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메이너드 케인스

 



'''The Right Honourable '''
'''{{{#white {{{+1 The Lord Keynes
}}}}}}'''
 '''CB'''[1] '''FBA'''[2]
'''본명'''
존 메이너드 케인스[3] 남작[4] (John Maynard Keynes)
'''국적'''
영국 [image]
'''출생'''
1883년 6월 5일[5], 잉글랜드 케임브리지셔 주 케임브리지 [image]
'''사망'''
1946년 4월 21일, 잉글랜드 서섹스, 틸턴
'''작위'''
틸턴 남작[6]
'''학력'''
케임브리지 대학교 킹스칼리지 수학과 학사 (~1904년)
'''직업'''
경제학자, 철학자, 언론인
'''주요
경력
'''
베르사유 조약 체결 회담 영국 대표의 일원
파리 강화 회의 재무성 수석대표
전후 국제 통화 제도 논의 핵심 멤버
차관 도입 협상 영국 측 대표
왕립 인도 통화위원회 위원
브레턴우즈 협정 영국대표
잉글랜드 은행 이사
국제경제회의 영국대표
'''정당'''
자유당
'''신체'''
198cm
'''배우자'''
리디아 로포코바[7]
'''종교'''
무종교
'''서명'''
[image]
1. 개요
2. 생애
3. 평가
4. 성향
5. 어록
6.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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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경제학자. '''거시경제학의 창시자이자 정립자.'''
경제학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는 인물 중 한명으로, "완전 고용을 실현·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유방임주의가 아닌 정부의 개입과 보완책이 필요하다."라는 수정자본주의를 주창했다. 이러한 케인스의 이론은 오늘날 거시경제학의 기초가 되었으며, 여전히 경제학계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마르크스가 죽은 해에 태어나면서 '''자본주의 멸망을 예고한 마르크스의 꿈을 좌절시킨 인물.'''

2. 생애



1883년 영국 빅토리아 왕조풍의 청교도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저명한 경제학자이자 논리학자였으며 케임브리지 대학의 강사(교무계원)이기도 했다. 어머니는 시의원이었다. 나중에 어머니는 시장까지 지낸다. 말하자면 전형적인 부르주아 계층에서 태어난 셈. 이후 남동생 하나와 여동생 하나가 더 태어난다. 엘리트 교육을 받으며 자라나 뼈대있는 가문 자제들만 다닌다는 이튼 스쿨을 졸업했다. 이튼 고등학교 재학 시절 케인즈는 각종 상을 휩쓸었는데, 연극에도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1902년 케임브리지 대학에 입학한 케인즈는 당대의 최고 엘리트과 사도들(Apostles)이라 불리는 학내 비밀 클럽에 가입한다. 그 사도들에는 화이트헤드, 리튼 스트레이치, 이엠 포스터, 레너드 울프, 무어 등이 있었다고 한다. 케인스는 경제학을 전공하지는 않았고 다만 대학원 시절에 경제학 수업을 청강한 적은 있다. 그의 전공은 수학이었으며 오히려 철학을 공부하고 싶어했다고 한다. 그래서 학위를 딴 이후에 케임브리지에 남아서는 주로 철학 강좌를 청강하러 다녔다고 한다. 또 수학과 생활이 싫었는지 친구에게 "나는 지금 내 지성을 탈진시키고, 내 감성을 파괴시키며, 내 천성을 썩히는 중이다."라고 징징대기까지 했다. 실제 그는 수학 실력이 나쁘진 않았지만, '''수학을 싫어했다'''고 한다. 이런 울분 때문인지(...) 훗날 경제학이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수식에 빠져 산다고 맹공을 펼치기도 했다. 물론 상대적인거라 어릴땐 수학 천재 소리도 듣던 사람이었다.
이튼스쿨 때의 수학 천재 명성과 다르게 대학 학점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케인스는 수학과 졸업시험에서 전체 12등을 차지했으나 어려서부터 수학 천재 소리를 듣고 자랐던 그가 수학과 졸업시험에서 12등을 차지한건 자존심 상한 일이었는지 아니면 수학이 싫었는지는[8] 몰라도 2부 시험 응시를 하지 않고 공무원 시험을 보기로 결심한다. 1905년 공무원 시험을 준비해 이듬해 합격한다. 이 때 응시자 전체 차석이라는 어마어마한 성적을 거뒀으나, 경제학 영역과 수학 영역 이 두 과목에서만 총점을 엄청 까먹는 바람에 케인즈는 수석에서 차석으로 밀려나 버렸다. 이 때 케인즈는 자신의 경제학 파트 점수를 보고 '''"시험관이 나보다 경제학을 모르는거 같다."'''라는 의미심장한지 아니면 짜증이 섞인 토로인지 모를 말을 남겼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할 때 즈음, 스승 알프레드 마셜이 쓴 '경제원론 1'을 접하게 되는데 이 책이 케인즈의 인생을 바꾼 계기가 된다. 알프레드 마셜은 경제학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경제학적 직관'과 '실용주의' 를 강조해, 수식 같은거 없이 경제학적 직관에 기반을 두면서 경제학 이론을 설명했는데 이게 딱 케인즈가 좋아할 만한 스타일이었던 것. 케인즈는 이 책을 통해 경제학에 흥미를 느껴 경제학 공부를 시작했고 마셜은 이런 케인즈의 열의와 노력이 기특해 케인즈의 논문에 응원의 메시지를 적기도 했다. 그리고 이 응원의 메시지를 본 케인즈는 친구에게 '''"어쩌면 난 경제학에 재능이 있을지도 몰라"'''라는 말을 남겼는데, 이 말은 경제학 역사상 가장 겸손한 말이자 위대한 경제학자가 막 경제학에 입문할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는 말로 자주 인용되는 문구가 되었다. 마셜은 케인즈를 아껴 그에게 같이 케임브리지에 남아 경제학 연구를 하자고 종용했지만, 케인즈는 당시엔 이 제안을 거절하고, 약 2년간 인도 사무부(India Office)에서 근무한다. 하지만 관청 생활에 염증을 느꼈는지 이후 마셜의 제안을 받아들여, 1909년부터 모교였던 케임브리지에서 경제학 강사로 일하게 된다. 케인즈는 이후 1911년 당시 영국의 최대 경제단체였던 왕립경제학회의 공식기관지인 '이코노믹 저널'의 편집장으로 임명되었다. 고작 28살 때의 일이었다.
1914년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 재무성의 근무위촉을 받아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며 이후 정부대표로 발탁되어 베르사유 조약에도 개입했다. 이 때 베르사유 조약, 특히 영국과 프랑스의 강력한 대(對)독일 압박에 불만을 표시한 걸로 전해진다. 그의 저서 중 하나인 <평화의 경제적 귀결(Economic Consequences of Peace)>에서 그는 베르사유 조약이 전후 참전국들의 경제적 회생과 유럽의 경제적 안정성 모두 놓친 조약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베르사유 조약의 과도한 전쟁 배상금이 가져올 문제를 언급했다. [9] 이후 과도한 전쟁배상금이 2차대전 발발의 씨앗이 되면서 케인즈의 예언은 맞아 떨어지게 되었다.
1920~30년대 케인스는 잇따라 확률론(1921), 화폐개혁론(1923) 등을 발간하며 자신의 이론을 정립시킨다. 프랭크 램지의 지도교수로 활약하기도 했으며, 케임브리지에 램지와 같이 비트겐슈타인을 데려오려는 노력을 하기도 하였고, 이탈리아의 경제학자 피에로 스라파와 같이 수학과 철학을 논하기도 했다고 한다. 1936년 세계 대공황의 영향이 아직 가시지 않았던 시점에 그는 자신의 대표 저작이자 이후 세상을 바꾼 책인 '''<고용, 화폐, 이자에 관한 일반 이론(General Theory of Employment, Interest and Money)>'''을 펴낸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 때에도 영국 재무성에서 일했으며 1944년 '''브레튼우즈 체제'''를 만드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는 본래 가상의 국제 공용통화인 방코르(Bancor)를 사용하여 그것을 기축통화로 삼는 새로운 국제통화체계를 만들고자 하였으나, 그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달러를 기축통화로 하는 금본위제브레튼우즈 체제가 만들어진 것. 다만 이후 국제통화기금에서 케인즈의 Bancor안을 일부 차용하여 가치가 거의 변동하지 않는 개념화폐인 '''특별인출권'''(SDR)을 만들긴 한다.
1942년 남작 작위에 서임되었고, 1946년 4월 21일 사망했다.

