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돌

 


국가무형문화재 제135호 온돌문화
온돌의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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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전통식 온돌
2.1. 온돌 보급으로 좌식 문화 정착
3. 현대식 온돌
4. 외국 사례
5. 문제점
6. 기타
6.1. 제주식 온돌 굴묵
6.1.1.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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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온돌(, [1])이란, 열기가 방바닥을 지나가도록 함으로써 방 전체를 데우는 난방 방식이다. 한반도에서 오랜 세월 동안 한국인들의 주생활, 식생활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한국 전통 난방 방식이기도 하다. 온돌이라는 명칭은 조선왕조실록 세종조에 처음 나타나며 명칭이 온돌로 굳어진 것은 19세기 이후부터다.

2. 전통식 온돌


아궁이에서 불을 때면 화기(火氣)가 방 밑을 지나 방바닥 전체를 덥게 하는 한국 전래의 난방장치로 구들이라고도 한다. 전통 방식의 아궁이-넓적돌 구조로 바닥을 데우는 것을 구들, 현대적인 파이프 난방까지 포함해서 온돌이라고 하는 식으로 구분해서 쓰기도 한다. 온돌의 채난원리(採暖原理)는 열의 전도를 이용한 것이다. 방바닥 밑에 깔린 넓적한 돌(구들장)에 화기를 도입시켜 온도가 높아진 돌이 방출하는 열로 난방한다. 전도에 의한 난방 이외에 복사난방과 대류난방을 겸한다. 형식상 라디에이터와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다.
대중적으로 널리 사용된 온돌은 한국인에게 좌식, 맨발 생활과 단층 주거 건축 양식을 정착시켰고, 역설적이게도 현대에 들어서도 아파트를 선호하는 이유가 되었다. 서양인들이 복층 단독 주택을 선호하는 것에 비하면 대조적인 현상이다. 온돌 난방과 취사를 동시에 해결하는 아궁이를 이용하면서 국물 요리가 발달했다. 다만, 각주에 후술하듯 뼈대를 제외한 바닥과 벽체를 황토흙으로 짓는 건축 구조가 아니었다면 바닥에 난방을 한다는 아이디어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온돌이 개발된 덕분에 방바닥에 장판을 깔아서 위생적인 삶이 가능해졌다.
한국 고유의 난방법으로 한국인의 생활습관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일반적으로 기원전 4세기 옥저 시대부터 온돌이 발명되었다고 추정한다. 실제로, 신석기시대청동기시대의 유적에서 이미 온돌의 원형으로 추정되는 형태가 발견되었다. 고구려 때 '긴 구덩이를 만들고 그 아래에 불을 때어 따뜻하게 하였다'(구당서)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같은 기록에서 '백제는 고구려와 습속이 유사하다.'라고 이야기하므로 백제에서도 이미 온돌의 초기 형태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단, 이때의 온돌은 방 일부만 데우는 ㄱ자 형태였고, 이후 고려시대 중기에 와서 현재의 방 전체를 데우는 온돌의 구조가 완성되었다.
이런 문화가 발달한 경위는 특유의 기후 때문이다. 한국은 사계절이 뚜렷한 나라인데, 이게 사실 사람 살기 좋은 여건이 절대 아니다. 연중 최고, 최저온도가 50도 이상 차이 나기에, 겨울은 너무 추워서 난방을 하지 않으면 버티지 못하고, 여름은 너무 더워서 냉방을 하지 않으면 버티지 못한다. 거기에 여름은 습하고 겨울은 건조하니, 겨울과 여름을 둘 다 날 수 있는 (=짓기 귀찮은) 집이 있어야 하는 더러운 기후다. 이 때문에 여름을 버티기 위해 일부러 산을 등지고 강을 마주 보는 이른바 '배산임수'형 주거지가 발달했는데 그 목적은 강바람이 정면에서 들어오고 이 바람이 뒷면의 산을 통해서 집에 좀 더 오래 머물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겨울에는 온돌이라는 난방 수단을 이용하여 버텨내야만 했다.
그동안 문헌 중심의 연구에 의하면, 13세기 전기에 개경을 중심으로 중상류층의 기거처에 온돌 사용이 보편화되었다고 본다. 고려 말기에 비로소 한반도 남부지방으로 온돌이 확산되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한반도 남부지방에 위치한 말흘리 고려시대 건물지에서 이미 온돌과 방이 연접되어 설치된 건물들이 확인되어 12세기 이전에 한반도 남부지역의 중상류층의 가옥에서도 온돌이 보급되었음이 확인되었다. 또한, 온돌방과 마루가 연접되어 설치되어 있는 것도 역시 12세기의 실증유구가 발견됨에 따라 그간의 연구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만들어졌음이 확인되었다.
