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채근
1. 소개
前 해태 타이거즈, 쌍방울 레이더스 소속의 포수. 現 홍익대학교 야구부 감독.
전설을 찾아 장채근 상편, 전설을 찾아 장채근 하편, 김종건의 아날로그 베이스볼 장채근편
몸집보다 더 컸던 마음집, 장채근
2. 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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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을 확정지은 후 선동열과 포옹하는 모습.[4]
광주상고-성균관대 체육교육학과를 다녔으며 특히 대학시절 배터리를 이룬 동기 한희민과는 둘도 없는 절친. 대학 졸업후에 1986년 신인지명 1차 9순위로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했으나 당시 주전 안방마님이던 김무종의 존재감이 워낙 막강했던지라 잘해야 1군 백업이었고 주로 2군 신세를 면치 못했다. 어찌어찌 백업 포수로 출전했다 해도 타석에선 대타를 써버리자 견디지 못하고 어느 날엔 경기 후 술에 잔뜩 취해서는 숙소의 김응룡 감독 방에 들어가서 "나에게도 한번 기회를 달라"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으나, 김응룡에게 찍소리 못하고 제압당한 적도 있었다(…). 카더라에 의하면 당시 흉기를 들고 김응용 감독을 찾아갔다고 했지만 장채근 본인이 "주전 기용 요청을 위해 김응용 감독을 찾아간 것은 사실이나 흉기를 소지하지는 않았다"고 밝혔다.6분부터 참고 이 사건을 계기로 오히려 김응룡은 장채근의 배짱을 높이 사게 되었고 그에게 주전 도약의 기회를 주기에 이르렀다.
이후 1987년 시즌 중반, 주전 포수 김무종이 엄지손가락 부상으로 결장하게 되자 김응룡은 장채근에게 안방을 맡겼고, 장채근은 이에 부응하여 잔여시즌 동안 나름대로 활약을 보이며 김응룡 감독의 인정을 받게 되었다. 가끔 터지는 홈런포 외에 타격은 딱히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지만, 장채근의 최대 장점은 어떤 투수든지(선동열이던 전날 갓 올라온 2군의 무명 투수였던 간에) 넓게 포용해주는 안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장채근은 경기 전날 항상 선발투수와 다음날 경기 운영에 대해 미리 의논했고 주로 투수들의 의견을 존중하여 받아들이는 편이었다. 설령 투수가 자신의 후배라 하더라도 "다 받아줄테니 던지고 싶은 대로 던지라"며 편안하게 배려했기 때문에[5] 해태 투수들 대부분은 장채근을 상대로 등판하는 것을 선호했고, 주전 자리를 조금씩 굳히게 된다. 이러한 장채근의 안정적 리드를 바탕으로 성장시킨 투수들로 해태의 에이스였던 이대진, 문희수, 조계현 등을 들 수 있다.
드디어 1988년 시즌이 개막되고 장채근은 본격적으로 주전 포수 자리를 꿰차게 되었다. 장채근은 그 해 당대 최고의 슬러거이던 팀 선배 김성한과 홈런왕 쟁탈전을 벌일 정도로 타격에서도 쏠쏠한 활약을 펼쳤다. 물론 전매특허인 투수리드는 기본이었다. 장채근이 거둔 1988년 시즌 성적은 타율 0.249, 26홈런(2위), 58타점으로 포수로선 상당히 준수한 기록이었다.[6] 그리고 그는 해태 마운드를 잘 다독이며 팀을 1988년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이끄는 데 큰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후 1990년대 초반까지 장채근은 해태의 안방마님으로서 에이스 선동열과 찰떡궁합을 이루며 무려 6번의 한국시리즈 제패(1986~1989년, 1991년, 1993년)의 금자탑을 세우는 주역으로 이름을 남겼다. 1991년 한국시리즈에서는 MVP로 선정되기도 했다.[7] 그러나 1993년 이후 기량이 쇠퇴하며 정회열에게 주전 자리를 넘기고 1994년 시즌 중 최해식과의 맞트레이드로 쌍방울 레이더스에 이적하여 1995년을 끝으로 선수 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8] 10시즌 동안 '''타율 0.228, 97홈런, 285타점'''의 통산 성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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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지도자 경력
3.1. 한국프로야구
은퇴 후 장채근은 1996~2004년 해태와 KIA 타이거즈의 배터리 코치[9] , 2004~2005년 KIA 수석 코치, 2007년 KIA 육성군 코치를 역임하였으며, 2008년 이광환 감독의 부름을 받고 우리 히어로즈 1군 배터리 코치를 지냈으나[10][11] 1년만에 계약이 해지되며 현장을 떠났다.