3. 평가


기존 자본주의에 중대한 수정을 가한 경제학자이자 카를 마르크스블라디미르 레닌의 악몽. 케인스는 시장이 가격 등을 통해 자동으로 수급이 조정되지 않는 경우가 있으며, 세계 대공황이 그 경우에 들어맞음을 주장했다. 그는 물가나 임금 등 명목 변수의 경직성, 시장에 부정적인 전망이 팽배해 금융이 급속도로 냉각되는 현상(금융가속도 효과로 나중에 발전됨) 등을 대공황의 요인으로 꼽았다. 이에 대한 처방으로 그는 정부 재정의 확대를 주장했다. 이는 그 이전까지 세계 경제학의 기본 원리였던 세이의 법칙을 정면으로 반박한 행동이었고 또 이것이 맞아 떨어졌다. 세이의 법칙 자체는 문제가 많이 제기된 이론이었다. 오히려 당대 경제학자들은 수급 차이가 단기적으로는 분명 존재하지만, 장기적으로 저절로 사라진다고 보았다. 호경기와 불경기, 노동 부족과 실업이 일시적으로 나올 수도 있지만 장기적으로 일정한 균형에서 머무르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케인스는 이런 관점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하였다. 이에 대한 케인스의 반박이

'''그 장기적 계획은 현재 사안에 대해 잘못 알려주고 있다. 장기적으로 우리는 모두 죽는다.'''

The long run is a misleading guide to current affairs--in the long run we are all dead.

