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관(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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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관'''
'''金炳琯 |KIM BYUNG-KWAN'''
<colbgcolor=#0f8184> '''호'''
화정 (化汀)
'''직업'''
교육자, 언론인
'''출생'''
1934년 7월 24일, 경성부, (현 서울특별시)
'''사망'''
2008년 2월 25일 (향년 73세)
'''본관'''
울산 김씨
'''학력'''
중앙고등학교 (졸업)
고려대학교 (경제학과 / 학사)
모나쉬대학교 (법학 / 명예박사)
와세다대학 (법학 / 명예박사)
'''가족'''
배우자 안경희
장녀 김태령, 장남 김재호, 차남 김재열
1. 소개
3. 언론활동
4. 고려대 앞 YS 문전박대 촌극
5. 문화-사회 후원 활동
6. 평가
7.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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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대한민국의 언론인, 기업가다. 1934년에 서울에서 태어나 2008년에 사망했다. 중앙고등학교, 고려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였다. 1999년부터 2005년까지 고려중앙학원의 제 11대 재단 이사장을 역임했다. 한 때, 명창 만정 김소희에게서 판소리를 배우기도 하였다.

2. 가족 관계




3. 언론활동


1968년 동아일보사에 입사해 관리과장, 광고부장, 판매부장, 광고국 부국장을 거쳐 1977년에는 판매 및 광고국장, 1981년에는 상무이사, 1983년에는 전무이사, 1985년에 부사장을 하였다.
부사장 시절인 1987년[1] 서울대생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때 군사정권의 회유와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성역 없이 보도하도록 기자들을 격려하는 등 동아일보가 언론자유를 쟁취하고 수호하는데 앞장섰다. 실제 당시 동아일보의 보도는 전국적인 6.10 민주 항쟁을 일으킨 결정적인 보도였고 그게 불씨가 돼 한국 민주화의 전환점을 가져오는 계기가 됐다.
1989년 동아일보 대표이사 사장이 되었다. 1990년에는 한국신문협회 회장을 맡아 한국 언론계를 대표하는 지도자로 4년간 활동했다. 한국신문협회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언론자유 수호의 중요성을 알리는 많은 행사를 개최했고 언론 자유를 침해하는 사례를 비판하는 글을 기고했다.
1993년 동아일보 회장에 취임하였다. 1995년 중국 리펑 총리와 한국 언론 사상 처음으로 단독회견을 가졌다. 1998년에는 북한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의 공식 초청을 받아 남측 신문 경영인으로는 처음으로 방북해 한반도 긴장 완화를 위해 남북한의 교류 확대를 제안하기도 했다. 또 동아일보-아사히신문-인민일보 3사간의 정기적인 국제 심포지엄과 각종 협력사업을 지원해 아시아 3국의 이해의 폭을 넓히는 데도 기여했다.#
2000년 10월 13일 아래에 자세히 서술할 '고려대YS 문전박대' 사건이 있었다. 그 일로 망신을 톡톡히 당하고 언론노련 등에서 사퇴요구를 받자, 2001년에 동아일보 명예회장으로 물러 앉았다. 이때 회장직을 물려받은 사람은 오명[2]이다.

4. 고려대 앞 YS 문전박대 촌극


[image]

