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상주의

 


1. 개요
2. 핵심
2.1. 경제사상인가?
3. 비판
4. 결말
5. 의의
6. 관련 문서

Mercantilism

1. 개요


중상주의는 무역을 통해 자본 및 귀금속(금, 은)을 '''축적'''하는 것을 국부를 증대시키는 이상적인 방법으로 여기는 경제사상 / 경제정책이다. 15세기 중반부터 18세기에 걸쳐 유럽 절대주의 왕정에서 대체로 취한 정책이다. 중농주의와 대립되었다. 이를 따르는 대표적인 정치가로는 프랑스 루이 14세 시기 재무장관을 역임했던 장 바티스트 콜베르찰스 1세를 사형에 처한 잉글랜드의 호국경 올리버 크롬웰이 있다. 중상주의 정책이라고 하면 흔히 '보호무역주의'를 떠올리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보호무역주의는 중상주의의 결과적 현상이다.
중상주의 의 주요 개념 중 일부를 들면 다음과 같다.
  • 제로섬 경제
  • 금은 등의 귀금속의 국내 축적 (중금주의)
  • 정부의 적극적 개입을 통한 자본집중.
  • 필요 이상의 자발적 거래를 제한함으로써 자본 유출 방지 (보호무역)
  • 공공재 확보 및 시장 활성화
  • 상인계층 보호를 통한 국부의 극대화
  • 수출을 위한 국내 산업 육성 (중공주의)
  • 중계무역과 수출을 강조 (무역차액주의)

2. 핵심


중상주의는 경제 현상을 제로섬 게임으로 생각하였다. 금은과 같은 귀금속을 부(富)로 여겼으며, 많은 금은을 모아 국고를 채우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여기서 귀금속은 기축통화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봐도 좋다. 이렇게 자금을 모아 강력한 군대와 관료제를 유지하는 것이 2차적인 목적이었다. 중상주의 정책을 펼친 자는 대체로 관료나 상인이었기 때문에 그들 자신의 목적에 맞게 정책을 수립했다.
중상주의에서 가장 주요한 정책은 귀금속을 얻을 수 있는 광산 개발이다. 하지만 국가가 광산을 소유하고 있지 않거나, 귀금속을 입수할 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무역을 통해서 얻어야 한다. 그리고 무역수지는 항상 수입보다 수출이 많은 것이 더 많은 귀금속을 축적할 수 있으므로 이득이다.
중상주의 이론에 따르면 국민이 많아질수록 국가는 강해진다. 왜냐하면 국민에 의해서 노동력과 시장, 군인이 공급되기 때문이다.
사치품에 대한 욕구는 억제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사치품은 귀금속을 유출시키기 때문이다. 욕구를 억제하기 위해서 중상주의에서는 사치품을 억제하는 법률이 지속적으로 만들어졌으며, 절약과 저축, 인색함이 덕목으로 여겨졌다. 왜냐하면 이렇게 해야 자본이 창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중상주의는 국가의 금속을 국가에 축적시키는 것이 곧 국가의 부흥임을 역설한다. 당연히 금속의 수출을 거부하는 이론이다. 딱 그 시대에 맞는 이론이라 할 수 있다. 금속만능주의의 파생 이론이라고 봐도 아주 틀리지 않다.

2.1. 경제사상인가?


우리는 그것을 고안해낸 사람이 소비자들이 아니라 생산자들이었다고 믿어도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소비자의 이익은 전적으로 무시되어 왔음에 비해, 생산자의 이익에는 매우 신중한 주의가 기울여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 생산자 중 우리나라의 상인, 제조업자야말로 중상주의의 특히 중요한 설계자다.

