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마을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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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 세대의 생존은 유한하나 조국과 민족의 생명은 영원한 것. 오늘 우리 세대가 땀 흘려 이룩하는 모든 조국과 민족의 생명은 영원한 것. 오늘 우리 세대가 땀 흘려 이룩하는 모든 것이 결코 오늘을 잘 살고자 함이 아니요. 이를 내일의 세대 앞에 물려주어 길이 겨레의 영원한 생명을 생동케 하고자 함이다.
박정희 前 대통령
대한민국 농촌 현대화를 추구하며 한 지역사회개발운동이다.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 / 너도 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
새마을노래의 첫 구절
1970년 4월에 당시 박정희 정권이 전국지방장관회의에서 새마을 가꾸기 운동을 거론, 동년도 5~6월에 구체적인 방안이 마련되어 전개된 농촌 계몽 운동이며 근면(勤勉), 자조(自助), 협동(協動)을 3대 정신으로 꼽았다.
2. 배경 및 전개
1969년 11월에 농촌근대화촉진법이 발표되고, 이어서 1971년부터 시행되기 시작한다. 1973년부터는 대통령실과 내무부에 관련 조직이 설치되었고, (내무부 지방국 새마을지도과, 새마을운동중앙협의회) 새마을지도자연수원(새마을운동중앙연수원의 전신)이 신설되어[1] 새마을운동 지도자의 교육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1975년에는 도시와 공장으로도 확대되었다.
'''새마을운동 계획자'''는 前 건국대학교 부총장이자 농업전문가, 유대인 전문가로 유명한 류태영 박사다. 고학으로 대학교까지 졸업한 류박사는 앞으로 국가를 위해 뭘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중 우연치 않게 덴마크 왕실의 후진국 특례 유학생 제도가 있음을 확인하여 영문으로 자신의 농촌 계몽 의지를 피력했다. 그리고 그 뜻이 수용되어 약 10여년 간 유럽 각국과 이스라엘 등을 다니며 농촌 계몽과 현대화 등을 연구하고, 이스라엘에서 농업교수를 역임한 후 귀국하여 새마을운동을 이끌었다고 한다.
한편 새옹지마가 될 일이었는지, 쌍용양회가 생산하는 시멘트 재고가 쌓여서 회사가 휘청거리게 되자 정부가 이 시멘트를 모조리 사들인 상황이었다고 한다. 이것이 마침 세워졌던 새마을 계획과 결합되면서, 전국에 한 마을당 600포씩 뿌리는 식으로 재고를 처리할 수 있었다고 한다.[2] 당시 거의 전국의 초가집을 헐고 시멘트집을 짓는데 만약 이걸 다 새로 생산했으면 그것은 그것 나름대로 만들 노동력이나 자금 면에서 손실이 컸을 것이 뻔하다.
새마을운동은 다음과 같은 단계로 진행되었다.
- 기반조성단계(1971~73): 새마을운동 의식을 확산, 기반구축
- 자조발전단계(1974~76): 경제난 해결에 주력
- 자립완성단계(1977~80): 국력 신장, 농어촌의 복지 향상 사업
- 민주복지완성단계(1981~): 5공화국 이후 민간 주도의 새마을운동으로 바꾸었으나, 이후 1988년 5공화국 청문회에서 사업을 민간에 넘기는 과정에서 많은 부패가 발생하였다는 사실이 밝혀져 문제가 되었다. 이 단계에서 새마을운동 사업은 상당히 위축되었다.
- 초가집을 없애고 슬레이트 지붕으로 고치기 및 서양식 현대화 주택 건설[3]
- 농기계 등 첨단 장비 보급
- 기존 흙길을 시멘트 or 아스팔트 길로 포장
- 도시 및 도로 미화 사업
- 새마을지도자들을 양성, 각종 교육 시행[4]
- 기타 정신적 교육[5]
3. 상징물
새마을의 대표적 상징물은 '''새마을기'''이다. 초록색 바탕에 노란색 동그라미 그리고 그 안에 초록색 새싹이 자라나는 모습을 담은 로고에 박정희의 글씨로 '''새마을'''이라는 흰 글씨를 쓴 깃발로 1970년 새마을운동 초창기 때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1절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
너도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
2절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
푸른동산 만들어 알뜰살뜰 가꾸세
3절
서로서로 도와서 땀흘려서 일하고
소득증대 힘써서 부자마을 만드세
4절
우리모두 굳세게 싸우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싸워서[7]
새조국을 만드세후렴
살기좋은 내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
녹색바탕은 농촌의 녹색혁명을 상징하며, 황색원은 협동과 부 및 무한한 가능성을 표시, 녹색의 잎과 싹은 근면·자조·협동의 새마을정신 및 희망과 소득을 상징, 줄기의 밑이 넓은 것은 안정과 번영을 표시한다.
