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모으기

 

1. 개요
2. 기원
3. 경과
4. 결과
5. 비판
5.1. 책임소재의 불명확성
5.2. 체계 문제
6. 여담
7. 같이보기


1. 개요



1997년 외환위기 사태가 닥치자 한국에서 벌어진 범국민적 운동. 국내에 있는 을 국민들이 모아 시중에서 구입한 다음 수출하여 달러로 바꾸고 그 돈으로 외환보유고를 늘린다는 취지 하에 이루어졌다. 이와 동시에 각자 집안에 있는 미국 달러를 포함한 외화 모으기 운동도 동시에 전개되었다.
이는 외환보유고 확보를 실패하는 등 예견된 위기에 대응하는데 완전히 실패해버린 정부 및 기업을 국민이 뒷바라지하는 모양새가 되었기에 이후 안팎으로 논란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국제 금값이 폭락하는 등 시장의 물을 흐린다는 이유로 외국에서도 욕 많이 먹은 정책. 그리고 IMF 구제금융으로 받은 금액보다 훨씬 못 미치는 금액으로 금모으기운동이 IMF를 극복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는 말은 상당히 과장된 면이 있다.
그래도 한국에서는 전국민이 하나 되어 위기를 극복하려 한 운동이라 아직도 자랑거리로 삼는 사람들이 많다.

2. 기원


1997년 11월 20일, 새마을운동 단체 중 하나인 '새마을부녀회 중앙연합회'에서 선포한 '애국가락지 모으기 운동'이 시초가 되었다.[1]출처 1 출처 2 1907년 대한제국의 국채를 갚기 위해 벌여진 국채보상운동의 정신을 계승하여 국민들의 애국심과 단결력을 이끌어내고자 했던 회원들은 12월 8일까지 금으로 된 물건들을 모아서 국가에 헌납하기로 결의했다.
12월 3일 국무총리가 주재하는 비상경제대책추진위원회 회의에서 이러한 운동 계획이 보고되었고, 정부는 경제난 극복을 위한 민간단체 차원의 바람직한 활동으로 평가했다. 같은 달 10일 열린 헌납식에서는 금 2445 돈, 133 돈, 외화 28 달러, 한화 701만 2천원을 기부받아 총 1억 3천95만여 원이 모였다. 모금액은 중소기업진흥청에 중소기업지원금으로 전달됐다.
새마을 금 모으기 운동은 긍정적인 평가에 힙입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1998년 1월 5일부터는 'KBS 금 모으기 캠페인'이 시작되었고 종전의 헌납이 아닌 보상의 체계로 운동의 성격도 바뀌었다.

3. 경과


날마다 감동적인 일이 벌어졌다. 바로 전 세계를 감동시킨 금 모으기 운동이었다. 국민들이 장롱 속의 금붙이를 꺼내 은행으로 가져갔다. 전국의 은행마다 금붙이를 든 사람들이 줄을 섰다. 금반지, 금 목걸이가 쏟아져 나왔다. 하나같이 귀한 사연이 담겨 있는 소중한 징표들이었다.

백성들이 나라의 빈 곳간을 자신의 금으로 채우고 있었다. 신혼부부는 결혼반지를, 젊은 부부는 아이의 돌 반지를, 노부부는 자식들이 사 준 효도 반지를 내놓았다. 운동선수들은 평생 자랑거리이며 땀의 결정체인 금메달을 내놓았다. 김수환 추기경은 추기경 취임 때 받은 십자가를 쾌척했다고 한다. 그 귀한 것을 어떻게 내놓으시냐고 주위에서 아까워하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예수님은 몸을 버리셨는데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 '김대중 자서전' 2권 중

[image]
1998년 2월 13일 서울 대치동에서 열린
‘금모으기운동’에서 기탁된 1㎏짜리 금괴
관련기사
1998년 1월 5일부터 운동이 시작되었다. 2개월간 금을 모으고 2월 말에는 국민은행주택은행[2]이 금모으기 업무를 중지했으며, 4월 말에 농협중앙회가 마지막으로 업무를 끝내면서 금모으기 운동의 막이 내렸다.
금 모으기 운동을 벌이던 가운데 여러 감동적인 에피소드와 해프닝이 벌어졌으며 많은 양의 금을 모았다.
'''금의 통계'''
''''''
'''모인 금의 양'''
1월
165.65t
2월
53.96t
3월
5.38t
4월
0.80t
'''총합'''
'''약 225.79t'''

