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석어당
[clearfix]
1. 개요
德壽宮 昔御堂
덕수궁의 주거 건물이다. '석어(昔御)' 뜻은 '옛날(昔)에 임금(御)이 머물던 곳'이다.
2. 역사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 전부 불탔다. 1년 뒤인 1593년(선조 26년) 한양 수복 후 환궁[1] 한 선조는 지낼 곳이 없자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집과 주변 민가들을 행궁으로 삼아 임시로 머물렀다. 처음엔 정릉동 행궁(貞陵洞 行宮)으로 부르다 광해군 때 이름을 경운궁(慶運宮)으로 바꾸었다.
이후 광해군은 소성대비(인목왕후)를 이 궁에 유폐시켰고, 이름도 서궁(西宮)으로 바꾸었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쫓겨난 뒤 인조가 소성대비를 만나러 이 곳에 왔으며, 소성대비에게 인정받은 뒤 서궁에 있는 선조가 머물던 전각에서 즉위했다. 그리고 궁의 이름도 경운궁으로 환원했다.
그러나 인조는 왕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경운궁 건물 대부분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어 경운궁을 사실상 해체했다. 하지만 정릉동 행궁 시절을 기억하기 위해 선조가 사용했던 두 채의 건물을 남겼다.#
비록 흔적만 남았으나, 임진왜란 때 선조가 고생한 것을 상기하려 조선 후기 임금들이 경운궁을 이따금씩 찾았다. 그 중 가장 많은 관심을 보인 왕은 영조였다. 1769년(영조 45년) 영조는 인조가 즉위한 건물에 즉조당이란 이름을 붙였고# 1773년(영조 49년)에는 선조의 환어 3주갑[2] 을 맞아 즉조당에 ‘예전(昔)에 임금(御)이 머물렀다는 뜻’의 '석어당(昔御堂)' 현판을 써서 걸었다. 기록 상으로 석어당 명칭은 이 때 처음 보이며 원래 즉조당을 달리 일컬었던 이름임을 알 수 있다.##
1896년(건양 1년) 아관파천으로 고종은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공사관에 머물렀다. 고종은 장차 돌아갈 곳으로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을 선택했기 때문에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던 1896년에 이미 경운궁을 궁궐답게 만드는 대공사를 진행했다.
1897년(건양 2년) 2월 고종은 경운궁으로 환궁했다. 석어당을 즉조당과 분리하여, 즉조당 동남쪽에 있는 현재 자리에 이름지은 것은 그 이후인 듯 하다. 그 근거로 1904년(광무 8년) 경운궁 대화재 당시 고종의 발언에, ‘환궁할 당시 경운궁에는 즉조당 하나 뿐이었다’는 내용의 기록을 들 수 있다.#[3] 그런데 이 전각이 경운궁 대공사 때 처음 지은 것인지, 아니면 선조 때부터 남아있던 건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앞에 썼듯, 인조 때 남긴 건물이 즉조당 외에도 1채 더 있었다는 점#, 건물 양식이 민가에 가까운 점, 그리고 옛날에 왕이 머물렀다는 뜻의 석어당 현판을 굳이 새 건물에 붙일 이유가 없다는 것을 볼 때, 정릉행궁 시절부터 존재했던 건물인 듯 하다. 1904년(광무 8년) 4월 27일 자 〈황성신문〉에서는 인목대비가 머물던 전각이라 했다.
환궁 후 고종은 정식 침전 함녕전 공사가 끝날 때까지 새로운 석어당에서 머물렀다. 1899년(광무 3년) 1월에는 고종의 친어머니 여흥부대부인의 1주기를 맞아 망곡례[4] 를 석어당의 행각에서 행했다.#
1904년(광무 8년) 앞서 언급한 대화재로 불탔고#, 직후 예전 모습 그대로 재건했다. 1933년 일제의 궁궐 공원화 계획으로 많은 덕수궁의 건물이 헐렸을 때에도 살아남아 오늘에 이른다.
3. 구조
- 현판이 2개 있다. 2층 바깥 면에 걸린 것은 궁내부 특진관이던 김성근(金聲根)이 , 1층 내부에 있는 편액은 고종이 썼다. 고종 현판을 보면 '석(昔)'자 옆엔 '어필(御筆)', '당(堂)' 자 옆에 '광무구년을사칠월 일(光武九年乙巳七月 日)'이란 작은 글씨가 있다. 1905년(을사년) 7월 어느 날에 썼다는 뜻이다.[7]
- 장대석을 3벌대로 쌓아 기단을 구성하고 기단의 상부는 전돌로 마감했으며, 정면에 4벌짜리 계단을 2세트 두었다. 그리고 그 위에 네모난 주춧돌과 기둥을 쌓아 건물을 올렸다. 지붕은 팔작지붕, 처마는 겹처마로, 1층의 경우 초익공 양식의 공포를 두었으나 2층에는 공포가 없다. 용마루와 내림마루, 추녀마루는 기와를 쌓아 마감했다. 용두, 잡상, 취두를 일체 올리지 않고 단청도 칠하지 않았다.