이다. 당시 경제학계에서는 세이의 법칙에 의하든, 단기 경기 변동을 인정하든 상관없이 이론적 결론은 모두 외부에서 손을 대지 말고 경제가 안정될 때까지 시장의 자율적 회복력을 믿고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는 처방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경제학의 장기 개념은 사람의 일생보다 훨씬 길 수도 있는 것이고, 당장 공황이 닥친 상태에서 가만히 있으라는 것은 죽을 사람 다 죽고 나서 새로 경제 구조를 이끌어 내도 장기적 균형이 되는 것은 큰 차이가 없다는 소리와 같다. 조악하게 비유하면, 인구는 사회의 생산량에 비례하기 때문에 전염병이 생기거나 전쟁이 나서 사람이 죽어도, 혹은 우연히 대풍작이 들어서 인구가 상승하여도 그게 끝나고 시간이 지나면 전쟁과 전염병, 풍작 이전의 수준으로 결국은 돌아가게 된다. 이게 장기적 균형이라면 전염병이 도는 와중에 사람을 구하겠다고 하는 것은 사회 생산량에 따른 인구 균형에 큰 효과도 주지 못하면서 오히려 그 시스템을 망치기 때문에 치료하지 말고 죽게 내버려 두라는 것과 같다고 본 것이다.
케인스의 처방을 간단히 말하면 공급이 수요보다 많아지면 정부가 개입해 수요를 창출시켜 해결하라는 것. "빈 병을 땅에다 파묻고 정부가 사람을 고용해 빈 병을 파내라"는 이를 설명하는 유명한 글귀다. 물론 더 효율적인 방법을 찾으라는 식으로 부가 설명하긴 했다만.
그전까지 경제학계에서는 '보이지 않는 손'이 경제 문제를 장기적으로는 해결해 준다고 믿었기에 케인스의 이론은 많은 반향을 일으켰다. 지금이야 불황이라고 하면 정부가 나서서 무언가 해야한다는 생각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지만, 1920년대의 경제학자들에게 이런 생각은 금기와도 같았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같은 학자들은, 시장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터이니 힘든 시간이지만 버텨 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허나 실업자가 길거리에 넘쳐나고 실업자가 아닌 사람들이라도 월급삭감이나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던 상황이었고 공산주의, 파시즘 등이 득세하며 자본주의 체제 자체에 대한 회의감과 환멸감이 강해졌다. '내버려 두고 버티게 해라'는 주장은 경제학자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그저 배부른 소리로 느껴졌고, 경제학자들의 말을 따른 정치인들도 손가락질을 당하여 줄줄히 실각해나갔기에 정치인들도 이들의 말에 대해서 회의적으로 변할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시장이 모든것을 해결할것이라고 믿던 경제학자들의 조언을 받아 긴축정책을 시행한 허버트 후버[10]하인리히 브뤼닝은 지지율이 개박살 냈다. 이런 시기에 등장한 케인즈의 이론은 인간이 그저 시장에 지배받는 동물이 아니라, 스스로 나아가 시장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고 미래를 개척할 수 있는 존재임을 입증하는 일종의 빛과도 같았다.
여담으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영원하지 않고, 노예제나 봉건제와 같이 역사 속에서 잠시 지나가는 과정의 일부라고 생각했다. 케인스의 이론이 없었으면 마르크스의 말대로 자본주의는 멸망까지는 아니더라도 지금처럼 강력한 체계로 거듭나지는 못했을 것이다. 고전적 이론에 의하면 시장 시스템을 유지할 경우 경기는 아무리 불경기를 맞이하더라도 가만히 내버려만 두면 결국 자체적인 회복력으로 원형으로 돌아올 수 있다. 그리고 이건 대부분의 사회 구조나 체제에도 적용되는데, 문제는 다시 회복되어서 살아나기도 전에 '''바닥을 찍거나 찍어가는 과정에서 그 과정을 참다 못한 사람들이 체제나 시장 자체를 엎어버릴 수도 있다'''라는 것이다. 이걸 노동자들이 하면 그게 바로 공산주의 혁명이 된다. 이럼 장기적으로 회복할 자본주의 시장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다. 실제로 모든 체제나 시스템 등은 이렇게 무너진다.
게다가 미국의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이 시행한 뉴딜 정책이 케인스의 이론이 어느 정도 맞다는 것을 증명하자, 이후 케인즈학은 세계 각국 경제 정책의 기본 지침이 된다. 참고로 루스벨트가 케인스의 이론을 받아들여 뉴딜을 추진한 것으로 아는 사람들이 상당하지만, 정확히는 비슷한 시기에 따로 제시한 것으로, 루스벨트의 정책과 케인스의 이론이 알고보니 비슷했던 것이다. 루즈벨트는 케인스의 이론을 참고하긴 했지만 임기 초반만 해도 감명깊게 받아들이진 않았고, 더군다나 케인스의 유효수요 이론은 단기적 경제처방인 반면 루스벨트의 뉴딜은 경제 처방이라기보다는 정치적 정책에 가까웠다. 뉴딜의 광대한 범위 안에 케인스 이론의 일부가 들어간 셈. 다만 이후 케인즈가 자문을 해주기도 했다고 한다.
