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협

 




'''고려대학교 총장'''
제5대
이종우

'''제6대
김상협'''

제7대
차락훈
제7대
차락훈

'''제8대
김상협'''

제9대
김준엽



1. 개요
2. 상세


1. 개요


[image]
金相浹.
생몰기간 : 1920년 4월 20일 ~ 1995년 2월 21일.
대한민국의 전 학자, 행정가이다. 호는 남재(南齋)이다.

2. 상세


1920년 전라북도 부안군에서 김연수(金秊洙)의 2남으로 태어났다. 호는 남재.[1] 일본의 야마구치고등학교를 거쳐 1944년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광복 후 1946년 큰아버지 인촌 김성수(金性洙)가 운영하는 고려대학교 정경대학 조교수가 되었다. 그 뒤 부교수, 교수로 승진하여 1962년까지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에서 정치학을 강의하였다. 1960년에는 학술원 회원이 되었다. 1962년 문교부(현 대한민국 교육부)장관에 임명되어 1963년까지 재임하였다.
문교부장관직에서 물러나면서 곧바로 고려대학교로 복귀하여 1970년까지 교수로 재임하였다. 1966년부터 1970년까지의 시기에는 고려대학교에서 일하면서 집안에서 경영하는 신문인 동아일보[2]에서 감사 및 이사를 맡기도 하였다.
1970년에는 고려대학교 총장이 되었다. 1972년 이후 박정희가 유신독재를 밀어붙이자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이에 극한으로 저항하였는데, 이때 "학생동요 이유있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교수 전원을 한밤중에 소집하여 데모 학생들을 경찰로부터 보호하고 안전하게 귀가하게 하는 등을 통해 부당한 권력의 압제에 저항하였다. 1975년 박정희 정권이 유신헌법 철폐시위와 관련하여 고려대학교만을 대상으로 한 긴급조치 제7호가 발동시키고, 군병력이 학생들의 민주화 시위 진압을 명분으로 고려대학교 교정에 난입하자 이에 항의하며 총장직을 사임하였다. 2년 동안 쉬었다가 1977년 다시 고려대학교 총장으로 복귀하여 1982년까지 재임하였다.
1980년 5.17 내란으로 국가의 실권을 장악한 전두환 중심의 신군부가 국회를 불법해산하고 국회의 기능을 대신하기 위해 설치한 국가보위입법회의[3]에 학계대표자격으로 참여하였다.
1982년 6월, 장영자·이철희 금융사기 사건으로 인해 흐트러진 민심을 수습하기 위하여 유창순의 후임으로 국무총리에 임명되었다.[4] 그러나 1983년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가 발생하자 민심 수습 차원에서 국무총리직에서 경질되었다. 보통 대학 교수나 총장이 얼굴마담 차원에서 국무총리에 임명되다가 경질되는 경우가 많은데 전형적인 사례이다.
말년에는 1985년 8월부터 1991년 8월까지 대한적십자사 총재를 지내면서 사회봉사에 힘썼다.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3. 가족 관계



보다 자세한 가계도는 동아일보 가문 문서를 참고할 것.

[1] 장남은 남계 김상준 前 삼양염업 회장, 3남은 남령 김상홍삼양그룹 명예회장, 4남은 남온 김상돈, 5남은 남고 김상하 前 삼양그룹 회장, 6남 김상철, 7남 김상응 前 삼양사 회장이다.[2] 백부인 인촌이 설립한 언론사로서 인촌의 후손들인 김상만, 김병관, 김재호가 대를 이어 경영중이다.[3] 이 기구가 악명높은 5공화국 헌법과 각종 정치규제안을 모두 만들었다.[4] 한편 김상협이 떠난 고려대학교 총장에는 독립운동가 출신인 김준엽이 취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