4. 결과


전국적으로 351만여 명이 참여하여 약 227톤의 금이 모였으며, 4가구당 1가구 꼴로 평균 65g(17.33돈)을 내놓은 셈이 되었다.
금모으기 이전의 금 보유량은 10여 톤 정도였는데 무려 그 20배가 넘는 금이 모인 것이다. 2019년 6월의 한국은행 금 보유량은 104톤#이므로 이 때 모인 금은 한국은행의 금 보유량의 2배를 넘었다는 것이다. 만일 이걸 모두 금 보유고로 돌린다면 2019년 6월 기준 벨기에의 금 보유고와 맞먹게 되며, 중앙은행 금 보유고로는 22위에 해당하는 양이다.
모인 금은 거의 대부분의 양이 수출되었다. 금을 수출한 가격은 22억 달러이며, 이는 1998년 1/4분기 수출액 3백 23억 2천만 달러의 7%이다. 금 수출액을 빼면 고환율에도 불구하고 1998년 1/4분기 수출액은 1997년 1/4분기 수출액과 비교해서 '''1.7%''' 늘어났을 뿐이었다. 결국 수출증가분의 대부분을 금 수출액이 차지한 것이다. 참고로 1997년 11월의 한국의 가용 외환보유고 20억 달러보다도 많으며, 이때 IMF에서 차관으로 받은 210억 달러의 10% 정도에 해당한다.
금모으기 운동은 절대 공짜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금을 헌납하면 헌납한 사람에게 정부에서 실제 금값에 해당되는 돈보다 약간 더 얹어서 통장에 입금시켜줬다. 만약 이렇게 하지 않고 아무 보상없는 갈취식 헌납을 받았더라면 헌납한 사람들 상당수가 파산해서 길거리에 나앉았을 것이다. 금이라는 물건은 절대로 만만하지 않은 고가 귀금속이기 때문이며 특히나 금속 가격 부동의 1위를 자랑하는 금속이기 때문이다. 1억원으로 2kg 남짓밖에 구매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비싸다.
다큐멘터리 등에서 IMF를 다루며 금모으기 운동을 조명한 적이 있었는데, 그 자체의 '''효용성보다도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위기를 극복하려는 자세'''가 국제적인 신용도를 얻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술회하는 당시 관련자나 외국 경제인의 평가 등이 소개되기도 했다. 국민들이 희생을 해서라도 국가의 빚을 보상할 만큼, 돈을 갚을 의지가 매우 강하다는 것이며, 이렇게 극단적으로 쥐어짜낼 수 있는 의지가 있다는 것은 곧 '''"빚을 갚을 가능성은 높다."'''는 뜻이므로 일단 신용 측면에서는 긍정적이기는 하다. 특히 중국과 대만에서는 '자국상품 애용' 이라고 그들에게 받아들여지는 국내에서의 현대차 점유율과 함께[3] 한국인들의 애국심과 단결력을 칭찬할 때 나오는 단골 레퍼토리이다. 중국 정부 입장에서도 국민이 국가를 위해 희생한, 애국심 선전에 탁월한 소재이므로 환구시보 같은 중화사상이 가득한 매체에서조차 금모으기 운동을 칭찬할 정도이다. 하지만 국가신용도는 근거를 바탕으로 산정되므로 인상이야 개선될지 몰라도, 외환보유고로 전용하지 못한 점은 신용도에 뼈아팠음을 여전히 부정할 수 없다.