그의 저서에 일관성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있는데[11], 이 부분에서 비주류 경제학자들은 그가 철학적 사상을 토대로 확고한 경제적 신념이 있었던 학자라기보다는 기존 체제에서 좋은 삶을 누리는 엘리트로서 체제 유지를 위해 그때그때 필요한 논리를 전개한 지배계층의 수호자 겸 대변인이였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때문인지 세간에 뉴딜 정책의 정책적 기초가 되었다고 흔히 알려진 <고용·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만 해도 사실은 케인스 자신이 보기에 체제 유지를 위해 적절한 행위를 하는 걸로 보이는 루스벨트 뉴딜의 '이론적 정당화'를 위해 저술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견해도 있다. 당장 이 책은 뉴딜이 시행된 이후인 1936년에 발간되었다(루스벨트는 뉴딜을 최소 후보 시절인 1932년부터 주장했다). 다만 일반이론이 1936년에 출간되었다고 해서 불과 4년 전에는 그 구상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식의 논법도 너무 확대해석이 들어간 가정이긴 하다. 그리고 이 책이 출간되고 난 이후 세계 경제학의 기조가 바뀐건 사실이다.
한편, 당시 주류 경제학계는 케인스의 주장을 극히 이단적인 생각으로 치부했다. 케인즈를 비판한 이들이 '통화론자'나 '새고전학파' 등의 원류이다. 새고전학파는 New Classical School로서 본문의 설명처럼 케인즈 경제학을 비판하면서 등장한 시카고 대학 중심의 거시경제학파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신고전주의 혹은 신고전학파는 'Neo'classical School로서 케인즈의 스승인 마셜이 창시하다시피 한 것이다.
케인즈의 후학들은 여러 분파로 갈렸다.
  • 포스트케인지언
케인즈와 거의 동시대에 활동하다시피 한 후학들이 만들어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등을 중심으로 모임. 포스트케인지언도 세 부류가 있는데, 민스키 등을 중심으로 한 미국 PK,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을 중심으로 한 영국 PK(소위 스라피언이라 불리기도 한다), 기타에 해당하는 부류다. 칼도어 등이 이런 기타 부류에 해당한다.
케인즈보다 약간 뒷 세대가 미국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케인즈 경제학과 종래의 신고전파 경제학을 결합하여 당대의 주류로 자리잡았다.
네오케인지언이 경제학의 발전 과정에서 세대 교체를 성공적으로 이뤄낸 것.
이들의 논쟁은 현재 진행형이기도 한데, 1970년대 이후 스태그플레이션이 터지면서 케인스의 이론이 다소 의심받는 경우도 생기자 이때 등장한 것이 통화주의 및 새고전주의였다. 이 때부터 정부는 개입을 하긴 하되 너무 간섭하진 않는 방향으로 가야한다는 일종의 정반합적인 절충적 흐름이 창출되었다. 왜냐하면 정부가 너무 비대해져도 능률과 효율이 떨어지고 부정부패 등이 만연해질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12]
다만 당시 스태그플레이션의 원인은 케인스 이론이 잘못됐다기보단 안그래도 심각한 미국의 무역 적자에 불안감을 가진 달러 보유국들이 달러를 다른 통화로 바꾸려 들면서 달러의 가치가 하락하고, 그에 맞춰서 석유값까지 폭등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이러면 달러로 살 수 있는 재화가 줄어들며, 이는 원자재 가격에도 크게 영향을 미친다. 결국 공급은 감소하게 되며, 수요는 석유값 폭등 등을 이유로 동반하락한다. 거기에 돈을 들이부은 미국 정부의 삽질이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 즉, 정부의 개입이 나쁜게 아니라 오히려 정부가 케인즈의 이론을 따랐다면 '''다른 방식'''으로 개입을 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새고전학파는 합리적 기대 이론의 전기 새고전학파와 실물 경기 변동 이론의 후기 새고전학파로 나눌 수 있다. 전기 새고전학파의 출현을 논하려면 약간의 부연설명이 필요한데, 1950년대 들어 시카고학파 중 통화주의 학파가 출현해서 재정정책 대신 통화정책의 '가능성'을 제시했고[13], 케인즈학파가 이에 수긍하면서 대신 재량적 통화정책을 제시했다. 이러자 70~80년대 들어 합리적 기대를 배경으로 한 루카스의 이론이 시카고 대학에서 발흥하면서 재량적 통화정책은 결국 물가만 올릴 뿐이며, 애초에 민간은 과거 변수에 따라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이를 적응적 기대라고 한다.) 온갖 잡다한 변수를 통해 움직이기 때문에 과거 변수를 추론해서 정책을 설계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잘못된 것이라는 루카스 비판이 나왔다. 이 결과 케인즈 이론은 당분간 무덤에 들어가야 했다.
그렇게 1930년대 거시경제학의 탄생 이래 케인스 경제학은 70~80년대 일시적 부침을 겪기도 했지만, 90년대 이후 신학파가 들어서고 2천년대 세계금융위기 등을 겪으며 평가받아 지금도 여전한 주류 경제학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물론 상기했듯 서로 논쟁하며 정반합이 꾸준히 이뤄져서, 이젠 내용은 비슷한데 명칭만 다른 정치적 레토릭 싸움이 된 측면도 어느 정도는 있어보인다. 실제 통화주의와 그 후학인 전기 새고전주의와 케인스 경제학은 큰 틀에서 단기적으로는 총공급곡선은 우상향하므로 정부 개입이 일정 부분 효과가 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소용없다는 견해를 공유한다. 다만, 단장기 기간이나 효과를 보이는 정책 등의 기술적, 세부적 관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4. 성향


