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정의 문란

 


1. 개요
2. 상세
3. 삼정의 종류
3.1. 전정(田政)
3.2. 군정(軍政)
3.3. 환곡(還穀)
4. 이후
5. 같이보기


1. 개요


19세기 조선 왕조에 세도정치가 이루어지면서 매관매직으로 수령직에 오른 탐관오리들이 조세 제도의 두 가지인 전정, 군정과 환곡을 악용하면서 일어난 폐단을 가리키는 역사용어이다. 환곡(還穀)은 조세 제도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국가가 운영하는 제도였던 데다가 환곡의 부정부패도 전정, 군정의 부정부패와 양상이 비슷했기 때문에 그 당대부터 '삼정'의 문란이라고 묶여서 불렸다.

2. 상세


부패한 관료와 이에 결탁한 지주에 의한 수탈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예전부터 있었겠지만, 조선 후기에서 이 '수탈'에 해당하는 삼정의 문란은 세도정치 시기부터 조선 국가 전반에 걸쳐서 크게 유행했다. 즉, 조선 후기로 가면서 정치 쪽에서 기존에 아슬아슬하게 유지되어 오던 권력의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붕괴되고 한쪽으로 집중되는 현상이 발생하면서, 이것이 수취 제도에도 심각한 민폐를 끼친 사례이다.
세도정치 당시 조선에서는 매관매직이 성행하여 세도가에 을 주고 관직에 오르는 자들이 비일비재했는데 이들은 수령직에 오른 후 애꿎은 백성들에게서 본전을 뽑으려고 했다. 당시 유행하던 콜레라와 같은 각종 질병이나 기근, 수해 등의 자연 재해까지 겹쳐 조선 백성들의 생활에 직격타를 날렸다.
세도정치 시기에 발생한 문제라고 오해하기 쉬우나, 역사적으로는 조선 중기부터 있었던 정치 변동과도 큰 관련이 있다. 가장 근본적인 해결은 지주전호제, 즉 집권 세력이었던 사림의 경제 기반을 개혁하는 것이 마땅하였으나 문제는 조선이 망할 때까지 해결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 때문에 삼정의 문란은 조선을 근대 국가로 발전되지 못하게 한 원인으로 평가된다. 특히 사회가 안정되면서 집권계층으로 경제력이 집중되며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격차가 벌어지고 가진 자들이 부를 증식시키기 위해 가지지 못한 자들을 더욱 착취함과 동시에 이들의 정치적 권력이 공고화되면서 가지지 못한 자들의 사회적 불만이 가중되어 폭동과 반란으로 폭발한, 어떻게 보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반복되어 온 현상이다.

3. 삼정의 종류



3.1. 전정(田政)


