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촉사

 

1. 개요
2. 상세
3.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
3.1. 국보 제323호
4. 기타

灌燭寺

1. 개요


충청남도 논산시 반야산(般若山)에 위치한 사찰. 고려 광종 19년(968년)에 승려 혜명(慧明)이 광종의 명으로 창건하였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이다.

2. 상세


이 절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불상이자, 은진미륵(恩津彌勒)이라고도 부르는 국보 제323호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이 있다.
설화에 따르면 은진면 반야산에서 고사리를 캐던 한 여인이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어 그곳으로 가보니 아이는 없고 큰 바위가 솟아 나오고 있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들은 광종이 혜명에게 그곳으로 가서 바위를 불상으로 조성하라는 명을 내렸고 혜명은 기술자들을 데리고 가서 970년부터 1007년까지 37년간 불사를 치른 끝에 불상을 완성한다.
나중에 이 불상을 보기 위해 찾아온 중국의 고승 지안(智眼)이 불상의 백호를 보고 마치 촛불을 보는 것 같이 미륵이 빛난다고 하며 관촉사라는 이름을 지어줬다고 한다.
관촉사 경내에는 불상외에도 석등(보물 제232호), 석탑, 석문, 배례석 외에 법당이 자리하고 있다. 법당은 고려 우왕 때(1386년) 처음으로 건립되었으나 조선 선조 14년에 중수되었고, 다시 현종 15년에 개수되었다.

3.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



[image] '''대한민국 국보 제323호'''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
論山 灌燭寺 石造彌勒菩薩立像


'''소재지'''
충청남도 논산시 관촉동 254
'''분류'''
유물 / 불교조각 / 석조 / 불상
'''수량/면적'''
1구
'''지정연도'''
2018년 4월 20일
'''제작시기'''
고려시대
[image]
대한민국의 국보 제323호인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흔히 은진미륵(恩津彌勒)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관촉사가 있는 이곳의 옛 지명이 은진면이었기 때문이다.[1] 이 불상은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218호로 지정되어 관리되다가 2018년 4월 20일 국보 제323호로 승격되었다.
높이 18.12미터, 둘레 9.9미터로 국내 최대의 석불이다. 이 불상은 천연의 화강석 암반을 불상의 발로 조성한 대좌(臺座)위에 허리를 기준으로 하체와 상체, 그리고 면류관 형태의 보개(寶蓋)를 각각 조각하여 전체적으로 커다란 석재 4개를 다듬고 하나씩 얹어 거대한 불상으로 만든 것이다. 이렇게 만든 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내려온다.
고려 광종 때 반야산에서 아이 우는 소리가 들려 아낙이 다가갔더니 큰 바위가 땅에서 튀어나왔다. 신령한 돌이라 여겨 조정은 불상을 만들기로 하였다. 광종 21년(970)에 혜명(慧明)대사가 석공 100명과 공사를 시작하여 37년이 지난 목종 9년(1006)에 돌을 다 다듬었지만, 너무 커서 합칠 방법을 찾질 못하였다. 혜명대사가 고민에 빠진 어느날 동자 두 명이 강가에서 흙장난을 하는 모습을 보고서 불상을 세울 수 있었다고 한다. 당시 동자들은 평지에 불상의 아랫부분을 먼저 세운 다음 그 주변에 모래를 높이 쌓아 불상의 가운뎃부분을 위로 밀어 올리고, 다시 그 주변에 모래를 높이 쌓아 불상의 윗부분을 밀어 올리는 놀이를 하고 있었다. 훗날 이 마을은 모래 사다리라는 뜻으로 사제촌이라고 불렸다.
혜명대사에게 방법을 알려준 동자들은 문수보살보현보살의 화신이었다고도 한다.
국사 교과서나 옛 학술지 등에서 '못생겼다며' 꽤나 폄하를 당했던 불상이다. 앞서 통일신라의 불상들이 사실적이고 근엄함을 강조했던 것과 비교했을 때 고려의 불상들이 상대적으로 조형미, 균형미 등 부족한 면모가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 사례로 이 은진미륵이 자주 꼽혔기 때문이다.[2] 심지어 미술사학자 김원룡은 '3등신에, 미련하게 생긴 얼굴, 불상이라기보다는 그냥 돌기둥, 신라의 전통을 잃어버린 한국 최악의 졸작'이라는 박한 평가까지 내릴 정도였다.[3] 하지만 후에 와서는 독창적이고 개성 있는 스타일로 재평가받았고, 이러한 점이 부각되면서 2018년에는 국보로 승격되었다.
물론 고명하신 학자님들께서 못생겼네 잘생겼네 하고 입방아를 찧건 말건 관촉사 은진미륵은 예로부터 민중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이에 대해 전해지는 현지 전승이 있다. 사람이 죽어서 저승에 가면 염라대왕이 죽어서 온 영혼에게 이승에 있을 때 개태사 가마솥과 관촉사 은진미륵을 봤느냐고 묻고는, 봤다고 대답하면 잘했다고 칭찬하고 못 봤다고 대답하면 살면서 그것도 한 번 안 보고 뭐 했냐며 버럭 화를 낸다고 한다. 관촉사 은진미륵에 대한 민중들의 애정과 존중이 나타나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3.1. 국보 제323호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고려 광종(光宗, 재위 949~975)의 명으로 968년경 승려 조각장 혜명(慧明)이 제작한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석불로서,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218호로 지정․관리되어 오다가, 이번에 고려시대 신앙과 불교조각사에 있어서의 위상을 재평가 받아 국보로 승격하게 되었다.

