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전간기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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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1935년 10월 3일 ~ 1936년 5월 5일
'''장소'''
에티오피아 전역
'''교전국'''
<^|1>[image] 이탈리아 왕국
<^|1>[image] 에티오피아 제국
'''지휘관'''
<^|1>[image]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image] 베니토 무솔리니
[image] 피에트로 바돌리오
[image] 로돌포 그라치아니
<^|1>[image] 하일레 셀라시에
'''결과'''
이탈리아 왕국군의 승리
'''병력'''
총 50만 명
전차 795대
항공기 595기
80만 명
'''피해규모'''
전사 2만여 명
부상/질병 18만여 명
전사 27만 5천여 명
부상 50만여 명
1. 개요
2. 배경
3. 전개
4. 결과
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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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탈리아 왕국에티오피아 제국 간에 펼쳐진 두 번째 전쟁이다. 에티오피아는 이 전쟁으로 패전하여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에 편입되었다.

2. 배경


전체적인 배경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활력을 찾지 못한 이탈리아의 경제와 산업, 그리고 이를 만회하고자 하는 베니토 무솔리니파시스트 정권의 대외 확장정책에 있다. 동시에 이탈리아는 제1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패배에 따른 굴욕을 만회하고자 하는 심정이 강했고, 이탈리아령 에리트레아와 이탈리아령 소말릴란드를 육로로 연결시키고자 하는 의지도 강했다.
이탈리아와 에티오피아는 1928년에 이미 양국간 평화중립조약을 체결한 상태였지만, 1934년 11월~12월에 발생한 아비시니아 위기의 주요 원인은 에티오피아와 이탈리아 식민지 간 경계의 불분명함과 이탈리아의 영토 확장 야욕에 있었다. 이탈리아령 식민지 정부는 경계가 불분명한 지역을 자국 영토로 해석하고 군을 보내 진지를 구축, 당연히 이를 용납하지 않은 에티오피아군이 응전하여 상호간의 대규모 교전이 발생하여 양측 합쳐 1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후 양국은 서로 상대방을 맹비난하고 국경에 군사력을 증원하였으나 이 위기가 바로 전쟁으로 번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학자들은 이 때를 기점으로 이탈리아가 본격적인 전쟁 준비에 돌입했다고 본다.
한편, 당시 무솔리니는 영국, 프랑스와 함께 3국이 공동으로 독일의 재군비와 팽창정책에 맞서며 대응한다는 스트레사 체제를 구축했다. 하지만 이탈리아의 속셈은 독일을 막자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영국, 프랑스와 동맹 맺고 독일을 견제한다고 하면 우리가 에티오피아를 공격해도 영국, 프랑스가 못 본척 해 주겠지?"라는 것이었다. 국제연맹은 1935년 초부터 양국간 중재에 나섰고 영국과 프랑스도 당시에는 우호국이었던 이탈리아의 편을 들긴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위기가 확산되는 것을 막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이미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를 침공할 만반의 전쟁 준비를 진작부터 하고 있었다. 1935년 1월에는 프랑스와 조약을 맺어 에티오피아를 고립시키고 이탈리아군은 스트레사 조약이 맺어지는 1935년 4월 이전에 68만의 병력과 3300문의 기관총, 275문의 야포, 200대의 탱캣과 205대의 비행기를 에리트레아소말릴란드에 배치시켰다. 스트레사 조약이 맺어진 1935년 4월에는 추가로 8개 사단과 장비가 증원되어 6000문의 기관총과, 2000문의 야포, 600대의 전차와 400대의 항공기가 배치되었다. 이게 영국-독일 해군조약이 맺어지기 두 달 전의 일이다.
한마디로 무솔리니는 독일을 견제하는 척 하며 영국과 프랑스를 상대로 외교전을 벌여 에티오피아를 고립시켜 놓았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서 에티오피아를 침공할 준비를 이미 끝내놓고 있었다.
