 명명을 바로잡는 책이 바로 이 책.
  • 한국산접류분포도
  • 한국산접류의 연구
  • 제주도방언집
  • 제주도의 생명 조사서

4. 여담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에서도 '나비 박사' 라는 이름으로 석주명 박사에 대한 일화가 나온다. 다만 살해당한 내용이나 이혼 등은 교육상의 이유로 책에 언급하지는 않는다.
미군의 폭격으로 불탄 과학관 안에는 그가 그동안 채집한 나비 표본 75만 점이 있었다고 한다.
송도고교를 그만두고 나올 때 보관하고 있던 표본 60만 점은 나비들의 명복을 빌어주기 위해 화장하라는 어느 스님의 조언에 따라 중요하거나 품질이 좋은 것은 제외하고 화장했다고 한다. 사실 관리할 사람이 없었던 이유도 있었다.
제주도하고도 연관이 깊다. 1943년부터 2년 1개월 동안 경성제국대학 부속 생약연구소 제주도 시험장[19](현 서귀포시 영천동 소재 제주대학교 아열대농업생명과학연구소)의 연구원으로 파견을 지원해 연구소장을 맡았다. 이때 제주도 곳곳을 답사하며 나비뿐만 아니라 자연, 방언, 인문 분야를 아우르는 학문적 연구로 제주도 방언집 등 제주도 총서 6권을 남겨 제주학 연구의 기초를 세웠다. 현재 서귀포시는 옛 생약연구소를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받기 위한 정책을 추진 중이다. 만약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이 되면 옛 연구소를 석주명기념관으로 조성하여 리모델링 및 석주명선생 관련 유물자료 수집과 그의 업적을 기념하는 사업을 추진할 방침이라고 한다.[출처]
언어학자기도 했지만 대중적인 인식은 나비박사(…) 정말 딱 그 수준에서 그친다. 1964년에 건국공로훈장 국민장을 추서 받았으며 1998년에는 문화관광부의 4월의 문화인물에 선정되었고 2003년에는 서귀포시 토평동 네거리에 석주명 기념흉상이 건립되었다. 2005년에는 서귀포시에서 석주명 기념사업회를 창립하였고 2009년에는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의 한국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되었다.
그의 묘소는 원래 보문사 탑골승방(현 서울시 성북구 보문동 3가)에 안치되었다가 1981년 9월 23일 남한산성 밑 능골에 이장되었다.
[1] 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예장동에서 총격사[2] 호접은 나비란 뜻이고 선은 신선 선, 나비의 신선이란 뜻이다.[3] 음력 9월 23일[4] 에스페란토로 논문을 내고 교과서를 저술하는 한편으로 제주 방언을 연구하기도 하였다.[5] 예전에는 1908년 11월 13일이라고 적혀있었지만 출생일에 오류가 있었음이 밝혀졌다. 누이동생이었던 석주선이 1968년 11월에 발간한 석주명의 유고집 '제주도 수필'을 발간하면서 발문에 오빠는 음(陰) 9월 23일 (1968년 11월 13일)이 바로 오빠의 회갑이어요.라고 서술한 것을 염두에 두고서 다른 작가들이 그의 생년월일을 1908년 11월 13일로 오해한 데서부터 비롯되었다. 석주명의 회갑일인 1968년 음력 9월 23일은 양력 11월 13일이지만 그가 태어난 1908년 음력 9월 23일은 양력 10월 17일이다. 따라서 지금까지 잘못 알려져왔던 석주명의 생년월일은 1908년 10월 17일로 정정되었다.[6] 현재는 가고시마대학(鹿児島大学) 농학부[7] 종업원이 100명에 달했다.[8] (1888~1970) 평안북도 삭주 출신으로 대한민국 최초의 식물학자 겸 조류학자로 석주명이 송도고보에 재학중이던 당시에 그의 스승이기도 하였다. 또한 그의 막내아들은 경희대학교 명예교수 겸 한국조수 보호협회 회장, 국제 환경과학 연구소 이사장, 국제 조류학회 (IOC) 이사이기도 한 원병오 교수로, 2020년 4월 9일 사망했다.[9] 전국을 돌아다니며 나비 75만여 마리를 수집하여 비교하였다. 당시 학계는 신종 만들기에 급급해 약간 특징이 다르면 무턱대고 새로운 종으로 분류하곤 했는데 석주명이 바로잡은 것.[10] 얼마나 고지식했는지 돈이 있는데도 가방이 다 떨어질 때까지 썼다. 마지못해 부모와 부인이 바꾸라고 해도 절대 안 바꾸었다. 게다가 신혼여행 가서도 부인이 식당에 가서 사먹자는 것을 거부하고 싸온 도시락을 먹었다. 이러니 부부관계가 초반부터 틀어졌다. 게다가 연구에 몰두한다고 집에도 오지 않고 그저 연구실에만 있었고, 급여도 연구비로 대부분을 써버리고 부인에게 생활비를 적게 주니, 생활고에 시달린 부인의 분노가 폭발하고 말았다. 당시 교사가 안정적인 봉급을 받고 시간적인 여유가 많아 배우자들에게선 1등 신랑감인데 현실이 이랬으니...[11] 2번째 부인으로, 남편에게 복종을 강요하던 그 당시 여성관을 거부하는 신여성이었다.[12] 석윤희로 아내가 데려가서 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나중에 석윤희는 미국으로 이주했고 북일리노이 주립대 교수로 재직중이다.[13] 사실 석주명은 부인과 결혼하기 이전에 1번째 부인이 자식도 없이 요절하여 결혼할 생각이 없었는데, 보다 못한 부모가 중매를 서주며 재혼하라고 압박을 해서 마지 못해서 했다. 그러니 부인을 사랑하지도 않았다. 게다가 부인을 돈타령만 하는 속물이라고 몰아붙이며 끝까지 부인과 화해하거나 가정에 신경쓰지 않았다. 나중에 그와 인터뷰한 기자가 이것에 대한 소감을 묻자 "오히려 편하다."라고 했다. 한 마디로 애초부터 가정에 신경 쓸 생각 자체가 없었던 셈. 워커홀릭 중에서도 상 워커홀릭.[14] 그리고 두부도 좋아했었는데 이유는 먹는데 시간을 아낄 수 있어서(...)[15] 이런 일화를 반영했는지 석주명 위인전을 그린 한 만화에서는 석주명이 제일 싫어하는 음식이 생선이란다. 그 이유가 가시를 발라낼 시간이 없어서라고(...). 실화가 아니라 창작이니 유의.[16] 일설로는 도쿄에서 다른 곳으로 가던 외국인 교수였는데, 석주명이 연구하던 개성의 연구소를 겸사 구경하고 싶다고 해 들어가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석주명 본인은 누추하고 그렇게 전문기구 없이 누추한 나비연구소라고 생각해 소개했는데, 그 교수는 참으로 과학적이고 이렇게 전문적으로 나비를 연구하는 곳은 처음 봤다며 극찬했다고 한다.[17] 지금은 깊은산부전나비로 정정[18] 일설에 의하면 악명 높은 반공 테러 집단인 서북청년단 출신 전력이 있는 국군이라는 주장도 있다.[19] 약초를 재배, 생산하기 위한 목적으로 1940년대에 건립된 시설이다.[출처] 2020년 3월 31일자 한라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