전세, 즉 농사짓는 땅에 매기는 토지세를 말한다.
대개의 경우 전세를 말한다면 토지 1결당 매기는 세금 20.2두[1]를 칭한다.[2]
엄밀히 말하여 토지세는 농민의 부담이 아니고 지주의 부담이다. 현대 사회에서처럼 건물주가 세입자에게 자기 세금을 전가하는 문제는 조선 시대에도 있었으나, 기본적으로 전세의 부과 대상은 지주였다.
그런데 원칙대로 시행되지 않고 가진 놈에게서는 덜 뜯고 없는 놈한테서 더 뜯어가는 사태가 벌어지면서 문제가 되었다. 조선 초기에 세종이 준비했던 전분 6등법이나 연분 9등법, 소위 말하는 공법은 결국 '''지주'''가 낼 돈이 수확량 등에 따라 더 커지기도 하는 제도였다. 그러나 인조 대에 이르러서는 최저 세율로 고정된다. 이를 영정법이라고 하는데, 연분 9등법의 하하년에서 걷던 1결당 미곡 4두로 고정된 것.
간단히 말하면 농민의 생활상이 어려우니 세금을 최저 세율로 내렸다는 것이다. 얼핏 보면 농민에게 유리할 것 같은 제도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16세기 과전법의 폐지로 대표되는 지주전호제의 일반화[3]와 더불어 시작된 농민의 몰락은 결국 자영농의 감소. 즉 소작농의 증가로 이어져 왔고,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농촌 대부분이 대농장의 지주와 소작농으로 분화된 상태였다. 이 상태에서 영정법이 발표가 되었지만, 그 혜택은 소수의 대농장 지주들만 보고, 소작농들에게는 아무것도 돌아가는게 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세도정치기에 이르러서는 이앙법이 전국적으로 퍼지는데, 이 과정에서 노동력의 가치가 급락하고, 소작농들이 소작지를 얻기 힘들게 된 것[4]을 악용하여 지주가 전세를 소작농에게 전가시키는 상황이 도래한다. 참고로, 지주전호제의 확산으로 노비의 경제적 가치가 급락하여 노비의 가격이 엄청나게 떨어지고 노비제가 거의 유명무실해진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경제를 복구하기 위해 토지 개간이 장려되고[5] 양전 사업과 은결을 찾아내어 세수를 확보하려고 하였다. 이 과정에서 지주들의 부담은 증가하였으나 땅 소유자에게 부과되는 세금이었으니 제도적으로는 농민의 부담은 예나 지금이나 큰 차이는 없었다. 그러나 운송비, 수수료, 혹은 창고 보관 중 가 파 먹었다 등의 부담을 농민에게 물어내라고 하는 것이 문제였다. 전정에서 발생한 부패 유형을 정리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 진결(陳結): 진결의 '진'은 황무지를 뜻하는 것인데 말 그대로 황무지에다 세금을 부과했다는 것이다. 황무지는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땅이기 때문에 세금을 걷을 수가 없지만 탐관오리들은 이를 무시하고 황무지에도 세금을 부과해 농민들을 마구 쥐어짰다. 경작하지 않고 놀고 있는 땅에 세금을 걷는 것도 역시 진결에 해당한다.
  • 은결(隱結): 양안(量案: 토지 대장)에 누락된 토지를 등록해주는 대신 몰래 토지세를 거두는 짓거리를 말한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이 탐관오리들은 말만 그렇게 해놓고 양안에다 등록을 안 했다. 즉, 농민한테는 토지 대장에 새로 등록한다고 뻥쳐서 세금 걷어갈 건 다 걷어가놓고 입 싹 닦고 삥땅 쳤다.
  • 도결(都結): 삥땅을 치더라도 티가 나면 말짱 도루묵이 아닌가? 당연히 탐관오리들은 분식회계를 통해 티 안 나게 다 꾸몄다. 하지만 장부를 조작하는 것도 실물과 어느 정도 맞아야 하는 법. 분식회계로 인한 결손액은 당연히 만만한 농민들 쥐어짜서 충당했다. 앞서 말했듯 조선 후기에 전정은 1결 당 미곡 4두인데 이를 2배인 8두로 걷는 등 정액 이상으로 징수하는 것을 도결이라 한다.
  • 백지징세(白地徵稅): 토지가 없는데 장부를 허위로 조작하여 세금을 걷거나 세(稅)를 부과할 수 없는 황폐한 진전(陳田)에 대해서 과세하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진결이랑 혼동할 여지가 있는데 차이점은 진결은 황무지에 세금을 걷는 것에만 한정해서 쓰는 것이고 백지징세는 황무지 + 없는 땅에 세금을 걷는 것을 함께 일컫는 말이다. 즉, 이쪽이 진결보다 조금 더 큰 개념에 속한다.

3.2. 군정(軍政)