- 뒷면 외관은 앞면과 꽤 차이가 있다. 기단부터 다른데 지형의 특성 상 뒷면 기단은 장대석 1벌대이다. 그리고 뒤에서 볼 때 기준으로 2, 3, 5, 7, 8칸에 각각 가퇴를 설치했고 가퇴의 측면에는 4벌의 계단을 두어 출입가능하게 했다. 또한 양 가퇴 사이에 쪽마루를 설치했고 마루의 가장자리엔 난간을 두었다. 이 난간은 중간 부분을 아(亞)자 형태로 장식하고 돌림띠대에 하엽동자[8] 를 세워 돌난대를 받치는 모습으로 동쪽에 2개, 서쪽에 9개이다. 난간 사이에 사람 한 명이 지나다닐만한 빈 공간이 있는데 이 앞에 댓돌이나 계단이 없다. 원래 그런 건 아니었고 나중에 사라진 것.
- 바깥 면의 창호를 살펴보면, 정면 기준 2, 3, 6, 7칸과 뒷면의 가퇴 부분 창호는 정(井)자 살이다. 이를 제외하고는 2층을 포함하여 전부 띠살로 되어있다. 실내 창호의 경우 대청에서 뒷 툇간으로 나가는 문짝은 아(亞)자 살로 화려하게 만들었고, 동온돌에서 측면의 툇간과 연결되는 창의 경우 정(井)자 살이다.
- 1층은 정면 8칸, 측면 3칸의 총 24칸이고 2층은 정면 6칸, 측면 1칸의 총 6칸이다. 1층 내부는 가운데 2칸을 대청으로, 앞면과 대청 뒷면의 가장자리 칸에 툇마루를 깔았으며 대청을 중심으로 양 옆에 온돌방을 두었다.
- 동쪽 온돌방은 이론 상으로 정면 2칸, 측면 2칸의 총 4칸이나 모든 공간을 1칸으로 터서 방을 넓게 만들었다. 서쪽 온돌방은 약간 다르다. 기본 구조는 동온돌과 같으나, 대청 쪽 칸은 다른 칸과 기둥 및 문지방으로 나누었고, 나머지 칸은 서로 구분 없이 텄다. 서온돌의 서편에는 2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나무 계단이 있다. 방에서 측면의 툇간과 연결되는 창의 모습도 차이가 있는데, 동온돌쪽 창은 전통 양식이나 반대편은 서양식 문짝이다. 이는 근대화 영향을 받은 것을 보여준다.
- 2층 내부는 칸마다 구분 없이 전부 텄고 바닥은 마루로 마감한 모습이다. 천장은 서까래가 바로 보이는 연등천장으로 만들었으며 4번째 칸 위의 종도리에는 용 그림과 무늬를 화려하게 그려넣었다. 단, 색을 입히진 않았다.
- 그러나 덕수궁의 명례궁 시절의 모습을 그린 《신축진찬의궤》와 《임연진연의궤》의 석어당 모습은 지금과 매우 다르다. 우측에 칸 하나가 더 있어 아래쪽 행랑채와 붙은 모습이었으며, 좌측으로 즉조당과도 복도각으로 통했다.
4. 여담
- 문화재청에서 2016년 이후 봄마다 3월 말 ~ 4월 초의 1주일 가량을 석어당과 준명당, 중화전, 함녕전 등 덕수궁의 주요 전각 내부를 개방했다. 해설자의 인솔 하에 단체관람을 했으며 덕수궁 홈페이지에서 예약을 하고 가야했다. 하루에 2번, 1회 당 소요 시간은 1시간 20분 정도였다. 석어당 2층도 개방했는데 2층에 올라서 꽃 핀 덕수궁의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이 관람의 가장 큰 매력이었다고 한다. 2020년에는 코로나 19 사태로 진행하지 않았다.
- 2020년 3월 SK텔레콤이 덕수궁관리소와 함께 덕수궁을 3차원 입체 표현한 어플 'AR(증강현실) 덕수궁'을 시범운영한다고 24일 밝혔다. 그 중 석어당과 덕수궁 대한문, 중화전과 석조전 등 네 곳을, AR로 재현한 판다 · 고양이 · 웰시코기 등과 인증샷을 찍을 수 있게 만든 AR 포토존으로 지정했다. 자세한 내용은 기사 참조.
[1] 還宮. 임금이 궁으로 돌아오는 것.[2] 임금이 서울로 돌아온 후 60갑자가 세 번째로 돌아왔다는 뜻. 1653년(효종 4년)이 1주갑, 1713년(숙종 39년)이 2주갑, 1773년(영조 49년)이 3주갑이다.[3] 정말 말 그대로 즉조당만 달랑 있었다는 얘기가 아니고, 제대로 된 이름과 위상을 가진 건물이 즉조당 뿐이었다는 뜻이다.[4] 빈소나 능묘를 바라보며 곡을 하는 의례.[5] 경복궁 근정전과 창덕궁 인정전도 2층이지만, 실내는 층 구분 없이 뚫려있다.[6] 조선시대 중기까지 석어당처럼 침루로 불리는 2층 건물이 상당히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창덕궁에 있었던 경훈각의 2층인 징광루이다.[7] 이는 즉조당 현판도 마찬가지이다.[8] 荷葉童子. 연꽃 잎 모양의 짧은 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