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자·이철희 금융사기 사건

 


1. 개요
2. 인물 소개
3. 사건의 발단 및 진행
4. 사건의 여파
5. 사건 이후의 장영자
5.1. 2차 장영자 사건
5.2. 3차 장영자 사건
5.3. 4차 장영자 사건
6. 여담
7. 참고 자료
8. 관련 문서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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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행각을 벌이다 구속되고 있는 장영자
1982년 일어난 사건으로 전두환시절의 경제사건이다. 한동안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금융사기사건으로 이른바 '단군이래 최대의 사기사건'으로 회자되었다.[1] 명성그룹사건, 영동개발진흥사건과 함께 5공 3대 금융부정 사건 중 하나다. 장·이 사건이라 부르기도 한다.

2. 인물 소개


장영자는 사채시장 거물로 사건이 터지기 전부터 엄청난 재력가였으며, 젊은 시절부터 미모와 '''남다른 지략으로 다른 사람을 조종하는데 매우 능한 인물'''로도 명성이 있었다고 한다. 상대방이 어지간히 영리한 사람일지라도 장영자 본인의 뜻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자신감마저 보인적 있었다고.
하지만 장 씨가 재산을 불린 과정은 잘 드러나지 않았고, 세간에도 거기까지는 알려져있지 않다. 장영자의 형부 이규광(전두환 부인 이순자의 삼촌) 이 증권 정보나 거물을 소개해주고 금전 관리법을 알려주는 식으로 영향을 끼쳤을 거라는 견해도 있으나 미확인이다. 어쨌든 사건이 터졌을 당시 이미 부동산과 사채 시장에서 '''큰손'''으로 유명했고, 대부분의 어르신분들도 큰손이라고 하면 으레 장영자를 뜻하는 걸로 아신다. 참고로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는 군인 아내 시절의 이순자가 장영자를 따라 부동산 투기에 나서 연희동 집을 샀다는 내용이 나온다.
장영자는 여러가지로 인맥이 탄탄하다.
먼저 남편은 중앙정보부 차장 출신인 이철희. 이 사람은 육군방첩대 SIS[2]에 부대장 출신으로, 중앙정보부 창설요원이며 정보 관련 업적이 대단했다. 대북 작전에도 어느 정도 개입했고, 김대중 납치 사건을 비롯한 대규모 공안사건에도 많이 끼어들었다. 박정희김대중 납치를 직접 지시했는지에 관하여는 논란이 있지만, '''이철희는 누가 뭐래도 핵심 라인이었다.''' 이러한 공로 때문인지 유신정우회 소속으로 국회의원도 역임했다.
그리고 바로 윗문단 장영자의 재산 형성 과정에서 언급된 장영자의 형부 이규광은, 이순자의 숙부다.
또한 당시는 야당 지도자였으며 훗날 대통령이 된 김대중장영자의 사촌형부였었다. 왜냐하면 김대중의 첫 부인 차용애[3]가 장영자에게는 고모의 딸, 즉 고종사촌 언니였다. 하지만 김대중과 장영자는 인척관계는 아니다. 차용애가 사망한 후 김대중이 이희호와 재혼했기 때문에 기존의 처가와의 인척관계는 소멸되었다. 따라서 김대중과 장영자는 법적으로 완전 남남이다.


