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성왕

 


'''시호'''
'''문성왕(文聖王)'''
'''존호'''
'''국왕(國王)'''
'''성씨'''
김(金)
''''''
경응(慶應)
'''왕후'''
왕비 박씨, 왕비 김씨[1]
'''왕태자'''
폐태자(847 ~ 852)
'''부왕'''
신무왕
'''모후'''
정계부인(貞繼夫人)[2]
'''묘지'''
공작지(孔雀趾)
'''생몰년도'''
음력
? ~ 857년 9월[3]
'''재위기간'''
음력
839년 ~ 857년 9월 (18년)

'''국왕께선 영원히 사람(人)과 하늘(天)의 주(主)가 되시길 바랍니다.'''

'''업보가 다하시는 날엔,'''

'''곡식을 나눠오신 그 명성으로,'''

'''무상의 지위(无上之位)에 오르길 바랍니다.'''

'''國王永主人天.'''

'''會其報盡之日,'''

'''捨粟散之名,'''

'''齊於无上之位.'''[4]

탑을 세운 문성왕에게 바치는 기도. 창림사무구정탑지에서 발췌.

1. 개요
2. 생애
3. 기타
4. 삼국사기 기록
5. 관련 항목


1. 개요


신라의 제46대 국왕. 제45대 신무왕 김우징의 아들로 신라 하대에서 애장왕 이후 오랜만에 등장한 적장자 왕이며 김제륭, 김명, 장보고로 이어진 반란 시대를 끊어내고 통일신라수명을 늘린 수성 군주.

2. 생애


839년 아버지 신무왕이 재위 반년만에 승하하자 왕위에 오르게 되었는데 전생에 무슨 를 지었는지 재위 기간 내내 유독 반란이 많이 일어났다. 물론 문성왕 즉위 이전 3대 동안 반란이 계속됐던 것을 감안하면 오히려 이런 반란들을 자신의 시대에 끊어낸 것은 문성왕의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841년 일길찬 홍필(弘弼)이 반란을 일으켜 문성왕 시대 반란의 서막을 알린 것이다. 홍필은 반란 준비를 하다가 일이 발각되자 바다으로 도망가 잠적했고 결국 잡지 못했다고 한다.
844년 8월 서해안 방비 거점으로 강화도에 혈구진(穴口鎭)을 설치했는데 근현대까지 천 년 이상 방어 시설로 활용된다.
846년[5] 청해진 대사이자 진해장군인 장보고가 반란을 일으켰다.[6] 이에 염문(염장)(閻文(閻長))으로 하여금 장보고를 암살하도록 하여 저지했으나 이 때에는 근거지인 청해진을 완전히 없애지는 않았는데 이후 상황을 보면 청해진이 강대한 사병을 보유한 군벌화된 세력이었기에 당장은 못했다가 맞을 것이다. 일본 측 기록을 참고하면 장보고가 암살당하자 청해진에 소속되었던 장보고 측 인물들이 혼란에 빠진 정황이 나타나며 장보고 측이 주도적으로 반란을 일으켰다기보다는 신라 중앙에서 먼저 선수를 쳐서 진압한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847년 이찬 김양순(金良順)과 파진찬 흥종(興宗)이 반란을 일으켜 그들의 목을 베었다. 일본 측 기록인 입당구법순례행기에 따르면 847년 일본 승려 엔닌당나라에서 일본으로 귀국하는 과정에서 신라를 거치고 여행기에 당시 정세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4월 일본 대마도 사람 6명이 낚시를 하다 표류해 지금의 전라남도 진도군의 거차군도로 추정되는 황모도(黃茅嶋)에 와서 지금의 광주광역시인 무주에 감금하고 본국으로 송환 대기 중이라 했으며 9월 당나라의 사신단 500여 명이 수도 서라벌에서 머물고 있었다고 한다. 신라 서남부 다도해의 여러 섬에 왕실과 귀족들이 운영하는 말 목장이 있었다고 한다.입당구법순례행기[7]
849년 이찬 김식(金式)과 대흔(大昕) 등이 반란을 일으켰고 대아찬 흔린(昕鄰)도 죄에 연루됐다고 하는데 김식과 대흔은 처형하고 흔린은 죄가 가벼웠는지 죽이지는 않은 듯하다. 그러나 같은 삼국사기조차 김양 열전에서는 김흔이 달벌대전 패전 후 속에서 은거하던 중 아무 일도 없이 죽었다고 나와 있어 본기와는 차이를 보이는데 뉘앙스상 숙청을 강하게 연상시킨다.
851년 청해진(淸海鎭)에 토벌군을 보내 청해진을 완전히 없앴으며 청해진에 살던 주민들은 벽골군[8]으로 강제 이주시켰다고 한다. 이처럼 각종 반란이 일어났으나 모두 진압하면서 결국 왕권을 다시금 안정시키는데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 문성왕 덕분에 이후 진성여왕 시기까지 신라는 50여 년 동안 다시 안정적인 상태가 된다.
852년 문성왕도 분명히 태자인 아들 김안이 있었으나 태자로 올린지 5년만에 폐위하였다. 삼국사기 본문에는 왕태자하였다고 써져 있는데 별도의 시호도 추증되지 않았고 卒에 "죽다"라는 뜻이 아닌 "마치다"라는 뜻도 있는 점을 고려하면 왕태자 자리에서 물러났다고 보는 것이 맞는 듯하다. 실제로 흥덕왕 시기의 태자였던 김충공도 삼국사기에는 헌덕왕 시기 卒하였다고 적혀져 있고 분명히 문성왕의 남계 후손은 단절되지 않고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으로 이어진다.[9] 좌우지간 김안은 이후 경순왕의 조부가 되는 김인경(金仁慶)을 낳는다.[10]
857년 9월 병이 들어 유언과 같은 조서를 남기고 7일 후 사망해 시호를 '문성'이라 하고 공작지(孔雀趾)라는 땅에 장사를 지냈다.[11] 문성왕이 죽을 때 유언으로 원성왕계의 형제 상속 관습 때문인지 결국 아들 김안이 아니라 숙부이자 전처의 아들인 김의정(金誼靖)을 후계자로 추대했다. 아들이 있는데 숙부에 물려준 건 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으로 아무튼 왕위는 문성왕계가 아닌 숙부에게 넘어갔다.