3.2. 대학야구
'''홍익대의 황금기를 이끌고 연령대 대표팀을 맡으며 유니버시아드 3위 세계선수권 3위를 이끈 명장'''
한동안 야인 생활을 하던 장채근은 2011년 가을부터 홍익대학교 야구부 감독으로 다시 야구 인생을 시작하게 되었다.[12]
홍익대 감독으로 부임한 이후 서울대 베이스볼 아카데미에서 2주간 '아마추어 야구 지도자 과정'을 수료하게 되는데, 여기서 과거 선수/지도자들의 실태를 상징적으로 알려줄 말을 남긴다.'''“내가 그동안 몰랐던 게 너무 많았다. 솔직히 OPS(출루율+장타율)도 몰랐다^^”'''
십 수 년간 프로에서 코치생활을 한 현직 대학 감독이 고도로 정교한 세이버매트릭스 지표도 아니고, 그 당시 이미 야구팬들에게 널리 알려진 OPS도 몰랐다는 건 국내 야구 지도자들의 통계 야구에 대한 관심이 아직 절박하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는 방증.[13] 막상 본인은 타율에 비해 출루율이 높고 장타력이 있었기 때문에 OPS를 살펴보면 '낮은 타율에 홈런만 잘 치는 타자'로 불리던 시절보다 좀 더 고평가 받을 수 있는 선수였다. 실제로 한 기사에서 이와 같은 사실을 언급하기도 했다.
이 후 베이스볼 아카데미를 수료하고 이론 공부에 대해 긍정적인 발언을 하면서 최근에는 놀림을 받기보다 그래도 배우려고 안하는 지도자들 보다 낫다는 평을 받았다.
대학야구 약체팀이었던 홍익대학교를 2013년 춘계리그 준우승(vs동국대)과 대통령기 준우승(vs 건국대)으로 이끌었으며, 드디어 2014년 하계리그에서 단국대를 상대로 우승하며 콩라인 탈출에 성공하였다. 하계리그에서는 홍익대의 첫 우승이며, 전국대회 우승으로는 2004년 대통령기 우승(vs 경성대)이후 10년만인 경사였다. 2015년에는 KBO 총재기 대회 결승에서 동국대에게 승리를 거두며, 또 한 번의 우승을 선사했다. 어찌 보면 선배인 선동열을 안 따라간 것이 신의 한수가 된 듯? 장채근 감독의 활약상
2016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프로팀 감독에 대한 열망을 드러냈다. 관련기사 2016년 하계리그 결승에서 연세대에게 1-3 상황으로 리드 당하는 상황에서 빅 이닝을 만들어냈고, 8-3으로 역전승을 거두며 2년만에 하계리그 패권을 탈환하였다. 2014년부터 3년 연속 우승이며, 부임 이후 3번째 우승에 성공했다. 인터뷰 그리고, 8월에 무등 야구장에서 개최된 대통령기에서 단국대를 제압하고 12년만의 대통령기 우승 및 '16시즌 2관왕의 위업을 달성했다. 2017년 KBO 드래프트에서 제자 나원탁, 원혁재, 김민섭이 지명받는 쾌거를 이루었다.
이런 성적을 인정받아 2016 WBSC U-23 야구 월드컵에 참가할 대한민국 U-23 야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으로 임명되어 대표팀을 대회 3위로 이끌었다.