3. 사건의 발단 및 진행


1980년 7월, 당시 국군보안사령부 보안처장이었던 정도영 준장은 '어느 중년 여인이 군 부대 불교 행사에 빠짐없이 참석해 거액을 뿌리고 다닌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이 여인이 해당 부대의 부대장들과 아무런 인연도 없으면서 거액을 기부했다는 점이 수상했다. 조사 결과 여인의 이름은 장영자로 당시 나이 40세, 법명은 보각행(普覺行)이고[4], 엄청난 재력가 행세를 하지만 사실은 빚 독촉을 받는 상태였다. 곧 장영자는 요주의 인물로 지목되었고, 각 부대에는 '장영자를 조심하라.'는 지휘 조언이 내려갔다.
1981년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산하 민정수석비서관실에 장영자 부부에 관한 첩보가 입수되었고, 민정수석비서관이학봉국가안전기획부유학성에게 통보해줬다. 유학성은 처음엔 별 거 아니라고 여겼으나 곧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1982년 4월 공영토건이 장영자에게 어음 사기를 당했다며 진정서를 대한민국 검찰청에 제출했는데, 검찰 내사 결과 어음 사기와 관련된 기업이 더 있음이 밝혀졌다. 처음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2과에서 이 사건을 맡았으나 곧 중수부와 서울지검들이 맡았다.
1982년 5월 7일 대검찰청 중앙수사부가 (부장 이종남 검사) 장영자 부부를 구속하며 사건의 전말이 밝혀졌다.
장영자는 주로 자금압박에 시달리던 건설업체들을 찾아가 남편 이철희의 과거 경력을 들먹이며 "특수자금이니 절대 비밀로 하라." 하며 현금을 빌려주고, 그 대가로 업체들로부터 수배에 달하는 약속어음을 받아냈다. 공영토건에서는 빌려준 현금의 9배에 달하는 1279억 원을 약속어음으로 받아냈다. 이들 부부는 이렇게 받은 어음을 할인해서[5] 생긴 돈을 다른 회사에 빌려주며 똑같은 짓을 하였다. 이걸 계속 반복해서 받은 어음의 총액은 7111억 원이고 이 중 6404억 원을 할인해서 사용하였다. 처음 종자돈을 제외한다면 마치 폰지사기다단계처럼 그야말로 무에서 유를 만들어낸 셈이었다.
참고로 신군부가 3공화국, 4공화국의 대표적 부정축재자로 지목한 10명의 부정축재액 총액이 853억 원이었는데, 장영자 부부가 받아낸 어음 총액은 '''7111억 원'''이다. 2020년 현재에도 7111억 원이면 대기업조차 쥐락펴락하는데, 저때는 이루 헤아리지도 못하는 거액이었다. 서민용으로 지은 개포동 주공아파트 18평짜리도 분양가가 600~700만 원이었다. 지금의 환율로 따지면 약 7조 원 내외고 거기에 당시 GDP의 1.4%, 당시 한국정부 예산의 10%를 차지했다.
워낙 엄청난 규모의 사기 사건이고 장영자전두환의 처가와 얽혀 있다 보니, 이 사건의 배후에 청와대가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가령 태양금속은 현금 단 한 푼도 받지 않고 어음을 끊어주는 등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사실 여부를 떠나서 그런 의혹이 제기될 만했다.
어쨌든 이 사건으로 포항제철에 이은 업계 2위 일신제강(현 KG동부제철), 도급 순위 8위였던 공영토건[6] 등이 모두 부도가 났다. 그리고 장영자와 이철희에게는 법정 최고형인 징역 15년형과 미화 40만 달러, 엔화 800만 엔 몰수형, 추징금 1억 6254만 6740원이 선고되었다. 또한 장영자의 형부이며 영부인 이순자의 작은 아버지 이규광에게도 징역 1년 6개월 및 추징금 1억 원이 선고되었다. 그 외에 구속된 사람이 30여명에 이르렀으며, 장영자의 집에 침입해 물방울 다이아 등 1억 2천만 원 어치를 훔친 유명한 절도범 조세형을 잡은 사례로 장영자에게 50만 원을 받았던 경찰관 8명은 쫓겨났다.[7] 참고로 당시 경력 10년짜리 평교사 월급이 25만 원 수준이었다.
또한 사건과 직접적으로 관련있는 일은 아니지만, 검찰은 사건 조사 후 '장영자 부부가 15개월 만에 49억 원 내외를 썼다.'고 발표했다. 이 때문에 시민들은 아연실색했다. 이 부부는 하루에 1089만 원 내외를 지출한 셈이다. 장영자 부부는 서울 시내 20평 아파트가 1천만 원이 안 되었던 '''1980년대에 이랬다.'''

