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부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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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는 '''《국부의 형성과 그 본질에 관한 연구(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이다. 일상 대화에서 원제를 말하기에는 원제가 꽤나 길기 때문에 일상 대화나 비격식적인 글에서는 '''국부론'''(國富論)으로 짧게 부르는 경우가 많다. 영어권에서도 The Wealth of Nations로 줄여서 부른다.
1776년 영국의 학자 애덤 스미스가 찰스 타운센드 공작의 아들을 개인과외하며 유럽 각지를 여행하고 1766년에 영국에 귀국한 뒤 10년간 커콜디에서 자신의 서재에 파묻혀 지내 쓴 책이다. 사실 이 여행을 떠날 때까지만 해도 스미스는 경제학과는 거리가 먼 철학자였고, 여행을 통해 경제학에 관심과 식견이 생긴 것이다. 이 사실은 국부론의 초안을 작성할 때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도 드러난다.
경제학을 잘 모르더라도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은 아는 사람이 많은데, 바로 이 《국부론》에서 나온 말이다.
《국부론》이 나오던 당시, 전통적으로 우수한 토지를 바탕으로 중농주의를 채택한 프랑스[1] 나, 신대륙을 바탕으로 넘쳐나는 금과 새로운 문물들을 중점으로 한 상업 즉, 중상주의[2] 를 밀어붙인 에스파냐가 아닌 산업 혁명을 바탕으로 성장한 영국이 세계적 부국으로 등극하게 되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통적으로 부의 원천은 토지에서 온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실제로 중세는 토지가 많을수록 부자이던 시대였다. 그러다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식민지에서 쏟아져 나오는 금과 새로운 문물들은 그간 땅만 있으면 돈이 굴러오던 경제와는 다른 새로운 경제, 즉 무역업이란 장르를 탄생시켰다.
그러나 애초부터 서유럽 지방 중에서도 기름진 땅을 독차지하는 프랑스도, 가장 먼저 신대륙을 발견해 독점무역을 해오던 에스파냐도 아닌 (중세까진) 듣보잡 섬나라에 불과하던 영국이 산업 혁명 이후 이 두 나라를 제치고 부국으로 자리잡은 이유는 당시의 기준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해괴망측한 일이었다.[3]
당시의 학자들은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고, 새로운 관점에서 돈이 움직이는 현상을 설명해야 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탄생한 책이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다.
현대에 와서 분업을 하지 않는 공장을 찾는 게 더 어려울 정도로 대부분의 공장은 하나의 물건을 만드는 데 여러 가지의 공정을 거친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BC4세기 그리스 작가 크세노폰(Xenophon)의 《키루스의 교육(Cyropaedia)》에서 이미 분업을 통한 생산성 향상을 지적한 바 있다. 근대에 들어서 윌리엄 페티 경(Sir William Petty)이 네덜란드 조선소의 효율적인 생산 방식을 견문하여 분업의 이점을 재발견하여 이후 분업에 대한 논의가 등장하게 되었다. 애덤 스미스는 분업을 분석한 결과, 3가지의 특징을 알아냈다.
그런데 이 핀 공장이 공정을 18개로 나누어 공돌이 10명에게 작업을 시켰더니[4] 하루에 약 48,000개를 생산할 수 있었다. '''분업 하나만으로 생산성이 무려 240배로 뛰었던 것이다.'''
스미스는 분업에 의해 생산성이 향상되는 원인에 대해서는 1) 전문화된 노동자들이 숙련도가 향상되기 때문이고, 2) 한 작업에서 다른 작업으로 전환할 때 낭비되는 시간을 절약할 수 있으며, 3) 매일 같은 작업을 반복하는 노동자들이 작업능률을 향상시킬 수 있는 공구나 기계류를 고안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내놓았다.
이러한 사태를 피하기 위해서 아무도 교환을 거절하지 않을 특정 상품을 갖고 거래하려고 노력하게 되었으며, 초기에는 가축, 소금, 조개 껍데기 등이 이용되었으나[5] 결국 내구성이 높아 장기간 보존이 용이하고 가치의 손실없이 분할할 수 있는 금속이 선호되었다.