하지만 조선 중기까진 기본적으로 하층민 문화로서 화덕을 이용하는 상류층은 잘 채용하지 않았다. 종묘제례나 군대 훈련 등으로 상번하는 사람들의 임시 거처마저 온돌을 설치하니 낭비가 심하다는 식의 상소가 올라온 기록도 실록에 남아있으며 조선 영조 때의 기록까지도 당시 궁궐에도 온돌이 많이 없었는데, 왕의 편전인 창덕궁희정당 역시 온돌방이 아니었다고 한다.
한편 나인이나 내관들이 추위를 견디다 못한 나머지 임의로 건물을 온돌식으로 개조하였는데, 이로 인해 땔감을 공급하는 백성들이 곤란을 겪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왕이 거주하는 궁궐조차도 온돌이 보급이 더뎠을 정도라면 당연히 민간으로 보급되는 것도 흔하지가 않았을 것이다는 잘못된 생각이고. 온돌의 형태가 완성된 고려때부터 상류층은 온돌을 안쓰고 평민들이 온돌을 주로 이용했다.
경신대기근을 불러온 17세기 소빙하기를 겪으면서 난방은 생존의 문제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비로소 상류층에게까지 널리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인구가 늘어나고, 상류층에게까지 온돌이 보급되어 나무땔감의 수요량이 급증하자 조선의 삼림자원은 급속히 고갈되어 갔고 구한말에 이르러서는 민둥산이 아닌 산이 없다고 이야기할 정도가 되었다. 전국적으로 진행되어 조선 말기에 이르면 실록에서 다량의 벌목으로 인한 토사유실로 인한 농업생산성의 저하 문제를 논의할 정도에 이른다. 이 당시에는 석탄 채굴이 대규모로 활성화되지 않았던 것도 산림자원 황폐화의 큰 원인이었다. 당시 16세기~ 17세기를 거치면서 인구 증가와 목재 수요 증가로 유럽과 동아시아의 각국의 산림은 고갈되어가고 있었다. 조선의 경우는 인구의 증가뿐 아니라 온돌이 보급되면서 더더욱 생존에 대한 위기감이 더욱 심화된 것이다.
이로 인해, 18세기 조선에서는 산림의 소유권을 둘러싼 송사인 산송(山訟)이 증가한다. 때문에 조선 정부도 산림 보호를 위한 금산(禁山) 규제와 정부 주도로 비변사와 각 지방 군관을 동원한 대규모 나무 심기를 시행하였다. 1788년에는 소나무를 보호하기 위한 산림법인 송금사목을 제정한다. 문제는 이러한 규제와 나무 심기에도 불구하고 급증한 수요를 공급이 따라가지 못했고 조선 후기가 되어 상당한 삼림의 고갈을 겪는다. 물론 당시라고 해서 석탄을 이용하려는 시도가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보편적이지가 못했다. 일본과 유럽도 비슷한 과정을 겪었으나 일본은 홋카이도 개척을 통한 외부 지역의 목재 공급, 유럽은 아메리카 대륙과 기타 해외 식민지에서 목재 공급을 통한 수용 충족과 석탄사용을 통한 목재연료 사용 감소를 통해 산림 고갈을 해결하게 된다. 무엇보다 한반도와 달리 강수량이 고른 기후라 자연적 회복도 빠른 편이었다. 물론, 조선시대 한반도의 산림이 전부 더 고갈된 것은 아니고 개마고원 일대나 백두대간 지역처럼 인구가 적거나 평상시에 사람이 드나들기 쉽지 않았던 지역에는 숲이 남아있었지만[2] 사람이 쉽게 드나들 수 있는 평지나 나지막한 산에 있던 숲이 많이 파괴되었기에 조선 전체로 보면 대단히 심각한 수준의 산림파괴로 임자원은 거의 고갈되었다.
이 때문에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청나라의 벽돌 건축을 찬양하며 한국식 온돌의 단점을 비판했는데, 황토와 돌로 만들면 돌에 바른 황토의 두께에 따라 온도가 균일하지 않고 열이 여기저기서 새어나가지만 벽돌로 만들면 수수깡 몇 줌으로도 집안 전체를 달구기 좋다고 칭찬했다.[3] 또한 동시대 인물 성대중도 청성잡기를 통해 무리한 벌목으로 인한 산림파괴와 젊은이들이 온돌 때문에 게을러진다고 지적했다.
이후 일본 침략기의 산림 수탈과 6.25 전쟁까지 겪으면서 더욱 숲이 황폐화가 되고 1950년대까지도 가정용 연료에서 신탄(나무)의 비율이 80%에 달하는 상황이었다. 이게 어느 정도였냐면 1950년대 신문 사회면에는 '도벌' 관련 기사가 가끔 보인다. 한 마디로, 나무를 허가받지 않고 몰래 베는 도둑질이다. 기사를 읽어보면 상당한 중범죄로 취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행히 1970년대부터 내무부[4]에서 중점적으로 산림 녹화사업을 벌인 결과 한반도 남쪽 숲은 거의 회복되었다. 그와 동시에 나무의 대체제로써 연료를 연탄으로 대체하는 사업을 벌이며 태백, 화순 등 전국에 산재한 석탄자원을 활용하고자 석탄개발공사를 세우고 채굴했다. 그 결과 세계적으로 2차대전 이후 황폐해진 숲을 복원한 모범사례 중 하나가 우리나라의 산림녹화다.[5] (대한민국의 산림녹화 설명) 세계 여러나라에서 산림녹화를 국가적으로 추진하고 있지만 대체연료를 제 때 보급하지 못해 덜 자란 나무들까지 벌채하는 경우가 잦다. 북한의 경우도 거의 모든 산이 민둥산인데 우리가 남북협력으로 나무를 심어줘도 금세 땔감으로 잘려나간다고 한다.