1970년 새마을운동 전파와 홍보를 위해서 관공서와 기업체의 국기 게양대마다 태극기와 함께 의무적으로 게양되었던 깃발이었기 때문에 관공서와 기업체 국기 게양대에 새마을기가 게양되어 있었고 깃발 외에 마을 입구 표지판이나 비석 등에도 새마을 마크가 새겨지기도 하였다. 현대에는 농촌이나 산촌 위주로 새마을기를 계속 게양하고 있으나 문민정부 출범 이후 새마을기의 공공기관 의무 게양 조항이 사라졌고 새마을운동 정신의 무분별한 강조는 곧 유신정권의 잔재라는 지적이 나오면서 새마을기를 달지 않는 기관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물론 현재도 농촌지역 지자체 기관이나 기차역에는 새마을기가 걸려있는 곳이 적지 않다.
드물게 패션 아이템으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는데, 예를 들자면 농활 봉사활동을 한다거나 체육대회에서 단체복을 만들 때 사용하는 등, 일종의 빈티지/농촌 느낌이 나는 표식으로 사용중인 듯하다.
4. 결과와 계승
새마을운동으로 이루어낸 전국적으로 생활 환경 및 국민 위생 개선, 농로 등의 인프라 구축 등은 대단한 결과임에 틀림없는 사실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한국 농촌에서 초가집은 이때 사라졌다'''는 것으로 설명해도 될 정도. 현재에도 농촌에서 "새마을운동"이라는 문구가 갖는 힘은 대단하다. 아예 새마을 모자가 농촌을 상징하는 물건 중 하나로 자리잡았을 정도다. 예를 들어 정태춘 박은옥의 노래 "고향집 가세"에는 가요로서 드물게 농촌 고향의 상징으로서 새마을 모자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TV 예능에서는 이 새마을 모자를 이장의 상징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예전 개그 콘서트 봉숭아학당의 "그까이~꺼 이장" 장동민이나 청춘불패의 남희석 등. 물론 원조는 같은 방송국 유머 1번지의 코너 "괜찮아유"에서 최양락이나 김학래가 쓰고 나오던 것이긴 하다.
1988년도의 제5공화국 비리규명 청문회에서 밝혀진 문제점[8] 에 따라 한동안 새마을운동은 위축되었으나, '''제2새마을운동'''으로 새롭게 사업을 전개해 왔다. 문화·시민의식의 선진화, 서로 돕는 복지공동체 만들기, 지역 활력 찾기, 친환경 조성, 국제·통일 협력사업등을 목표로 활동했다.
현재는 '''새마을운동'''이란 이름으로 새롭게 사업이 전개되는 중이다. 2018년도는 사회공동체운동, 경제공동체운동, 문화공동체운동, 환경공동체운동, 지구촌공동체운동을 중점운동으로 추진하고 있다. 이를 통해 가정새마을운동, 지역사회새마을운동, 지구촌새마을운동분야에서 활동하며 나라 발전의 기틀 마련과 공동체 의식 제고, 지구촌 공동 번영을 목표로 활동하고 있다. 지금도 다양한 형태로 새마을운동 관련 조직이 운영되고 있으며, 예전에 비해 역량이 줄어든 감은 있었지만 그래도 지역에서 다양하게 활동하고 있다. 새마을운동을 주관하는 새마을운동중앙회는 1980년 12월 1일 새마을운동중앙본부로 사단법인 인가를 받아 창립되었다. 새마을운동조직육성법은 1980년 12월 13일 법률 제3269호로 제정되었다.
문재인 대통령도 2019년 10월 29일 전국새마을지도자대회에 참석해 "세계는 '새마을운동'이 이룬 기적 같은 성과에 주목하고 있다"며 과거 새마을운동이 한국 경제발전에 이바지한 점을 높이 평가했다. #
4.1. 전파
새마을운동은 세계에서 상당히 높게 평가 받고 있는 한국의 정책중의 하나다. 제3세계 국가들이 새마을운동에 괜히 큰 관심을 보이는 게 아니다. 대한민국의 급속한 경제발전에 영향을 준 것 뿐만 아니라, 농어촌 지역의 빈곤 극복과 복지 향상을 이뤄냈다는 점에서 큰 지지를 받는다. 경제개발협력기구(OECD)도 새마을운동을 연구하고 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아프리카의 유엔 산하기관에 한국의 새마을운동을 배울 것을 권고했다. 콩고, 가나, 케냐, 남아프리카공화국 등이 새마을운동을 수입해간 주요 국가이며, 다양한 국가에서 새마을운동을 배우기 위해 연수생 신분으로 한국에서 노력하고 있다.# 콩고에서는 지천에 널린 진흙으로 벽돌을 구워 (흡사 50년대 한국의 신흥주택처럼) 양옥집을 짓는 사업이 꽤 쏠쏠하다는 듯.