군역을 지지 않는 16세 ~ 60세의 남성들이 내는 군포(軍布)를 말한다. 원래의 취지는 군역을 부담하는 이들이 군 복무를 하는 동안 군역을 면제 받은 사람들이 군포를 납부해 군 복무자들을 경제적으로 돕도록 하는 제도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공명첩 등으로 양반이 증가하고, 도망친 농민들이 많아지면서 과세 대상이 크게 감소한다. 이때문에 국방세를 걷으려 해도 세금을 낼 대상이 크게 줄어든 상황이 된 것이었다.
영조 무렵에 5군영이 설치되어 직업 군인의 숫자가 늘어나고[6] 결국 이 경비를 충당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따라 등장한 균역법(均役法)은 기존 1년에 2필의 군포를 걷던 것을 1년에 1필, 즉 절반으로 줄이고 나머지를 왕실[7], 지주[8], 상류층[9]이 보충하는 형태로 바꾼것이다. 중앙군 말고도 지방에서도 필요에 따라 따로 군포를 징수하기도 하였다.
이중에서 균역법의 핵심은 '''결작'''으로, 이는 땅에 매기는 세금이었으므로[10] 시행 초기에는 지주의 부담은 증가하고 농민의 부담은 이전과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영악한 지주들이 이런저런 편법을 써서 이를 곧 소작농에게 전가시켰고(전정 항목 참조.), 농민의 부담은 오히려 더 커지게 된다.
게다가 걷는 군필을 '''줄였음에도 불구하고 갖은 편법을 써가며 실제로는 걷을 수 없는 군필을 걷는''' 사태까지 벌어진다. 결국 이런 폐단은 순조 이후 세도정치 시기에 극에 달하게 된다. 군정에서 나타난 폐단의 유형은 다음과 같다.
  • 백골징포(白骨徵布): 백골이란 말 그대로 죽은 사람을 뜻한다. 죽은 사람은 당연히 군역을 질 수가 없지만 탐관오리들은 사망자의 호적에서 사망 사실을 고의로 누락하고 계속 산 사람처럼 꾸며서 군포를 징수했다.
  • 황구첨정(黃口簽丁): 황구(黃口)는 어린이를 말하는데[11][12] 앞서 말했듯이 군역을 지는 대상은 정(丁) 즉, 16~60세 남성들이었다. 그런데 탐관오리들은 16세가 안 된 어린이의 나이를 허위로 올려서 16세 이상의 정으로 만들어 군포를 징수하였다.
  • 강년채(降年債): 위에서 언급한 황구첨정과는 반대 개념이다. 군역을 지는 대상은 16~60세 남성들이므로 60세를 초과한 노인들 역시 군역 대상이 아니므로 군포 징수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조선 말기 탐관오리들은 60세를 초과한 노인들의 나이를 억지로 내려서 60세 이하의 정으로 만들어 군포를 징수하였다.
  • 족징(族徵): 만약 납세자가 이것을 못 버티고 도망칠 경우 연좌제를 적용하여 친척이 대신 내도록 하는 것이다. 친족이 대신 납부하도록 했다고 하여 족징이라고 부른다.
  • 인징(隣徵): 당시 조선 사회는 5가구를 묶어서 서로를 감시하게 하는 오가작통법을 실시하였는데 만약 한 가구가 도망칠 경우 다른 4가구에게 감시를 똑바로 못한 책임을 물어서 그 도망자 가정의 과세분까지 몽땅 떠넘겨 대신 내도록 하는 것이다. 이웃이 대신 납부하도록 하였다 하여 인징이라고 부른다.

위 목록 중에서 족징과 인징을 농민들이 대거 이탈하는 상황의 핵심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토지 이탈이나 사망 시에도 과세가 소멸하지 않고 주변인들에게 이중 삼중의 과세로 들러붙었기 때문. 한 농민이 도망치면 그 옆의 네 가구(오가 작통법)에게 징세하고, 이를 버티지 못한 농민이 또다시 이탈하고, 결국 다섯 가구 내의 인원이 다 이탈하면 친척을 찾아가고, 그 친척이 다시 이탈하고, 다시 그 이웃내에서 번지는 식의 도미노의 행태가 되어버렸기 때문.
이러한 폐단들은 당시의 농민들에게 커다란 부담이자 고통이 되었다. 농민들은 한겨울에 집안에 불을 때우지도 못하고 옷도 입지 못한 채로 서로가 부둥켜 안으며 추위를 견뎌야 했으며[13], 당시의 군포 부담을 견디지 못한 가장이 자신의 영 좋지 못한 곳자르고 말았다는 이야기가 정약용의 시, 애절양(哀絶陽)에서 묘사하고 있다. 그 밖에 정약용의 <목민심서>에는 사람뿐만이 아니라 집에서 키우는 애완견, 심지어는 '''절굿공이'''까지 군적에 올려 군포를 걷었다는 이야기가 묘사되어 있다.
이러한 균역법 이후 부담을 해결하기 위해 농민들은 적극적으로 다른 방법을 모색하게 된다. 이앙법 참고.