4. 사건의 여파


이 사건으로 국무총리 유창순, 경제기획원장관 겸 경제부총리 신병현, 외무부장관 노신영, 문화공보부장관 이광표, 법무부장관 이종원, 검찰총장 정치근, 국가안전기획부유학성, 내무부장관 서정화, 총무처장관 김용휴, 재무부장관 나웅배, 체신부장관 최광수, 보건사회부장관 천명기, 민주정의당 사무총장 권정달, 교통부장관 윤자중, 농수산부장관 고건[8], 상공부장관 서석준, 동력자원부장관 이선기, 정무수석비서관 허화평, 사정수석비서관 허삼수 등 당시 5공의 실세들은 물러났다. 유학성의 후임 국가안전기획부장에는 노신영이 임명되었다.
단, 허화평과 허삼수는 바로 경질되지는 않았고 그 해 말에 경질되었다. 허화평과 허삼수는 이 사건을 계기로 김상구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 사무차장 등 전두환 대통령의 친인척들을 공직에서 배제하려고까지 하였고 심지어는 전두환 정권의 개국 공신들인 유학성, 노태우, 정호용 등을 궁정동 안전가옥에 초대하여 전두환에게 친인척의 2선 후퇴를 건의할 것을 결의하기까지 하였다. 이 점 때문에 그들은 전두환의 눈 밖에 났다.
여담으로, 박철언 전 의원의 회고에 의하면 허화평과 허삼수는 경질되기 몇 달 전부터는 청와대 본관 출입도 경호원들에 의해 통제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대통령비서실 법률비서관 겸 정무비서관 신분으로 해당 사건을 수사한 검사들을 텔레비전에 출연시켜 의혹을 잠재우는 데 기여했다고 하였다.
이후 장영자는 음모론을 제기했다. 이순자의 아버지 이규동명성그룹의 뒤를 봐주고 있다는 의혹으로 세간이 시끄러워지자, 전두환 정권에서 그를 무마하려고 장영자-이철희 부부를 대신 희생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훗날 장영자가 출소한 후에도 사기 사건을 일으켜 다시 구속 수감되는 행각을 되풀이했음을 생각하면, 이순자의 친정 식구들이 비리를 저지른 것은 저지른 거고, 장영자는 장영자대로 사고를 친 게 분명하다.
5공 정부는 이 사건을 무마하고 민심을 달래기 위해 2차례의 개각[9]과 1982년 5월 민주정의당 당직 개편을 단행했다. 그러나 국민들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고 5공 정권 구호를 빗대어 '정의사회구현 좋아하네.'라고 빈정대는 말이 유행어가 되었다. 그리고 신병현 부총리는 이 사건으로 경질되었다가 아웅산 묘소 테러사건으로 서석준 부총리가 순직하면서 다시 부총리직에 돌아오게 되었다.
김재익 경제수석비서관은 이 사건이 터지고 나서 제2의 장영자, 이철희 사건을 막기 위해 시중의 음성자금을 양성화해야 한다는 점과 조세 부담의 불균형을 시정해야 한다는 점을 들어 전두환에게 금융실명제 시행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기득권층에서는 정치 자금 모금의 어려움, 기업 활동의 어려움을 들어 반대하여서 없던 일이 되었다.[11] 결국에는 이 때 불발된 금융실명제가 나중에 김영삼 정부 시기인 1993년 8월 12일 오후 8시 정각이 되어서야 시행되었고,[12] 1997년 12월 31일에는 이를 확정한 법률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이 공포되었고, 2001년 11월 28일에는 금융실명제 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는지에 대한 여부는 불명이지만, 당년 9월 27일에 제정된 「특정 금융거래정보의 보고 및 이용 등에 관한 법률」이 시행되어 여러차례 개정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있다.[13]

5. 사건 이후의 장영자



5.1. 2차 장영자 사건


장영자는 1991년 가석방된 후에도 용인술, 처신에 대한 자신감으로 억울함을 호소하는 언론 보도를 내는가 하면, 다시 시중 은행의 주요 간부들을 자신있게 찾아 다닌다. 하지만, 1994년에 다시 140억 원대 어음사기 사건을 저질러서 4년간 복역한다. 이것이 일명 '2차 장영자 사건'으로 여기에 연루된 동화은행서울신탁은행에도 불똥이 튀어 현임 은행장들이 사임했고, 이들 기관들도 징계를 받았다.[14]

5.2. 3차 장영자 사건


그 후 1998년에 광복절 특별사면으로 풀려나서 '이번에야말로 좀 조용히 살려는가 보다.' 했지만, 또 다시 '''구권 화폐 사기'''를 일으키며 2000년에 다시 구속되었다가 2015년 1월에야 석방되었다. 이 기간 동안 남편 이철희가 옥중의 아내를 정성껏 돕는 모습이 다시 한 번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구권 화폐 사기가 무엇인지는 다음 기사들을 참조하면 된다. 2005년 머니투데이, 2007년 시사저널[15], 2013년 Go발뉴스