현재 남아있는 주거 목적의 한옥 건물들이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2층 이상이 없는 단층집만 있는 가장 큰 원인이다. 온돌의 무게와 비용이 대단했고 온돌 없는 2층 집을 짓느니 온돌 있는 1층으로 만족한 것이다. 하지만 온돌이 확산되기 전인 고려~조선 전기까지는 일반 주택에도 다층 건물이 상당히 있었다고 한다.참조 고려도경에서도 개성의 건물 열 개 중 하나는 복층 건물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하지만 종종 낮은 복층 구조의 조선조 건물에는 다음과 같이 구들이 설치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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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의 방초정.(출처:문화유산채널) 정자 가운데 돌기둥처럼 된 부분이 구들이고, 위에 온돌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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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구들(출처)의 모습.
개화기 당시 외국인들이 한국을 방문한 뒤 남긴 기록 중에 온돌에 대한 기록도 많이 남아 있다. '벽난로에 비해 매우 효율적인 방식'이라는 칭찬 외에도 '조선인들은 빵처럼 구워지는 것을 좋아한다.'[6], '용광로에서 잠을 자는 기분이었다.' 등 특이한 묘사들이 많다. 당시 조선에서는 손님이 오면 아랫목을 내주고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불을 더 때주는 풍습이 있다고 당시 조선에 파견온 러시아 군인들이 기록했다.[7] 이때 조선에 방문한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너무 뜨거워 문을 열었는데, 주막주인이 소리를 지르며 달려와 호랑이가 물어간다면서 문을 닫아버렸다고 한다. 문을 여는데 성공해도 당시 조선의 겨울은 너무 매서워 온돌 바닥은 뜨거운데 공기는 차가워서 괴로웠다는 기록도 있다. 입식 생활의 난방과는 다른 난방 체계에 큰 인상을 받은 듯. 평균 온도가 33도에 40도에 육박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하니 외국인 입장에선 상당히 고역이었을 것이다.
전통 온돌방은 기름종이로 된 장판지를 구들 위에 바른 뒤 콩기름을 덧바르는 콩댐을 하거나 송진을 덧발라 송진장판을 만들어 방수 작업을 하였다. 그리고 현대 온돌방은 비닐 장판을 깔아서 한국인에게 방바닥 기본 속성이 방수성 및 내수성이다. 비닐 장판은 사실 보일러처럼 역수입이라고도 볼 수 있다. 서양에서 아마씨 기름을 굳혀 만든 리놀륨이 있기 때문이다.
전설에 의하면 아자방이라는 구들이 있었다고 한다. 아자방은 신라 효공왕 때 구들 도사로 불리던 담공선사가 칠불사 벽안당에 아(亞) 자형으로 길이 약 8m의 이중 온돌방을 축조하였는데, 온돌의 구조가 특이하여 아궁이는 지게를 지고 들어갈 만큼 거대하고 불을 한번 때면 49일간이나 따뜻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1948년 공비를 토벌한답시고 군부대가 소각 전소시켜 아자방은 온돌만 남아 있었다가 1982년 복원되었다. 아자방의 완전한 구조를 알아내기 위해 당시 온돌 보수공사를 맡은 온돌 인간문화재 관계자인 김용달 옹은 '아자방의 원리를 알 수 없어 일반 형태로 놓았다.'라고 하였고, 이 때문에 아자방의 구들 본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우며 한번 불을 넣으면 3~4일 정도 온기가 유지될 뿐이다.
1982년 당시[8] 이를 확인해본 결과 봄, 가을에는 온기가 10일 정도 유지된다고 한다. 구들 전문가들은 전설의 49일이 유지 불가능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다만 전통 구조의 도자 가마나 숯가마의 열 보존 상태를 생각해보면 전혀 불가능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더불어 선방이라는 스님들 수련처라는 장소의 특성상 굳이 고온의 지속적 유지는 불필요하다는 점도 또한 염두에 두어야 할 부분이다.
2019년 많은 사람들의 노력 끝에 아자방의 원리를 알아냈다. 가마 형태의 대형 아궁이와 보조 아궁이, 이중 구들을 설치하고 많은 장작을 쌓아두어 불이 서서히 오래 타도록 하여 온기를 유지하였다. 아자방을 복원하였는데 한 번 불을 넣으면 약 25일까지 온기를 유지시킬 수 있다고 한다. 전설의 49일 온기 유지 기간에 약 50% 가량 근접할 정도로 성공적인 복원을 성사시킨 것이다.[9]
한편, 제주도에서는 굴묵이라는 독특한 난방 방식이 있었다.