처음에는 금은동철이 아무런 표시도 없는 덩어리째로 사용되었으나 거래할 때마다 중량을 재고 금속의 순도를 매번 확인해야 하는 불편함을 해소할 필요성에서 중량이 일정하고 순도가 표시된 금속 화폐인 주화#s-3가 등장하였다. 주화는 중량을 재는 수고를 들이지 않고 그 개수를 세어 주고 받을 수 있었다.
한편 물물교환이 사라지고 화폐가 사용되면서 상품의 교환가치를 화폐로 평가하게 되었다. 즉 화폐는 그 자체로는 사회의 수입이 아니지만, 자본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고 그것에 의해 구매할 수 있는 재화를 나타내는데 사용되었다. 점차 화폐가 상업의 보편적인 매개체가 되고 모든 종류의 재화가 매매되거나 교환되면서 시장이 형성될 기초를 형성했다.
수상 수송이 발달하면서 대량의 화물이 저렴한 비용으로 운송할 수 있게 되었다. 18세기 당시 마부 2명이 모는 말 8필의 광궤 4륜마차는 런던과 에든버러 사이를 4톤의 화물을 싣고 6주일만에 왕복하는 반면, 화물 200톤을 적재한 선박은 불과 6~8명의 선원만 필요로 하면서도 거의 같은 시간에 같은 거리를 항해할 수 있었다. 따라서 200톤의 화물을 런던에서 에든버러로 운송하려면, 육로로는 100명의 생계비와 말 400필, 마차 50대의 유지비가 소요되는 반면, 수로로 옮길 때는 불과 6~8명의 생계비와 200톤급 선박1척의 유지비만 소요된다.
수운의 발달로 수송비용이 폭락하면서 하천과 연안을 낀 도시들에서부터 분업이 확립되고 상업 사회가 형성되었다. 더이상 이웃 농촌에서만 원자재를 공급받을 필요가 없게 된 도시들은 멀리 떨어진 지방 및 외국에서 원자재를 수입하고 공산품을 판매할 수 있었다. 몇몇의 한정된 촌락을 벗어난 더 넓은 범위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수요를 바탕으로 성장한 도시들은 대량의 수요를 요구하는 전문적인 제조업 업종의 등장을 가능케 했고, 또한 농촌의 잉여 생산물을 위해 대규모 시장을 제공함으로써 농촌의 경작과 개량에 자극을 주기까지 했다.
한편 그 자체가 상거래의 안전을 전제 조건으로 하는 도시의 상업과 제조업은 농촌에 질서와 선정, 개인의 안전과 자유를 도입하는 부수적인 효과도 있었다. 외국 무역과 제조업이 도입되기 전, 대지주는 소유지의 잉여 생산물을 교환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대신 다수의 가신, 식객을 부양하면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을 뿐 아니라, 잉여 생산물의 소비자가 대지주와 그 부하들로 한정된 상태에서는 농노나 소작인들도 대지주에게 종속되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외국 무역에 의한 제조업이 확립되자, 대지주들은 특히 사치품을 구매하기 위한 소비를 충당하기 위한 목적으로 점차 가신과 필요없는 소작인을 해고했으며, 동시에 보유한 토지에서 최대한의 이익을 얻기 위해 나머지 소작인들에게 토지 개량을 위한 장기 차지계약을 인정하게 되었다. 소작인은 장기간 토지 차용권을 보유하고, 잉여 생산물을 소비할 시장이라는 대안이 존재함으로써 지주로부터 독립했고, 해고된 가신들은 대지주가 농촌을 폭력과 권력으로 지배하는데 더이상 이용될 수 없었다. 이에 따라 농촌에서 일상의 정치를 교란할 권세가들이 사라져 가고 농민이 종속에서 해방되면서 도시와 같이 사법과 행정이 확립되었다.
그러나 증기기관의 발명과 산업혁명으로 인해 여러 공정으로 쪼개진 공장은, 수작업보다 퀄리티가 높은 공산품을 일정한 품질로 대량생산할 수 있었다. 당장 위의 핀만해도 분업만으로 240배가 뛰었는데, 증기기관으로 자동화까지 되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이는 가내수공업으로 생산된 저품질&소량&고가의 공산품을 빠른 속도로 대체했으며, 과거 특권층의 전유물이 저렴한 가격으로 그것도 더욱 양질의 제품을 누구나 쉽게 구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즉 그만큼 공산품 시장이 확대되고 시장이 활성화되며, 규모가 팽창하게 되어 시장이 경제를 주도하게되는 본격적인 시장경제체제의 시초이기도 하다.