케인스는 현대 리버럴, 진보(중도좌파, 넓게 보면 중도우파까지)의 경제 관념에 큰 영향을 끼쳤고, 실제 그 역시 당시 보수당에 대립하던 자유당 당적을 가진 리버럴한 성향이 있던 사람이었다. 양성애자기도 했다. 허나 그가 사회주의자였냐 하면 그건 또 아닌게, 그는 마르크시즘을 혐오했다. 그는 1930년대 파시즘이 대두하자 '''마치 이에 대한 대항마인양 '가장 총명하고 뛰어난 사람들'이 모였다는 대학가에서 마르크스주의가 전쟁·파시즘·실업의 치유책으로 환영받는 현실'''을 개탄했다. 당연히 러시아 혁명도 좋게 보지 않았는데, 그는 혁명을 반대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첫째, 기존의 질서는 개혁이 불가능할 정도로 불량한 것이 아니며, 둘째, 혁명이 가져다 줄 훗날의 체제가 현 체제보다 낫다는 확신이 없고, 셋째, 설사 새로운 체제가 전복된 그것에 비해 낫다는 것이 증명됐다 할지라도, 과연 그것이 혁명 과정에서 치르게 될 희생을 보상할 만한 것인지 누구도 확답을 줄 수 없다.

그는 자유방임주의자들이나 사회주의자들 모두 자본주의와 자유시장 체제를 동일시하고 자본주의의 변화 가능성을 외면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소련 경제학자들 앞에선 집단주의적 기조를 따라 개조된 자유주의만이 무정부주의적 자본주의와 마르크스주의적 공산주의 모두에 대한 진정한 대안이라는 내용의 연설문 "나는 자유주의자인가?"를 낭독하기도 했다.[14]
케인스는 당시 보수 진영 지도자들은 자본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참신한 수단과 볼셰비즘을 구별할 능력조차 없다고 혹평했고, 사민주의 세력은 정의감은 인정하지만 계급투쟁이 일어날 경우 자신의 계급을 대변하지 못하기에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고 했다.[15] 그래서 자유당이 제대로만 한다면 인류의 진보를 위한 가장 최선의 선택이 될 것이라고 하며 매력을 느낀 것.
실제 케인스는 엘리트 계층 출신이었고, 인명 부분을 보면 알겠지만 남작위까지 가진 귀족이었다. 때문인지 아래 문장에서도 보듯 계급관 등 특정 부분은 오히려 당대 기준으로도 상당히 보수적인 엘리트주의자였다. 그는 만약 민주주의에서 엘리트가 배척당한다면 대중들이 조작이나 감언이설에 속아 넘어갈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How can I accept a doctrine which sets up as its bible, above and beyond criticism, an obsolete text-book which I know to be not only scientifically erroneous but without interest or application for the modern world? How can I adopt a creed which, preferring the mud to the fish, exalts the boorish proletariat above bourgeois and the intelligentsia who, whatever their faults, are the quality in life and surely carry the seeds of all human advancement? Even if we need a religion, how can we find it in the turbid rubbish of the red bookshop? It is hard for an educated, decent, intelligent son of Western Europe to find his ideals here, unless he has first suffered some strange and horrid process of conversion which has changed all his values.

어떻게, 과학적으로 틀렸을 뿐만 아니라 흥미도 현대 세계에의 실용적 가치도 없는 한물간 책 따위를, 그 한심한 교리를 어떤 비평을 초월하여 성경처럼 떠받들 수 있겠는가? 어떻게 촌티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부르주아 계급과 지식인 계급(여러 오점을 제쳐 두더라도 결국 삶의 질을 높여주었으며, 인류 발전의 밑바탕이 될 계급들)보다 높게 보라는, 물고기보다 흙탕물을 선호하라는 그런 한심한 교리를 받아들이란 말인가? 설령 우리에게 어떤 신념이 필요하다 하더라도, 그걸 어떻게 빨간 서점의 혼탁한 쓰레기 속에서 찾을 것인가? 서유럽의 교육받고 품위 있으며 지적인 어떤 젊은이가 이런 곳에서 이상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 젊은이의 가치관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을 어떤 지독한 종교적 개종에 시달리지 않는 한 말이다.
- Keynes, John Maynard (1931). Essays in Persuasion

케인스는 진보의 씨앗을 가지고 있는 부르주아와 지식인 계급보다 교양 없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찬양하는 신조에 거부감을 표했다. 그는 자유와 인권이 보장받는 사회에서 유산계급이 문화를 선도해가는 것이 맞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그는 무산계급도 환경의 변화를 통해 얼마든지 문화를 이끄는 주체가 될 수 있다고 말하며, 태생적 우월성을 주장하던 일부 보수적 생물학자들의 논쟁에 반기를 표했다. 공산주의도 비판은 했지만, 개인과 공동체의 소유욕에 대한 인식 변화에 끼친 영향은 놀라웠다고 평하기도 했다.
오늘날 그는 진보 경제학의 대두처럼 취급받기도 하지만, 상기했듯 마르크시즘에 대해선 비판적인 그였기에 그의 경제 사상도 사회주의적 평등 개념보단 유효 수요를 끌어올림으로써 어떻게 사회적 후생을 극대화시켜 경기를 안정된 상태로 유지하냐에 초점이 맞춰져있었다. 그에 따라온 복지 개념은 유효 수요를 끌어올리기 위한 수단 중 하나였고, 이런 유효 수요 창출을 위해 정부의 역할을 강조하되 정부가 가계를 지원하든 기업을 지원하든 그건 핵심사안은 아니었다. 물론 현실에선 둘 다 지원하는 형태가 되는게 당연했지만. 결과적으로 극단적인 마르크시스트 입장에서 보자면 케인스는 오히려 일부 계획 경제 도입 등 자기들 이론과 우연찮게 겹치는 부분을 잘 이용해 사회주의 세력을 견제하고 자본주의를 튼튼하게 먹여살린 웬수일지도 모른다.