이 장에서 주의 깊게 살펴본 중상주의의 여러 규제들에서는, 우리나라 제조업자들의 이익이 특별히 우대되었고, 이리하여 소비자의 이익이 희생되었을 뿐 아니라 기타의 생산자들의 이익도 크게 희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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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스미스, 국부론 중

타 경제사상과는 달리, 중상주의는 이 학사를 대변하는 대표적인 경제학자를 지칭할 수는 없다. 사실 중상주의라는 용어 자체가 명칭 자체가 후대 애덤 스미스가 당시 대표적인 경제주체들을 통괄하여 부르기 위해 만들어진 이름이기 때문이다. 정작 중상주의 경제가 운용되고 있던 수 세기의 달하는 시간동안 해당 종사자들은 자신이 관심있는 경제 현상의 일면에 대해 집중하고 있었으며,[1] 이를 중상주의라는 하나의 학문이나 사상으로 묶는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이는 이 중상주의 자체가 국가의 상업적 이익을 중시하는 '''관료'''와, 안정적 시장을 원하는 '''상인'''들이 제시한 다양한 의견의 집합체였기 때문. 중세 이전까지는 신양과 정의에 걸맞는 스콜라 철학과 봉건제도를 중심으로 경제가 운영되었으나, 르네상스 이후 유럽의 다양한 사회적 격변은 마키아벨리식의 냉혹한 현실 정치와 국제 관계에서 국익의 획득과 같은 사항을 더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다. 때문에 당시 유럽국가는 국부를 위해 상인을 중요시 하고 나머지 이해당사자는 억압하는 식의 경제를 운용하게 되었고 자본은 최대한 축적하고 지출은 최대한 막는 자린고비식 운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를 각자 관료와 상인들이 타 계층들이 불만을 터뜨리는 일 없이 납득시키기 위해 당대의 논리를 종합해서 주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즉 중상주의는 당 대의 사회현상을 연구하는 학자의 연구 끝에 나온 것이 아니라, '''기존 경제적 기득권들 간의 특혜를 합리화시키기 위해 내놓은 각종 의견과 정책'''들을 후대에 중상주의라고 분석하였다고 보면 된다.

3. 비판


중상주의자들은 수출은 증가시키고, 수입은 억제시켜야 국부(國富)가 늘어나서 이득이 된다고 보았다. 데이비드 흄은 이를 비판하였는데, 수출의 증가는 통화량의 증가로 이어지고 이는 결국 물가의 상승을 가져오게 되므로 수출에 의한 이득을 감소시키는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초창기 고전 경제학자인 애덤 스미스가 강하게 비판한 학설이 이 중상주의다. 애덤 스미스는 국민의 노동 능률(생산성)이 중상주의의 귀금속보다 더 큰 부를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중상주의 정책에선 국가와 유착한 자본가들의 독점을 정당화하는데, 애덤 스미스는 이를 비판하며 국가의 간섭에서 벗어나서 자유로운 경쟁이 필요함을 주장했다. 그 유명한 '''보이지 않는 손'''도 이 중상주의를 비판하는 과정에서 등장했다.
그러나 학문으로서 중상주의의 가장 큰 문제가 하나 더 있다. 중상주의에선 국가 안보와 정권유지 정도를 제외하곤 (실질적으론 '''기득권의 탐욕이나 군사적 확장''') 왜 그 자본을 모아야 하는 지에 대한 합당한 해명이 없었다. 이는 애시당초 기득권의 정치적 필요에 의해 제안된 논리이다 보니 당대 학자들 중 그 누구도 '상업활동'을 독립된 학문으로선 다루지 않았던 것. 중상주의 당시 경제활동 종사자들 입장에서도 경제학 지식은 공익성과 도덕성이 지극히 떨어진, 자신의 재산을 불릴 수 있는 잔머리나 비법 정도로 여기고 있었다. [2] 즉,중상주의 당시에도 상업에 대한 인식은 베니스의 상인의 사일록을 통해 볼 수 있듯 '이딴 장사치 짓을 학문으로 인정하기엔너무 부도덕하다' 라는 편견에서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고, 기껏 해 봐야 마키아벨리즘적 사고에 따라 국부를 비열하지만 효과적으로 축적하는 필요악에 그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이론적 뒷받침이 없으니- 중상주의 경제는 사리사욕을 터부시 하는 문화적 장애물이 있는 상태에서 국익이라는 외압에 의해 억지로 경제가 돌아가는 꼴이 된 상황이었다.
때문에 중상주의 아래에서의 경제는 오직 기득권들의 의사에 달려 있었고, 자발적으로 경제성장을 유지할 원동력과 동기가 부족했다. 때문에 이런 기득권의 정치적 입장이 바뀌게 될 경우-농경사회의 대표적 미덕인 청빈과 공익을 추구하는 구성원의 영향을 받은 기득권들로 인해 해당 국가의 경제가 동결되거나[3], 아니면 기득권이 합리적 판단이 마비된 채 귀금속을 착취하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다[4] 경제 전체가 파탄나기 쉬웠다.