하지만 임지섭에게 남아공전에서 13개성적표, 다음날 멕시코전에서 75개성적표, 사흘 후 일본전에서 127구를 던지게 하는 등성적표 혹사를 시켜서 비판을 받고 있다.
선수 경력도 화려하고 성품도 모나지 않으며 약체인 홍익대를 대학야구의 명문으로 만들며 많은 선수들을 배출했고 또 약체인 연령대 대표팀을 이끌며 아시아선수권 3위,하계 유니버시아드 3위, 세계야구선수권 3위를 이뤄내는 등 호성적을 기록하며 국가대표팀 감독 후보로 하마평이 오르고 있다. 홍익대를 대학야구 강호로 변모시킨 장채근 감독
전임인 이정훈 감독이 선수들을 혹사시키면서 구단들이 선수들을 차출해주지 않으려 해 각 구단들을 설득하느라 진을 뺐다고 한다. 그나마 kt 위즈가 통크게 주전급 자원들인 박세진, 류희운, 정운, 심우준, 정성곤을 차출해줘 한숨을 돌렸다.
창단 이후 2020년도 전국대회 첫 8강, 4강에 이어 결승에 진출한 김해고등학교 야구부의 박무승 감독이 홍익대 코치 시절 장채근 감독으로부터 많은 노하우를 전수받았으며 본인의 지도자 생활에 많은 도움을 줬다고 밝혔다.
3.3. 대표팀 감독 선임 논란
2018년 8월 엠스플뉴스를 통해 인터뷰를 하였는데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KBSA)가 사상 처음으로 국가대표 감독을 공개모집하고도 여론의 화살을 맞고 있다. 국가대표 감독 선임 과정에서 불분명한 규정과 오락가락한 말 바꾸기로 스스로 논란을 자초한 탓이다.
즉, 이연수 성균관대 감독이 대표팀을 맡고 있는데 과정에서 KBSA 임원 세 명이 면접위원으로 참여해 특정 감독 후보에겐 최고점을, 다른 감독 후보들에겐 최하점을 주면서 면접 심사 결과가 뒤바뀌어진 사실을 더불어민주당 손혜원 의원이 밝혀낸 것이다. 즉 편파판정.
여론의 화살은 이제 KBSA 집행부를 향하고 있다. 취재 중 만난 한 아마야구 감독은 “관리단체에서 벗어난 지 채 2년도 되지 않아 KBSA가 다시 ‘과거의 문제투성이 협회’로 회귀했다”며 “현 KBSA 집행부가 모두 옷을 벗든, 뼈를 깎는 반성을 하든 변화된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KBSA는 또 한 번 관리단체 신세가 될 게 분명하다”고 일갈했다.
이에 대해 장채근 감독은 '''“KBSA가 실시한 U-23 세계야구선수권대회 대표팀 감독 선임에 여러 의혹이 있다'''"는 동료 감독들의 의견을 종합해 감독들을 대표해 KBSA에 정식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KBSA가 말만 ‘공개모집’이지, 실제론 특정인을 염두해둔 불공정한 선임에 치중했다는 게 많은 아마야구 감독의 공통된 생각'''"이라며 "'''지금껏 수십 년간 누적돼온 KBSA의 ‘불공정한 관행’을 뿌리 뽑지 않는 한 아마야구의 미래는 없을 것으로 판단해 내가 총대를 메게 됐다”'''고 밝혔다.
“'''이번 아시안게임 야구대표팀 논란에서 보듯 왜 아마대회에 매번 프로선수들이 대거 출전하지는 모르겠다'''”며 '''“‘병역혜택’를 위해 아마야구를 이용하는 지금 같은 행태는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고 목소릴 높였다.
또한 스승이었던 김응용 회장에게도 강한 불만을 표했다.