5. 어록


#1, #2를 참고할 것.

장기적으로 우리는 모두 죽는다.[16]

'''In the long run, we are all dead.'''

자유방임 자본주의는 1914년 8월에 끝났다.

자본주의는 가장 사악한 사람들이 공공의 선을 추구하기 위해 가장 사악한 행동을 하는 어떤 놀라운 형태의 믿음이다.

Capitalism is the astounding belief that the most wickedest of men will do the most wickedest of things for the greatest good of everyone.

그런데, 이와 같은 사태는 어느 정도의 개인주의(個人主義)와 완전히 양립할 수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또 이자 생활자들의 안락사(安樂死)를, 또 따라서 자본의 희소가치를 최대한 이용하려는 자본가의 누적적인 압력이 안락사 당하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경제학자들의 사상은 옳든 '''틀리든''' 일반인들의 상상과는 달리 훨씬 더 막강하다. 세상은 이들에 의해 지배된다. 그리고 어떤 지적 영향력으로부터도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실무가들조차도 대개는 죽은 경제학자들의 노예에 불과하다.

정부가 낡은 병에 돈을 가득 채워 넣은 후 그것을 어느 폐광에다 묻어두고는, 기업들에게 마음대로 그 돈을 파 가도록 내버려 둔다고 가정해 보자. 그때부터는 모두 그 돈을 파내기에 혈안이 될 터이므로 실업이 줄어들고, 실질소득과 부도 증가할 것이다. 물론 이 방법보다는 그 돈으로 주택을 짓거나 하는 편이 더 현명하다. 그렇지만 최소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가격이 신축적이라 주장하는 고전파 이론은 경제가 이렇게 움직이고 있다고 설명하는게 아니라 이렇게 움직여야 한다는 당위를 설명하고 있는지 모른다. 이렇게 실제와 당위를 혼동하기 시작하면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당신이 은행에서 100파운드를 빌린다면 그건 당신의 문제다. 하지만 당신이 '''100만 파운드'''를 빌렸다면, '''그건 이제 은행의 문제다.'''

If you owe your bank a hundred pounds, you have a problem. But if you owe a million, it has.


