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두

 


'''김대두
金大斗'''
[image]
'''출생'''
'''1949년 10월 11일'''
'''사망'''
'''1976년 12월 28일 (27세)'''
'''출신'''
'''전남 영암'''
'''체격'''
'''173 cm / 71 kg'''
'''범죄'''
'''살인'''
1. 소개
2. 범죄 행각
3. 사형 집행
3.1.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3.2. 소설 대도
4. 둘러보기

김복준 김윤희의 사건의뢰 대한민국 살인사건 제40화 : 1975년 단 55일간 17명

1. 소개


'''"교도소에 있다가 사회에 나오니 누구도 받아주지 않았다. 친척과 친구들도 전과자라고 냉대했다. 남들보다 끗발나게 살고 싶었는데..."'''

'''대한민국 최초의 연쇄살인마'''이다.[1] 2004년 유영철 사건 발생 전까지 30년 동안 가장 많은 사람의 목숨을 뺏은 살인범으로 기록됐다.[2] 이판능이나 우범곤대량살인으로 분류되고 또한 정신이상자로 평가할 소지가 충분하기에 제외. 물론 제정신으로 사람을 5명, 6명 살해하거나 일가족을 몰살하는 범죄는 잊을 만하면 나왔지만 10명이 넘는 연쇄살인을 저지른 건 김대두가 처음이다.