즉 양해영 실무부회장이 KBSA에 있다는 것에 대해 강하게 유감을 표하며 수준행정에 대해 '''"역시 사람이죠. 전 양해영 전 KBO 사무총장이 왜 지금 KBSA에서 실무 부회장으로 활동하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돼요. 그분이 KBO 사무총장일 때 KBO가 어땠습니까. 직원이 입찰 비리를 저지르고, 심판이 구단에 돈을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 외 얼마나 불공정한 일이 많았어요. 그런 분이 KBSA에서 실무 부회장을 맡아 협회 행정을 좌지우지한다는 것 자체가 난센스에요. 지금도 어떻게 그분이 아마야구에 오게 됐는지 정말 의아할 따름입니다.'''"
'''"김용균 사무국장과 양해영 실무 부회장 같은 사람들이죠. 이번 U-23, U-20 감독 선임도 두 사람이 결제라인에 있었어요. 특히나 김 사무국장은 정말 수시로 말을 바꿨어요. 야구인을 하찮게 알아도 이렇게 하찮게 여길 순 없는 일입니다. 회장님에게 현안을 있는 그대로 설명드려야 하는데, 전 그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봐요.'''"
엠스플인터뷰
두 달 후 2018년 10월 10일 엠스플추적에서 이 사실이 들통났고 즉 밀어붙이기 점수 형식이 탄로났다. 현직 KBSA 임원 세 명이 면접위원으로 참여해 특정 감독 후보에겐 최고점을, 다른 감독 후보들에겐 최하점을 주면서 면접 심사 결과가 뒤바뀌어진 사실을 더불어민주당 손혜원 의원이 밝혀낸 것이다.
보도자료에서 KBSA로부터 제출받은 U-23 감독 선발 과정의 면접 평가표를 검토한 결과 손혜원의원은 “면접 과정에서 특정인 밀어주기가 명백하게 드러났다”며 “KBSA가 점찍어둔 감독이 있다는 야구계의 소문이 사실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야구계에선 오래전부터 국가대표 감독 선임 과정에 특정인 개입 의혹과 이권 의혹 등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공정성 강화를 위해 시행한 사상 첫 감독 공개채용에서까지 같은 논란이 반복됐다는 건 심각한 문제다.
이에 대해 손혜원 의원은 '''“KBSA는 공개채용 과정에서조차 특정인을 감독으로 만들기 위해 농간을 부린 것으로 보인다'''”며 '''“대한체육회와 KBSA는 면접과정에 개입한 사람이 누구인지 명백히 밝히고 책임 있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엠스플추적
요컨대 장채근 감독이 제기한 의혹들이 사실로 들통났다.
4. 평가
포수 리드에서 볼배합 측면에서는 당대 1위라 할 수 있는 팀 동료 김무종에게 우위를 점한 것은 아니었으며, 수비력도 블로킹 능력 (+ 트래쉬 토크) [14] 을 제외하면 동 시대의 경쟁자들보다 월등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에게는 다른 팀 포수들이 갖기 어려운 강점 2가지가 있었으니,
첫째, '''체격'''.
워낙 체구가 큰 덕분에 장채근이 포수 마스크를 쓰고 앉아 있으면 백스톱이 꽉 찬 듯한 인상이 들어 투수들이 마음놓고(?) 던질 수 있었다고 한다. '''"어디로 던져도 들어간다."'''는 느낌을 주는 인물이었던 것.
둘째, '''소통'''.
투수가 최대한 편하게 던질 수 있도록 '''다독이는데 능하였고''', 마운드에서 흔들리는 투수를 특유의 걸직한 입담으로 긴장을 풀어주곤 했다. 이렇게 하면 투수 개개인의 특성을 살리는데 매우 유용할 뿐만 아니라, 벤치 및 일상에서의 팀 단합에도 큰 도움이 된다.
타격의 경우, 정확도는 평균 내지 그 이하였다. 통산 .228의 타율과 순출루율은 비교적 높았지만 3할 초반인 출루율은 당시 포수들의 타격능력을 보아도 중간 또는 그 이하였다. 그러나 그는 .413의 통산 장타율로 이를 만회하였다. 포수로는 그 유명한 이만수 이후에 시즌 20홈런을 2번이상 기록한 두 번째 사례다. 종합적으로 봤을 때 그의 공격력은 그리 높게 평가할 순 없지만 주전으로 발돋움 한 1988년부터 최전성기인 92년까지의 5시즌 동안은 wRC+ 평균 111 가량으로 준수했다. 당시에는 포수에게 공격력을 크게 요구하지 않고 수비와 투수와의 궁합을 최우선으로 여겼기 때문에 그 정도만 해도 충분하다 여겨졌다.