5.3. 4차 장영자 사건


2018년 12월 21일, 출소 3년 만에 또 6억대 사기를 쳐서 구속되었다.#

6. 여담


  • 당시 이동찬 코오롱그룹 회장은 장영자에게 코오롱그룹의 계열사 중 하나인 코오롱건설을 팔려고 하였다. 그런데 팔기 직전 장영자가 검찰에 연행되는 바람에 이 사건에 연루되는 화를 면하였다.
  • 장영자는 전 남편[16]과의 사이에 남매를 두었는데, 이 남매는 부모가 이혼한 후 아버지 밑에서 컸다. 전 남편이 크게 사업을 하는 사람이라 경제적으로는 남 부러울 것 없이 자랐지만, 엄마의 복잡한 팔자를 물려받았는지 남매 모두가 삶이 평탄치 못했다.
  • 먼저 남매 중 맏이인 배우김주승과 결혼해서 딸까지 낳고 한동안 잘 살았는데, 장영자가 출소하고 다시 사기 사건을 일으켰을 때 김주승의 연예계 제작사가 부도나면서 김주승이 미국으로 도피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 일과 그 밖에 알려지지 않은 이런저런 사정으로 인해 부부는 결국 이혼했고, 그 후 김주승은 2007년에 지병이던 췌장암으로 사망했다.
  • 남매 중 둘째인 아들은 2000년 구권 사기 때 장영자와 함께 잡혀갔다가 풀려났는데, 교도소까지 다녀와 자중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고, 오히려 뺑소니 사고를 크게 치고 외국으로 튀었다(…). 그러나 몇 년 후 희귀병에 걸려 시한부 인생이 된 상태로 귀국했는데, 알고 보니 외국으로 도피하기 전에 사귀다가 헤어진 여배우 차주옥[17]이 둘 사이의 아이를 낳아 기르고 있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상태라 자기 핏줄에 애착이 느껴졌던지, 장영자의 아들은 죽기 전 차주옥과 혼인신고를 해서 정식 부부가 되었고 얼마 후 사망했다. 그런데 장영자의 아들이 생전에 아버지의 유산 분배를 놓고 누나에게 소송을 건 상태였는데, 소송 중에 사망하면서 법적으로 부인이 된 차주옥이 그 소송을 대신하여 계속했다. 즉, 장영자의 딸과 며느리 사이에서 재산분쟁이 벌어진 것이다. 장영자 가족 잔혹사 3탄 이번엔 재산분쟁
  • 장영자 부부 소유였던 땅에 빌딩이 지어졌는데 하필이면 폐건물이 된 적이 있다. 일명 장영자 빌딩. 그러다가 소유주가 바뀌면서 2014년 10월에서야 15년 만에 완공됐다.
  • '2. 인물 소개'에 설명한 것처럼 장영자의 친언니는 당시 전두환 정권에서 승승장구하던 전두환의 처삼촌 이규광과 결혼했는데, 공교롭게도 장영자의 고종사촌 언니는 전두환 정권에 맞서던 김대중과 결혼했다.[18] (당연히) 이규광의 부인(장영자의 언니)도 김대중 첫 부인의 고종사촌 동생이라서, 이규광과 김대중은 사촌동서가 되고, 이규광이 손아랫동서라 김대중에게 형님이라고 불러야 한다. 이렇게 되면 이순자는 자기 작은아버지 이규광의 형님뻘인 김대중에게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 그리고 전두환은 처삼촌 이규광의 손윗동서인 김대중을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 물론 전두환과 김대중은 어디까지나 '사돈의 사돈'일 뿐이라서 촌수니 항렬이니 하는 것을 따질 사이는 아니다. 하지만 굳이 억지로 따져보자면 전두환이 김대중의 조카사위뻘이 된다.(…) 그래서 가끔 '전두환과 김대중이 사실은 친척 사이라더라'고 잘못 알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김대중과 장영자는 혼인으로 연결된 인척관계인데, 인척관계는 혼인관계의 소멸 즉 이혼, 혼인의 취소 그리고 배우자의 사망 후 생존배우자의 재혼으로 소멸한다. 차용애의 사망후 김대중이 이희호와 재혼했기때문에 기존의 처가와의 인척관계는 소멸된다. 김대중과 이희호가 결혼한 것은 1962년이므로 이미 1962년부터 김대중과 장영자는 법적으로 완전 남남이었다. 따라서 김대중은 이규광이나 전두환과도 아무런 친인척 관계가 없다. 한마디로 그냥 말 많은 인간들이 어거지로 끼워 맞춘 것에 불과하다.
  • "100년 만에 한 번씩 장씨 여자가 큰 일을 벌인다." 하는 입소문(?) 같은 말이 있다. 어르신들이 이 사건을 두고 지금까지도 이 말을 입에 올리는 경우가 있다. 또한 큰일을 벌이는 장씨 여자의 예로는 장영자 외에 조선시대에 이름을 날린 장녹수장희빈이 거론된다. 공교롭게도 둘은 각각 16세기 초와 18세기 초에 등장한 200년을 사이에 둔 인물이고, 장영자는 장희빈 사후 거의 3세기 뒤 사람.
  • 1993년 12월 19일자 KBS1 <다큐멘터리 극장>에선 재연극 중심으로 다뤄졌는데, 당시 장영자 역은 배우 이경미가 맡았다.
  • 2005년작 MBC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는 무려 3화 분량으로 이 사건이 나온다. 3화는 10.26사건과 동일한 분량이며 이보다 많은 분량은 12.12 군사반란과 5.18 민주화운동 뿐이다. 사실 장영자 사건 자체만이 아니라 이 사건을 이유로 허화평, 허삼수를 포함한 하나회 인사들이 숙청되는 과정까지 나오면서 분량이 많아진 것으로 보인다. 장영자 역은 이혜숙이 맡았다.