2. 범죄 행각


1975년 전라도, 경기도, 서울을 돌며 17명을 살해한 연쇄살인마다.
폭력 전과 2범인 김대두는 출소 후 돈이 궁했고 돈을 빼앗기 위해 1975년 8월 12일 첫 살인을 저질렀으며, 같은 해 10월 8일 검거되기 전까지 55일 동안 마구 돌아다니면서 '''아이들을 포함한 17명'''을 살해했다. 특히 1975년 9월 25일부터 1975년 10월 2일까지 경기도의 외딴집을 주요 범행 대상으로 삼아서 단 1주일 사이에 11명을 살해하고 2명에게 중상을 입히기도 했다. 당시 언론에서는 이 사건을 소위 '''야수의 짓'''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첫 살인 후 순천행 기차를 탔다가 우연히 만난 교도소 동기와 같이 돌아다니며 두 번째 범행을 저질렀다. 범행 후 이렇게 된 바에야 돈이 많은 서울에서 살인을 저지르자고 의기투합한 둘은 기차를 타고 서울로 간뒤 헤어졌다. 어쨌든 김대두는 계속해서 범행을 저질렀다.
검거되기 하루 전 교도소에서 갓 출소한 청년에게 접근해 공범을 제의하나, 그 청년이 자신의 물건을 훔쳐 달아나자 그 청년을 살해하고 그가 입고 있었던 청바지를 벗겨 가져갔다. 이때 어리석게도 피해자의 청바지가 피범벅이었음에도 청량리 역 근처의 세탁소에 맡겼다. 세탁소에 피 묻은 청바지를 맡기면서 김대두는 세탁소 주인에게 "친구랑 싸우다가 코피를 흘려서 그 코피가 바지에 묻었다."라고 어설픈 변명을 하였다. 청바지에 묻은 피는 코피를 쏟았다고 하기엔 너무 많았고 결국 이를 수상하게 여긴 세탁소 직원 하씨의 신고로 경찰에 체포되었다.[3] 경찰에 잡힌 직후에 청바지에 묻은 피에 대해서 여러 차례 진술을 바꾸었는데 처음엔 세탁소 주인에게 말했던 것처럼 친구랑 싸우다가 피를 흘렸다고 주장했다가 이후에는 동네 뒷골목에서 불량배들에게 구타를 당해서 피를 흘렸다고 말을 바꾸었다.[4] 그러나 형사가 그 문제의 동네로 갔지만 불량배들중 김대두와 싸운 사람은 단 한명도 없는걸로 확인되었다. 이후에 담당사건 형사인 홍세호 형사랑 함께 중국집에서 같이 탕수육과 술('빼갈')을 먹다가 체념한 듯이 "형사님, 사실 한 놈을 깠습니다.(죽였습니다)"라고 자백을 하면서 그동안 저질렀던 연쇄살인 행각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얼마 후 김대두의 진술로 공범도 체포되었다.[5]
- 1975년 8월 13일, 전라남도 광산군 임곡면(현 광주광역시 광산구 임곡동)에서 잠을 자고 있던 노부부를 습격하여 할아버지를 살해하고 할머니에게 상해를 입힘.
- 1975년 8월 19일, 전라남도 무안군 몽탄면의 구멍가게에서 일가족을 습격하여 노부부와 '''7살 손자를 살해'''.[6]
- 1975년 9월 7일,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면목동(현 중랑구 면목동)으로 올라와서 홀로 사는 60대 노인 1명을 살해.
- 1975년 9월 25일, 경기도 평택군 송탄읍[7](현 평택시)에서 할머니와 손자들을 습격하여 '''5살, 7살, 11살 손자손녀 포함''' 일가족 4명을 살해. '''11살 손녀는 집 밖의 나무에 묶여[8] 강간 시도 후 살해 당한 상태로 발견되었으며 다른 3명의 희생자들은 장도리 손잡이가 부러질 정도로 내리쳐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상태였다.'''[9]
- 1975년 9월 27일, 경기도 양주군 구리읍(현 구리시)에서 일가족을 습격하여 3명을 살해하고 2명에게 상해를 입힘. 부부와 자녀인 '''3살 아기가 살해되었다'''.
- 1975년 9월 30일, 경기도 시흥군 남면(현 군포시)에서 어머니와 '''생후 3개월 된 아기'''를 습격하여 어머니는 강간 후, 아이는 '''내리쳐 살해'''. '''아이의 사인은 장파열.'''
- 1975년 10월 2일, 경기도 수원시에서 30대 부부를 습격하여 2명을 살해.
- 1975년 10월 3일, 경기도 수원시에서 골프장 캐디를 습격했으나 상해를 입히는 데에 그침.
- 1975년 10월 7일,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에서 공범으로 포섭하려고 했던 남성 1명을 살해.
[10]
모든 죄를 순순히 인정했으며, 검거 이틀 후 현장검증을 실시했는데 껌을 질겅질겅 씹어대며 히죽 웃어대는 모습에 전 국민이 경악했다는 이야기가 있다.[11] 또한 범행 수법 자체도 어처구니가 없었는데 그저 외딴집에 사는 일가족만을 몰살하고 얼마 안 되는 돈을 빼앗아 가는 일이 반복되었던 것이다. 돈이 정말 한푼도 없어서 얻은 게 없거나, 손전등 한개, 고추 15근을 들고 나오거나 습격한 구멍가게 안에 있던 먹을 것들로 배를 채운 뒤 250원을 훔쳐간 적도 있다. 어찌 보면 단순 강도살인인데 중상류층을 주로 노리던 이전의 강도 살인자들과 달라서 경찰이 제때 못 잡았다고 할 수도 있다. 표창원이 쓴 한국의 연쇄살인에서는 그가 배운 게 없어서 그저 자기가 살아온 삶과 유사한 곳에서의 강도살인의 형태로만 범죄를 저질렀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옥중에서 기독교 신자가 되었고 수천 명을 신자로 만들었다고 하는데 과연 진심이었는지 사형 판결을 피하기 위한 행동이었는지 지금도 설왕설래가 있다. 같이 수감됐던 사람의 증언을 들어보면 조금이나마 잘못을 뉘우치는 기색이 있었던 것 같더라는 얘기가 있기는 하다. 실미도의 저자 백동호는 김대두가 교회 예배에 출석하며 뉘우치는 기색을 보이기는 했다고 서술했다. 자세한 건 후술.

3. 사형 집행


1심은 김대두와 공범에게 둘 다 사형선고를 내렸다. 그러나 2심에서는 김대두에게만 사형, 공범 김해운은 다수를 살해하긴 했지만 한 건만 가담했고 김대두의 반 강요로 이뤄진 점을 참작해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김대두는 공범이 사형을 면하자 상고를 포기하여 형이 확정되었다. 당시 죄질이 명백하고 다수가 살해된 사건의 주범은 판결 당해 혹은 다음 해 신속히 사형을 집행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므로 이듬해인 1976년 12월 28일 바로 처형되었다.
그가 처형되기 직전 정신적인 측면에 대한 연구를 통해 이후 벌어질 수 있는 사건에 대한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있었고 국선변호인이었던 이상혁 변호사도 감형을 청했지만 결국 이뤄지지 않았다. 결국 제대로 된 연구는 30여 년 뒤 또다른 연쇄살인범 유영철이 잡힌 뒤에야 이뤄진다.
사형당하기 직전 전과자를 냉대하지 말 것과 잡범과 중범죄자, 초범과 재범을 분리 수감하여 초범이나 잡범이 범죄를 배우지 못하게 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비록 용서할 수 없는 범죄자의 유언이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12]