또한 중국의 일부 지역에도 전파되었다. 중국어로는 한국신촌운동(韩国新村运动)이라 번역하는데 특히 중국의 덩샤오핑은 중국어로 번역된 새마을운동 관련 서적을 당 간부들에게 나눠주며 새마을운동을 배우라 지시했을 정도. 위에 소개됐던 류태영 박사도 새마을운동 전파를 위해 중국을 여러 차례 방문하기도 했다. 후진타오 주석도 새마을운동을 공부했으며, 이를 모방한 "신농촌운동"을 추진하고 있다.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초청 연수나 기타 인재개발원 연수 사업도 포괄해서 새마을운동 전파사업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대개 이런 초청 연수는 새마을운동 발상지 기념관, 농업기술원, 농촌 정보화마을등과 포스코, 현대자동차, 삼성전자 등의 산업현장으로 견학을 하게 된다. 일부 연수를 온 인사들의 경우 대규모 산업을 견학하면서 규모에 압도 당해 오히려 절망하는 부작용도 있는 듯 하다. 자신감 상실까진 우리가 어떻게 못 도와준다
페루에서 당시 대통령이던 알베르토 후지모리가 새마을운동을 수용하였다가 결과적으로 실패했던 이후로는 위상에 타격이 가기도 하였다. 그러나 미얀마가 부분적 민주화를 이룬 직후 새마을운동을 적극 수용하기로 하자 다시 이를 전파하기 위한 노력이 확대되고 있다. 미얀마의 첫 민선 대통령이 새마을연수원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특히 미얀마의 경우 새 도읍지인 네피도가 아직 건설이 충분히 끝나지 않아 이에 대한 개혁 의지가 매우 강하다.
5. 비판
새마을운동은 후진국의 산업화로서는 뛰어난 성과를 거둔 모범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전례가 없었던 것은 아니며 한국만이 이룰 수 있었던 성과라고 보기는 어렵다. 예를 들어 자재의 배급과 함께 자치적인 개발 경쟁을 유도하여 건설 붐을 일으킨 사례는 계획 경제 체제를 가장 먼저 시행한 소련의 스타하노프 운동을 들 수 있으며, 그 효과도 톡톡히 거뒀다.대대적인 새마을운동 전개에는 경제적 동기보다 지지기반이 취약했던 정권이 상대적으로 통제가 용이했던 농촌사회를 조직하고자 했던 정치적 동기가 더 작용했다. '''일제의 '농촌진흥운동'이나 '농촌중견인물양성'이 실제로는 전통향촌사회를 재편하는 수단으로 기능했듯이''', 새마을운동 또한 1인 독재를 유지하기 위한 정치선전과 체제동원의 매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 민족문제연구소 자료연구실
또한 한반도 내에서도 1950~60년대 북한의 천리마 운동과 청산리 방법 등이 일반민의 의식 개혁 및 자발적 참여 유도 운동이라는 차원에서 선례로 존재하고 있었으며, 이는 그 당시에도 알려져 있었다.[9]
조선총독부에서 실시한 근대화 정책과도 비슷하다는 지적이 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권위적 근대화라는 차원에서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의 근대화 정책은 이미 제국의 형태를 갖추었던 일본의 막대한 자금력이 투입되어 말 그대로 위로부터 시행된 것이고, 일반민의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내지 못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차이가 있다는 주장이 있다. 새마을운동의 경우는 총독부와 같은 일방향적인 구도보다는 일반민의 호응을 얻어 시행되는, 앞서 말한 소련, 북한 등의 인민 동원 체제와 유사하다. 사실 조선총독부의 근대화 정책보다는, 만주국의 농촌진흥운동과 닮아있다. 기시 노부스케가 만주국 관료를 지내며 그 악명을 높이던 시절에 입안했던 것이 바로 만주국의 농촌진흥운동이며, 박정희 본인 또한 만주국 소속의 군인이었으니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당연히 비판점을 볼 때도, 이러한 일반민 동원 체제의 전체주의적 문제점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새마을노래와 함께 아침 일찍 기상하기 등 "일사불란"을 요구하는 동원적 수단, 희망적 전망에 대한 적극적 참여 등을 이용하면서 실질적으로 반강제의 체제 협조를 이끌어냈다는 것이다. 새마을 청년회 등에 반강제로 가입을 시킨 후에 다리나 제방 공사 당시 "자기 마을의 일"이므로 적극적인 참여를 당연시했던 것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는 일. 이 사업으로 농촌은 더욱 집단화되었다. 때문에 비판하는 측에서는 대개 국민교육헌장과 함께 박정희 정권의 "국민 국가 만들기"라는 점을 짚는 편이다.