2.1. 온돌 보급으로 좌식 문화 정착


한반도에서는 17세기에 온돌이 대다수의 가정에 보급되면서 입식 문화에서 좌식 문화로 전환되었다.
조선조 최대의 생활혁명: 입식에서 좌식문화로
좌식공간관습의 건축사적 함의 - 신발의 문제를 중심으로 -, 조재모, 건축역사연구, 2012, vol.21, no.1, 통권 80호 pp. 83-98 (16 pages), 한국건축역사학회
독일을 비롯한 서구에서 에너지 효율 때문에 온돌식의 바닥 난방이 권장되고 있는데, 이렇게 바닥 난방을 채택한 가정은 한국처럼 좌식문화로 바뀌어 가고 있다. 벽난로나 대류 난방을 할 때는 바닥이 차가워서 양발과 슬리퍼를 신고 소파나 의자에 앉아 생활했지만, 바닥이 뜨끈하니 바닥에 앉거나 드러눕는 걸 즐기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에 대한 문제로 관절 건강 악화를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좌식 생활[10]을 오래 하게 되면 관절 건강에도 좋지 않을뿐더러 오다리(휜다리 내반슬)가 되어 무릎 안쪽의 연골이 비정상적으로 닳게 되면서 체중에 쏠려 부담이 가해지고, 이렇게 연골의 소모가 크면 커질수록 관절염의 위험성이 커진다는 것. 관절은 항상 관리해야 하는데 젊은 나이라도 하더라도 예외는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이런 것은 어디까지나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지, 좌식한다고 무조건 오다리가 되고 관절염이 걸린다는 건 아니다. 위의 좌식 문화로 바뀌는 독일의 경우에도 그냥 눕거나 쿠션에 기대서 다리 펴고 앉을 뿐이지 양반 다리나 정좌는 하지 않는다. 한국에서 나간 것 중에 보료가 있기도 하고, 애당초 로마인과 그리스인은 누워서 밥먹던 사람들이다.

3. 현대식 온돌


재래식 온돌은 한 번 데워지면 오랫동안 따뜻하지만 연료가 많이 들어가서 장작을 많이 확보해야 한다. 이것은 조선 후기부터 1950~1960년대까지의 한반도 삼림 황폐화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이 때문에 1960년대부터는 구들장을 그대로 두고 연료만 연탄으로 바꿔 나간다. 그러나 불완전 연소로 인한 일산화탄소 발생으로 연탄가스 중독 사고가 너무 많이 발생했다. 사실 이 문제는 연탄의 입장에선 매우 억울한 일이다. 원래 구들장 틈새가 잘 마감되면 이런 일은 절대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나 세월에 따라 구석구석 갈라지기 마련인데다, 전후 날림으로 지어진 1960년대 건물이 튼튼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시멘트로 된 구들장은 반복된 주거 충격과 온돌의 열에 의해 내구도가 갈수록 약화되는 약점이 있었으며 갈라지다 못해 주저앉기도 했다. 구들장을 교체하는 비용은 만만하지 않았기 때문에 보수하며 사용하다 보니 연탄가스의 위험은 갈수록 가속되었다. 장작을 때었다면 연기 냄새만 나고 말았을 일이 일산화탄소를 많이 배출하는 연탄을 사용함으로 인해 큰 사고가 되었다. 장작도 나무 종류에 따라 주의해야 한다. 대표적으로 밤나무는 불완전 연소시 일산화탄소와 유독가스를 내뿜기 때문에 장작으로는 절대 사용 금물이다. 거의 다 탄 밤나무를 화로에 얹었다가 중독돼서 실려간 사고도 있으며, 찜질방에서 밤나무 장작을 썼다가 질식사한 사고도 있다. 이후 이 문제점이 없는 개량식 온돌을 역수입해서 도입하게 된다. 일산화탄소가 나오는 난방부와의 분리 및 간접가열방식.
개량식 온돌은 보일러 관을 방바닥에 매설하여 난방한다. 보일러로 물을 데워 온수를 만든 후 그 온수를 방바닥에 매설한 관으로 순환시켜서 바닥을 데우는 방식이다. 단열 시공으로 공기까지 따뜻해지는 특징이 있으며 겨울철에는 가습기 등으로 건조를 방지한다.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온돌을 체험해 보고 1937년 자신의 건축물에 바닥 난방을 도입했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도쿄에 왔다가 데이코쿠 호텔 별채에서 묵게 되었는데, 그 건물이 경복궁 자선당을 뜯어다 옮겨 놓은 것이었다. 그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만든 현대식 온돌난방형태를 대한민국에 역수입한 것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온돌이다. 원본 자선당은 관동대지진 때 불타 사라졌으며 1999년 옛 자선당이 있던 자리에 새로이 복원되었다. 보일러 문서 참고. 온수를 순환하여 난방하는 시스템은 근본적으로 파이프를 바닥에 매립하고 그 파이프에 물을 흘려보내야 하기에 다층 주택은 항상 누수 위험을 안고 있는 단점도 있다.
그래서 아파트의 역사 초기에는 다층 주택 건축은 가능해도 거기다 온돌을 깔 수 없었다. 그렇게 바닥시공을 하려면 구들장이 엄청나게 무거워져서 하중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한국 역사에서 다층 주택이 존재하긴 했으나 흔치는 않았던 것은 그 이유.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온돌을 깐 다층주택은 1962년 마포아파트 450세대이다. 또한 와우아파트 붕괴사고의 원인 역시 온돌 하중이 설계도면상 평당 하중이었던 180kg을 3배 이상 초과한 평당 800kg라 하중을 견딜 수 없었던 것. 그로 인해 아파트가 안전하지 않다는 인식도 퍼졌지만, 결국 건축기술의 발전으로 대한민국의 단독주택, 아파트 구분 없이 어지간한 한국 주택에는 어떤 방식으로든 바닥에 온돌이 깔려있다. 또한 호텔, 모텔, 펜션 등의 숙박시설에서도 온돌방을 따로 구비해놓는다. 병원에서도 일부 병실엔 온돌방을 갖춰 놓기도 한다.
심야전기를 이용한 온돌도 있지만 온도조절이 힘들고 낮에는 추워지기 쉽다. 낮에는 비싼 전기료를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원래 심야전기 난방이 등장한 이유가 1990-2000년도 초반 도시가스에 비해 심야전기 난방비가 더 저렴했었기 때문이다. 보온 처리만 잘 된다면 도시가스보다 경제적이었고, 많은 원룸들이 이런 방식을 이용해 건물을 짓곤 했다. 하지만 2010년대에는 전기요금이 많이 비싸지면서 심야전기 보일러는 점차 외면받고 있어서 이 방식은 점차 쇠퇴 중이다.[11] 이외에도 열선을 방바닥 아래에 깔아놓는 방식도 있으며, 시공이 편리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다른 에너지를 가공하여 만든 전기를 난방에 사용하는 것은 효율적이지는 않아서 요금폭탄이 자주 날아온다. 그리고 미숙한 시공자가 설치하면 바닥의 습기 차단 등 마무리 작업을 소홀히 해서 누전이나 감전사고가 일어나는 경우도 있다.
해외에서도 친환경 난방법으로 관심을 받고 있다. 대류식 난방은 매질이 공기인지라 열기가 금방 사라진다. 그러나 온돌은 매질이 물이라 축열 효과가 높다. 원리적으로는 라디에이터와 유사하지만, 온돌은 콘크리트도 2차 매질이 되므로 최종 효율이 더 높다. 그러나 온돌이 대중화된 한국과는 달리, 해외에선 온돌 난방이 흔한 시공법이 아니라 숙련된 시공자가 많지 않으므로 시공 비용이 높은 편이다. 그래서 개인주택보다는 이산화탄소 배출 저감이나 친환경 인증 목적으로 상업용 대형 건물에 도입하는 사례가 더 많다. 하지만 개인주택도 바닥난방을 할 경우에 기관에서 공사비를 지원해 주는 식으로 권장하고 있다.
한편, 2018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선수촌 숙소로 현대식 온돌이 적용된 최신식 아파트가 제공이 됐는데, 온돌 특유의 따뜻하고 아늑함으로 경기에 지친 선수들에게 뜨거운 사랑을 받았다. 현재 그 숙소는 일반 아파트로 분양이 되었다.
이러한 온돌의 특성들을 계승하고 발전시킨 것이 전기장판온수매트이다.