3.3. 환곡(還穀)


춘궁기에 먹을 것이 없는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해 관에서 곡식을 빌려주었다가 가을에 되받는 바람직한 의도의 복지제도였지만 세도정치 때는 각종 고리대의 온상이 되었다. 당시 조선의 농업 생산량이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고 농민들 역시 생활이 넉넉하지 못했다 보니 거의 해마다 관에서 곡식을 꾸어먹을 수밖에 없게 되었고 그 때문에 환곡 역시 거의 준과세처럼 되어 버렸다. 그런데 이 썩을 놈의 탐관오리들은 그 환곡을 자신들의 재물을 모으는데 악용했다. 그리하여 처음엔 백성들을 보릿고개에서 벗어나게 해주고자 실시했던 국가 복지제도가 도리어 백성들을 쥐어짜는 악습으로 변질되어 버렸다.[14]
환곡은 모곡에 대한 이자를 1/10으로 제한하였는데, 이것은 기본적으로 환곡의 성격이 구휼 제도였기 때문이다. 환곡은 먹고 살만한 사람이 할 것이 아니다. 이를 현대에 적용시켜서 생각한다면, 최저 생계비 정도만 벌어서 먹고 사는 가정에 국가에서 강제로 대출을 해주면서 이자까지 물린 것이다. 조선의 전반적인 세율 체계에서 10%의 이자는 낮은 수준이었다고 하지만, 최저 생계비를 겨우 버는 정도라면 실제로 체감되는 이자 부담이 일반인보다 심각한 수준일 것이다. 환곡의 문란은 이런 점에서 생겨난다. 가뜩이나 먹고살기 힘든 사정에서 담당 공무원이 빼돌리는 부분까지 나온다면 어떻겠는가. 환곡에서 나타난 폐단은 가장 심각했는데 그 유형은 다음과 같다.
  • 늑대(勒貸): 환곡을 이용하지 않으려는 백성들에게 강제로 곡식을 빌려주는 것을 뜻한다. 형편이 어느 정도 나아서 안 빌리려는 경우 혹은 '차라리 그냥 굶어죽을란다.' 하는 마음으로 안 빌리려는 경우 이런 것들 모두 막론하고 그냥 강제로 곡식을 떠넘기거나 빌릴 때까지 죄인으로 몰아 고문을 한 경우도 있었다. 그래놓고 받아낼 건 다 받아챙겼다.
  • 장리(長利): 사실 본래 환곡은 곤궁한 농민을 구제할 목적으로 시행된 복지제도였기 때문에 처음엔 이자가 없었다. 그러다가 상평창에서 담당하면서 이자를 조금씩 받기 시작하였다. 환곡을 되받을 때 붙이는 모곡은, 처음에는 봄부터 가을까지 6개월 동안에 2할(20%, 연리 40%)였고, 조선 후기에는 6개월에 1할(10%, 연리 20%)였다. 그러나 후기에 들어 점점 조선 사회가 부패해지면서 탐관오리들은 제멋대로 이율을 올려버렸다. 그리하여 제멋대로 1/5, 1/3로 올리다가 급기야 말기에 가면 이자를 6개월에 5할(50%, 연리 100%) 이상으로 걷어가기까지 했는데 이 경우를 장리라고 불렀다. 환곡의 폐단 중에서도 가장 악질적인 부류이다.
  • 분석(分石): 빌려주는 곡식에다 쌀겨, 모래, 등을 섞어서 주거나 물로 불려서 양을 속이는 경우를 말한다. 예를 들면 농민 A가 환곡으로 쌀 1섬을 대출받았다고 치면 실제 포대 안에 들어가 있는 쌀 양은 반 섬밖에 안 되고 나머지 반 섬은 쌀겨, 모래, 돌 등이었다는 식이다. 사실 이건 환곡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횡령의 방법 중 하나인데 이 분석의 행태가 제대로 터진게 조선후기 왕조몰락의 시발점인 임오군란이다. 그 때에도 13개월치 봉급을 체불한 후에 겨우 1달 치 봉급을 주었는데 그 봉급으로 나온 쌀에 모래와 쌀겨 등이 잔뜩 섞여 있었다.
  • 반작(反作): 장부를 허위로 조작하는 것을 말한다. 이 역시 분식회계의 일종인데 분식회계 사실이 들통나지 않으려면 어느 정도 실물과 맞아야 하는 법이므로 역시 그 차액분을 농민들에게 억지로 징수하였다. 그리하여 그 농민이 곡식을 안 꾸어먹었는데도 곡식을 꾸어먹은 것으로 날조하여 걷어내기도 했고 빌린 양을 날조하여 걷어내기도 하였다. 이 형태를 반작이라고 부른다.
  • 허류(虛留): 전임(前任) 관리나 지방의 아전이 결탁하여 창고에 있는 양곡을 횡령, 착복하고 장부상으로는 실제로 있는 것처럼 거짓으로 기재하여 후임 관리에게 인계하는 것을 말한다. 국법에는 이러한 경우 엄격한 처벌을 받도록 규정되어 있으나 허위 문서의 작성자와 인수자가 서로 공모하여 은폐시켜서 환곡의 폐단은 국가 재정의 궁핍화를 가속화시켰다. 위의 반작과 차이점은 반작의 경우는 장부 조작이긴 한데 그건 '환곡 출납 대장'을 조작한 것이고 이것은 창고 내 보관 중인 장부를 조작한 것을 말한다.

