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타프 하이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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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의 정치인으로, 서독의 3대 연방 대통령을 지냈으며 그 외에도 법무부 장관, 내무부 장관 등의 정부 요직을 거쳤다.
2. 생애
1899년 루르 공업 지대 에센에서 출생했다. 구스타프라는 그의 이름은 외할아버지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그의 외할아버지는 1848년 혁명에 참여할 만큼 열성적인 자유주의자였으며, 하이네만 본인 역시 이런 정치 성향을 고스란히 본받게 된다. 제1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에 징집됐지만, 건강의 문제로 후방에서 근무하였으며 종전 후에는 대학교에 진학해 법학을 전공하였고 박사 학위까지 수여받는다. 이후 쾰른 대학교에서 법학과 강사로 일했지만 1933년 나치가 집권한 이후 나치당에 가입할 것을 집요하게 거부했던 탓에 강사자리에서 쫓겨났고[1]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때까지 고향 에센의 크루프 철강공장에서 관리직으로 근무한다.[2] 여담이지만 2차대전 시기 철강공장에서 근무했던 덕분에 징집을 면할수 있었으니 말 그대로 새옹지마.
2차대전 후에는 에센에 진주한 영국군 군정에 의하여 에센 시장으로 임명되었으며, 그와 동시에 기민당 창당에도 관여한다. 한편 1949년 독일연방공화국의 초대 총리에 취임한 콘라트 아데나워는 프로테스탄트 신자로서 하이네만이 가진 정치적 영향력에 주목했고, 그를 내무부 장관으로 입각시킨다.[3] 하지만 1952년 아데나워가 6.25 전쟁과 냉전이라는 국제 상황을 이용하여 독일군을 재건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여기에 반발하여 내무부 장관에서 사퇴한 뒤 기민당에서도 탈당한다. 이후 1957년에 하이네만은 사민당에 입당하는데, 독실한 프로테스탄트 신자였던 그가 사민당에 가입한 것은 상당한 파장을 독일 정계에서 불러일으켰다. 오늘날 하이네만의 사민당 입당은 1959년 고데스베르크 강령을 통한 사민당의 마르크스주의적 계급투쟁 정당에서 대중 정당으로의 전환의 시발점이었다고 평가받는다.
한편 1966년 키징어가 이끄는 기민당과 빌리 브란트가 이끄는 사민당 사이의 대연정이 설립되면서 하이네만은 법무부 장관으로 입각한다. 이어 1969년 당시 서독의 대통령이었던 하인리히 뤼프케가 사임하자, 그의 후임자를 결정할 투표에서 사민당의 후보로 출마하였고 여기서 당선되면서 서독의 3대 대통령에 취임하게 된다. 하이네만의 당선에는 자민당의 지지가 결정적이었고, 여기서부터 싹 튼 사민당과 자민당의 우호관계는 같은 해 10월 정권 창출을 둘러싼 협상과정에서 자민당이 오랜 기민당과의 연정 관계를 청산하고 사민당과 연정 관계를 이루면서 꽃을 피우게 된다.[4] 총리로 취임한 빌리 브란트는 동방 정책을 기치로 내걸면서 동구권 국가들과의 외교관계를 활발히 했고, 이에 발맞추어 하이네만 역시 동구권 국가들을 활발히 방문하면서 2차대전 시기 독일이 저지른 각종 전쟁범죄들을 사죄한다. 이 시기 68 혁명이 활발히 진행되었던 독일에서 하이네만의 이런 행보는 학생과 지식인들에게 큰 지지를 받았고 1974년 총선에서 사민당이 압승을 거두면서 재선 역시 어렵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이미 70대 중반이었던 하이네만은 자신의 나이와 건강 상태를 고려하여 대통령 선거 불출마를 선언했고 그의 후임자로 자민당의 발터 셸이 취임한다. 퇴임 후 고향 에센으로 낙향한 하이네만은 1976년 숨을 거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