3.1.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3.2. 소설 대도


실미도의 저자 백동호의 첫 작품이자 자전 소설인 '''대도'''에서 주인공 백동호와 같은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백동호와 시비가 붙었는데 키가 작고 만만한 탓에 백동호에게 얻어터지고는 죽여버리겠다고 벼른다. 백동호는 나중에 와서야 그가 연쇄 살인마라는 걸 알고는 담배를 건네며 가까운 사이가 된다. 하지만 자신이 기대한 거물과 거리가 먼, 약자만 골라 죽이는 데다가 그걸 자랑스럽게 떠드는 저질[13]이라는 걸 알게 되자 손절한다. 상술했듯 교회 예배에 참석하게 되자 주위 재소자들에게 베풀며 참회한 모습을 보이지만 자기 성깔은 버리지 못했다고 한다. 죽은 후에도 세상사가 마음 먹은대로 돌아가지는 않는다는 걸 백동호에게 몸소 보여준 인물.
대도가 절판된 탓에 원문을 읽기는 힘들어졌지만 백동호 씨가 '''김복준 김윤희의 사건의뢰'''에 출연해서 자신이 만난 재소자들 썰을 푸는 영상에서 간략하게나마 들을 수 있다.

4. 둘러보기




[1] 이관규의 경우는 일제강점기 시기이므로 논외다. 대한민국 이후로는 김대두가 최초이다.[2] 하지만 실제로는 이동식이 최악의 연쇄살인범이다. 왜 이동식의 살인횟수가 축소되었는지는 항목 참조.[3] 이 신고로 하씨는 포상금 100만 원을 얻게 되었는데, 이는 오늘날 물가로 치면 대략 2억원 정도에 해당가는 거금이다. 정작 돈을 벌고 싶어 하던 김대두가 강도 살인 행각을 저지르면서 빼앗은 돈은 고작 '''2만 6800원'''(당시 화폐가치와 물가상승률을 고려해도 요즘 기준으로 몇십만 원밖에 안 된다.)에 불과했다.[4] 이 동네가 미아리인데 사창가가 있는 동네고 이 당시엔 사창가를 조폭들이 관리했었던만큼 충분히 그럴싸한 일이긴했다.[5] 참고로 김대두는 같이 탕수육을 먹고 있는 홍 형사를 살해하려고 생각하였으나 그 계획을 실현하지 못했다고 한다. 만약 죽였다면 홍 형사는 18번째 희생자가 됐을지도 모른다.[6] 7살 아이를 살해한 방법이 매우 잔혹했다고 한다. 그래서 후에 검거된 뒤 형사가 김대두에게 '''"어린애를 그렇게까지 했어야 했느냐"'''고 물었고 김대두는 '완전범죄를 위해서였다'라 답했다고.[7] 이 당시엔 정말 한적한 시골이었다고 한다.[8] 얼굴에 보자기가 씌워진 상태였다…[9] 추정으로는 5살, 7살짜리 남동생들과 할머니를 먼저 잔인하게 살해한 뒤 11살짜리 여아를 집 밖으로 끌고나가 성폭행 (시도) 후 살해했을 것으로 보인다. 아이가 느꼈을 엄청난 공포심과 범죄의 잔혹성을 생각하면 김대두가 얼마나 사이코패스 급의 인간쓰레기인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10] 김대두는 아이들을 유난히 잔혹하게 살해했다. 프로파일러의 추측으로는 아이들이 공포심에 우는 소리가 김대두의 신경을 자극했을 것이라고 한다. 그 유영철도 우는 아이를 죽이진 않았다.[11] 그런데 현장검증 때 껌을 씹는다는 건 불가능하며, 이 이야기는 도시전설이거나 김대두를 악마화하기 위해 경찰이 흘린 거짓으로 보인다는 의견도 있다.[12] 사실, 김대두 그 자신이 바로 전과자를 냉대한 탓에 다시 범죄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으며 분리 수감하지 않아 교도소 동기와 함께 살인을 시작하게 된 사람이었으니 꽤나 뼈 있는 말이었다. 이는 낙인이론과 차별적교제론의 사례가 될 수 있다.[13] 갓난아기의 목을 밟아비틀어 죽이는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