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궁
'''金宣弓'''故家喬木至今存 옛 집의 높은 나무 지금도 서 있으니
太守應先下里門 태수(太守)는 응당 먼저 이문(里門)에 내리리라.
半是簪纓半刀筆 반은 잠영(簪纓)[1]
이요, 반은 도필리(刀筆吏)[2] 였으니,順忠公後幾雲孫 순충공(順忠公)의 후손이 몇 대나 되는가.
-김종직, 선산지리도십절(善山地理圖十絶) 가운데 '김선궁'[3]
생몰년 미상.
고려 초기의 호족으로써 선산(善山) 김씨(일선[4] 김씨)의 시조다.
원래 이름은 선(宣)으로 선궁이라는 이름은 일리천 전투 때에 고려 태조 왕건의 병사 모집에 고을의 아전으로써 응모해서 왕건으로부터 '''왕건 자신이 쓰던 활을 하사받고''' 이름을 선궁이라고 고치게 되었다고 한다.
《선산김씨대동보(善山金氏大同譜)》에는 김선궁의 관직을 고려 삼한통합익찬공신 삼중대광문하시중 일선백(高麗三韓統合翊贊功臣三重大匡門下侍中一善伯)이라고 되어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정난보국공신으로 고려 3대 정종(定宗) 때 대승(大丞)에 추증되고 시호를 순충(順忠)이라 하였다고 되어 있다.
김선궁의 무덤은 구미 해평면의 금오리 미석산에 있는데, 무덤에 대해서는 선산부 동쪽 미석산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정작 그 자리에 무덤이 두 개가 있어서 어떤 것이 김선궁의 무덤인지 정확하게 알 길이 없어서 이에 1767년 후손들이 제단을 마련하고 표석을 세워 제사를 지냈으며 1803년에 유허비를 세웠다고 한다. 1862년에 와서 김선궁의 신도비가 세워진다. 그러니까 지금 남아 있는 김선궁에 대한 기록이라고 하는 것도 김선궁이 살던 당대의 기록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당연히 족보 기록은 말할 것도 없다.
김선궁의 신도비에는 그가 신라 김알지의 28세 손이고 문성왕의 7세 손이라고 했는데, 15살 때 외출했다가 돌아와 보니 그의 아버지 체의(體誼)가 고을의 어떤 사람에게 당해 상처를 입고 분해서 드러누워 있다가 아들이 들어오자 "아비가 남에게 수치를 당하면 자식이 가만 있을 수 있겠느냐"며 자신이 고을 관리에게 모욕을 당했다고 아들에게 말했고, 김선궁은 당장 아버지에게 모욕을 주었다는 그 고을 사람에게 찾아가 자신의 이름을 밝힌 다음 그 사람의 목을 베고 관에 자수했는데 관에서는 처음에 선궁을 옥에 가두었다가 선궁의 사연을 알고 효자라며 칭찬하고 방면했다는 일화가 실려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선궁에게 봉술(奉術)과 봉문(奉文) 두 아들이 있었는데 맏아들 봉술은 김선궁의 문하시중 직책을 이어받았다고 하며, 둘째 아들 봉문은 삼사우윤(三司右尹)으로 선산에서 아버지 뒤를 이어 아전이 되었다고 한다. 이후 집안이 번창해 '''선산부의 사족(士族) 및 이족(吏族)은 다 선궁의 후손들이었다고 한다.''' 일선 김씨로 조선 시대의 성리학자였던 김종직은 일선 김씨의 시조 김선궁이라는 인물에 대해 "선산 고을 안의 김씨 성 가진 사람은 모두 선궁의 후손이라고 한다"고 하면서도 '''김선궁이 정말로 실제 자신의 조상인지는 계보가 너무 멀어서 남은 기록이 별로 없어 상고할 방법이 없다'''며 같은 일선 김씨로써 고려 때의 호장이었다는 흥술을 자신의 비조(鼻祖), 즉 자신과의 혈연을 문헌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조상으로 보고 흥술에서부터 족보를 기록했는데, 이것이 《이존록(彝尊錄)》으로 김선궁을 언급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5]
남아있는 기록들을 보면 김선궁의 행적에 대해 가장 믿을 수 있는 부분은 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지금의 구미 선산면인 일선 지역의 아전이었고 일리천 전투 때에 고려군에 가담해 후백제와 싸워서 공을 세웠다는 것이고 그래도 조선 시대까지 '''선산 지역에서 김씨 성을 쓰는 관리나 아전은 거의가 자신을 김선궁의 후손이라고 자처했다'''는 《이존록》의 언급을 보면 선산에서 나름 끝발 날렸던 인물이었음은 틀림없다. 조선 시대 김성일의 차자[6] 에는 축성이 지나치게 폐단이 되고 있다고 하면서 "안열(安悅)이 도둑을 물리친 것은 수주(水州)에서였으며,[7] 김선궁이 적을 이긴 것은 안성(安城)에서였는데 여기에 무슨 웅거할 만한 산천이나 성곽이 있었습니까?"라고 말하고 있다.[8] 김성일이 어디에 근거를 둔 것인지 안성이 어디인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지만 성곽이 없어도 옛날에는 잘만 이겼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그 사례로써 김선궁을 언급한 것을 보면, 군사적인 재능도 어느 정도는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1] 벼슬하는 사람.[2] 아전을 가리키는 단어.[3] 윤료가 제작한 선산지리도에 선산 출신인 김종직 자신이 시를 지어서 덧붙인 것. 점필재집과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려 있다.[4] 선산의 다른 이름이 일선이다. 선산군은 지금의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면.[5] 《이존록》의 현존하는 판본이 연산군 3년(1497년) 김종직의 조카이자 제자였던 강백진(康伯珍)의 간행본과 1528년 박승임(朴承任)의 간행본이고, 《신증동국여지승람》이 완성된 것은 1530년.[6] 왕에게 올린 보고서.[7] 안열은 고려 원종(元宗) 때 수주(수원)부사를 지냈고 원종 12년(1271년)에 대부도(大阜島) 주민들이 섬에 주둔하던 몽골군을 죽이고 삼별초에 호응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이를 진압했다.[8] 해당 차자는 김성일의 문집인 《학봉전집》권3에 실려 있고, 내용은 니탕개의 난(1583년) 이후에 조정에서 너무 무관을 많이 등용하는데 자질도 안 살피고 관리 임용 순서도 안 가리고 관직을 막 준다고, 그러면서 성곽을 짓는다고 백성을 너무 괴롭히는 거 아니냐는 것이 요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