석불과 관련된 기록은 고려 말 승려 무외(無畏)가 쓴 「용화회소(龍華會䟽)」를 비롯해『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년), 고려 문인 이색(李穡, 1328~1396)의 시 등에서 찾아 볼 수 있으며, 내용을 종합해 보면 고려왕실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당대 뛰어난 조각장이 참여하여 제작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보살상은 좌우로 빗은 머릿결 위로 높은 원통형 보관(寶冠)을 썼고 두 손으로 청동제 꽃을 들고 있다. 널찍하고 명료한 이목구비와 균제되지 않는 압도적인 크기 등은 한국 불상 중 가장 독창적이고 특색 있는 미의식을 창출한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우아한 이상미(理想美)를 축구한 통일신라 조각과는 전혀 다른 파격적이고 대범한 미적 감각을 담고 있는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우리나라 불교신앙과 조각사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독창성과 완전성 측면에서도 뛰어나 국보로서의 가치가 충분하다.


4. 기타


  • 입구에 1965년에 세워진 이승만의 추모비가 있는데, 뜬금없어 보이지만, 여기에는 나름의 사연이 있다. 1953년, 이승만의 결단으로 반공포로 석방 사건이 벌어지자 전국에 있던 포로수용소에서 반공 포로들이 일제히 풀려났다. 이 사건이 당시에 국제사회에선 비판도 많이 받았지만 어쨌든 풀려난 반공포로 장본인들은 당연히 이승만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반응이 많았다. 당시 논산에도 포로수용소가 있었는데 이때 풀려난 이들 중 일부가 이승만이 사망하자 이곳에 추모비를 세운 것이다.

그렇다면 왜 많은 절 중에서 관촉사인가 하면, 당시 풀려난 포로들은 한국군으로 재입대한 경우가 많았는데, 알다시피 이곳 논산에는 육군훈련소가 있다. 그리고 은진미륵이 아주 오래전부터 영험하기로 유명하기도 했고, 1958년에 이승만이 대한민국을 방문한 외국사절단들을 이끌고 관촉사에 다녀간 적이 있는데 이런 점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 부여군의 대조사에 있는 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 제217호)은 관촉사의 미륵불상과 매우 유사하다. 높이는 10m로 관촉사의 것보다 작지만, 전체적인 조형미는 거의 동일하다.


[1] 현재의 행정구역상 지명은 논산시 관촉동이다.[2] 이는 통일신라가 새로 통일되었음을 강조하기 위해 수도 서라벌에서 형성된 귀족적 문화를 일률적으로 지방에 전파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국사석가탑과 거의 똑같게 생긴 전형적인 통일신라식 3층석탑이 북쪽 금강산, 북서쪽 황해도, 서쪽의 경기도충청도, 남서쪽 전라도에도 오래된 절이나 절터에 하나씩 있는 것이다. 반면 고려는 각 지방 호족의 연합으로 형성된 나라로서 각 지방의 불교미술도 전형적 양식을 벗어나 자유분방해지는데 아무래도 일개 지방세력 단위다보니 수도의 중앙 귀족이 주도한 신라식 양식보다 균형미나 세련미는 떨어지는 느낌이 많다.[3] 이런 평가를 한 이유는 비교하는 기준이 석굴암 본존불이었기 때문이다. 통일신라에는 그 정도의 예술품을 만들 기술이 있었는데 고려로 넘어가면서 그 기술이 끊겼다며 기술의 퇴보를 한탄하면서 석굴암의 비교대상으로 지목한 것이 관촉사의 불상이었던 것. 상대가 워낙 넘사벽이니 관촉사 불상 입장에서는 억울했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