겉으로 보기 좋은 성과는 만들어냈으나, 새마을운동으로 막고자 했던 농촌 사회의 붕괴는 억제하는 수준에도 머무르지 못했다. 1970년대 농촌 쟁의는 결국 새마을운동이 농촌의 구조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강 교육자 겸 동화 작가 문관식이 쓴 <밤나무골 아이들>이라는 창작 동화(꿈동산 마이프렌드라는 창작동화 시리즈에 실렸다)에서는 새마을운동 당시의 농촌을 묘사하면서, 새마을운동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은근히 보여주고 있다. 참고로 어린이들이 읽는 동화, 그것도 1980년대에 쓰여진 작품이다. 그 때부터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은 비판적으로 봤다는 이야기.
지붕 교체 사업 당시 지붕을 슬레이트로 했다가 슬레이트가 썩자 석면이 검출된 것 역시 큰 문제가 되었다. 일단 당시의 기술이나 경제 상황으로 보았을 때 석면을 쓴 것이 잘못된 결정이었던 건 아니었다. 석면의 위험성이 영국에서 대두된 시기는 1924년이나, WHO 산하 IARC에서 석면을 발암물질로 확정한 시기는 1987년이다. 즉 새마을운동이 한창이었던 1973년~1979년에는 석면의 위험성이 제대로 안 알려져있었고 오히려 그 유용성 덕분에 잘 쓰였던 것이다. 결국 이후의 시점에서 보면 잘못된 것이 맞지만 어느 정도 감안할 점이 있었다는 것만 알아두자.
전통문화의 급격한 상실도 문제가 되었다. 물론 산업화와 그에 따른 급격한 사회변화로 어쩔 수 없는 부분도 분명 있지만 당시 보존해야 할 전통까지 밀어붙이기 식으로 파괴한 경우가 많다. 특히 무속문화가 가장 큰 피해를 입었는데 각 마을 마다 존재하던 서낭당, 마을 굿 같은 것은 조직적으로 파괴되었다. '''심지어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으로 등재된''' "제주칠머리당 영등굿"의 경우 조차도 미신타파의 명목으로 굿을 금지하면서 하마터면 전승이 끊길 뻔 했다. 이를 두고 논했는지는 몰라도 도올 김용옥이 대학생 시절에 "새마을운동은 문화박멸운동이다"는 논지의 글을 학교신문에 발표했다가 뼈아픈 곤욕을 치른 적이 있다. 또한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이만열) 교수도 이 문제를 지적하였다. 보기 그리고 당시 전해지던 여러 고택들과 향교도 상당수 자취를 감추었다. 그 예로 새마을 운동당시 사라진 제주향교 명륜당을 예로들수 있다.
또한 새마을운동으로 농촌에 "개혁"을 시행해봤다고 보기엔 성과라고 할 것이 전무하지 않느냐는 비판도 있다. 새마을운동이 시행된지 40년이 지난 지금도 '''한국의 농업이 세계적인 수준에는 전혀 미치지 못 한다는 점'''이 이런 시각을 떠받치고 있다. 이러한 한계로 인해 장기적 이농현상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은 새마을운동의 목적이 사실은 오히려 농촌 붕괴를 조장하는 것 아니었냐는 비판까지 유발하고 있다. 실제로 19세기 영국에서도 정치인들 입장에서는 이농현상을 오히려 호의적으로 해석한 선례가 있기 때문에 당시의 영국보다도 훨씬 가파른 산업화를 겪었던 한국의 경우는 정부가 아예 이농현상을 의도적으로 부추겼으리라는 시각을 가지는 것도 그다지 무리가 아니다.[10][11]
처음부터 시멘트를 다량으로 동원하는 사업이었기에 전쟁 상황에 대비할 수 있는 방공호를 같이 지었다면 더 효율적이었음에도 예비군까지 동원을 추진한 정권이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그런 것은 지지부진했고,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외에도 새마을운동은 농촌 현대화 운동 이상으로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주도되는 프로파간다적 선전물로 적극적으로 활용된다. 때문에 일부에선 일본과 비교하며 자력갱생’과 ‘농가경제부흥’을 내걸었지만 농촌 통제 수단으로 작용한 일제의 농촌진흥운동과 국민총력운동은 ‘유신체제의 실천도량’으로 불린 새마을운동과 빼닮아 있다고 통렬하게 비판했다.##
이후 새마을운동에서 이름을 딴 새마을호 새마을 이름과 기호를 새겨넣은 모자와 깃발, 그리고 새마을연극까지도 생겨난다.