4. 이후


사실 삼정의 문란은 조선에서 임금부터 고위 관리, 지방 양반들까지 그 폐해와 심각성을 인식하고 있었다.[15] 사실 삼정의 문란은 위 문단에 서술된 대로 지주전호제가 일반화된 조선 중기부터 조금씩 드러나고 있었는데[16] 영조정조는 탕평을 토대로 한 강력한 왕권과 통치력으로 폐단을 최소화시킬 수 있었지만, 정조 사후 순조가 즉위하고 조선 정치가 군약신강[17]되면서 문제가 뚜렷하게 표면화되었다.
하지만 순조가 그냥 앉아 있기만 한 임금은 아니었는데, 자신의 미약한 왕권이나마 가끔씩 내세워서 신하들을 꾸짖었고 어느 정도 개혁의 의지를 보이기도 했다. 일단 순조 본인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세도정치에 취약해 정치력이 약하다는 약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적장자였던 효명세자에게 일찍부터 왕에 준하는 권한을 주어 자신의 후대 왕권을 강화하려 했었고, 효명세자가 총명하여 일처리를 잘해냈기에 실제로도 세자에게 기대를 많이 걸었다. 그러나 효명 세자가 순조가 살아있을때 22살의 나이로 일찍 요절하는 바람에 기대는 이뤄지지 못했고, 순조 자신도 건강이 좋지못한터라 단명하여 역시 어린 나이로 손자인 헌종이 즉위하면서 왕권은 예전과 똑같이 미약하게 시작되었다. 순조의 의도와는 달리 오히려 세도정치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강해지게 되어 삼정의 문란 역시 더욱 심각해졌다.
신하나 양반들도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순조 시대 이후 재야에서 활동하였던 정약용, 박지원, 박제가 등 당대의 이름깨나 날린 실학자들은 직접 민심을 접하면서 지나친 수탈로 고통받는 백성들의 실상을 고발하여 삼정의 문란을 공론화하였고, 이들은 각자의 이론에 따라 여전론, 한전론 등 농민의 공정한 토지 분배, 상공업 진흥 등 백성들을 생활을 안정시킬 대책을 내놓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실학자들은 자신들의 아이디어를 국정에 반영할 수 있을 정도로 정치-사회적인 입지가 없었고, 설혹 어떤 아이디어가 왕에게 알려져 실제로 시행을 하려고 해도 당대의 세도가들이 반대하고 방해하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었고 그나마 나머지 일반 관료들도 세도가들 눈치만 보기 바쁜 상태였다.[18] 이러니 정책이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는 것은 당연지사.
게다가 학문 연구 기관인 동시에 지방의 여론을 조정에 알리는 언론기관으로서의 기능도 담당하였던 서원도 이때쯤이면 풍양 조씨, 안동 김씨 등 세도정치 가문들 항문이나 핥아주는 개로 전락해 버렸다.[19] 이들 역시 빽을 믿고 지방 수령들과 지주들 못지 않게 백성들 수탈에 열을 올렸다. '''결국 삼정의 문란에 대한 대책은 '고쳐야지' '잘돼야지' 하는 윗선들의 영혼없는 제스처에 불과하였고, 정작 문제 해결이 절실하였던 백성들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지배층들은 결국 문제를 인식만 했을 뿐 해결할 능력도 의지도 없었던 것. 애초에 삼정의 문란을 야기한 원인이자, 삼정의 문란으로 가장 큰 이득을 보는 세력이 기득권 지배층이었으니 이를 견제할 왕권이 취약해진 상황에서 제대로 개혁이 이루어질 턱이 없었다.
이런 계속되는 병크를 참지 못한 백성들은 폭발하여 농민 봉기에 가담하거나 도적의 무리에 합류하기에 이르렀다. 어영부영 계속 방치된 삼정의 문란은 조선 후기 사회적 혼란이 발생하게 되는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었고, 이는 홍경래의 난과 진주 민란으로 대표되는 임술농민봉기의 원인이 되어서 조선은 급속히 막장으로 달리게 된다.
이를 수습하기 위해서 철종 대에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이 만들어져 해결책을 내놓긴 했지만 그 해결책이란게 환곡의 폐단이 가장 극심하다. - 일단 환곡을 폐지한다. - 그런데 그러면 국가에 들어오는 세입이 줄어든다. - 전정으로 보충한다. 라는 헛소리만 나오는 것뿐이었다. 한마디로 환곡을 전정으로 대체하자는 것. 더 큰 문제는 이 삼정이정청의 사람들이야말로 세도정치를 이끌고 있던 사람들이라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모양새가 되었으며, 그나마 이 해결책조차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고 민란이 대충 가라앉자 결국 현상유지를 내세웠다. 삼정이정청 자체가 임시 관청으로 만든거라 3개월만 운영되고 폐지된 탓에 해결이 될리가 없었으며 진주민란 이후에도 민란이 지속되었다.
흥선대원군 때 와서야 겨우 적극적인 시정이 이루어졌는데, 양전사업으로 은결(隱結)[20]을 색출하면서 전정을, 호포제(戶布制)[21]를 실시하면서 군정을, 마을 단위로 주민이 관리하는 사창제[22]로 되돌리면서 환곡을 해결하여 그나마 사정이 나아졌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들은 또 여흥 민씨 세도 정치에서 허사로 돌아갔고, 결국 매관 매직 문제와 함께 시너지를 일으키면서 임오군란동학농민운동의 계기가 되었으며, 조선 멸망의 여러가지 이유들 중 하나가 된다.