5. 비판



5.1. 책임소재의 불명확성


국민들의 신용 카드 빚으로 경제 위기가 발생했다며 기업 부채로 일어난 금융위기를 국민더러 갚으라고 등을 떠밀었기에 긍정적으로 바라보기 어려운 상황. 정상적인 국가였다면 하다못해 '채권을 발행하여 금을 매입'하는 식으로 해결했어야 했는데, 금을 덥썩덥썩 기부해버린 당시 국민들의 행동은 지금 기준으로는 호구'에 가깝다고 평할 수 있다.
경제 위기에서 합리적인 경제 주체는 유동성이 높은 자산을 매각하고 가치 변동이 적은 안전자산을 구매하여 안정성을 확보하고, 이런 상황 속에서 동서고금 최고의 안전자산 중 하나인 금은 집안 꼭꼭 숨겨두는 게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다. 그런데 이와 반대의 현상이 벌어졌기에, 사회학자와 경제학자들의 주목을 제대로 끌었다. 개인보다 무조건 국가를 위해야 한다는 이승만 시절 부터 시작한 극단적 집단주의가 개인주의 사상에 비해서 극도로 강했던 20세기 대한민국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2008년 9월 세계금융위기에서도, 그 뒤를 이은 유로존 위기에서도 이 같은 사례는 전 세계적으로 당연히 없었으며, 그리스인들은 아예 이해하지도 못했다고 한다. 중국계 경제학자 쑹훙빙이 쓴 '화폐전쟁'에서도 금모으기 운동을 매우 높이 보았다. 그 까닭은 아시아 금융위기를 국제금융자본의 음모로 보고, 금모으기 운동에 대해 국제금융자본의 횡포를 국민들의 노력으로 저지하는데 성공한 사건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이렇게 국민들의 무조건적인 희생을 정부와 기업이 감사하게 생각하고 기리는 것 같지는 않다. 일단 재벌들은 국가 전체를 멸망의 위기로 몰아넣은 주제에, 그 와중에도 국민이 어떻게든 국가를 살리겠다고 모은 돈을 헐값매각을 통해 부가세 탈루를 추진하다 걸렸다.[4] 이쯤되면 그냥 매국노라고 불러도 전혀 과장이 아니다. 기사 참조.
정부 또한 2010년에 초등학교 교과서에 IMF의 원인으로 '국민의 과소비'를 '첫 번째'로 싣는 등 거의 세뇌 수준의 교육정책을 펼치는 것을 보면 국민에게 감사하기보다는 '''국민이 문제'''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이른바, 국민 개새끼론인 것이다. IMF 외환위기는 국가와 대기업들의 경영진이 무능했고 그에 비해 지나치게 큰 과욕으로 인해 빚은 참사이며, 노동자는 금모으기 운동 뿐만 아니라 강도 높은 정부의 긴축으로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으니 사태 해결에 기여한 바가 무시할 수 없을 정도, 적어도 IMF 사태로부터 국가를 지킨 영웅으로 대접해줘도 모자랄텐데도 이런 취급을 받는 것이다.
이 때의 경험은 후일 각종 '''자국 혐오의 원인'''이자 국민들이 '국가 위기 상황'에서 '더 이상 극복에 나서려 하지 않는' 원인의 한 가지로 작용하기도 한다. 배신감 때문인데, 이 때 국민들이 경제 위기를 극복하겠다고 금을 내놓는 동안 높으신 분들은 공적자금을 빼돌리거나, 자식이 군대에 가지 않게 하기 위해 국적포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현재도 건재한 몇몇 대기업의 경우 당시 이 성금을 탈세하려다 발각되기도 했다. 입맛이 쓴 후일담인데, 금모으기 운동을 한 지 딱 10년이 되는 해, 2007년의 가을에 주요 경제지가 일제히 보도한 사건이다.