오마이뉴스에서 촬영한 당시 김병관 회장이 횡설수설하는 모습. 2분 40초부터.
2000년 10월 13일 김영삼 전 대통령은 고려대에 강연을 하러 왔다. 그러나 사흘 전인 10월 10일 고려대 총학생회는 김영삼의 고려대 방문 저지를 이미 결의했다. 물론 대학당국은 성만영 학생처장을 통해 강연이 어려울 것 같다며 김영삼의 대변인 노릇을 해온 박종웅 한나라당 의원에게 연기를 요청했으나, 김영삼은 이를 무시하고 고집스럽게 고대 정문까지 왔다. 그날의 강연을 기획한 함성득 교수[3]도 하루 전 총학생회로부터 김영삼 교내진입 저지방침을 통보받았지만 수업에 대한 나름대로의 ‘소신’을 갖고 강연을 밀어붙였다. 결국 아침부터 정문을 막아선 약 200여명의 고대생들때문에 김영삼은 고대에 진입을 할 수 없게 되었고, 분유통으로 소변을 해결하면서 그 앞에서 버텼다. 그때 고대 총학생회 쪽에서 “우리는 정문만 막고 있으므로 후문이나 쪽문을 통해 들어가는 길은 터주겠다”는 타협안이 나왔지만, 좌우명이 '대도무문(大道無門)'인 김영삼이 “뒷문으로는 절대 안 들어간다. 떳떳하게 정문으로 들어가겠다.”고 버텼다.
이때 김병관 이사장이 갑자기 '''술이 덜 깬 상태'''로 나타나 김영삼의 차 안에 들어가 면담을 하고 나오더니 시위학생들에게 다가가 '''“나 재단이사장이다. 문 열어라.”'''고 호통을 쳤다. 하지만 학생들은 “못 연다. 걸어서 들어가라”며 야유를 보냈다. 이에 김 이사장도 '''“나는 학교에 걸어서 들어가 본 적이 없다”'''며 큰소리로 맞받았지만 먹혀들지 않았다. 결국 김병관은 별 수 없이 정문에 딸린, 차가 드나드는 옆문을 통해 학교 안으로 걸어서 들어가야 했다.
그러던 김병관은 오후에 다시 정문에 나타나 학생들 앞에 '''“너희들이 이러면 동아일보로 모시겠다. 고려대학은 민족대학, 동아일보는 민족신문, 동아일보로 모신다”'''고 말하였다.[4] 학생들이 꿈쩍도 하지 않자, 김병관은 김영삼 차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잠시 뒤 차 밖으로 나온 김병관은 '''“김정일 위원장이 98년 10월 22일 나에게 ‘하사’한 ‘조선영화음악’이라는 CD 가운데 ‘심장에 남는 사람’이라는 곡을 김 전 대통령에게 들려줬다”'''고 말했다.[5][6] 김병관은 이어 둘러싸인 기자들에게 “인생의 길에 상봉과 이별 그 얼마나 많은가…”라는 <심장에 남는 사람>의 노래가사를 읽어주기도 했다.
그러던 김병관은 갑자기 옆의 어느 기자에게 "어느 신문사 기자인가?"라고 물었다. "한겨레 사회부 기자입니다"라는 대답을 듣자마자 "어? 한겨레? "라고 반응하더니만, 갑자기 안주머니에서 한겨레신문 정연주 논설위원이 쓴 ‘한국신문의 조폭적 행태’라는 칼럼의 복사본을 꺼낸 후 기자들에게 이를 보여주고 주먹을 번쩍 들면서 '''"일어나라 조폭! 폭파해라 조폭! 젊은이여 일어나라! 사주 타도하라! 그거 아냐?"'''라고 술주정을 부리기 시작했다(...)[7] 이어서 '''“YS에게도 보여줬다. 동아일보는 DJ 신문이 아니다. 한겨레신문은 조폭들 보고 다 일어나라고 한다. 이래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김병관은 '''느닷없이 농성학생들 틈에 섞이더니 학생들이 들고 있던 피켓을 빼앗아 들고 10여분간 학생들과 함께 앉아 시위를 벌였다.''' 이 와중에 시위대 사이에 앉아서 담배도 피웠다(...) “이왕 망신당하는 마당에 내일 <한겨레> 톱으로 나련다. 나도 열두시까지 여기 있겠다.”면서 버티던 김 이사장은 동아일보 관계자들의 설득으로 되돌아갔다.
사흘 후 김영삼은 기자간담회에서 동아일보 기자를 가리키며 “너그 회장한테 술 좀 그만 묵고 다니래라. 대낮에 취해갖고 차 안에서 말도 많이 하고. 그래갖고 회사나 학교 운영 되겠나. 내 차 안에서도 들어와서 노래 듣자고 하던데, 생각해보라. 내가 그때 노래 듣게 됐나”고 얼굴을 붉혔다.
2000년 10월 25일에는 이 사태를 놓고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위원장 최문순, 이하 언론노련)이 성명서를 냈다. "동아일보 사주인 김병관 회장은 지난 13일 고려대 앞에서 전 국민을 상대로 취중 추태를 보인 이후 지금까지 어떤 사과나 유감을 표하지 않고 있다"며 "김회장의 고대 앞 추태는 결코 우연히 발생한 일회적 사건이 아니며 우리나라 족벌언론의 '황제 경영'에서 비롯된 오만과 독선의 결과물인 만큼 김회장은 전 언론인과 독자들에게 석고대죄하고 동아일보를 떠나라"고 주장했다.
언론노련은 이어 김회장의 상습적 음주와 그로부터 비롯된 비정상적인 회사 운영, 무능 경영, 상식을 벗어난 편집권 간섭 등으로 인해 동아일보가 조직의 난맥상과 함께 위기에 처해 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김병관 회장이 동아일보 지면을 공개 비판한 기자에게 입에 담을 수 없는 폭언을 가한 것을 비롯해 노조를 비롯한 저항세력을 지속적으로 고립, 소외 시킴으로써 스스로의 자정 능력을 내부로부터 상실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언론노련은 김회장이 2000년 10월 3일 민병욱 논설위원 칼럼[8]을 본인의 동의를 받지 않은 채 무단 삭제한 것과 <대구·부산에는 추석이 없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강요한 것 등이 심각한 편집권 유린 사례라고 꼽았다. 그러면서 "동아일보가 유신 시대의 동아투위를 거쳐 박종철 사건 등 근현대사의 고비 고비에서 역사의 흐름을 바꿔 냈던 시대의 양심인 만큼 김병관 회장의 사유물도 아니고 동아일보 구성원들만의 소유물도 아니다"라고 주장하며 "동아일보를 살리기 위해서 김 회장 퇴진 요구는 불가피하다"는 의견을 개진했다.#