인상적인 거구, 못 치는 거 같은데 한 번씩 날려주는 일발장타력, 어떤 투수와도 호흡을 맞출 수 있게 하는 푸근함. 이런 독특한 개성으로 타이거즈 전성기의 한축을 담당했기에 해태 타이거즈의 꼬꼬마 팬들이었던 지금의 30대 ~ 40대 팬들에게 잊을 수 없는 선수로 기억되고 있다. 다만 일부 타이거즈 팬들이 그를 과대평가하는 주장을 펼쳐 논쟁거리가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이만수와 김동수 사이에 장채근을 집어넣어야 한다는 주장인데, 장채근 전성기 88~92년에 이만수는 계속 포수 보고 있었고(93년부터 주전포수에서 물러났다.) 그 5년 중에 가장 생산성이 나빴던 89년의 wRC+가 149다.
프로야구 원년에 데뷔한 이만수의 전성기와 86년 데뷔한 6살 어린 장채근의 전성기가 동시에 끝났는데 이만수와 김동수 사이에 집어넣는 건 억지다. 장채근은 전성기 4시즌에도 단 한번도 이만수를 앞지르지 못했으며 92년을 제외하면 김동기, 유승안, 김상국에 밀려 2인자조차 아니었다. 장채근의 포수 골든글러브 3개는 지금 같으면 상당한 논쟁을 일으킬 수 있었다. 굳이 이만수, 김동수까지 갈거 없이 김동기와 유승안과의 비교에서도 드러난다. 프로 원년 멤버인 유승안이 장채근보다 늦은 나이에 데뷔해서 더 일찍 은퇴했음에도 sWAR, wRC+, OPS, wOBA 등 절대장타율 정도를 제외한 주요 지표에서 앞서고, 김동기는 통산 sWAR만쳐도 장채근의 2배가 넘는다.
요약하자면 '당대 최강팀의 주전 포수'였다는 점, '전성기 4시즌(88~89, 91~92)간은 리그에서 다섯 손가락안에 드는 뛰어난 포수였다는 점'에서 야구사에 의미 있는 발자취를 남긴 선수이기는 하지만, '당대 정상급 포수'라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평균 이하인 타격의 정교함을 장타력으로 만회한 박경완의 데뷔 초기(1990년대 말)와 비슷했다.
5. 기타
- 해태 입단 초기 동계훈련 때 김응룡 감독이 체중을 물었는데, 자신의 진짜 체중은 95kg 였지만 5kg를 줄여 "90kg입니다" 라고 답했다. 이에 김응룡은 "한달 줄테니 10kg 빼라"는 지시를 내려 장채근은 한 달 동안 죽어라 고생한 끝에 간신히 5kg를 줄였다. 비록 10kg엔 미치지 못했지만 한 달 만에 5kg를 줄인 게 자신으로서도 뿌듯했던 장채근은 김응룡이 다시 체중을 묻자 "옛! 90kg입니다!!" 라고 자랑스럽게 답했다. 그러자 김응룡의 표정이 일그러지며 "야 임마, 하나도 안 줄였잖아!" 라고 불호령(…). 장채근은 순간 자신이 체중을 속였다는 사실을 깜빡했던 것이다(…).
- 우람한 체구에 비해 의외로 다리가 꽤 가는 편이다.
- 이병훈의 현역 시절 통산 도루 갯수(8개) 중 3개를 허용했다. 이병훈이 "형, 왜 저 안 잡으셨어요?"라고 물으니 장채근이 "발 느린 것들끼리 도우며 살아야지 않것냐?"라고 했다 한다.