5.2. 체계 문제


운동의 실무 측면에서의 비판도 있다.
본래 금모으기운동의 골자는 기업이 수집한 금을 예탁받은 뒤 예탁증서를 발급하고, 예탁기간이 끝난 뒤 수익을 배분하는 골드뱅크 업무였다고 한다. 즉 금을 외환보유고로 확보하여 신용도를 확보한 뒤 외국에서 돈을 빌려 유동성 문제가 해결하면 정부가 구제금융을 통해 기업 빚을 갚아줄 수 있고, 이후 경제가 정상 궤도에 오르면 기업에 수익을 배분하고 기업은 수익금으로 구제금융을 변제하는 식.
하지만 2월 6일에는 한국은행에서 모인 금을 수집하여 외환보유고로 활용하려고 보니, 기업들이 자기들 빚 갚는데 급급해서 모인 금을 급하게 수출해버려 남은 금이 없었다고 한다. 한국은행은 모인 금 가운데 겨우 3.04t만을 확보하였다고 한다. 당시 한국은행이 보유하고 있던 금의 양이 13.4t에 불과했다는 걸 생각하면 이것도 매우 많은 양이기는 하지만, 227t의 금을 모두 한국은행에 집중해서 외환보유고로 전용하려 했으나 그러지 못한 점은 아쉬울 수밖에 없다. 특히나 금은 안전자산으로 유사시 최종결제수단이라 IMF 외환위기와 같은 비상사태에서 더더욱 빛을 발하고, IMF 외환위기가 진정된 다음 금 시세는 급등하였으니, 이때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었다면 한국의 국익에도 큰 도움이 되었을 것임이 자명하다.
게다가 국제 금 시장의 시세를 교란할 정도로 엄청난 양의 금이 한순간에 시장에 유통되면서 시장 교란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당연히 시세 폭락으로 국제적인 비판에 직면한 것은 물론이요, 한국 기업들도 시세 폭락으로 제값 받고 팔지 못한 바람에 벌이가 신통찮았다고 한다. 하다못해 파는 속도에 완급이라도 조절했음 좋았을텐데 자기들의 원죄가 있어 제발이 저린 기업들이 국가가 뺏어갈까봐 급하게 팔아치웠다는 의심을 받았다. 그렇지 않더라도 재벌그룹 종합상사들이 IMF 구조조정의 표적이 되자 수출 실적을 부풀리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는데, 재무재표를 뻥튀기하여 구조조정을 피해보고자 금을 사들여 되파는 짓거리들을 자행했다.
한편, 약 5년 뒤 주요 경제지들이 금모으기운동의 뒷사정을 일제히 대서특필해가며 대기업 종합상사들의 비리를 까발렸는데.. 그 시기가 절묘해서 딱 공소시효가 지난 다음이었다.
한마디로 '''도움이 되긴 됐으나, 국민 이외에는 다 딴 생각을 하고 있어서 제대로 돌아간게 아무것도 없었다.'''

6. 여담


구한말의 국채보상운동이나, 보불전쟁 직후에 프랑스전쟁배상금 반환 운동과 비슷하다는 평가가 있다.
나중에 금값이 크게 오르자 운동에 참가한 사람들이 사회 분위기에 휩쓸려 금을 헐값일 때 팔아버린 것을 후회했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국회에서도 동참하였는데 총 13kg(...)이 모였다. 당시 국회의원 총원이 288명이었으니 1인당 약 45g(12돈)을 모았는데, '''국민 1인당 평균보다 적다'''고 당시 언론에서 맹폭격을 당하였다.
사실 같은 반도 국가인 이탈리아무솔리니 파시즘 정권기에 유사 사례가 이미 있다.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결과 영-프 연합국이 이탈리아 왕국에 부과한 어설픈 경제제재는 오히려 이탈리아 신민들의 애국심과 단결성만 높혀줬고, 자발적으로 금모으기 운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유럽 추축국의 패망이 목전에 다가온 45년 4월, 무솔리니가 파르티잔에 잡혀 죽던 날에 메라 하천에서 한 어부가 이 금반지들을 발견한다. 파시스트 지도자들이 은닉했다가 도주하면서 유기한 것이다.
2018년 5월 31일, 말레이시아가 국가 부채를 줄이고 재정파탄을 극복하기 위해 국민들을 상대로 모금활동에 나섰다. 월스트리트 저널에서는 해당 기금조성을 한국의 금모으기 운동을 연상시킨다고 전했다. # [5]
이후 금 판매에 참여했던 대기업들이 유령업체를 끼워서 2조원의 부가세를 포탈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7. 같이보기



[1] 일각에서 제시하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제안이 최초라는 설은 자서전 중 내용에 대한 해석 중의 하나인 것으로 판명된다. 또한 KBS1 다큐극장 중 '새마을운동' 편에서, 금모으기 운동 전신을 애국가락지 모으기 운동으로 소개한 바 있다.[2] 두 은행은 2001년에 서로 합병하게 된다.[3] 삼성은 세계적인 대기업이므로 '자국상품 애용'에 넣지 않는다.[4] 아래에도 나오지만 금을 헐값에 팔아 호구가 된 게 아니라 재벌들이 자기들 이익챙기겠다고 범죄행위를 한 것이다.[5] 나집 라작 전 총리의 국영투자기업 1MDB(1Malaysia Development Berhad) 스캔들로 국가부채가 심각하게 늘어났기 때문이며, 모금활동도 크라우드 펀딩 방식으로 이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