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와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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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구조
3. 특징
4. 현재
5. 해외에서
6. 기타
7. 관련 문서


1. 개요


지붕으로 기와를 사용한 . 기와 이전 테크였던 초가집이 몇 년이면 지붕 소재가 썩어버려 자주 갈아줘야 하던 것[1]을 반영구적인 기와로 대체한 것이다.
한국 대부분의 기와집은 찰흙으로 만든 검은색 기와를 많이 사용하였다.

2.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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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들보
  • 대공
  • 용마루
  • 빼도리
  • 처마
  • 서까래 : 지붕의 뼈대를 이루는 나무
  • 추녀 : 처마의 네 귀퉁이에 있는 큰 서까래
  • 추녀마루
  • 굴도리
  • 보뺄목
  • 들어열개
  • 분합문
  • 합각마루
  • 목기연
  • 합각
  • 소로
  • 머름
  • 초석(주춧돌)
    • 단추형 초석
  • 한벌대
  • 디딤돌
  • 두벌대기단
  • 석계
  • 노둣돌
  • 석함
  • 대청

3. 특징


양반 중에서도 신분이 높은 사람이 거주할 경우 푸른 유약을 발라 만든 청기와를 사용해 지붕을 만들기도 하였다. 전통적으로 부유층이나 양반들만이 기와집을 짓고 살고 있었는데 일반 농민이 기와집을 짓는다 해도 특별한 제재하는 법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당시 기와는 상당히 비쌌기 때문에, 지붕을 기와로 얹으려면 품이 많이 들어서 일반 농민들이 짓고 살기에는 도저히 무리였다. 기와 굽는 가마 자체가 손꼽히던 시절이었으니. 그래서 당시에는 기와집이 호화사치주택으로 분류되었다. 물론 양반들이라고 해서 기와집을 막 짓고 살 수 있었던 건 아니고 크기 제한이 있어서 99칸을 넘는 집을 짓고 살 수는 없었다. 99칸이 넘는 기와집은 무조건 궁궐이나 관아, 성균관 같은 대형교육시설이라는 얘기다.[2] 물론 99칸이라고 해도 180평에 해당되는 크기이기 때문에 일반인들 입장에서는 매우 널찍했던 건 마찬가지이며 품이 많이 들었기 때문에 세도가나 전국을 휘어잡는 거상급은 되어야 99칸집을 짓고 살 수 있었다. 기와집이라고 해서 죄다 넓은 것도 아니라서 한양 도성 내부 같은 도심지 기와집의 경우에는 집이 좁아지는 경향이 있었다.
조선시대 기와집은 남녀유별을 강조하는 유교의 영향 때문에 남자와 여자가 생활하는 공간이 철저히 구분되어 있었다.
한편으로 일제시기 때 개량형 기와집이 등장하기도 했는데 경성부의 인구가 지방에서 올라오는 인부들[3]로 인해 날이 갈수록 증가하게 되자 새로 집을 지을 땅이 부족해져서 땅값이 오르게 되면서 궁여지책격으로 기존의 기와집보다 훨씬 좁게 만들면서 2층까지도 만든 개량형 기와집이 등장하게 되었고[4] 현재 서울에 남은 기와집 가운데서 상당수가 이런 개량형 기와집이다.

4. 현재


1970년대에 낙후의 상징이라며 대대적으로 없앴던 초가집과는 다르게 기와집에 대해서 별로 손을 대지 않았지만 애초에 수량도 많지 않았던 데다가 아무래도 공간의 한계와 소음문제가 있고 특수한 경우엔 기와 사이의 틈이 벌어져 물이 새는 경우도 있다보니 아예 현대식 주택으로 개보수하는 경우도 많이 있었다. 부동산 투기와 재개발로도 사라지는 경우가 많고 잘 지어지지는 않다보니 전통 기와집이나 개량형 기와집은 도심지에서 찾아보기가 힘들어졌다. 다만 지붕만 기와인 서양식 주택은 꽤나 널려있는 편이다. 하지만 골목골목 다니다 보면 아주 가끔 개발되지 않고 오래된 기와집들이 자주 보이곤 한다.

5. 해외에서



6. 기타


대한민국의 대통령 관저인 청와대도 기와집이다. 청와대(靑瓦臺)라는 명칭 자체가 푸른 기와를 덮은 집이라는 뜻. 물론 전통양식의 기와집은 아니고 지붕만 전통 양식으로 꾸민 서양식 건물이다.
북한의 지상과제인 지상락원의 기준 중 하나이기도 하다. 김일성이 제시한 지상락원의 기준이 이팝에 고기국 기와집에서 비단옷이기 때문. 물론 현실은 시궁창이기는 하고, 북한의 경제개발기에도 남한과 마찬가지로 도심지에는 아파트를 대량건축하는것이 유행이었다.
경춘선 김유정역의 신역사가 기와집 형태로 지어졌다. 이외에 남원역, 구례구역, 곡성역 등 기와 지붕을 얹은 역들이 꽤 있다.

7. 관련 문서



[1] 보통 2년마다 지붕갈이를 했다.[2] 다만 조선 이전에는 불교가 국교급 위상이었기 때문에 이 규정 이상으로 규모가 큰 국가사찰이 있었다. 그리고 난세라면 이 법이 무시되곤 해서 최충헌 같은 자들은 100칸을 훌쩍 넘는 기와집을 보유했다.[3] 물론 이들 인부 대부분은 그냥 초가집이나 움막집에서 살았던 것이 현실이었다. 기와집을 지을만한 여력 자체가 없던 계층이었기 때문.[4] 엄밀히 말하면 다시 보편화된 것이다. 조선 전기 때까지만 해도 2층 건물이 보편화되었고, 그 이후에도 덕수궁 석어당창덕궁 경훈각 등의 2층 건물들이 남아 있었고, 사료에도 2층 건물에 대한 기록이 어느 정도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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