4. 외국 사례


중국 동북부(만주)와 몽골의 일부에서 온돌과 같은 원리로 난방한다. 중국에서는 황하 강 이북부터 있으며 방의 일부 즉 잠자는 곳에만 설치하는데 이것을 캉(炕)이라고 부른다. 만주족들도 이걸 사용했는지 이를 가리키는 말이 있다. 만주어로는 나한(nahan)이라 부른다. 몽골에서는 게르 바닥에 이것을 이용한다. 중국은 북부 지방은 단열에 신경을 많이 쓰지만 남부 지방은 단열시공을 잘 하지 않아서 북방 사람이 남방에 가서 얼어죽는다는 말이 나올 지경이라고 한다. 중국정부에서 1950년대에 전국 단위 난방계획을 짰을때 전국적인 난방 기준으로 짰을때 상대적으로 따뜻한 남부지역에다가 난방을 별로 안 깔아도 별 상관이 없도록 지정했다. 이 당시 중국의 경제상황이 좋았던 시절은 아니었기 때문에 추운 북부지역에 난방자원을 집중하는것이 합리적인 선택이었지만, 이 기준이 21세기 이후로도 유지되고 있기 때문에 남부지역도 단열기준을 강화해야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그래서 하이난 성 등 최남단 지역에 살지 않는 남부지역 사람들은 겨울에는 바깥온도와 집안온도가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아서 추위에 벌벌떠는 모습을 쉽게 볼수있다.
일본에서는 온난한 기후와 전통 바닥재 다다미의 낮은 열 전도성 때문에 온돌과 같은 바닥 난방을 쓸 이유가 없었다. 또한 위에서 언급했듯이 온돌을 제대로 써먹으려면 단열시공이 필수적인데 일본은 홋카이도 같은 추운 북부 지방을 제외하면 대부분 해양성 기후라 그다지 춥지 않은 겨울 날씨를 가진 반면 여름에는 습하고 푹푹 찌는 무더위가 이어지기 때문에 겨울 추위보다는 여름 더위에 더 신경을 써서 집을 짓는 편이다. 따라서 전통적으로 일본은 방 한가운데에 화덕을 놓아 난방을 했다. 이는 지금도 시라카와고 같은 전통가옥 보존지에서 볼 수 있다.
온돌이 현대에 와서 보일러로 데운 물을 파이프 배관으로 흘려보내는 식으로 진화한 것처럼 일본도 이러한 전통적인 난방 방식을 진화시켜 현대 일본인들은 코타츠나 스토브 등을 주로 난방용으로 쓴다. 그 덕분인지 겨울철에 여느 일본 가택은 외부와 온도차이가 크지 않아서 겨울나기에 좋지 못하다. 일본의 가정집에 가보면 난방을 하는 방 이외에 부엌이나 욕실 등의 공간은 상당히 춥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통적인 일본 가옥은 바닥재로 다다미를 사용하여 바닥에서 한기를 느끼지 못하였지만, 서구화의 영향으로 마루바닥을 사용하게된 현 일본 가정집의 바닥은 겨울철에는 얼음장처럼 차갑기에 실내화를 신으며, 한국처럼 내복만 입고 생활하기는 사실상 어렵다. 그에 대한 대비책으로 더운물로 목욕을 하고 몸이 따뜻한 동안에 일찍 잠을 청한다. 이를 위해 일본 전통 침구는 아주 두껍지만, 그조차 춥다고 느끼는 사람이 많아 앙카(行火)라는 보조 난방기구를 집어넣고 자기도 한다.
그렇다고 일본에 온돌 같은 바닥 난방식 주택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고급 주택과 최근에 지어진 가정집이나 맨션(아파트) 한정이지만 일본도 바닥 난방 주택이 있다. 일본에서 유카단보(床暖房)라 불리는 한국식 현대 온돌 시스템과 비슷한 난방 시스템을 사용하는 가정집도 늘고 있다. 다만 일반화된 시공이 아니다 보니 시공 시 추가시공비용을 내야 하며, 일본 주택의 단열 성능이 떨어지기 때문에 난방비 부담이 엄청나서, 거실의 일부 공간에만 도입하는것이 일반적이다. 기존의 난방기능이 있는 에어컨, 라디에이터, 전기장판, 코타츠 등 병행해서 사용하거나 차라리 돈을 더 내니 껴입는 쪽을 택하는 경우가 많은 편이다. 또한 기존의 일본 가정집은 목조건물이 대부분인지라 연식이 오래된 집에 무리해서 설치할 경우 이것 때문에 화재 등의 안전사고가 종종 일어나는 경우도 있다. 2016년 이후로 한반도 북쪽과 위도가 비슷한 일본 아오모리 현과 홋카이도 지방에 한국식 온돌 시스템을 일본의 환경에 맞춰 개량한 개량식 온돌 시스템이 현재 소규모로 보급되고 있는 중인데. 기존의 유카단보와 비교해서 난방비를 2배 정도 절약이 가능해서 나름대로의 입지를 갖춰나가고 있다.