6. 여담


  • 특이한 입술 모양 때문인지 별명이 '오리 주둥이'였다.
  • 성적인 성향이 양성애자였던 것으로 유명하다.
  • 거의 모든 걸 병적으로 기록하는 습관이 있었다고 한다. 유년기에는 계단의 숫자를 센다거나, 먹은 음식의 개수를 세는 것은 물론, 20대 몇 년 동안에는 미트스핀을 한 횟수를 모두 기록해두기도 했다고 한다.
  • 경제학에 막 흥미를 붙일 무렵 친구에게 "어쩌면 나는 경제학에 소질이 있을 지도 몰라."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이는 애덤 스미스국부론을 막 저술하기 시작할 무렵 친구에게 보낸 "나는 요즘 시간을 때우려고 책을 한 권 쓰고 있다네."라는 글의 편지와 더불어 경제학 역사상 가장 겸손한 발언일 것이다.
  • 예술과 문화를 사랑하는 일종의 덕후였다. 그는 이러한 문화예술적 행위가 인간이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가치라고 믿었다. 하지만 이런 면은 레닌 등에게 그가 부르주아적 경제학자라고 평가받는 단초를 제공하기도 했다.
케인스 부부
인생의 승리자(?)이기도 한데, 연하의 발레리나(리디아 로포코바)와 42살에 결혼을 했다. 하지만, 와이프가 불임이었기에 자녀는 보지 못했다고 한다. 아내는 러시아에서 망명한 무용수였다.[17] 그녀는 케인스가 죽고 나서 재혼을 하지 않고 30년 넘게 더 살았다. 참고로 케인즈 키는 거의 2m에 육박했다.
  • 남동생인 조프리 케인스는 의사이자 작가였고, 작위를 받을 정도로 대성했다.[18] 이 사람은 찰스 다윈의 손녀와 결혼해서 자녀를 꽤 많이 뒀기에, 영국에 있는 케인스 가문의 사람들은 다 이 사람의 자손이다. 조프리 케인스의 3남이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조카인 마일로 케인스가 큰어머니인 리디아의 도움을 받아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전기를 작성했다.
  • 경제학자들 중 별로 없는(...) 주식투자에 크게 성공한 인물로도 나름 유명하다. 대공황의 위기 속에서도 120%의 소득을 올렸다고 한다. 사족으로 옛날이나 지금이나 대부분의 경제학자는 주식투자에서 대박치는 경우가 드물다.[19] 케인즈의 앞 세대 경제학자인 어빙 피셔를 예로 들면, 1920년대에 경제학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해서 주식시장의 큰손이 되었지만 막상 손절 타이밍을 잡지 못하고 “주식시장은 앞으로 꺼지지 않는 영원한 고점에 도달했습니다.” 라는 발언을 하며 주가가 여전히 오를 것이라는 예측만 했다가 결국 본인의 재산과 집은 물론이고 명성마저 날려먹고 엄청난 비웃음거리로 전락했다. 본론으로 돌아와 케인스는 주식투자에 어떻게 성공했냐는 질문에 "중간의 중간을 택하세요."라고 답했다는 일화도 나름 유명하다. (참고로 케인스는 금수저였지만 상속받은 재산은 딱히 없다고 한다.) 현대의 주식투자가들에게 유명한 그의 투자이론은 1936년 발간된 출간된 그의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 12장에 잘 나타나 있는데, 그것은 주식투자는 미인선발대회와 같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투표로 미인을 뽑는 미인선발대회에서 선발되는 미인은 투표자 자신이 가장 미인이라고 생각하는 여인이 아니라 가장 많은 사람들이 미인이라고 생각하는 여인이라는 것이다.[20] 그래서 대체로 투표자의 평균 선호에 가장 가까운 여인이 미인으로 최종 선발되게 된다. 결국 이는 투자자 개인이 생각하기에 이익을 낼 것 같은 종목이 아니라 시장 주도주나 인기주에 투자하라는 말과 같다. 여담으로 이 미인 선발대회의 비유는 2013년 수능특강 영어B에 지문으로 제시되었다. 관련된 뒷얘기로, 사실 케인즈의 주식 투자 성공 비결은 미인대회 이론 그런 거 없고 걍 발레리나 출신 아내가 찝어주는 종목을 그냥 투자했기 때문이라는 소문도 있다. 이 소문은 주식 투자를 위한 각종 분석 및 연구가 별로 소용없다는 주장의 예시로 자주 쓰인다.
  • 하이에크와 케인스의 주장을 으로 요약한 동영상도 존재한다. 나무위키에는 세기의 대결 - 케인즈 vs 하이에크라는 이름으로 항목이 등록되어 있다. 보기 보기2 참고로 해당 동영상의 각본은 조지 메이슨 대학의 러셀 로버츠(Russell Roberts) 교수가 집필했는데, 이 교수는 친하이에크 성향으로 분류된다. 때문에 케인즈의 주장이 하이에크에 반박받는 것처럼 묘사되었다. 사실 둘은 사상적으론 대립했지만 사적으론 친한 사이였는데, 하이에크는 케인스를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위대한 사람, 저는 그에게 무한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가 없었다면 세상은 훨씬 더 비참했을 거에요."(Keynes Hayek: The Clash That Defined Modern Economics, By Nicholas Wapshott, 206쪽)라고 평하기도 했다.
  • 케인스는 경제학자로서 가장 유명하지만 아이작 뉴턴 재조명의 선두주자이기도 했다. 그는 경매에 나온 아이작 뉴턴의 미출간 저작을 구매하여 읽을 정도로 뉴턴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그리고 그러한 자료를 검토한 끝에 케인스는 "뉴턴은 이성의 시대를 연 최초 사람이라기보다는 최후의 마법사, 마지막 바빌로니아인이자 수메르인, 약 1만 년 전에 인류의 지적 유산을 쌓아올리기 시작했던 사람들과 같은 눈으로 가시적이고 지적인 세계를 바라보았던 마지막 위대한 정신."이라는 말로 뉴턴을 평가했다. 그리고 20세기에 재평가되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 연금술사, 신비주의자로서의 뉴턴의 이미지는 바로 케인스가 구축해놓은 것이다. 이 때문인지 칼 세이건의 책 코스모스에서는 경제학자라는 이야기는 일절 없이 '전기작가'로 소개되기도 했다. 과학사나 수학사 관련 서적에서 뉴턴을 "최후의 마법사"로 칭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게 바로 케인스의 영향 때문이다.