애덤 스미스는 인간의 이기심(Selfishness)이 경제발전을 가져왔다고 보았다. 흔히 이기심은 나쁜 것으로 여겨지지만, 국부론의 관점에서는 이기심이 없으면 경제발전도 없다. 빵집 사장이 빵을 만드는 목적은 소비자들에 대한 ‘자비’가 아닌 개인의 사리사욕 추구이지만 결론적으로 소비자는 빵을 먹고, 사장은 돈을 번다.
이것으로 사회주의의 실패 원인을 설명하기도 한다. 생계는 당과 국가가 책임지고 이외의 이기심 및 자본의 축적을 터부시하는 사회주의에서는 활발한 경제 활동과 자본에 의한 생산 수준의 고도화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국부론에서는 인간의 이기심을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국부론의 원서는 발간된 지 250년 가까이 된 고서이므로 저작권이 없다. 물론 번역이나 편역 등은 저작권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원서는 인터넷으로도 공개되어 있으며, 이곳에서 읽어볼 수 있다. PDF다운로드
'경제학'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던 시절에 경제학이란 새로운 학문을 탄생하게 만들었다. 경제학의 기초를 닦은 것과 동시에 고전 경제학의 시발점이며 경제학을 공부하는 이들이 한 번쯤은 읽어봐야 할 명저이다. 즉 '경제학'의 시작이다.
물론 학문적 체계가 확립되기 전이었을 뿐 《국부론》 이전이라고 해서 경제에 대한 관념이 없었다고는 볼 수 없다. 당장 국부론 자체가 기존의 경제관이던 중상주의에 대한 반박과 중농주의에 대한 보충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매우 체계적인 현대의 경제학과는 달리, 과거의 경제학은 그냥 상인들이나 정부 관료들 사이에서 전해오는 일종의 구전 학문에 가까웠으며 그 내용도 어떻게 하면 금과 은을 더 축적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연구, 즉 일종의 상업무역론에 가까웠다. 즉 단순한 금과 은의 양이 아닌, '부' 라는 것의 기준을 명확히 정의하고 이것을 어떻게 측정하며 어떤식으로 움직이는지를 논리적이고 수학적으로 관찰하는 학문으로서의 국부론은 경제학을 탄생시켰다고 볼 수 있다. 국부론에서 정의한 '부(Wealth)'는 '''생산성'''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는 현재 세계 국부 평가 기준으로 국내총생산(GDP)이라는 지표를 사용하게 됨으로써[6] 결정적으로 전 세계 경제 시스템 자체를 재설계하는 데 공헌했다.
적어도 경제학을 접하고 있는 사람은 이 책의 이름 정도는 들어봤을 것이다. 국부론을 성경에 비유하기도 하는데, 이건 경제학이 종교 같은 무언가이고 국부론이 그 경전이라는 뜻이 아니라 경제학에서 국부론이 차지하는 자리를 표현하는, 구미 기독교 문화권에서 유래한 하나의 관용어다. 바이블 문서 참고.
이에 그치지 않고 스미스는 그러한 부를 국가가 어떻게 유지하고, 축적할 것인가에 대한 정책적 조언도 가미한다. 바람직한 시장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국가의 개입을 오히려 강조하며, 범선을 비롯한 당대의 군수산업은 오히려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유치산업(원문엔 infant industry)에 대한 국가의 보호를 이야기하는데, 열등한 농업 국가인 영국이 프랑스 농산물에 잠식될 것을 우려한 맬서스와 당대 대중들에겐 맬서스의 안티 쯤으로 여겨졌지만 라이벌이자 후대에 고평가를 받는 이 등에게 영향을 준 내용도 존재한다. 한마디로 오늘날 우리가 알고있는 경제학의 기원을 마련한 책이다.
한국어 번역본은 유인호 역(동서문화사 → 학원출판공사 → 동서문화사), 최임환 역(을유문화사), 김수행 역(동아출판사 → 비봉출판사), 정해동, 최호진 공역(범우사) 등이 있다.