서양에서는 로마 제국 시대에 유사한 것이 발견되다가 중세 시대에 사라졌다고 한다. 주로 독일과 같은 한랭한 지역에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는 목욕탕의 뜨거운 물을 바닥 아래로 흘려 바닥을 데우는 식의 단순한 시스템으로서 온돌과는 차이가 있다. 그 외에도 1864년 남북전쟁 야전병원(Civil War hospital sites)에서 온돌 형태의 난방 장치가 쓰였다.
그 외에 온돌과 비슷한 시스템으론 로마의 하이포코스트가 있다. 방 밑에 공간을 내고 뜨거운 공기를 대류시켜서 난방을 하는 것인데, 비슷할 것이다. 구글 이미지에서 Hypocaust를 검색하면 대강 한국의 구들과 매우 닮았음을 알 수 있다. 현대 유럽, 미국 등지에선 일반적으로 벽난로/난로나 보일러, 라디에이터를 사용한다. 다만 러시아의 페치카나 독일과 북유럽에서 쓰는 '카헬오펜'이 한국의 온돌이나 중국의 캉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이 있다. 구들을 벽에다 세워놓았다고 보면 된다. 구조
미국이나 유럽에서 바닥 난방 방식은 병원 등 일부 공공건물이나 빌딩에서 주로 사용한다. 한국은 온돌의 전통으로 인하여 가정집에서 사용 비율이 높으며 서구권과 반대로 공공건물이나 화장실에서 라디에이터를 많이 사용한다.
이는 건축 공법의 차이도 한몫한다. 한국은 황토로 지은 흙집이 주류였고, 구들장도 흙벽돌과 돌로 만들었다. 반면 서구권과 일본은 목조 주택의 비중이 많고, 자연히 2층 이상의 가정 주택이 많다. 유럽의 석조 건물 들도 외부 벽체가 아닌 내부의 층별 바닥은 목조인 경우가 많다. 콘크리트로 마감하는 대형 빌딩이 아닌 목조 기반 가정주택에서 하중이 많은 온돌시공을 하지 않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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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독일, 덴마크, 노르웨이의 전통가옥에서는 'Bilegger'라 하여 한국의 아궁이 개념처럼 한쪽에서 조리를 하면 반대편 거실이나 방에서 난방이 되는 장치가 있었다고 한다. 위의 그림을 자세히 보면, 반대편 방을 따뜻하게 한 열기가 다시 굴뚝 쪽으로 올라가면서 햄과 소시지를 훈제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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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래스카 아막낙 섬에서 쪽구들 형태의 온돌 유적이 발견되기도 했다. 이 유적을 연구한 릭 크넥 박사는 한국에 직접 방문하기도 했다. 이 유적이 한반도와 연해주 일대에서 고래잡이를 한 고대 해양 민족이 고래를 쫓아 동진하면서 전래되었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Primitive Technology는 오두막을 짓던 중 온돌 구조로 볼 수 있는 침소를 만들기도 했다. 업로더 본인 역시 설명에 온돌을 언급했다.
테르마이 로마이에서 일본의 전통 온천 시설의 한 종류로 소개되고 있다. 물론 한국에서 건너간 그 온돌 맞다. 애초에 이름부터 온도루. 상술한 바와 같이 로마시대에도 온돌과 비슷한 것이 있었기에 두 소재를 엮어서 스토리를 짠 듯. 아베 히로시 주연 테르마이 로마이 실사판 1편 에서도 주요 아이디어로 나온다.