3. 기타


  • 반란에 시달린 왕이라는 인식과는 달리 장보고와 청해진을 없애기 전까지는 장보고에게 남해의 제해권을 주어 바다를 안정시켜 무역로를 안전하게 확보케 하였고 그로 인해 활발한 무역과 사신 왕래 등으로 과의 관계 개선 및 신라경제를 풍족케 한 왕이었다. 840년에는 당나라에서 공부는 하는데 빈공과(賓貢科)에 합격은 못한 장수생 105명을 데려오는데, 문성왕 당시는 당나라 국학에 10년간 유학간 국비 유학생만 수백 명에 사비 유학생도 더 있었던 정도로 당나라와의 교류가 많은 시대였다. 혹자는 그를 가리켜 장보고와 청해진을 없애버림으로써 결정적으로 신라의 몰락을 가져온 임금이라며 부정적으로 평하기도 하는데, 청해진이 없어지면서 장보고가 한때 쓸어버렸던 해적들도 다시 늘어나기 시작하고 일본 측 기록을 보면 청해진이 주도하던 일본 간 무역도 삐걱대는 등의 문제가 있었다. 다만 사실 하대 신라는 청해진을 없앤다 해도 이미 국가 막장 테크가 슬슬 진행되고 있었기에 이걸 몰락의 전적인 원인으로 보기는 사실 무리다.
  • 문성왕의 나이가 생각보다 꽤 어릴 것이라는 추측이 꽤 있다. 신라 하대 왕족들의 건강 상태가 족내혼(族內婚) 등으로 인해 양호하지 않았다는 추정이 있고, 거듭된 반란의 경우도 앞서 신무왕이 1년의 재위를 채우지 못해 나타난 이른바 권력 공백에 따른 부작용이다.[12] 선대 왕들의 연령대가 확실히 밝혀지지는 않았어도 여러 정황 및 연령 대조로 유추는 가능한데[13], 선왕인 신무왕도 사실상 많아봐야 40대에 승하했을 가능성이 높아서 문성왕 역시 많아봐야 30대 초반을 넘기지 못하고 승하했을 가능성이 크다. 문성왕의 생년이 늦다면 그의 재위 기간에 있었던 일들도 사실상 다음 왕이 될 숙부 헌안왕을 비롯한 측근 대신들이 맡았을 가능성도 있다.
  • 삼국사기에 기록된 문성왕의 왕비는 2명으로, 841년에 당나라가 봉한 왕비 박씨와 842년에 들인 위흔(김양)의 딸 왕비 김씨가 있다. 삼국유사 왕력편에 문성왕의 왕비로 기록된 소명왕후(炤明王后)가 왕비 박씨와 왕비 김씨 둘 중 누구와 동일인인지 불분명하다. 문성왕의 아들들의 생모도 누군지 확실치 않다.