1. 개요
애덤 스미스의 대표적인 저서이자 애덤 스미스 본인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도덕감정론보다 후세 사람들에게 더 각광을 받은 책.《국부론》은 좋은 책이 아니다. '''위대한 책이다.'''
토드 부크홀츠,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
원제는 '''《국부의 형성과 그 본질에 관한 연구(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이다. 일상 대화에서 원제를 말하기에는 원제가 꽤나 길기 때문에 일상 대화나 비격식적인 글에서는 '''국부론'''(國富論)으로 짧게 부르는 경우가 많다. 영어권에서도 The Wealth of Nations로 줄여서 부른다.
1776년 영국의 학자 애덤 스미스가 찰스 타운센드 공작의 아들을 개인과외하며 유럽 각지를 여행하고 1766년에 영국에 귀국한 뒤 10년간 커콜디에서 자신의 서재에 파묻혀 지내 쓴 책이다. 사실 이 여행을 떠날 때까지만 해도 스미스는 경제학과는 거리가 먼 철학자였고, 여행을 통해 경제학에 관심과 식견이 생긴 것이다. 이 사실은 국부론의 초안을 작성할 때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도 드러난다.
이는 케인스가 막 경제학에 흥미를 붙일 무렵 친구에게 했던 말인 '''"어쩌면 나는 경제학에 소질이 있을지도 몰라."'''와 더불어 경제학 역사상 가장 겸손한 발언으로 손꼽힌다.'''"나는 요즘 시간을 때우려고 책을 한 권 쓰고 있다네."'''
경제학을 잘 모르더라도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은 아는 사람이 많은데, 바로 이 《국부론》에서 나온 말이다.
2. 시대상
《국부론》이 나오던 당시, 전통적으로 우수한 토지를 바탕으로 중농주의를 채택한 프랑스[1] 나, 신대륙을 바탕으로 넘쳐나는 금과 새로운 문물들을 중점으로 한 상업 즉, 중상주의[2] 를 밀어붙인 에스파냐가 아닌 산업 혁명을 바탕으로 성장한 영국이 세계적 부국으로 등극하게 되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통적으로 부의 원천은 토지에서 온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실제로 중세는 토지가 많을수록 부자이던 시대였다. 그러다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식민지에서 쏟아져 나오는 금과 새로운 문물들은 그간 땅만 있으면 돈이 굴러오던 경제와는 다른 새로운 경제, 즉 무역업이란 장르를 탄생시켰다.
그러나 애초부터 서유럽 지방 중에서도 기름진 땅을 독차지하는 프랑스도, 가장 먼저 신대륙을 발견해 독점무역을 해오던 에스파냐도 아닌 (중세까진) 듣보잡 섬나라에 불과하던 영국이 산업 혁명 이후 이 두 나라를 제치고 부국으로 자리잡은 이유는 당시의 기준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해괴망측한 일이었다.[3]
당시의 학자들은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고, 새로운 관점에서 돈이 움직이는 현상을 설명해야 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탄생한 책이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다.
3. 주요내용
3.1. 분업
현대에 와서 분업을 하지 않는 공장을 찾는 게 더 어려울 정도로 대부분의 공장은 하나의 물건을 만드는 데 여러 가지의 공정을 거친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BC4세기 그리스 작가 크세노폰(Xenophon)의 《키루스의 교육(Cyropaedia)》에서 이미 분업을 통한 생산성 향상을 지적한 바 있다. 근대에 들어서 윌리엄 페티 경(Sir William Petty)이 네덜란드 조선소의 효율적인 생산 방식을 견문하여 분업의 이점을 재발견하여 이후 분업에 대한 논의가 등장하게 되었다. 애덤 스미스는 분업을 분석한 결과, 3가지의 특징을 알아냈다.
- 생산성 향상
그런데 이 핀 공장이 공정을 18개로 나누어 공돌이 10명에게 작업을 시켰더니[4] 하루에 약 48,000개를 생산할 수 있었다. '''분업 하나만으로 생산성이 무려 240배로 뛰었던 것이다.'''