5. 같이보기


[1] 영정법의 기본적인 전세 4두+균역법의 2두(결작)+삼수미(훈련도감)세의 2.2두+대동미(대동법)의 12두[2] 물론 이것 이외에도 잡세들이 정말 많았다.[3] 이 개념을 이해하려면 조선시대 수조권의 개념과 소유권의 개념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링크참조[4]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이앙법의 확산으로 수확량이 증가하고 노동력을 절약할 수 있게 되어 기존 면적에 사용되던 노동력 중 일부가 잉여노동력으로 시장에 풀려버리니 노동력의 가치는 급감하고, 소작지를 얻기위한 경쟁은 치열해진 것[5] 등록되지 않은 땅을 개간한 사람은 신분에 상관없이 소유권을 인정해주고, 일정 기간 동안 세금을 면제하였다.[6] 영조 한참 이전부터 군역기피가 심하여 양인개병은 붕괴되는 추세였다.[7] 어염, 선박세[8] 결작, 토지 1결당 2두[9] 선무군관. 1필. 여기서 말하는 상류층은 경제적인 지위를 뜻한다. 봉건제적 신분질서를 뜻하는것이 아니다. 물론 경제적 상류층에 양반들이 많은 것은 사실이긴 하지만 예외도 존재한다.[10] 그래서 이를 역의 전세화 현상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11] 당나라 개원지(開元志)에 의하면 갓 태어난 아이를 황(黃), 4살을 소(小), 16살을 정(丁), 60살을 노(老)라 한다고 적혀있다. 구(口)는 인구, 호구에서 쓰는 용법과 같이 사람을 셀 때 쓰는 단위다. 통감절요 주석에 의하면 황은 어린아이의 머리카락이 누런 것에서 왔다고 한다.# 또 다른 의견으로는 코흘리개 어린아이들은 음식을 먹고 입을 잘 닦지 못해 누런 입(黃口)으로 보여서 그렇게 불렀다는 주장도 있다.[12] 이 황구첨정, 백골징포는 이미 숙종때 호포제 실시 논의에서 윤휴가 언급할 정도로 오래되었다.[13] 정약용도 유배 생활 중 이를 보고 '큰아들 5살에 기병으로 등록되고, 2살 된 둘째 아들도 군적에 올라 있어 세금이 지나치니 가족 모두가 차라리 빨리 죽어 버리기를 바랬다. 이런 상황에서 옷이 다 무엇이랴' 라고 묘사하였다.[14] 이게 얼마나 악질적이냐면 이 환곡으로 수탈되는 양이 너무 많다보니 남은 양으로는 도저히 견딜 수 없고 그러면 또 환곡으로 빌려야 하고 그러면 또 많이 뜯기고 또 빌려야 하는 악순환이 이어진다.[15] 그 증거로 삼을 만한게 임술농민봉기 당시 장흥에서 일어난 민란의 주동자는 다름아닌 '''전직 군수'''였다. 다른 사람도 아닌 직전에 군수 맡은 사람이 민란의 주동자가 된거다(...)[16] 명종 때 직전법이 폐지됨으로 인해, 관리(양반)들에게 땅(수조권, 조세를 수취할 수 있는 권리)을 나눠주는 기존의 방식이 아닌, 일정한 급여을 지급해 주는 녹봉제가 일반화되었다. 