새마을연극은 유신정권의 이념을 선전하고 국민을 동원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극으로 새마을연극의 체계적인 지원과 육성책은 정부(문화공보부)에 의해 진행되었다.. 1972년에 시작된 ‘새마을연극운동’은 유신의 대표적인 이데올로기인 새마을운동의 정신을 유포하기 위하여 국가 주도로 이루어졌고 새마을 극본의 보급, 학교 및 직장에 새마을연극을 공연하기 위한 극단 조직, 전국 새마을연극 경연대회 개최, 새마을 소재 연극의 지방 순회공연 등을 핵심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때 대한민국 정부는 새마을희곡의 창작을 활성화하기 위해 문예창작공모 및 구입ㆍ출판ㆍ배포 그리고 문학상 제정 및 시상, 문인들의 새마을운동 현장 답사, 새마을희곡집 발행 등을 했다. 명분은 문화 예술 진흥이나 실질적으로 '''"새마을연극은 전 국민을 대상으로 유신정권의 이데올로기를 학습시켜, 당대의 국민을 유신정권이 상상한 이상적인 국민으로 결집시키기 위한 도구로 활용되었다."''' 때문에 유신정권의 말로와 더불어 가치와 유효성을 상실하였다 선전과 동원 정치로서의 새마을연극
5.1. 반론
그러나 위에서 천리마 운동과 청산리 방법을 새마을운동과 1:1로 대응되는 유사품처럼 서술한 데에는 어폐가 있다. 일단 천리마 운동과 청산리 방법이 적어도 6년간 북한의 고속성장을 견인한 것은 사실이나, 이 당시에도 이미 60년대 후반부터 제조업 가동률이 현저하게 저하되고 있다는 문제점이 지적되었다. 그리고 천리마 운동과 새마을운동의 가장 결정적인 차이점은 전자와 달리 후자는 '''가계소득 증진'''에 가장 집중했다는 점이다. 반대로 천리마 운동은 자발적 참여 운동을 내걸기는 했지만 여전히 '''집단농장 체제'''를 전혀 부술 생각이 없었다는 태생적 한계가 있었다. 오히려 젊은 당 간부들과 소련에서 유학한 경제학자들이 '''자주관리'''의 효율성을 역설하며 당시 소련과 헝가리가 했던 경제개혁을 본받자고 했지만 김일성은 이를 그저 우습게 여겼다. 더군다나 그 이후 김정일이 권력을 휘어쥐자 유일 수령제가 강화되면서 이런 목소리는 나오는 족족 입막음당하고 여전히 집단농장 위주의 대중 동원만이 강화됐다. 하다못해 집단농장의 자율성을 높여 일종의 영농법인처럼 기능하게 만들고 노동자들의 이직을 자유롭게 하였다면 유능한 노동자들은 더 나은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집단농장으로 이직하거나 노동력 부족에 시달리던 도시의 공장으로 취업하는 방식을 통해 가계소득을 효과적으로 올려나갈 수 있었겠지만 문제는 이게 되면 공산주의가 아니다.(...)
농촌 쟁의가 당시 지역 여론의 대세를 이루었는지는 아직도 학자마다 의견이 분분하므로 함부로 단정지을 문제는 아니다. 6-70년대 당시는 오히려 '''여촌야도'''라 하여 오히려 수도권에서 민주공화당의 득표율이 바닥을 기어 사실상 농촌에서의 득표율에 기대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농촌의 민주공화당 지지세가 옳은가 그른가에 대한 문제를 떠나서, 농촌 쟁의가 지역 여론의 대세를 이루었다면 이러한 정치적 경향이 나타났다는 사실은 설명하기가 힘들어진다. 결국 농촌 쟁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수도권의 경공업 현장에서 일어났던 노사분규들과는 그 정도가 달랐고, 새마을운동이 농촌 쟁의의 확대를 어느 정도 저지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위에서는 새마을운동의 목적이 사실은 이농현상을 부추기는 것 아니었냐는 비판이 있으나 이는 도리어 20세기 후반에 새 행정부가 집권할 때마다 당면해야만 했던 문제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일단 70년대를 기점으로 농업 인구가 크게 줄었던 것은 사실이나 이를 무조건 농촌에서 수도권으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은 사실관계에 어긋난다. 이는 행정구역의 변화로 따졌을 때, 새마을운동이 시작된 이후로 읍이 시로 승격되는 비율이 거듭 증가했음을 간과한 주장이다. 오히려 새마을운동이 정착한지 20년이 흐른 90년대는 도농복합시를 도입하여 대대적인 도농 통합을 추진해야 했을 정도다.[12]
해방 이후로 한국 농업은 기계화 및 정보화 도입을 통해 단위 면적당 필요한 인력은 계속 감소하고 있는 것이 추세였고 이 추세는 변화한 적이 없다. 이 상황에서 농촌 인구가 그대로 농촌에 남아있어야 한다고 국가가 주장한다면 이는 이 지역에서 엄청난 실업이 일어나는 것을 의도적으로 조장하게 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런 정책을 실제로 취한 것이 중화인민공화국이고 농민공 문제는 농촌과 도시 양 쪽에서 전부 난처함을 토로하고 있는 상황인데다가 호적을 기준으로 직업 선택을 사실상 강제하는 이 정책은 아예 새로운 신분제로 등극하고 있는 수준이다. 뿐만아니라 당시 도시에서는 공업과 서비스업의 급격한 팽창으로 초중등 교육을 이수한 교육받은 노동력이 시급하게 필요해지는 상황이었는데 새마을운동으로 인한 농촌 지역의 소득 향상은 자연스럽게 교육수준 향상으로 이어졌고 이 인력들이 도시로 공급되는건 일종의 필연이었다. 