5. 문제점


바닥과 공기의 온도를 서로 적절하게 맞추기 어렵다. 마루에서 생활하는 한국의 주거 특성상 바닥이 따뜻한것이 좋지만 바닥 온도를 높이면 공기 온도도 높아짐으로 실내가 너무 더워지게 된다. 이 문제는 단열 성능이 좋은 친환경 주택일수록 더 크다.

6. 기타


일본어 가타카나로 표기하면 온도루(オンドル)가 된다. 그래서인지 온돌과 관련된 기사가 2ch에 뜨면 온두루어가 줄줄 달린다. オンドル와 オンドル의 차이가 스테가나 하나 차이이기 때문이다.
한국 아이돌 그룹인 카라가 일본 방송에 출연했을 때 코타츠를 소재로 '일본 대단해'를 이끌어내는 방송이 진행된 적이 있었다. 일본인들은 다들 코타츠 아래에서 귤을 까먹는 이야기를 하면서 카라에게도 이런 반응을 기대했지만, 정작 한국에는 온돌 문화가 있어 딱히 코타츠가 신기하거나 좋은 물건으로 여겨지지 않다 보니까, 멤버 한승연은 "한국엔 그런 거 없어요! 한국에선 바닥 전체를 덥혀요!"라고 대수롭지 않게 대답해 본의 아니게 역관광을 한 적이 있다.[12][13]
온돌의 구조가 방바닥 밑에 공간이 있는 구조이다보니 타짜 1부에서는 방바닥에 홈을 파고 온돌 밑에 숨어 있던 사람이 화투패를 넘겨주는 기상천외한 수법을 구사하기도 했다. 주인공이 눈치까고 방이 추우니 불 지피자는 말에 떼꿀멍하고 망했지만.....
온돌과 같은 바닥 난방을 겪어보지 못한 이들은 문화 충격을 받기도 한다. 호텔 방에 한국식 바닥 난방이 깔린 줄 몰랐던 네덜란드 투숙객들이 단체로 뛰어나온 적이 있었는데, 바닥이 뜨거워서 아래층에 불이 난 줄 알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 바닥 난방에 익숙해지면 일본의 코타츠족(...) 외국인 이상으로 "온돌 대단해!"를 읊고 다니는 외국사람들을 볼 수 있다. 실제로 종로에 많이 있는 여관방 장기투숙객 중 상당수는 이들 온돌문화에 적응한 외국 관광객들인데 거의 연간 단위로 투숙했다. 요즘은 똑같은 바닥난방이면서도 더 고급 숙소인 레지던스로 많이 옮겨간 편이다.
전기밥솥이 드물던 시절에는 온돌을 밥을 보관하는 데도 썼다. 이 시절을 묘사한 소설 등에서 아랫목에 묻어 놓은 밥 운운하기도 하는데 워낙 따뜻하기 때문에 이불 몇 겹 깔고 밥통을 놔두면 몇 시간이 지나도 잘 식지 않는다. 온돌의 성능을 보여주는 사례. 단 밥통이 부실할 경우 사람도 같이 이불을 덮고 있다가 뒤척이면서 밥이 엎어지거나 하는 사례도 있었다. 옛날에는 밥뿐만 아니라 청국장 콩을 발효하는 데도 썼다. 그래서 콩을 발효하는 아랫목의 이불을 들면 매우 구린 냄새가 난다.
2018 평창 동계올림픽에 참가한 캐나다의 쇼트트랙 선수 샤를 아믈랭이 평창 선수촌 숙소에서 온돌 바닥에 누워서 TV를 보고 있는 모습이 인스타그램에 올라와서 소소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아마도 한국식 온돌 바닥이 따뜻해서 기분이 좋았던 모양이다. 사실, 이 영상이 화제가 된 이유는 캐나다나 미국 같은 대부분의 북미권에서는 좌식생활을 하는 문화가 아니다보니 바닥에 누워있는 모습이 신기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구권에서는 신발이나 슬리퍼를 신고 카펫을 까는데, 이 카펫 용도가 바닥의 냉기를 막고 신발에서 떨어지는 먼지를 흡수하는 목적이라 청소를 잘 안 하면 변기 이상으로 더러워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바닥에 눕는 경우는 별로 없어서 취침을 할 때도 침대를 쓴다. 물론, 평창 선수촌에는 침대가 있지만 겨울에도 바닥에 누우면 잠을 못 잘 정도로 춥다. 농담조로 하는 말이, "한국식 온돌바닥에 적응되면 경기에 나가기 싫을 거야", "쟤 귤 좀 갖다 줘", "캐나다 돌아가도 온돌 생각날 거야"라는 재미있는 드립이 있었다.#
2018년 3월 16일 문화재청이 ‘온돌문화’를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하겠다고 예고했다.