스미스는 분업에 의해 생산성이 향상되는 원인에 대해서는 1) 전문화된 노동자들이 숙련도가 향상되기 때문이고, 2) 한 작업에서 다른 작업으로 전환할 때 낭비되는 시간을 절약할 수 있으며, 3) 매일 같은 작업을 반복하는 노동자들이 작업능률을 향상시킬 수 있는 공구나 기계류를 고안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내놓았다.
- 화폐의 사용
이러한 사태를 피하기 위해서 아무도 교환을 거절하지 않을 특정 상품을 갖고 거래하려고 노력하게 되었으며, 초기에는 가축, 소금, 조개 껍데기 등이 이용되었으나[5] 결국 내구성이 높아 장기간 보존이 용이하고 가치의 손실없이 분할할 수 있는 금속이 선호되었다.
처음에는 금은동철이 아무런 표시도 없는 덩어리째로 사용되었으나 거래할 때마다 중량을 재고 금속의 순도를 매번 확인해야 하는 불편함을 해소할 필요성에서 중량이 일정하고 순도가 표시된 금속 화폐인 주화#s-3가 등장하였다. 주화는 중량을 재는 수고를 들이지 않고 그 개수를 세어 주고 받을 수 있었다.
한편 물물교환이 사라지고 화폐가 사용되면서 상품의 교환가치를 화폐로 평가하게 되었다. 즉 화폐는 그 자체로는 사회의 수입이 아니지만, 자본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고 그것에 의해 구매할 수 있는 재화를 나타내는데 사용되었다. 점차 화폐가 상업의 보편적인 매개체가 되고 모든 종류의 재화가 매매되거나 교환되면서 시장이 형성될 기초를 형성했다.
- 규모의 경제 및 시장 사회의 형성
수상 수송이 발달하면서 대량의 화물이 저렴한 비용으로 운송할 수 있게 되었다. 18세기 당시 마부 2명이 모는 말 8필의 광궤 4륜마차는 런던과 에든버러 사이를 4톤의 화물을 싣고 6주일만에 왕복하는 반면, 화물 200톤을 적재한 선박은 불과 6~8명의 선원만 필요로 하면서도 거의 같은 시간에 같은 거리를 항해할 수 있었다. 따라서 200톤의 화물을 런던에서 에든버러로 운송하려면, 육로로는 100명의 생계비와 말 400필, 마차 50대의 유지비가 소요되는 반면, 수로로 옮길 때는 불과 6~8명의 생계비와 200톤급 선박1척의 유지비만 소요된다.
수운의 발달로 수송비용이 폭락하면서 하천과 연안을 낀 도시들에서부터 분업이 확립되고 상업 사회가 형성되었다. 더이상 이웃 농촌에서만 원자재를 공급받을 필요가 없게 된 도시들은 멀리 떨어진 지방 및 외국에서 원자재를 수입하고 공산품을 판매할 수 있었다. 몇몇의 한정된 촌락을 벗어난 더 넓은 범위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수요를 바탕으로 성장한 도시들은 대량의 수요를 요구하는 전문적인 제조업 업종의 등장을 가능케 했고, 또한 농촌의 잉여 생산물을 위해 대규모 시장을 제공함으로써 농촌의 경작과 개량에 자극을 주기까지 했다.
한편 그 자체가 상거래의 안전을 전제 조건으로 하는 도시의 상업과 제조업은 농촌에 질서와 선정, 개인의 안전과 자유를 도입하는 부수적인 효과도 있었다. 외국 무역과 제조업이 도입되기 전, 대지주는 소유지의 잉여 생산물을 교환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대신 다수의 가신, 식객을 부양하면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을 뿐 아니라, 잉여 생산물의 소비자가 대지주와 그 부하들로 한정된 상태에서는 농노나 소작인들도 대지주에게 종속되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외국 무역에 의한 제조업이 확립되자, 대지주들은 특히 사치품을 구매하기 위한 소비를 충당하기 위한 목적으로 점차 가신과 필요없는 소작인을 해고했으며, 동시에 보유한 토지에서 최대한의 이익을 얻기 위해 나머지 소작인들에게 토지 개량을 위한 장기 차지계약을 인정하게 되었다. 소작인은 장기간 토지 차용권을 보유하고, 잉여 생산물을 소비할 시장이라는 대안이 존재함으로써 지주로부터 독립했고, 해고된 가신들은 대지주가 농촌을 폭력과 권력으로 지배하는데 더이상 이용될 수 없었다. 이에 따라 농촌에서 일상의 정치를 교란할 권세가들이 사라져 가고 농민이 종속에서 해방되면서 도시와 같이 사법과 행정이 확립되었다.