5. 문화-사회 후원 활동


1989년 동아일보 사장 시절, 그가 국립극장과 손잡고 펼친 ‘창작 창극운동’은 척박했던 국악계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해외 순회공연을 통해 세계적으로 큰 호응을 얻은 창극 ‘아리랑’을 비롯해 임꺽정, 안중근, 김구, 홍범도, 전봉준 등이 그의 후원으로 재조명됐다.
또한 남도의 토속, 민요를 소재로 한 연극과 영화 촬영에도 전폭 후원, 지원해주었다. 1998년 10월 북한에 다녀온 김병관은 사재를 털어 ‘화정평화재단’과 ‘21세기 평화연구소’를 설립했다. 얽히고설킨 한반도 문제의 해법을 찾기 위한 것이었다. 그밖에 그는 한국신문협회 회장과 한국디지털교육재단 이사장 등을 역임하기도 했다.

6. 평가


안좋게 평가하는 측에서는 그냥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호의호식하며 살아온 과정에서 그에게 별다른 사상이나 신념 같은 것은 없었다고 평가하는 경우도 있다. 그의 조부인 인촌 김성수와 그의 부친인 일민 김상만은 각각 친일 논란과 기자 강제해직[9] 등 이력이 있다 해도 민족언론 동아일보사의 사주로서 민족주의민주주의 등에 양식을 갖고 있었고 매사에 극단적인 방향으로 가는 게 아니라 중립적, 포용적 사고를 하는 사람이었지만 김병관은 전혀 그렇지 못했고, 동아일보라는 거대언론사의 사주를 맡기에는 여러 모로 부족한 사람이었다는 견해이다.
그의 임기 이후 동아일보가 기존보다 보수화 되었는데 그 원인으로 꼽히는게 있다. 2001년 동아일보가 김대중 정권에 의해 세무조사를 받던 중 그의 부인 안경희도 검찰 조사를 받았는데 안경희는 그런 일련의 검찰 수사 과정에서 모욕감을 느껴 투신자살하였고 이 이후로 동아일보와 당시 여권과의 관계는 최악이 되었다.#
좋게 평가하는 측에서는 그는 언론사를 운영함으로써 '이 나라 자유민주주의의 보루로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수호는 독자들과의 변할 수 없는 약속'이라는 신념을 가졌고,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수호'를 의무라 자임하였으며 개혁과 합법이라는 이름으로 자유민주주의를 훼손시키려는 세력에 대한 반발과 부정적인 시각을 피력하였다고 얘기한다.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는 그를 기리는 추모사에서 "화정 선생에게 동아일보는 3대를 이어온 영광스러운 가업(家業)인 동시에 벗어던질 수 없는 무거운 십자가였다. 창업주 인촌 김성수 선생을 중심으로 일제강점기의 어둡고 고통스러웠던 시기에 출발해 오늘에 이르기까지 격동의 역사를 헤쳐온 역사 깊은 신문의 운영을 책임지는 중압감에서 잠시라도 몸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라고 평하였다.
절친한 지인 중 한 명이었던 이정일 전 국회의원은 다음과 같이 평하기도 했다. "화정의 부인 안경희 여사 생전에는 내외가 함께 해외여행을 자주 다녔다.", "그분은 불의와 타협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허허실실 웃더라도 자기 주관이 분명했다. 평소 술을 좋아했지만 취중에도 편집국장이 상의해오면 전혀 흐트러짐 없이 항상 공정하고 불편부당한 입장에서 냉정하게 지시했다. 다른 것은 양보해도 기사에서만큼은 양보란 없었다. 1990년 노태우 전 대통령 재임 중 3당 합당을 할 때도, 김대중 정부 때도 권력에 문제가 있으면 결코 좌시하지 않았다. 언론을 떠나서 다른 무엇을 할 수 없는 분이었다."
그의 초등학교 동창으로 60년 가까이 희로애락을 함께한 이상혁 변호사는 “투박한 얼굴에 말은 없고 눈만 껌뻑거려 남들에겐 무뚝뚝해 보였겠지만, 잔정이 많은 사람이었다”면서 “어느 여행지를 가든 1000~2000원 하는 값싼 기념품을 사가지고 와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직원들에게 나눠주곤 했다”고 말했다.