농촌지역의 공업화도 일부 진행될 수는 있지만 이 정도의 발전으로 농업 고도화로 인한 지속적인 노동수요 감소에 대응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대약진운동 수준의 나이브함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이촌향도를 농촌 황폐화의 지표라고 보는 것은 비현실적인 측면이 매우 크다는 것이다. 농촌 지역에서 필요한 인구 자체가 줄어들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감소하는 농업 일자리 상황에 맞게 과잉할 것으로 예상되는 인구에게 새로운 일자리를 제공해주는 것이 오히려 국가가 최우선으로 해결해야 하는 과제였다고 할 수 있고 이러한 전환은 매우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노동인구의 전환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농촌에 남겨질 것은 심각한 수준의 실업, 불경기와 그로 인한 치안 불안과 범죄, 그리고 이로 인한 가계 소득 저하와 뒤를 잇는 교육 수준 저하로 인한 생산성의 하락이라는 악순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새마을 운동으로 인해 일어난 이촌향도는 농업 생산력의 극대화와 함께 공업화를 가능한 수준으로 진행하여 농촌에 남을 인구에게 지속적으로 높은 삶의 질을 제공하고 이런 정책으로도 전부 수용할 수 없는 떠날 인구에게도 더 좋은 일자리를 가질 기회를 제공하는 정책의 일환 속에서 벌어졌다고 봐야 하는 것이다. 이촌향도는 절대 '''모든''' 인구가 농촌을 떠난다는 의미가 아니라 '''과잉한''' 인구가 새로이 성장하는 산업분야의 일자리를 찾아 이동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와 문화라는 부분에 있어서도 전통적인 농촌 사회구조는 애초에 지속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칼 마르크스가 이야기 했듯이 토대가 상부구조를 정의한다. 산업혁명의 물결이 이제 농업 생산 방식에까지 몰려오고 있는데 전통적 생산방식에 기반한 전통적 사회구조라는 것은 존속이 당연히 불가능할 수 밖에 없고 제도나 문화와 같은 것들도 전환된 생산방식에 따라 재정의될 수 밖에 없다. 전통문화의 몰락 역시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볼 수 밖에 없고 애초에 세계적으로 그 전통문화라고 하는 것이 실제로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200년을 넘는 것이 거의 없다.''' 전통문화적 요소라고 인식되는 것들은 대부분이 근대 민족주의의 발흥과 함께 필요에 따라 발명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당시 정권이 수도권으로의 이주를 의도적으로 부추겼다는 믿음과 달리, 오히려 산업화 과정에서 서울의 인구과밀이 정부의 당면적 과제로 떠올랐고 이에 대한 대책이 활발히 논의되고 있었다. 대한민국의 모든 정권은 서울과 수도권에 주택을 공급하는데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예나 지금이나 수요는 항상 공급을 아득하게 능가하고 있고. 오히려 서울 인구의 폭증을 정부에서는 통제불능의 상황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광주대단지사건'''은 바로 이런 정부 인식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는데 사기에 가까운 조건으로 서울 저소득층을 성남시로 밀어내면서 붙인 조건이 무려 '''다시는 서울로 되돌아오지 않는다'''.라는 것이었다. 또한 호서 지방으로 행정수도를 이전한다는 계획을 세워 그 초안을 작성하기도 했다. 서울 인구 집중의 문제를 정부 차원에서 쓸 수 있는 제일 강력한 극약처방을 통해 근본적인 수준에서 해결하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정작 행정수도 이전이 다시 논의되었던 참여정부 시기에 한나라당이 대통령 탄핵을 표결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에 이 계획이 70년대에 작성되었음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13]
또한 위에서 남한 국토에 방공호가 부재함을 지적한 것도 사실관계에 부합한다고 보긴 힘들다. 결정적으로 지금도 '''전방이나 서해 도서지역은 방공호가 있다.''' 연평도 폭격 당시 주민들이 피신한 방공호가 새마을운동 당시에 지어진 것이다.[14] 그리고 효율적이었을 거란 이유로 당시에 사방팔방 방공호를 짓고 다녔다면 오히려 호평은 커녕 쓸데없는 자원낭비, 인력낭비, 노동낭비라고 비난만 나왔을 것이다. 실제로 알바니아의 엔베르 호자가 국토 전역에 토치카를 무차별적으로 지었다가 '''지금까지 까이고 있다.'''