- 산업 혁명에 따른 대량생산으로 애덤 스미스의 견해가 확증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증기기관의 발명과 산업혁명으로 인해 여러 공정으로 쪼개진 공장은, 수작업보다 퀄리티가 높은 공산품을 일정한 품질로 대량생산할 수 있었다. 당장 위의 핀만해도 분업만으로 240배가 뛰었는데, 증기기관으로 자동화까지 되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이는 가내수공업으로 생산된 저품질&소량&고가의 공산품을 빠른 속도로 대체했으며, 과거 특권층의 전유물이 저렴한 가격으로 그것도 더욱 양질의 제품을 누구나 쉽게 구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즉 그만큼 공산품 시장이 확대되고 시장이 활성화되며, 규모가 팽창하게 되어 시장이 경제를 주도하게되는 본격적인 시장경제체제의 시초이기도 하다.
3.2. 이기심의 긍정
애덤 스미스는 인간의 이기심(Selfishness)이 경제발전을 가져왔다고 보았다. 흔히 이기심은 나쁜 것으로 여겨지지만, 국부론의 관점에서는 이기심이 없으면 경제발전도 없다. 빵집 사장이 빵을 만드는 목적은 소비자들에 대한 ‘자비’가 아닌 개인의 사리사욕 추구이지만 결론적으로 소비자는 빵을 먹고, 사장은 돈을 번다.
이것으로 사회주의의 실패 원인을 설명하기도 한다. 생계는 당과 국가가 책임지고 이외의 이기심 및 자본의 축적을 터부시하는 사회주의에서는 활발한 경제 활동과 자본에 의한 생산 수준의 고도화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국부론에서는 인간의 이기심을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 인간은 이익을 얻고자 하는 이기심 때문에 더 열심히 일한다.
- 이익에 대한 열망이 클수록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
- 인간의 이기심은 한정적인 자원으로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
- 자원은 한정되어있기 때문에, 이를 가지기 위한 경쟁이 생기게된다.
-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상대방보다 더 좋은 방법을 끝없이 연구한다.
- 더 많은 이익을 위해 새로운 관점에서 생각하게 된다.
3.3. 보이지 않는 손
4. 국부론 원서
국부론의 원서는 발간된 지 250년 가까이 된 고서이므로 저작권이 없다. 물론 번역이나 편역 등은 저작권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원서는 인터넷으로도 공개되어 있으며, 이곳에서 읽어볼 수 있다. PDF다운로드
4.1. 평가
'경제학'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던 시절에 경제학이란 새로운 학문을 탄생하게 만들었다. 경제학의 기초를 닦은 것과 동시에 고전 경제학의 시발점이며 경제학을 공부하는 이들이 한 번쯤은 읽어봐야 할 명저이다. 즉 '경제학'의 시작이다.
물론 학문적 체계가 확립되기 전이었을 뿐 《국부론》 이전이라고 해서 경제에 대한 관념이 없었다고는 볼 수 없다. 당장 국부론 자체가 기존의 경제관이던 중상주의에 대한 반박과 중농주의에 대한 보충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매우 체계적인 현대의 경제학과는 달리, 과거의 경제학은 그냥 상인들이나 정부 관료들 사이에서 전해오는 일종의 구전 학문에 가까웠으며 그 내용도 어떻게 하면 금과 은을 더 축적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연구, 즉 일종의 상업무역론에 가까웠다. 즉 단순한 금과 은의 양이 아닌, '부' 라는 것의 기준을 명확히 정의하고 이것을 어떻게 측정하며 어떤식으로 움직이는지를 논리적이고 수학적으로 관찰하는 학문으로서의 국부론은 경제학을 탄생시켰다고 볼 수 있다. 국부론에서 정의한 '부(Wealth)'는 '''생산성'''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는 현재 세계 국부 평가 기준으로 국내총생산(GDP)이라는 지표를 사용하게 됨으로써[6] 결정적으로 전 세계 경제 시스템 자체를 재설계하는 데 공헌했다.
