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포
軍布
1. 개요
조선시대의 조세 제도의 하나.
일단 군포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조선시대의 조세 제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조선시대의 조세제도는 수, 당의 조용조 체계에 따라 전세는 토지에, 군역과 요역은 16~60세 사이의 남자들 (정남이라 한다)에게 부과하고, 토산물을 내는 공납은 집집마다 부과하는 게 기본이었다.
2. 상세
본래 군역은 양민 남자들이 돌아가면서 번상 (番上, 복무)하는 것 이었는데, 현역으로 복무를 하고 있는 사람의 가족들은 귀중한 노동력이 빠지기 때문에 생계에 곤란을 겪게 된다. 이를 방지하기위해 자연호를 기준으로 자연호에 정남이 세사람있다고 가정하고 (이를 테면 아버지 아들 삼촌) 한명만 군역을 지고 나머지 둘은 생계를 책임지며 군역간사람의 뒷바라지를 하게 했다.
하지만 이 역시 문제가 된다. 자연호에 남자가 세사람이 있으리라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즉 어떤 집은 남자가 다섯이고 어떤 집은 둘인데 일괄적으로 장정이 셋 있다고 가정하니 남자 다섯 있는 집은 이익이고 남자 둘 있는 집은 손해를 본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세조 10년 (1464년)에 정군으로서 현역으로 복무하는 자의 가족을 도와주는 보법 (保法)을 정비하고 실시하기 시작했다. 이는 종전 자연호 중심에서 장정 전체를 두고 계산을 한다. 즉 정군 1명에 그 뒷바라지를 해주는 비번자인 보인을 2명씩 편성하여 보통 1년에 2필의 베를 줘서 복무중인 자의 가족들이 생활할 수 있게 했다.
그런데 보법의 시행으로 문제가 생긴다. 군정을 담당하는 양민의 수가 너무 늘어서 정작 요역을 부담해야 할 대상자를 찾기가 힘들어진 것이다. 이는 동원할 수 있는 노동력은 한정되어 있는데, 군역으로 모조리 빠져나갔기 때문이었다.
거기다가 요역은 한창 농사일이 바쁜 농번기에 동원되는 일이 많았고, 농사일에 지장이 크고 고되기 때문에 양인들이 요역을 기피하게 된다. 이러자 국가에서는 군인들을 요역에 동원하기 시작했는데 너무 고된 토목공사 등에 동원되다보니 군인들마저도 점차 역을 기피하는 상황에 이른다.이를 군역의 요역화라고 칭하고, 15세기 말부터 나타나기 시작해서 16세기 들어서는 본격화되었다.
이에 한양에서 복무하는 중앙군들은 수포대립 (收布代立)이라 하여 보인에게서 받은 포를 가지고 유민이나 노비들에게 대가를 지급한 뒤 대신 복무하게 하는 행태가 나타났고, 지방에서는 아예 수령들이 정군에게도 군포를 거두고는 그 돈으로 용병을 고용해서 배치하는 방군수포 (放軍收布)라는 제도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본래 방군수포제는 현역 복무를 해야 하는 정군들 중에서 부득이한 사정으로 입대를 할 수 없는 사람에게 그 편의를 봐주는 대신 한 달마다 베 3필이나 쌀 9두를 걷는 제도였다. 이렇게 돈을 받는 제도가 나타나면 부정부패가 끼기 마련이었으니, 원래는 편의를 봐주기 위해 좋은 뜻으로서 소규모로 되던 게 지휘관들의 착복[1] 이 자행되었다. 이는 지방군의 지휘관들에게 녹봉이 전혀 지급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2] 무엇보다도 군의 규모가 너무 커져 5위와 진관 체제의 붕괴를 초래하는 원인이 되었다.
이때까지 방군수포제는 아직 불법이었으나, 중종 36년 (1541년)에 이걸 양성화시켜 군적수포제로 바꾸어버린다. 16개월마다 양인 정남에게서 베 2필을 징수하여, 용병을 고용하게 됨으로서 부병제가 모병제로 전환된다. 즉 현종 이후 장원제-양세법-모병제를 지향하던 당군과 비슷하게 된 셈.