4.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 문성왕 본기'''
一年秋七月 문성왕 즉위하다
一年秋八月 궁복을 진해장군으로 삼다
二年春一月 예징을 상대등으로, 의종을 시중으로 삼다
二年夏四月 가뭄이 들다
二年 당 문종이 국학생을 추방하다
二年 기근이 들다
三年 전염병이 돌다
三年 일길찬 홍필이 모반하다
三年秋七月 당 무종이 왕과 왕비를 책봉하다
四年春三月 이찬 위흔의 딸을 들여 왕비로 삼다
五年春一月 시중#s-2 의종이 면직되고 양순을 시중으로 삼다
五年秋七月 호랑이 5마리가 신궁에 나타나다
六年春二月一日 일식이 나타나다
六年春二月 태백성이 진성을 범하다
六年春三月 우박이 내리다
六年 대아찬 김여를 시중으로 삼다
六年秋八月 혈구진을 설치하다
七年春三月 궁복의 딸로 둘째 부인으로 삼고자 하다
七年冬十一月 우레가 치고 눈이 내리지 않다
七年冬十二月一日 해가 세 개 나란히 나타나다
八年 염장이 궁복을 죽이다
九年春二月 평의전과 임해전을 중수하다
九年夏五月 이찬 양순이 모반하다가 발각되다
九年秋八月 왕태자를 책봉하다
九年 이찬 위흔이 시중이 되다
十年 가뭄이 발생하다
十年 파진찬 김계명이 시중이 되다
十年冬十月 벼락이 치다
十一年春一月 이찬 의정이 상대등이 되다
十一年秋九月 이찬 김식과 대흔이 모반하다
十二年春一月 토성에 들어가다
十二年 흙비가 내리다
十二年 사면하다
十三年春二月 청해진을 혁파하다
十三年夏四月 4월에 서리가 내리다
十三年 이찬 원홍이 당에서 불경어금니를 가져오다
十四年春二月 파진찬 진양을 웅진도독으로 삼다
十四年 조부에 불이 나다
十四年秋七月 명학루를 중수하다
十四年冬十一月 왕태자가 죽다
十五年夏六月 홍수가 일어나다
十五年秋八月 황충이 발생하다
十七年春一月 서남쪽 백성을 위로하다
十七年冬十二月 진각성에 불이 나다
十七年冬十二月 토성이 달에 들어가다
十九年秋九月 문성왕이 조서를 남기고 7일 후에 죽다
문성왕부터 삼국사기 11권이 시작된다.

5. 관련 항목


[1] 김양의 딸.[2] 정계(貞繼), 진종(真從), 정종(定宗) 중 하나라고 하는데, 繼의 이체자가 継이고 從의 이체자가 従이라서 한 쪽이 오기인 것으로 보인다. 다른 표기로 定宗이 쓰이는 점을 볼 때 '''정종(貞從)'''이 맞는 듯 하다.[3] 왕이 유언을 내린 후 7일 뒤에 사망[4] 생전엔 인천(人天)의 주인으로 살고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다가 사후에 그 공덕을 감안해 무상지위(无上之位), 자신보다 윗사람이 없는 자리, 즉 부처가 되라는 축복문이다.[5] 속일본기(続日本紀)에는 841년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한국 측 기록을 참고한다.[6] 다만 기록의 주체인 신라 왕실귀족 측에서 기록을 조작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7] 섬에서 말을 키우는 이유는 한반도 본토와 달리 말을 위협하는 호랑이가 없고 통제와 관리가 용이하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에 제주도절영도에서 말을 키운 것도 같은 이유.[8] 오늘날 전라북도 김제시.[9] 신라경순왕전비문(新羅敬順王殿碑文)에서는 태자의 이름이 김안이라고 하는데 삼국사기에서는 문성왕이 사망하는 해에 상대등에 오른 인물이므로 기록의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상대등 업무를 볼 정도로 장성한 아들 대신 왕위에 오른 문성왕의 숙부 김의정이 그를 순순히 살려준 것은 물론 그에게 높은 관직을 주어 반란의 빌미를 남긴 것은 설득력이 떨어지므로 이것이 잘못된 사료가 아니냐는 주장이 있다.[10] 김인경의 두 아들이 바로 태조 왕건의 5번째 왕후인 신성왕태후의 아버지인 김억렴과 경순왕의 아버지인 동시에 효녀 지은 설화로 유명한 화랑 김효종이다. 문성왕에게는 증손자들이다.[11] 문성왕릉 문서 참조.[12] 96각간의 난 이후 왕족들간의 권력 쟁탈전은 한층 더 심각해졌다. 이것은 해구, 연신의 난 이후 백제간주리의 난 이후 고구려를 생각해보면 알수가 있다.[13] 흥덕왕민애왕의 생년이 확인되었고, 후대의 경문왕의 생년이 둘 중 하나(843년 혹은 846년)로 좁혀지기도 하며, 왕과 왕비의 혼인 연도와 사망한 시기가 기록되어 있는 경우도 있어서 신라 후대의 왕들 생년은 이들을 기준으로 어느 정도 추정이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