이로 인해 양반(지주)들은 은퇴 후의 생계나 품위유지에 관한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어, 땅을 개인적으로 사들여서 농민들을 소작인으로 고용하게 되었다. 땅을 빌린 소작농민은 고용주인 지주에게 경제적으로 완전히 종속되었으며, 결국 지주 개인의 도덕성이나 준법 의식에 따라 농민의 삶이 결정되었다. 유능한 군주의 통치 하에서 법이 엄격하게 지켜진 평화로운 시대에서는 큰 문제가 없었겠지만, 양난과 당파 싸움 등의 혼란을 겪은 조선 중기 이후에 들어서 문제가 드러난 것.[17] 말 그대로 임금의 통치력이 약해져 신하를 제대로 통제할 수 없게 된 것. 청나라의 강희제도 17세기 말 경신대기근 시절 조선을 평하며 '조선은 군약신강이 나라를 망치고 있다' 라고 평했는데, 약 100여년이 지난 19세기가 되어서 다시 그 예언이 실현된 것이다. 다만 이는 군약신강의 문제는 아니다. 일단 경신대기근은 조선의 역량을 다 쏟아부어도 도저히 답이 안 나오는 대재앙이었기에(이 때 온 재해가 지진, 역병, 우박, 서리, 가뭄, 홍수, 태풍, 해충, 해로운 새, 폭설, 냉우, 폭풍우 등등등으로 '재해' 라고 불릴만한건 다 왔다.) '''인재(人災)'''가 아닌 '''천재(天災)'''였지만 이 때는 문제해결을 위해 역량을 쏟아붇지도 않았고 특별한 대재앙이 온 것도 아니었고 진짜로 군약신강탓을 하기에는 역사속에 나오는 외척의 발호가 더 큰 원인으로 엄밀히 말하면 군약신강의 범주에 들기는 하나 그래도 효종, 현종 시절에는 군주의 힘이 약화되어 있어도 한 가문이 힘을 틀어쥔 것이 아니라서 나름대로 건전성이 유지되었지만 이 때는 세도정치 기간으로 흔히 역사속에 나오는 외척의 폐단이란 폐단이 다 나오던 시기였다. 이러니 나라가 제대로 돌아갈 리 없는건 당연지사[18] 참고로 이 때는 정조가 등용했던 남인, 소론 등 마이너 인사들이 모두 권력에서 쫓겨나거나 낙향해버린 상태여서 중앙에서는 바른 소리를 할 사람이 없어져버린 상태였다. 특히 세도가들은 매관매직으로 자신들에게 아부하는 사람들을 요직에 임명했지 실력 있는 인재들의 등용을 막았던터라 조정에서는 인재들이 설 자리가 더욱 없었다.[19] 이 때문에 흥선대원군 집권 후 힘을 잃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20] 등록을 하지 않고 숨긴 토지[21] 쉽게 말해서 유학호(儒學戶: 양반)에게도 군포를 징수한다는 제도. 1명당 2냥씩 징수했다.[22] 요즘으로 치면 국가가 관리하는 생활안정자금대출이 하도 엉망으로 운영되어 민폐만 끼치자, 차라리 그 동네 사람들과 거래를 많이 튼 착한개미저축은행에서 돈을 꿔주는 걸로 전환시켰다고 생각하면 된다. 사창제를 실제적으로 관리하는 사람은 결국 그 지역에 계속 살던 경제적 여유가 있는 양반인 경우가 많았고 지나친 이득을 보려다 인심을 크게 잃는걸 몇년 하다 가버릴 관리보다는 껄끄러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