이후 임진왜란을 거치며 모병제로 구성된 5군영 체제가 완비되고[3] 직업군인제가 자리를 잡으면서 군의 비용은 양인에게서 징수하는 군포로 충당했는데, '''문제가 생겼다.'''
일단 군문마다 중복해서 세금을 걷거나 마을마다 세금이 다르다는 점도 있다. 또한 총액제 실시로 거둬들일 액수를 각 마을마다 중앙에서 정해놓는 바람에 지방관들의 농간으로 심한 착취가 자행되어 농민들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거기다 선결문제로 여겨지던, 당시 농민들에게 가장 부담이 심했던 공납 문제가 대동법으로 해결되자 이후 조선에서의 조세개혁론은 군포의 개혁 문제를 제시하기 시작했다.
신분제적 성격을 없애는 대변통론과 부세경감수준에 머무는 소변통론이 나왔다. 호포제 등으로 대표되는 양역변통론이 제기되었으나 모두 실시되지 못하다가 영조 때 균역법을 실시해 내야하는 포의 양을 종전의 16개월마다 2필에서 12개월마다 1필로 줄이고, 부족분을 메우기 위해 결작 (토지 1결당 2두를 내는 세금)을 신설하고, 왕실에서 걷던 어업세, 선박세등의 각종 잡세를 직접 거두게 했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였고, 세도정치 시기가 들자 삼정의 문란으로 인해 탐관오리들의 과중한 수탈이 자행되었는데 이 때 나오는 수법은 다음과 같다.[4]
- 족징 (族徵), 인징 (隣徵), 동징 (洞徵) : 장정이 군포를 못 내고 도망칠 경우 그 가족이나 이웃, 또는 같이 살고 있던 마을사람에게서 징수하는 것.
- 백골징포 (白骨徵布) : 이미 사망한 사람에 대해 미납세라고 하여 군포를 징수하는 것.
- 강년채 (降年債) : 60세가 넘어서 면역인 자의 나이를 낮추어서 군포를 징수하는 것.
- 황구첨정 (黃口簽丁) : 아직 역을 담당할 수 없는 어린아이에게서 군포를 징수하는 것. 심한 경우에는 태어난 지 3일된 갓난아기한테도 물렸다. 나중으로 가서는 뱃속 태아에게까지 물리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착취는 흥선대원군 때 인정 (사람)이 아닌, 집마다 군포를 물게 하는 호포제 (戶布制)를 실시하면서야 가까스로 해결할 수 있었다. 허나 이 역시도 온전한 해결책은 아니며 양반보다 평민이 더 부담을 가진 게 사실이다. 동학농민운동때 군포문제가 거론될 정도였다.
정약용의 시인 애절양은 군포로 인한 혹독한 수탈의 모습을 그렸다.
각주에도 나와 있듯이 한국사 시험 난이도를 높일 때 단골로 등장하는 파트이기도 하며, 사실상 고정출제라고 보면 된다. [5] 실제로 상당수 수능, 평가원 문제에서 사료를 제시하고 시대별로 군역대상자에게 걷는 군포의 양을 일부러 헷갈리게 해 변별력을 확보하는 경우가 많다.
[1] 着服. 남의 재물을 부당하게 자기 것으로 하는 것.[2] 이이가 방군수포의 폐단으로서 직접적으로 지적한 게 이 점이었다.[3] 임진왜란에서 병자호란에 거치는 기간 동안에는 병력 수요를 맞추기 위해 속오군이라는 형태의 징병제를 유지했다.(이는 선별적 징병을 원칙으로 하는 것으로 조선 전기의 원칙상의 양인개병제와는 그 성격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속오군은 물자 및 훈련 부족으로 인해 강한 전투력을 확보하지는 못했다. 병자호란 이후 대외 군사위기가 소멸하면서 점차 징병제는 사실상 폐지되었다.(속오군이 해체된 것은 아니었지만 더이상 군대라 부를 수 없었다.)[4] 국사 교과서에도 실려 있으며 한국사능력시험과 행정고시에서도 거의 고정출제되는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5] 참고로, 대한민국 소득세법 제 12조(2012년 개정)에서는 대통령령으로 정한 병이 받는 급여와 법률에 따라서 동원된 사람이 그 동원 직장에서 받는 급여에 대해서는 비과세규정이 적용되도록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