적어도 경제학을 접하고 있는 사람은 이 책의 이름 정도는 들어봤을 것이다. 국부론을 성경에 비유하기도 하는데, 이건 경제학이 종교 같은 무언가이고 국부론이 그 경전이라는 뜻이 아니라 경제학에서 국부론이 차지하는 자리를 표현하는, 구미 기독교 문화권에서 유래한 하나의 관용어다. 바이블 문서 참고.
이에 그치지 않고 스미스는 그러한 부를 국가가 어떻게 유지하고, 축적할 것인가에 대한 정책적 조언도 가미한다. 바람직한 시장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국가의 개입을 오히려 강조하며, 범선을 비롯한 당대의 군수산업은 오히려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유치산업(원문엔 infant industry)에 대한 국가의 보호를 이야기하는데, 열등한 농업 국가인 영국이 프랑스 농산물에 잠식될 것을 우려한 맬서스와 당대 대중들에겐 맬서스의 안티 쯤으로 여겨졌지만 라이벌이자 후대에 고평가를 받는 이 등에게 영향을 준 내용도 존재한다. 한마디로 오늘날 우리가 알고있는 경제학의 기원을 마련한 책이다.
4.2. 번역
한국어 번역본은 유인호 역(동서문화사 → 학원출판공사 → 동서문화사), 최임환 역(을유문화사), 김수행 역(동아출판사 → 비봉출판사), 정해동, 최호진 공역(범우사) 등이 있다.
5. 관련 문서
- 국부
- 경제학
- 애덤 스미스
- 미시경제학
- 고전학파
- 산업 혁명
- 욕심쟁이 혹부리 영감의 자전거 공장: 개인의 이기심으로 인한 활동이 결과적으로 전체에 이익을 가져온다는 국부론의 주장을 표현하고 있다.
[1] Quesnay 등의 학자가 중농주의 이론을 발전, 집대성해 스미스 이전의 경제학적 기틀을 마련한다.[2] 축적한 금붙이 등을 경제력의 원천이자 측정 기준으로 본 중상주의는 생산물(농산물)을 강조한 중농주의에 밀리게 된다.[3] 듣보잡까지는 아니였다. 오히려 강대국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그 당시에 유일하게 실탄으로 사격 훈련을 하는 국가였기 때문에,(사실 이것만 봐도 식민지 덕분에 얼마나 부유했는지 알 수 있다.) 영국 육군은 수는 적어도 정말 최강이였으며, 7년 전쟁의 북미 전선에서 프랑스가 정말 미친듯이 발렸다(...) 다만 이는 영국 육군이 압도적으로 강력해서라기보단 영국이 우월한 해군력으로 유럽에서 미주로 가는 프랑스의 보급로를 죄다 끊어버렸기 때문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보급 없는 군대가 박살 안 나는 경우는 없다. 당장 보급이 해로를 통해야만하는 북미 전선에서나 프랑스가 쳐발렸지, 육로 보급이 가능한 유럽 전선에선 7년전쟁 내내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어쨌든 프랑스는 루이지애나를 제외한 캐나다를 비롯한 모든 식민지가 영국한테 털려버렸다.[4] 10사람 중 몇 사람은 실제로 두세 가지 작업을 혼자서 하고 있었다.[5] 이것을 상품 화폐(commodity money)라고 한다. 동아시아에서는 상품 화폐로써 주로 면포와 비단이 사용되었다.[6] GDP는 특정 '기간'의 부가가치 생산의 합이라는 '유량'(Flow) 개념이다. 국부론이 나오기 전의 국부를 측정하는 것은 국가가 보유한 금이나 은의 양, 즉 '저량'(Stack) 개념이었다. 그러나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에서 지적한 생산성, 즉 Flow 개념의 국부 측정이 더 합리적이라는 것을 입증하면서 저량 개념의 국부 측정은 사실상 사라졌다. 현대의 외환보유액 정도가 Stack 개념의 국부인데, 외환보유액을 국부라고 표현하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