4. 결말


중상주의 적 사고에 따라 유럽 절대왕정들이 하나같이 생산과 수출만 중시하고 수입과 소비를 억제하는 식의 상인 보호 정책을 펼치자 '''중상주의 국가 간 무역이 거의 마비'''되어 버린다. 결국 일방적인 수입 및 수출이 가능한 가능한 식민지 확보 경쟁 및 더 많은 자본 확보를 위한 비기득권에 대한 착취로 이어지게 된다.
상세히 말하자면 중상주의적 경제관념에 따라 자연스럽게 무역도 국가가 상인과 국부를 철저하게 관리하는 보호무역으로 발전되었다. 그런데 이 보호무역이라는 것이 기본 전제조건인 '자국 산업 보호' 수준이 아닌, 아예 자국의 귀금속 유출 방지& 타국의 귀금속 확보가 목적이였던 것이 큰 문제가 되었다. 이렇게 되자 중상주의 하에서 무역이란 국가 지도층간의 알력다툼이 되었고, 모든 중상주의 국가가 높은 이윤을 가지는 자신의 완제품을 판매하고 싼 가격으로 대량의 원자재를 사고 싶어 했지만 정작 그 누구도 경쟁자인 상대방에게 대량의 원재료를 판매하거나 귀금속을 지불하면서 까지 타국의 완제품을 사려는 것은 꺼리게 되었다.
당연히 서로를 마키아벨리즘에 따라 귀금속을 확보하기 위한 제로섬 게임의 경쟁자로 보는 중상주의 국가들 사이에선 정상적인 무역자체가 성립할 수 없게 되었고, 상대방 국가를 대놓고 대포로 협박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교역 자체가 파탄나기 일쑤였다. 이렇게 되자 중상주의 경제체제를 가진 국가는 이러한 잠재적 라이벌이 없는 다른 문화권으로 비대칭 무역을 이어나가거나, 자국의 귀금속과 이를 생산할 수 있는 자산[5]을 최대한 확보하는 방식으로 방향을 선회하게 된다.
하지만 절대왕정 시기가 내리막을 타기 시작하자 중상주의 경제체제는 근본적인 문제점을 보이기 시작한다. 애시당초 중상주의라는 것 자체가 절대왕정의 핵심인 상비군과 관료체제를 운용하기 위한 유지비 확충을 위해서 였는데, 이 왕권이 약화되거나 시대가 변하자 축적해 놓은 대량의 귀금속들은 허공에 뜬 돈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국부 축적에만 중점을 둔 중상주의 시스템 상 이런 잉여자금이 재투자로 들어가는 건 드물었고[6]결국 해당 국가의 경제체제는 하위계층과 식민지의 자원과 노동력을 권력을 통해 합법적으로 약탈하는 형태가 되어버렸다.
자연스럽게 중상주의를 철저히 시행하던 국가들은 기득권의 호화스러운 사치나 식민지를 위한 과도한 군비확장을 시작했고, 이는 유럽 각국이 대격변이나 망국의 징조를 타는 원흉이 되어버린다. 영국은 식민지이던 미국의 독립과 그에 이은 산업혁명으로 기존 중상주의만 고집하던 독점상인들이 무너저 내렸고, 프랑스의 경우엔 프랑스 대혁명을 통해 앙시앵 레짐이 붕괴하며 관료층이던 귀족들과 왕이 그 대가를 크게 치루고 말았다. 물론 산업 후발주자인 독일=프로이센처럼 20세기 초반을 넘어서까지 중상주의적인 사고로 국가와 경제를 운영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 결과는 유럽 한 복판에 '''전 세계의 이윤과 기득권을 모조리 빨아들여 공중분해 시키는 총력전 블랙홀, 1차 세계대전을 여는 꼴이 되었다.'''
이렇게 되어서 막무가내로 부국강병만 부르짖으며 정경유착만 주장할 뿐, 체계성과 학문적 기반이 부실했던 중상주의는 당대 지식인층의 집중포화를 맞은 뒤 새로운 학문인 경제학사의 거름으로 사라졌다. 이 때문에 현대의 경제학에선 계획경제가 필요한 상황에선 다른 모델을 제시하지, 정치와 제왕학과 분리되지 못한 중상주의를 진지하게 꺼내드는 경우는 없다.