6. 여담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로, 새마을운동 이전에 '재건국민운동'이라는 것이 있었다. 농촌운동가 류달영 박사(1911~2004)가 주도한 것인데, 새마을운동과 다르게 국가주도가 아닌 국민들의 자발적 생활수준 개선을 강조한 것이었다[15] . 비록 그 자체는 실패했지만 새마을운동의 모델 중 하나가 되었다.[16]
당시 박정희 정권은 새마을운동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류태영 박사가 새마을운동의 성패는 고위 공직자의 정책 이해와 솔선수범에 달려있다고 말하자 삼일 후 특명으로 비서실장, 경호실장을 포함한 청와대 내의 간부 전원을 지하 대강당에 소집해서 류태영 박사의 교육을 듣게 했다. 말하자면 최초의 새마을 연수자들이다.
몇 년 후 광주에서 장관, 지역단체장 등 고위공직자 1천여명을 상대로 청와대 때와 같은 내용의 교육을 했었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처음부터 끝까지 참석해서 1천여명의 청중이 강연이 끝날 때까지 한명도 자리를 뜨지 못했다고 한다.[17]
기차 등급 새마을호와 ITX-새마을, 새마을금고 등이 여기서 이름을 따 온 것으로, 새마을 운동의 유산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새마을금고는 금융위원회가 아닌 행정안전부가 관할한다.
조용기 목사의 위인전에서는 자신이 박정희 앞에서 주장한 "새마음운동"을 당시 정부가 "새마음"이라는 단어가 너무 기독교적(?)이라 하여 새마을운동으로 고쳐 추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 그러나 류태영 박사가 개신교인이기는 했으나 그의 종교관은 조용기의 순복음교회와는 관계가 없다. 애초에 이 주장이 말이 되지 않는 것이 박정희는 무교였다. 독실한 불교도였던 육영수의 영향을 받아 불교 신자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무교다.
2013년 6월 18일 새마을운동 관련 기록물이 난중일기와 함께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제3공화국이나 제4공화국 시기를 다루는 드라마라면 이 새마을운동 노래도 나온다. 박정희가 최후반부에 잠깐 나오는 야인시대 마지막화에서도 한번 나왔다.
이 운동에 향수가 짙은 세대와 관료 중에서는 저출산을 극복하기 위해 새마을 정신으로 애를 낳자는 소리를 하는 등 여기저기에 새마을을 갖다붙이기도 한다. 재미있는 것은 북한에서도 김일성이 주도한 천리마 운동의 영향을 짙게 받아 여기저기에다가 천리마 정신을 갖다붙인다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가 2018학년도 초등학교 6학년 사회 교과서에서 새마을운동을 삭제하여 역사왜곡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문재인 정부 사회 교과서 무단수정 의혹 문서 참조.
박정희에 대한 향수가 짙은 경상북도에서는 새마을운동을 정말 각별하게 생각하고 있으며, 서로 자기가 운동 발상지라고 주장하는 지자체도 많다. 박정희의 고향인 구미시(구미 시가지)와 경북에서 제일 잘나가는 지자체인 포항시(북구 기계면 문성리)에서 기념관을 세우며 큰 소리를 치고 있지만 막상 정부 기록을 토대로 진짜 발상지로 인정받은 곳은 엉뚱하게도 청도군 청도읍 신도리이다.(이곳에도 새마을운동 기념관이 있다) 경부선상의 폐역인 신거역 일대로 경남지방의 수해 복구 현장을 시찰하려고 열차를 타고 내려가던 중 농민들이 관의 지시 없이 자발적으로 수해 복구를 하는 모습을 보고 새마을 운동의 발상에 착수했다...고 전해진다.