그리고 이후 영국-독일 해군조약으로 영국에게 뒤통수를 맞자, 이탈리아는 영프의 노력을 무시하며 에티오피아 침공을 본격적으로 준비했다.

3. 전개


에티오피아로서는 40년 전과 비교했을 때 여러 면에서 상황이 불리했다. 제일 먼저, 40년 전과 달리 이탈리아가 방심하지 않고 제대로 된 전력을 집중적으로 배치했다는 것은 아드와 전투의 승리와 같은 한타 싸움을 통한 일발 역전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국지적인 승리를 여러 차례 거두더라도 이탈리아군이 계속해서 쏟아져나오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또, 40년 전에는 전군을 에리트레아 지역에 투입할 수 있었지만 새 전쟁에서는 이탈리아가 그동안 확보한 식민지인 이탈리아령 소말릴란드와 접하게 되어서 그럴 수가 없었다. 북부와 남동부에서 동시에 방어전을 펼쳐야 했다.
실제 개전 직후 이탈리아군의 대규모 공세에 맞서 에티오피아군은 성공적으로 지연전을 펼쳤고, 오히려 1935년 12월에는 북부 전선에서 크리스마스 공세라 불리는 대규모 반격을 감행하여 상당한 전과를 거두었으며 이에 에리트레아 방면에서 진격하던 이탈리아군은 크게 후퇴해야만 했다. 그러나 에티오피아군도 깊숙하게 진격을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고, 남동부 전선에서 이탈리아군이 깊숙히 진격해오는데다 이탈리아군이 '''독가스'''[1]를 대대적으로 사용하는 등의 문제로 반격에 의한 전과를 제대로 활용할 수 없었다. 이탈리아군의 1936년 1월 공세로 에티오피아 남동부 전선은 크게 위축되었고, 2월에는 북부 전선에서도 이탈리아군이 독가스를 대대적으로 이용한 반격에 나서며 전선을 돌파했다.
1936년 3월 말이 되면 북부 전선 에티오피아군 주력 부대는 완전히 붕괴되었으며 수도 아디스아바바로 가는 통로가 활짝 열리게 되었다. 에티오피아군은 소부대 단위로 지연전과 게릴라전에 나설 수 밖에 없었고,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는 망명하여 영국과 프랑스의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정작 저 두 나라는 이탈리아의 독일 측 진영 참가를 방지하기 위해 에티오피아에 특별히 도움을 주지 않았다. 다만, 영프 양국은 에티오피아 점령 뒤에도 이탈리아 왕의 에티오피아 황제 겸임을 인정하지 않았고, 오래 지나지 않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점령 인정도 철회한다.
결국 1936년 5월 5일 이탈리아군이 아디스아바바를 점령하고 에티오피아 합병을 선언한다. 하지만 그 뒤에도 같은 해 연말까지 잔여 부대의 저항은 계속되며,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강점 기간 내내 게릴라들이 일부 지역을 장악한 채 이탈리아군과 게릴라전을 벌였다.

4. 결과


종전 후 이탈리아는 에리트레아, 에티오피아, 이탈리아령 소말릴란드를 합쳐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 식민지를 건설했고,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에티오피아 황제를 겸하게 된다. 그러나 아직도 에티오피아 각 지방에선 부족 단위로 또는 에티오피아군 잔당 출신 게릴라들이 이탈리아 통치에 반발하여 이탈리아는 강점 기간 내내 이들을 진압하느라 상당한 군사력을 소모해야 했고 끝내 완전히 진압하지 못했다. 이렇게 남은 에티오피아 저항세력은 파시스트 점령군에 맞서 외로운 게릴라전을 벌이다가,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영국령 소말릴랜드를 통해 영국군 주도 연합군 지원을 대거 받아서 오르드 윙게이트 장군 지휘 아래 성경의 기데온에서 이름을 딴 기데온 군단이란 이름으로 참전, 1941년 5월 5일 아디스아바바를 해방시키고 같은 해 말 에티오피아 전역을 해방시킨다.