- 이병훈이 술회하기를 현역 시절 잠실 원정을 오면 시합 전날 과음으로 LG 트윈스 쪽에 자리를 깔고 앉아 '병훈아~선배 죽겠다. 음료수하고 짬뽕 한 그릇만 갖다 주니라' 말을 했다고 한다. LG 선수들은 우리가 술주정뱅이들이랑 야구를 하네 하면서 웃었다고.
- 현역 시절 이강철이 자기 피부를 칭찬하며 만져대기 좋아했다고 밝혔다. 1990년대 초 해태 시절 선수단이 무등산에서 야유회를 했을 때 둘이 같이 찍은 사진을 보면 뭔가 수상쩍어보이게 나왔다.
6. 연도별 성적
[1] 호적상 이렇고 실제로는 1963년생이라고 한다.[2] 전직 야구선수 김종모도 이 마을 출신이다.#[3] 체육교육학과 (1982학번)[4] 당시 한국프로야구 최초로 챙달린 포수헬멧(현재 포수/주루코치 겸용 헬멧)을 착용한 선수였다고 한다. [5] 이는 나중에 롯데 자이언츠에서 강민호가 이어가게 된다. 장원준에게 "다 받아줄테니 던지고 싶은 대로 던져."라고 했다고. 그 당시 둘 다 신인이였다.[6] 사실 홈런 개수 대비 타점이 매우 적은 편이다. 70~80타점 정도여야 정상적인 수준이나 낮은 타율+하위타순에 주로 들어섰단 점을 감안해야 한다. 물론 장채근이 홈런 쳤을 시 앞 타자들이 출루를 많이 해주지 못한 불운 또한 기인한다.[7] 한국시리즈 사상 첫 포수 MVP였다. 이후 2016년 한국시리즈에서 25년만에 양의지가 MVP를 수상한다.[8] 허구연이 강연에서 회고한 바에 따르면 장채근이 최해식에게 밀리자 식칼을 들고 코끼리 감독에게 찾아가는 기행을(……) 보였다고 하는데, 장채근을 밀어낸 것은 정회열이 맞으므로 허구연의 기억에 착오가 있는 모양.[9] 1996년에 있었던 해태 타이거즈 항명사건 당시 신참 코칭스태프였다. 선수단의 리더는 장채근의 고등학교 선배이기도 한 이순철.[10] 해태 타이거즈 출신인 이순철 수석코치의 추천으로 여겨진다.[11] 이 당시 강정호의 재능을 대단히 높이 사서, 전문 포수로 나가 볼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 [12] 이 때도 비화가 있는데, 홍익대에서 감독 제안이 들어오자 역시 야인으로 쉬고 있던 선동렬에게 "무슨 움직임이 있느냐?"고 물었고, "없다"는 대답을 듣고서야 제안을 수락했다. 만일 선동렬이 프로팀 감독으로 가면 자신도 당연히 데리고 갈 줄 알고 미리 확인한 것이다. 실제 야구계에서 장채근은 선동렬 사단의 일원으로 분류된다고 한다. 근데 장채근의 홍익대 감독 취임 보름 후에 선동렬의 KIA 타이거즈 감독 부임 발표가 났다(…). 장채근이 감독으로 간 직후에 KIA 쪽에서 연락이 왔다면서 선동렬이 직접 장채근에게 해명을 했다고…….[13] 뭐 애초에 베이스볼 아카데미가 그런 거 바로 잡으려고 만들어진 것이긴 하다. 앞으로는 베이스볼 아카데미를 수료해서 통과하지 못하면 지도자 라이센스가 나오지 않기 때문에 이런 일이 점점 줄어들게 될 것이다. 여담으로 이 서울대 베이스볼 아카데미의 총책임자는 이광환이다. 장채근을 히어로즈 시절 코치로 쓴 인물이니 이제 공부시킨 것.[14] 한국시리즈에서 홈으로 쇄도한 주자를 잡으며 구수한 사투리 억양으로 '''"아따 아그야, 니가 살았을 것 같냐?"'''고 약 올리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