7. 관련 문서
[영어] Archives of Saemaeul Undong (New Community Movement) [프랑스어] Les archives de Saemaeul Undong (mouvement de nouvelles communautés) [1] 구 새마을지도자연수원설치법에 근거하여 설치되었다.[2] 물론 시멘트 재고를 이만큼 사들여야 하는 상황이었다면 어떤 식으로든 건설 사업을 했을 것이고, 경부고속도로 등 실제 그럴 수 있었던 건설 사업도 많았다.[3] 이 지붕에 슬레이트판이나 함석판 옮기는 일이 이청준의 소설 <눈길>에서 어머니가 새마을운동을 고깝게 보는 요소 중 하나다. 하지만 초가집이 타파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게, 초가지붕은 일단 비가 오면 물이 새는 경우가 많고 거기에 썩기까지 하면서 주거환경을 악화시킨다. 지금 한국민속촌이 주기적으로(보통 3년) 지붕을 교체하면서 굼벵이 잡는 걸 이벤트화 시키고 있는데 자기 집 지붕에 굼벵이들이 득실거린다고 생각해보라(...)[4] 새마을연수원에서는 새마을지도자 연수생들에 대한 교육평가를 했는데 등급을 각각 A, B, C로 나누어 A를 받은 수료생은 농림부에서 특별지원을 해주고, C를 받은 수료생을 추천한 군수는 문책하라고 지시했다.[5] 미신 타파 등을 목적으로, 이 당시 무속인들의 회고에 따르면 낮에는 미신이라고 돌을 던지다가 밤이 되면 아들이 아프니 제발 굿 좀 해달라고 찾아왔다고(…). [6] 박정희는 교사시절 음악 과목을 맡아서 작사 능력이 어느 정도 있었다.[7] "싸우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싸우자"는 당시 박정희 정권의 모토이기도 했다. 꾸준한 노동을 통해 근대화를 이루는 동시에 공산주의를 격퇴시키자는 멸공 정신을 동시에 강조한 셈. 여담으로 박정희 정권 당시에 생긴 예비군의 캐치프레이즈도 "일하면서 싸우자"다.[8] 특히 전두환의 친동생 전경환이 관련되었다.[9] 새마을운동을 비롯하여, 간혹 이러한 운동들이 "대중의 호응을 얻었다"는 이유로 독재가 아니라고 주장하거나 독재 정권이라는 이유로 대중의 호응을 얻었다는 설명을 의도적으로 잘라먹는 경우가 있는데, 현대 정치학과 역사학계에서 '대중 독재'에 대한 연구는 이미 제법 많은 호응을 얻고 있는 상황이다. 라틴아메리카의 포퓰리즘 정권을 비롯하여, 단순히 일반민의 호응을 얻는다고 해서 민주적인 것은 아니며, 독재와 일반민의 호응이 병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10] 다만 "농업"이라는 단어는 사실 서로 다른 분야의 일들을 통칭하는 것이며 이들 사이에는 세부적으로는 무수한 차이가 있는 게 현실인데 분야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고 "한국의 농업은 수준 이하"라고 하는 것은 이상하다. 예를 들어 오히려 한국 양봉업의 경우 한국이 국토 면적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세계 5위의 밀랍 생산국'''이 될 정도로 크게 성장해 있다. 한국보다 밀랍 생산량이 많은 나머지 4개 국가들은 모두 한국보다 국토가 훨씬 넓은 국가들이다.[11] 한국의 동부지방은 완전히 산맥이고 평야지대는 호남 일부 지역밖에 없다.좁은 나라와 더 좁은 농지를 생각하면 FTA와 겹쳐 농업 경쟁력이 떨어져 갈 수 밖에 없다.[12] 상술한 중국의 신농촌운동 또한 2016년 기준으로는 무조건 농가 소득을 올리는 방향이 아니라 각 지방마다 도농 통합이 이루어지는 방향으로 추진되고 있다.[13] 90년대 말의 한나라당은 DJP 연합으로 집권했던 김대중 대통령이 박태준 총리를 중심으로 내각제로 개헌하려 했을 때 이를 맹렬히 반대하기도 했다. 김종필은 이 때의 개헌 실패가 본인에게 치명타가 되었기 때문에 2015년 연재한 회고록에서 이 당시의 한나라당을 강도높게 비난하고 있다.[14] 뿐만 아니라 도시 지역에도 잘 찾아보면 민방위 마크와 함께 방공호 역할을 하는 지하시설들을 볼 수 있다. 대표적인 게 지하철이나 지하주차장, 그리고 오래된 아파트를 보면 지하에 텅 비어져 있는 창고 같은 걸 볼 수 있는데 이 역시 방공호로 마련된 것이다. 물론 현재에 와서 이런 것들은 잊혀지거나 반지하 임대 등 엉뚱한 용도로 전용되곤 한다. 여의도 광장 벙커처럼 아예 기관에서조차 잊어버리는 상황이 일어나기도 한다.[15] 이 당시에 퍼진 인사가 "재건합시다" 였다.[16] 주간동아 2015년 1013호 ‘동양의 덴마크’ 건설 꿈꾼 류달영[17] 류태영 박사 회고 칼럼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