이 전쟁의 의의는 '''이탈리아가 대독 공동전선에서 이탈, 독일과 협력하는 길'''을 선택했다는 데 있다. 사실 베니토 무솔리니도 처음에는 독일과 협력하기보다 그냥 영국이 뒤통수 때린 김에 식민지나 넓히자는 생각이었고 영국과 프랑스도 같은 이유로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공을 방관했지만, 이후 라인란트 재무장에서 무솔리니가 아직 에티오피아 전쟁이 끝나지 않았기에 적극적으로 영프에 협력하지 못하고 사실상 독일의 라인란트 재무장을 지지하게 되면서 영프와 이탈리아는 등을 돌린다.
이탈리아 입장에서는 일단은 반세기 전 아드와 전투의 굴욕을 갚았다는 선전거리가 되었지만, 실제 전쟁 과정에서는 태반이 제대로 근대화도 안 된 에티오피아군을 상대로 종종 졸전을 벌이며 미숙함과 부족한 역량을 노출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좀 자숙해서 역량을 먼저 키워야겠다는 생각은 안 들었는지 전쟁 끝나자마자 옆동네에서 터진 스페인 내전나치 독일보다도 훨씬 더 큰 규모의 대규모 개입을 하면서 일년 예산의 20% 정도를 까먹었다. 이는 메인 라운드라 할 만한 1939년의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졌을 때 이탈리아군이 졸전을 벌이는 주된 원인이 되었다. 국가 산업과 국력을 전쟁에 쏟아 붓는 총력전으로서의 2차대전은 적어도 이탈리아에게는 1939년이 아닌 1935년 에티오피아 침공으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패전 후 영국으로 망명 간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유명무실했던 국제연맹 회의에 출석하여 이탈리아가 참칭 중인 에티오피아 황제직이 가짜 자리로 인정되어 '에티오피아 제국의 황제 폐하'로 정중하게 소개되었고, 이탈리아의 제국주의적이고 잔인한 침략전쟁을 강하게 규탄했으며, 이는 회의에 참석했던 각국 대표들에게 비장하지만 동시에 결연한 의지가 보이고, 차분하면서도 단호하게 자국의 정의를 호소한 명연설로 칭송받았다. 하지만 이 당시 국제 여론이 좋아봐야 애초에 난리치고 깽판치는 나치 독일, 일본 제국 같은 국가들이 국제 여론을 신경 쓰고 사는 국가들이 아니니 실질적 효과는 없었다. 그래도 미국, 소련 두 강대국이 에티오피아 점령의 합법성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에 의의가 있었다. 하일레 셀라시에가 입장하자 갈레아초 치아노 백작의 지시를 받은 이탈리아 측 대표들과 언론인들은 야유와 함성을 내지르며 셀라시에의 연설을 방해하려 했다. 아무리 인종차별과 사회진화론이 판치던 시대라지만 한 나라의 군주를 상대로 열등 인종 깜둥이 드립을 치며 훼방을 놓으려 한 것이다.[2] 이 꼴을 보다 못한 다른 나라 대표들은 눈살을 찌푸리기 시작했고, 결국 외교적으로는 우방국에 가까웠던 루마니아 왕국[3] 대표로 자리에 참석해 있었던 니콜라에 티툴레스쿠(Nicolae Titulescu)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이탈리아 측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프랑스어로 '''"누가 저 야만인들에게 출구 좀 보여줘라!(A la porte les sauvages!)"'''[4]라고 일갈하자 인종차별하다 막상 자신들이 야만인 취급받은 이탈리아 측 인사들은 퇴장당했다.