7. 여담


  • 앞서 서술된 바와 같이, 술 때문에 사고를 치는 일이 잦았다. 한번은 낮술을 마시고 취한 김병관 회장이 동아일보 편집국에 들렀다가 인터뷰차 방문한 배우 채시라와 만나게 되었다. 당시 채시라는 드라마 왕과 비에 출연하고 있었는데, 김 회장은 대뜸 채시라에게 "대왕대비 마마"라고 부르더니, 술에 취해서 몸을 제대로 못 가누면서도 채시라에게 기념사진 촬영을 요구하여 실랑이가 벌어졌다고 한다. 이 사건이 당시 기자협회보에 보도되기도 했다.기사
  • 한겨레21의 기사에 따르면 부친인 일민 김상만은 그가 동아일보 사주가 되는 걸 달가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젊어서부터 맏아들의 행실을 못마땅하게 여겨서 동아일보 사줏감이 아니라고 판단했고 그래서 김상만은 차라리 동아일보가 설립되던 초기 형태로 소유구조를 돌려서 일종의 ‘국민주 언론사’로 복귀시키려 했다는 내용이다.# 구체적으로 누구라고 출처는 없이 그냥 "내부사정에 밝은 사람들"그렇다더라라는 내용이라 어디까지 믿을지는 알아서 판단하자.
[1] 참고로 이 1987년 당시 동아일보 부사장이 김병관, 사장이 김성열, 회장이 김상기였다.[2] 경기고육사,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했다. 건국대 총장, 대전 엑스포 조직위원장, 체신부 장관, 교통부 장관, 과학기술부 장관 등을 역임하였다.[3] 연세대 출신으로 고대 교수가 되어 화제가 된 인물이다. 국내 최초로 '대통령학'을 연구하여 나름 독보적인 인물로 꼽히기도 하였다. 그러나 2008~2009년 인터넷 검색광고 전문업체 ㅍ사 대표 윤아무개(46)씨한테서 “옥션이 광고대행 수수료를 낮추려고 하니 백용호 공정거래위원장에게 부탁해 수수료 인하 방지 및 기존 계약 유지를 도와달라”는 청탁을 받고, 그 대가로 윤씨한테서 현금과 승용차 리스료를 합쳐 7850만 원을 받았다가, 징역 10월을 선고 받았다. 그 직후 고려대에서 당연퇴직 처리됐다.#[4] 여기서 '민족대학' '민족신문'이란 말이 왜 나오는가? 확실히 술에 취한 상태에서 그냥 이말 저말 하는 중이다.[5] 이 CD는 당시 조선아태평화위원회 김용순 위원장의 초청으로 김병관이 북한을 방문했을 때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6] 뜬금없이 시위학생들에게 북한과의 친분을 언급하는 이유는 1996년 연세대 사태 이후로 대학생들이 시위하는 건 종북주의 한총련이라고 지레짐작해서 도매금으로 엮은 것이었다. 한 마디로 '니들 김정일 수령님 모시는 빨갱이들이지? 내가 다 알아!'식의 막무가내로 행패를 부린 것.[7] 한가지 웃긴 사실은 저렇게 만취한 상황에서도 언론사 사주라는 자각은 있는지 실제 타 언론사의 헤드라인은 알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한겨례가 저런 사설을 썼었고, 취중에서 용케도 한겨례 기자 앞에서 저 이야기는 꺼냈다...[8] 한나라당을 강도 높게 비판한 칼럼이었다.[9] 다만 그 독재시대에 회사 자체를 문닫게 할 생각이 아닌이상 해직은 한 기업을 책임지는 경영자로서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