6.1. 제주식 온돌 굴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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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의 독특한 전통난방방식으로 아궁이를 불을 때워서 집을 난방한다. 안방과 측벽 사이에 주로 위치했으며 아주 작은 공간이였다. 사람 한명이 들어갈 정도로 넓다.. 제주도는 소와 말의 응가를 지푸라기와 아궁이에 넣고 태우면 냄새와 같이 집이 따뜻하게 된다. 또한 제주도에선 이 굴목을 지키기 위해 있는 사람을 굴목지기라고 부른다.
실은 동물 배설물을 연료로 쓴 건 전세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현상이다. 미국 전통 카우보이들도 중부에서 Cow Chips라고 불리는 말린 들소 똥을 연료로 많이 사용했다 (그냥 들에 싸놓은 젖은 형태는 똥은 카우파이 Cow Pie). 여기서는 21세기에도 전해 내려오는, 소똥을 원반 형태로 말리고 멀리 날려 던지는 대회도 있다...

6.1.1.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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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굴뚝 돌, 구들 돌: 돌멩이라는 뜻의 돌이 아니다.[2] 그 기준이라는게 굉장히 척박하다. 한라산의 경우도 20세기 중반만 해도 해발 1000m이하로는 나무가 없다시피 했었다. 지금 기준으로는 굉장히 깊은 산림조차 사실 연령이 매우 낮은 산림이라는 것이다.[3] 하지만 여기엔 한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정작 그 청나라는 온돌 기술이 없어서 청나라 황제 건륭제도 난방하기 위해서 방안에 화로를 놓고 숯을 태웠다. 정말로 청나라의 벽돌 건축이 온돌 사용에 효율적이었을지는 잘 알 수 없었을 것이다.[4] 현재의 행정안전부인데 내무부 직속으로 산림청을 두었다. 녹화사업을 정부시책으로 추진해서 당시 대통령이던 박정희가 힘을 실어준 결과.[5] 다른 사례로는 독일이 있는데 독일의 경우는 기존 공업지대 자체가 서부 라인-루르 탄전 위에 세워져 있었고, 또 녹지는 다량 확보했으나 과거의 울창했던 숲을 완벽히 복원한 것은 아니다.[6] 스웨덴의 아손 그렙스트, '100년전 한국에 가다 中'[7] V.P 카르네프 대령, '내가 본 조선인' 中 당시 그는 너무 더워서 애를 먹었다고 기록했다.[8] 자료 출처는 과학동아 2001년 1월호.에[9] ##[10] 양반다리정좌 같은 것.[11] 심야전기 이용자들이 하도 늘어나서 값비싼 LNG발전소를 켜야하는 악영향으로 심야전기 신규신청을 폐지했다.[12] 이해를 돕기 위해 말하자면 일본에서 온돌이나 보일러처럼 바닥을 데우는 난방 기구는 고급 주택 혹은 최신 주택에서나 볼 수 있는 형식이다. 즉, 한승연의 말대로라면 자기들 기준으로는 웬만한 중산층들조차 엄두도 못내는 난방 방식이 한국에서는 일상이라는 소리. 좀 더 쉬운 예시를 들면 산유국 출신 연예인이 "우리나라에서 차에 기름을 가득 넣어도 만 원 정도 밖에 안 해요.", 혹은 낙농업국 출신 연예인이 "우리나라에서는 고기 3~4kg에 몇 천원밖에 안해요."라고 말한 것과 같은 소리다. 놀라지 않는 것이 이상한 셈.[13] 하지만 이건 일본특유의 자연환경때문에 생긴 인식인데, 일본은 지진이 자주 일어나는 환경이라 바닥 난방 기구를 설치할 경우엔 화재 피해를 입을 위험이 코타츠만 사용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올라가며,잦은 지진탓에 가스라인도 설치되지 않은 데다가 전기장판도 바닥 난방 기구의 특성상 전기 요금이 엄청 비싸진다는 점까지 감안하면(후쿠시마 원전 사건 이후 탈원전 정책 때문에 전력난도 겪고 있다) 온돌이나 보일러 같이 바닥을 데우는 난방 기구를 더더욱 설치할 수가 없다. 거기다 보일러에 들어가는 등유는 한국에서 수입해서 써야 하는 실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