에티오피아는 점령당한 후 인종차별적 법안과 강제 노역으로 가득 찬 이탈리아 점령당국의 학정에 시달리며 레지스탕스를 조직하여 싸우다가 제2차 세계 대전 초반인 1941년 영국군 주도 연합군에 의해 해방된다. 비록 점령 기간이 짦았지만 이탈리아 점령당국은 에티오피아의 주류 민족인 암하라인들을 비롯한 '''같은 기독교를 믿는'''[5] 에티오피아 테와히도 정교회 중심 민족들은 탄압하고, 중간행정직 같은 위치에 그동안 암하라인들과 반목했던 무슬림 소말리인, 오로모인들을 채워 놓으며 훗날 에티오피아 제국의 내부 갈등에 큰 씨앗을 남겨 놓았다.
이탈리아군은 에티오피아인들을 가혹하게 디루었다. [6] 로돌포 그라치아니 사령관은 누군가 자기를 암살하려고 했다는 이유로 3만명을 학살했으며, 낌새가 수상하다며 정교회 사제들이 가득 차 있었던 데브레 리바노스 수도원을 수백명의 순례객들과 함께 불태워버렸다. 이 '아비시니아의 도살자' 로돌포 그라치아니 사령관은 전후 처리를 하는 동안 승전국 에티오피아[7]의 기소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무 죄값도 치르지 않고 제명에 죽었다. 당장 1943년 무솔리니 실각 후로도 충성스러운 그의 부하 노릇을 하였으며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소속으로 자국인 이탈리아 빨치산들도 엄청나게 죽인 전적 덕분에 본인도 전쟁 끝나고 무사하게 넘어 갈 거라 생각을 안했다. 하지만 빨치산의 대다수를 장악했던 이탈리아 좌파에 맞서 우익 세력을 키워 줄 필요가 있었던 영국과 미국 당국의 개입으로 징역 19년 판결을 받고 몇 달 뒤에 바로 풀려났다. 독일과 일본에서 그러하 듯 냉전으로 덕을 본 케이스다.
사보이 왕가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5년여 간 에티오피아 황제위를 겸임하면서 짧게나마 황제 노릇을 해봤지만, 불과 5년이 지나고 자국 식민지가 전부 증발하는 것을 볼 수 밖에 없었으며, 10년 뒤엔 이탈리아 국민들의 선택으로 자신의 가문이 이탈리아 왕좌에서 쫓겨나며 본인도 외국으로 망명하는 치욕을 경험했다.[8]

5. 여담


1935년 10월 3일, 이탈리아 왕국군은 에티오피아에 대한 전면적인 침공에 나섰다. 이탈리아군의 투입병력은 총병력 50만에 항공기 600여 기, 전차 600여 대로 이탈리아가 투입 가능한 거의 대부분의 전력이었다. 이탈리아군의 졸전 기록이나 각종 인터넷에서 돌아다니는 글에서는 고작 에티오피아를 치는데 전력을 기울여야 하는 이탈리아라며 비웃지만, 사실 에티오피아는 최대 80만명의 군대를 가지고 있었고 기본적으로 고원지대이다. 이를 무시하고 1만여명으로 침공에 나섰다가 아드와 전투에서 참패한 적도 있다. 그렇기에 저 정도 전력 투입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1] 이탈리아는 생화학무기 사용을 규제한 제네바 의정서에 대해 10년 전 서명한 상황이었다.[2] 아무리 시대가 시대였다 해도 공식석상에서 다른 나라의 군주를 상대로 인종드립을 친다? 인종차별이 남아있던 시절에도 인종보다는 계급이 우선이었고 그 때문에 월남 황제가 프랑스를 방문했을 때 프랑스인들이 예를 표했다. (멀리 갈 것 없이 한국의 초대 대통령이자 양녕대군의 16대손인 이승만이 미국 생활을 했던 시절에 자신을 프린스 리로 자칭하자 현지의 백인들이 그래도 과거 왕족이었다고 다른 동양계 미국인들과 다르게 본 것은 물론이고 그냥 동양계라면 안 만나줄 것을 왕족 출신이니까 만나줬던 사례가 있었을 정도로 나름 잘 먹혔다. 독립 이후 왕정이나 신분 제도 자체를 경험해 본 적이 없는 미국인들조차 이랬는데 저때 당시 왕정이 유지되고 있던 국가가 즐비한데다가 공화정으로 전환한 국가들조차 왕정이 폐지된 지 수 십년 밖에 안 되었던 유럽 국가들의 국민들이 왕, 그것도 외침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왕위를 잃어버린 국왕 본인에 대해서 예우를 안 해 줄리가 없다.) 