7. 참고 자료



8. 관련 문서



[1] 2011년도에 다른 사건에 밀려 결국 순위가 떨어지고 말았다. [2] 국군기무사령부 문서에가면 나오는내용이지만 HID는 육군첩보부대이다. 1960년 4월 SIS라는 이름으로 육군방첩부대가 설립됐고 전신인 육군특무부대 CIC는 1950년 10월에 만들어졌다.[3] 두 아들을 낳고 일찍 사망했음. 이후 이희호와 재혼.[4] 실제로 장영자는 불교 신자다. 원래는 천주교였으나, 후에 불교로 개종하였다.[5] 중앙일보 연재물인 <청와대 비서실>에서 나온 증언에 의하면, 이때 불법으로 어음을 할인하지 않았던 은행장 하나는 '좋은 고객을 놓쳤다.'고 한동안 상사들에게 시달렸다는데, 사건이 터지고서는 '사람 보는 눈이 있다.'며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반대로 어음을 할인해주었던 은행 중 하나인 조흥은행은 이듬해 영동개발진흥사건으로 2연타를 맞아 1985년 기업 CI를 바꿀 정도로 큰 타격을 입었다. 그야말로 인생만사 새옹지마.[6] 부도 이후 동아그룹으로 넘어갔으나, 1997년 외환위기의 여파로 이듬해에 또 부도났다.[7] 당시 짜장면 한 그릇 값이 500원이었다. 2018년 현재의 가치로 환산하면 어림잡아 400~500만 원 정도.[8] 대통령빼고 다 해본 그 분 맞다.[9] 1982년 5월과 6월에 각각 1번씩 개각이 이루어졌으며 특히 6월 개각 때는 유창순 국무총리가 경질되고 김상협 고려대학교 총장이 국무총리 서리로 임명되었다.[10] 작중에서 이학봉은 누굴 디스하는 캐릭터가 전혀 아니다.[11] 당장에 드라마 제5공화국 30회만 보더라도 어느날 갑자기 금융실명제가 시행되기로 했다는 뉴스를 본 허삼수와 허화평은 화가나서 다자고짜 김재익 경제수석비서관을 찾아 "이런 국가적인 정책을 어떻게 상의도 없이 혼자서 진행 할 수 있는 겁니까?" 라고 항의하자 "전두환 각하의 지시였소." 라는 답을 들었고, 김재익은 "개혁을 강력하게 주장하더니 자기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고 하시오?" 라며 허화평을 비꼬았고 옆에 있던 이학봉[10]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도 "금융실명제가 선배들이 그렇게 얘기하던 개혁 아니었습니까?" 라고 거들기 까지 하자 허삼수가 열받아서 주먹을 치켜들기까지 했을 정도였다.[12] 그것도 당년 8월 12일 오후 7시 45분에 '''긴급재정경제명령 제16호'''로 발동되었다. 시간상으로는 금융기관들을 통한 현금인출이 불가능 하도록 밤중에 이뤄졌다.[13] 아무래도 금융실명제는 금융거래 정상화를 통한 경제정의 실현이라는 포괄적 목적만을 가지고 있다는 한계 때문에 추가로 별도의 법률을 제정하여 규제를 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14] 1994년 당시 유명 시사 만화 고바우 영감에서 고전영화 돌아온 장고에 비유해 '돌아온 장영자'라는 내용을 올리기도 했다. 사회활동을 재개한 장영자가 속사포 쏘듯 은행장들을 쓰러뜨린다는 줄거리.[15] 이 기사는 시사in 주진우가 시사저널 시절 작성한 것이다[16] 즉, 이철희와의 결혼재혼.[17] 이 사람이 누구냐면, 한지붕 세가족에서 강남길의 부인인 말자 역으로 나왔던 배우이다.[18] 물론 김대중의 첫 부인은 앞에서도 설명했듯 이 사건이 터지기 전에 한참 전인 1950년대 말에 사망했다. 또한 이 사건이 터졌을 당시 김대중은 전두환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인 신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