5. 의의


중상주의는 위에서 언급한 대로 초기 경제학자들이 비판할 용도로 만들어낸 문제점이 많은 경제학사였다. 하지만 경제학 전체에서 빼놓고 볼 수 없는 것 또한 중상주의인데, 이는 역사적으로 볼 때 중상주의적 경제구조는 시간과 지역을 가리지 않고 끝없이 복제- 재생산되었다는 점이다.
위에서 마지막까지 중상주의에 따라 경제를 운용했다고 비판된 독일제국의 경우에는 일단 기반이 갖추워진 뒤에는 중산층 육성에 성공한데다가 복지정책도 도입하면서 빈곤율을 어느정도 낮추는데에는 성공했기에, 독일 제국자체는 망했어도 나중에 소련의 경제정책이나 뉴딜정책에도 어느정도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마냥 망했다고 보기는 어렵다.[7]심지어 현대에 들어서도 보호무역이나 공산주의 하의 계획경제 등을 통해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기도 하다. 또 관세나 도량형 통일처럼 현대에도 남아있는 개념도 있으며, 전반적 대중들의 경제적 인식조차 아직도 '''"많이 팔아서 흑자를 내야만 좋다"'''는 중상주의식 사고에 머물러 있고, 무역적자 한 번 뜨면 정부가 죽을죄를 지은것마냥 난리치는 것이 현실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상업과 무역이 발전한 곳에선 여지없이 지배층과 상인 간의 밀착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권력과 군사력- 그리고 도덕적 정당성을 가진 지배층은 상인에 대해 직접적인 물리력을 행사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 상인들 또한 자신들의 생존과 번영이 지배층의 의사에 달려 있었기에 기득권의 요구에 적극 협조할 수 밖에 없었다. 즉 이런 관계 속에서 지배층이 상인을 가장 중요시 할 때 -자국 상인은 최대한 보호하고 이를 통한 국부는 최대한 확보하는 형태의 경제환경이 탄생하게 되는 것 이었다.
중상주의는 위와 같이 경제적 주권이 경제주체에게 있는게 아닌, 이와 무관한 영역에 있는 다른 권력집단의 손에 있을 때 어떤 모습을 가지게 되는지 보여준다. 물론 지배층에게 있어 상업의 중요성은 정치적&사회적 환경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었고, 이 경우 전면적인 억상(抑商)정책과 함께 (국가 통제하의)중농주의로 회귀하거나, 상인계급이 제공하는 사치와 항략에 빠지다 국가 전체가 몰락하는 일을 반복했었다. 수천년에 이르는 인류 역사와 무역속에서도 자본가 중심의 경제 및 사회체제 나타나지 못했던 이유 중 하나가 이런 권력의 힘을 입은 상업과 농업의 끝없는 순환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부르주아로 대표되는 유럽 상인계급의 정치적&학문적 영향력이 커지면서 기존 지배 계급과 동등한 위치에 서거나 아예 자기 자신들이 지배 계급이 되자 상황은 달라지게 된다. 더 이상 기존 권력이 상인 계층을 압박할 수 없게 되자 중상주의의 부작용이 폭주하기 시작했지만, 르네상스 이후 누적된 인문학적 토양은 이를 대체할 고전파 경제학을 잉태시켰다.
위에서 완전히 실패한 사상 마냥 잘근 잘근 씹은 것과는 달리, 사실 이러한 중상주의적인 경제관념은 후진국 및 개발도상국에게 유리한 개념이기도 하다. 후진국이나 중진국 단계 에서는 부채가 많으면 국가경제가 불안해지는데 반해[8] 외화가 많으면 많을수록 이러한 경제적인 불안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워지고 산업적으로도 일정부분을 수입대체하면 그 만큼 실업률이 떨어진다는 장점이 있으며 무역수지에서 흑자를 내면 그 만큼 경제성장률도 높아지는 효과를 가져올수있다. 대부분의 국가들은 한번씩은 이러한 중상주의적인 경제정책으로 경제를 발전시킨 적이 있었고, 한국도 이렇게 경제가 성장한 나라이다. 또한 위에서 해법으로 언급한 자유주의 경제정책을 폈다가 지나친 무역역조와 주기적인 경제위기로 인해 오히려 경제력이 안습이 된 나라들이 한둘이 아니기도 하고, 설사 경제자유화를 단행한다해도 중산층과 빈민층의 구매력을 희생하는 등 사실상 강압적으로 이루워진 경우가 많아서 위에서 얘기하는 자유주의라고 보기 힘든 결과를 낳는 경우도 한둘이 아니다. 문제는 중상주의에 따른 경제발전은 어느정도 규모가 커지고 나면 '비효율적이며 경제에 직접적으론 무관한 권력집단'의 영향력을 비대하게 성장시키게 되고- 결론적으론 제살 깎아먹기가 된다는 점이다.