게다가 에티오피아는 당시 유럽인들 사이에서도 아드와 전투 같은 전례 뿐만 아니라, 고대부터 기독교 국가였다는 점을 매개로 중세부터 그 존재가 알려 있었던 당당한 민족의 가족들(family of nations) 중 하나였다. 그 제국주의 시대에도 '이런 제국을 세운 사람들이 미개한 흑인일리 없다'라며 구성 민족이 사실 그리스 로마의 후예라고 하면서까지 띄워줬던 게 에티오피아다.[3] 베니토 무솔리니는 루마니아를 같은 로마 제국의 후예라면서 엄청 띄워줬다.[4] 티툴레스쿠는 프랑스 파리 대학에 유학한 엘리트 출신으로 외무장관 등의 요직을 거친 루마니아의 외교관이며 국회의원이었다. 그는 루마니아 상임대표로 두번 선출되었던 인물로서 파시즘의 행보를 걷던 루마니아와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던 인물이다. 이 강골의 지식인은 후에 들어서서 독일의 개 노릇을 자처하고 나선 루마니아 파시스트 정권을 정말 가루가 되도록 씹었으며 결국 1941년 3월 17일 망명지인 프랑스 에서 지병으로 사망했다. 이때 지병으로 죽은 것이 오히려 다행일 수도 있는 게, 몇 달 후 프랑스가 독일군에게 점령당했기 때문이다.[5] 사실 기독교가 다른 종교들에 비해 유달리 종파간 갈등이 심한 종교이기도 하다. 일부 근본주의 가톨릭교, 개신교 신자들은 서로를 진짜 기독교도로도 안보는 경우가 흔하며 16세기 종교개혁때도 교황령이 교황의 권위를 부정하는 개신교도 수십만명을 종교재판으로 처형하기도 했고 요새엔 개신교도들끼리도 교파에 따라 기독교인 취급도 안하는 경우가 많다. 거기에 비칼케돈파 종파였던 테와히도 정교회를 가톨릭을 믿는 이탈리아인들이 탄압하고 차별하는 것은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6] 소위 신사적인 모습으로 그려지는 이탈리아군이지만 에티오피아전에서의 이탈리아군은 파시스트 침략군의 스테레오타입 그대로였다. 실제로 이탈리아 역사학계 내에서는 한바탕 시끄러운 수정주의 논쟁을 거치며 도달한 결론이지만, 현대 크로아티아달마티아 해안처럼 (파시즘 성향을 띈 민족주의자들에게) 이탈리아의 성스러운 고토로 취급받았던 지방들에선 이탈리아군이 나치와 별 다름 없이 패악질을 저지르며 인종청소를 자행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절 트리에스테를 주도로 오스트리아령 연안주(Österreichisches Küstenland/Litorale Austriaco)라 불렸던 지방은 슬라브인들을 겨냥하여 지역 인구 20%를 살해한 전적이 있으며, 비슷한 분쟁지역이었던 쥐트티롤 같은 지방은 독일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대놓고 학살만 안 했지 심한 문화, 언어적 탄압을 가했다. 움베르토 에코의 말마따나 이탈리아의 파시스트들은 독일만큼의 국력이 없어서 패악질을 나치 스케일로 치지 못했던 것 뿐이다.[7] 1941년 해방된 그 해 영국은 미국의 압력을 받아 에티오피아 독립을 다시 승인하고 조약을 맺어 연합군의 일원으로 편입시킨다.[8] 물론 그 황위란 것을 막 겸임하던 때조차도 새로운 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 소련 양국은 점령 인정의 합법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잠시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점령을 승인했던 영국, 프랑스도 그의 황제위 겸임은 끝내 인정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