  •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만난 일이 있었다. 다만 당시만 해도 둘은 접점이 크지 않았던지라 당대 최고의 경제학자와 경제부흥의 상징과도 같은 두 거물의 만남은 의외로 싱겁게 끝났는데, 케인스는 "미국 대통령이면 경제를 좀 알 거라고 생각했는데.."라고 회고했고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그는 경제학자라기보단 수학자 같았다."라고 평했다. 허나 이후엔 케인스가 자문을 해주기도 했다고 한다.
[1] 바스 3등급 훈장 수훈자.[2] Fellow of the British Academy.[3] 영어 발음이 [keɪnz\]이기 때문에 "케인즈"라는 표기도 주로 사용되지만 국립국어원외래어 용례의 표기 원칙 제6장에 "어말의 -s[z\]는 ‘스'로 적는다."라는 조항이 있기 때문에 "케인스"가 표기용례로 규정되어 있다.[4] 1942년 남작 작위 서임, 1st Baron Keynes.[5] 카를 마르크스가 사망한 해에 태어났다. 묘한 부분. 또 동년에 태어난 인물로 조지프 슘페터가 있는데, 그 역시 케인스와 동시대에 경제학의 양대산맥을 이루던 인물이었다. 참고로 6월 5일은 경제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애덤 스미스가 태어난 날과 같다. [6] 1st Baron Keynes of Tilton in the County of Sussex.[7] 리디아 로포코바 케인스 남작부인(Lydia Lopokova, Baroness Keynes, 1892년 10월 21일 ~ 1981년 6월 8일,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본명은 리디야 바실리예브나 로푸호바(Ли́дия Васи́льевна Лопухо́ва)이다.[8]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경제학자들 중에 하나로 손꼽히는 사람이 수학을 싫어했다는 이야기엔 여러 정황이 있다. 우선 이튼에서의 수학천재 명성과 달리 케임브리지 수학과에서 2류 학생으로 전락한 케인즈는 수학과 학부생활을 힘들어했고, 본인이 만든 저작물과 이론의 정립에 수학을 거의 활용하지 않았다. 지금 케인즈가 만들었다고 알려진 수학 관련 거시경제 이론이나 방정식들은 대부분 폴 새뮤얼슨 같은 후대 경제학자들이 케인즈가 말로 풀어쓴 이론을 수학으로 옮겨놓은 것이다. 또 케임브리지 최고의 천재들 중 하나로 손꼽히는 사람이 다른거 다 압도적으로 잘하는데 이상하게 수학을 활용하는 것만 상대적으로 못하는 것도 특기할 만한 사항. 다만 케인즈는 이튼 스쿨에 다닐 당시 수학 경시대회에서 많은 상을 휩쓸어 수학 천재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고 케임브리지 수학과에 입학했으니 절대적인 기준에서 수학을 못하는건 아니었다. 하지만 수학 천재로 불리던 시절에도 케인즈는 토론회 같은 활동을 훨씬 더 좋아했고, 잘 안 알려졌을뿐 수학 외의 곳에서 훨씬 더 큰 두각을 보인 학생이었단 것. 이후에 경제학계에 발을 담갔을 때 경제학자들의 수학 놀음을 강하게 비판하고 자꾸 수학을 싫어하고 기피하는 모습과 발언을 보이면서, 사실상 케인즈가 수학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억지로 수학 공부를 해왔다는게 확실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9] "이건 20년짜리 휴전조약에 불과하다."는 내용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이건 프랑스 장군인 페르디낭 포슈의 발언이고 케인즈는 그냥 남은 건 전쟁 뿐이라며 짧게 던졌을 뿐이다.[10] 처음에는 재무장관인 앤드루 맬런이나 경제학자들의 말을 따라서 말 그대로 아무런 조치 없이 그대로 냅두었지만 경제상황이 지속적으로 악화되어나가자 뒤늦게 현실을 깨닫고 앤드루 맬런을 해임하고 재정을 대대적으로 투입했다. 그러나 이미 경제상황을 개선시키기에는 너무 늦었던 상황이었던지라 1932년 대선에서 참패했다.[11] 다만 케인스는 전혀 오류가 없는 맹목적 경제 모델의 설정보다는 당면한 문제들에 대한 학문의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경제적 사고의 본질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12] 연장선상에서 작은 정부론자들은 애당초 정부 권한이 적어야 부정부패나 독재로 흐를 가능성도 적다고 주장한다. 다만 반대로 말하면 정부의 권한이 작아질수록 재벌 등 다른 사회집단들의 부정부패나 갑질 횡포가 더 심해질 여지 역시 있다. 또 전염병 유행처럼 급박한 위기 상황에선 이런 주장이 더 힘을 잃기 쉽다. 적정선이 필요한 것.[13] 다만, 이들이 제시한 것은 준칙 위주의 보수적인 정책 운용이었다. 또 유의할 것은 통화주의 학파는 신자유주의 견해와는 어긋난다. 기본적으로 신자유주의론자들은 중앙은행이 적극적인 통화정책을 쓰는 것을 반대한다.[14] 출처: '존 메이너드 케인스(로버트 스키멜스키 저)'.[15] 다만 그는 당시 노동당이 실행 가능한 통치 철학이 없다고 비판했지만, 한때는 자유당, 노동당의 연립정부를 염원하기도 했으며(지지층이 꽤 겹쳤다), 이런 연대를 위한 행동 강령을 마련하는 데 힘을 쏟기도 했다.[16] 인간은 누구나 죽으니 주어진 시간 최선을 다하자 같은 철학적 내용이 아니라, 허구한날 장기 관점에서의 경제를 논하는 고전학파를 비판하면서 한 말이다.[17] 하지만 일부 보수주의자들은 러시아 출신 아내를 뒀다고 케인스에게 공산주의 색깔론을 펴기도 했다. [18] 군의관으로도 활약해서 1, 2차 세계대전에 다 참전했다. 최종 계급은 공군 소장.[19] 다만 마르크스는 죽기 1년 전쯤에 엥겔스가 요양 여행가라고 보내준 돈으로, 자신의 경제적 감각이 어떤지 한번 시험해보려고 미국 북부 철도회사와 철강회사 주식을 투자하여, 2주만에 4000파운드를 벌어들인 적이 있다. 이때가 1880년대였으니, 4000파운드를 지금 한국 돈으로 계산해보면 대략 4억 6800만원으로 상당한 거금을 벌어들인 셈이었다. [20] 다른 투표자들도 동시에 그러한 기준으로 투표를 한다면 이것은 아주 복잡해진다. 나는 다른 투표자들이 그 자신외의 또다른 투표자들이 미인이라 생각할 여인으로 예측되는 여인을 찍어야 한다. 그리하여 Everything depends on everything el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