6. 관련 문서



[1] (갤브레이스가 들려 주는) 경제학의 역사. pg.44[2] 이 때문에 바로 경제''''''의 시작을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으로 보게 된다. 21세기로 비유한다면 보이스피싱이나 랜섬웨어 등이 특유의 노하우나 기술을 통해 막대한 지하경제을 창출하고 있긴 하지만 이를 긍정적으로 평가할 요소가 없으니 '''보이스피싱학'''이나 '''랜섬웨어학'''과 같은 독립된 학문은 없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다.[3] 중농주의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당시 '경제학자'라고 자칭한 지식인들은 정말로 이렇게 산업화와 도시화를 무력화시키고 농경사회로 돌아가는 선택지를 꺼내든 상태였다.[4] 단적으로 중상주의 말기에는 바로크로코코로 대표되는 엄청나게 사치스러운 귀족문화가 꽃을 피웠다. 고급스럽게 적으면 중진국 함정이 된다.[5] 사실 중상주의 경제학에선 자산 또 한 귀금속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며, 자산엔 부채 또한 포함된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최소화 할 수록 좋은 것에 불과하다.''' 즉 당시 중상주의 경제 하에선, 까놓고 말해 전쟁에서 쓰일 잉여자본을 제외한 모든 것이 평가절하 되고 있다.[6] 중상주의 시스템상 귀금속은 국익과 이를 수호하기 위한 상비군을 위해 최대한 비축 및 관리해야 하는 요소이며, 이를 개개인이 필요에 따라 무분별하게 사용하는 것 자체를 국익에 반하는 방종으로 본다. 그러니깐 '''국가가 허용하지 않는 한''' 민간의 적극적인 재투자도 막혀 있는 셈. [7] 본디 마르크스주의에서는 독일제국의 경제정책을 국가자본주의라고 해서 중상주의적인 경제정책을 비판했지만 적백내전기를 거친 이후로 서방제국주의 국가와 맞설 방책으로 좀더 발빠른 경제성장을 도모했다. 처음에는 자유주의적인 경제정책(신경제정책)을 펴게 되나 전후 복구가 어느정도 이루워졌을 무렵에 더 발빠른 경제성장을 추구하며 농촌의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중공업을 육성하는 방식의 경제성장정책을 펴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방법론적인 측면에서 독일의 국가주도산업화 정책의 영향을 진하게 받았고 이를 계획경제라고 칭하게 된다.[8] 단적인 예로 설명한다면 아이티는 GDP 대비 국채비율이 30%대이지만 국민들은 엄청난 가난에 시달리는데 반해 미국은 GDP 대비 국채비율이 100%를 초과함에도 잘만 버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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