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녕
1. 소개
대한민국 양궁을 대표하는 사상 최고의 선수 & 신궁으로 올림픽에서 금메달 4개, 은메달 1개, 동메달 1개를 차지한 양궁의 전설이다. 이는 대한민국 올림픽 최다 금메달 기록(4개)이며 동시에 최다 메달 기록(6개)이다.[1]
2. 선수 경력
2.1. 어린 시절
1971년 4월 5일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났지만, 집안 사정 때문에 여기 저기를 이사다니다가 최종적으로 정착한 곳이 청주시였다. 여기서 양궁에 입문했고, 소년체전에서 두각을 나타내면서 양궁 신동의 등장이라는 찬사를 받으면서 청주여고 1학년 때, 최연소 국가대표가 되었다.
2.2. 1988년
처음 출전한 국제대회에서 '''세계신기록'''을 세우면서 우승하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1988 서울 올림픽에서 개인전 금메달, 단체전 금메달을 차지하면서 2관왕에 올랐다. 서울 올림픽에서는 개인전이 거리별 성적을 합산해서 메달 색깔을 가리는 방식이었는데, 총점 344점을 기록하면서 팀 동료이자 선배인 왕희경, 윤영숙을 제치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단체전에서는 선배들과 힘을 합쳐서 양궁 단체전 금메달을 차지했다.
2.3. 1989년~1991년
1989년부터 1992년 사이가 김수녕의 진정한 전성기였다. 1989년과 1991년 '''세계선수권 2년 연속 2관왕''', 1990 베이징 아시안 게임 단체전 금메달, 1989년 '''거리별 공인 6종목 모두 세계신기록을 모두 보유했다.''' 이게 겨우 20대 초반에 거둔 성적이다. 그야말로 양궁계의 최강자, 넘사벽. 참고로 세계선수권 2년 연속 2관왕은 김수녕 이후 단 한 사람도 기록하지 못했다. 이 시절에 세운 세계 기록은 '''하도 많아서 본인도 기억을 못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김수녕 선수가 현역 생활동안 세운 세계신기록은 '''30'''개가 넘는다.[2]
2.4. 1992년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도 당연히 국가대표가 되었는데, 여기서 무적의 그녀는 뼈아픈 패배를 맛봤다. 팀 동료인 조윤정과의 결승전에서 패하면서 은메달을 차지한 것이다. 다만 당시 경기장면을 보면 결승 후반까지 점수가 비슷하다가 마지막 두 발이 점수가 좋지 않게 나왔다. 자신의 점수를 보고 아쉬워하는 표정보다는 웃어넘기는 표정을 지었다. 즉, 대인배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단체전에서는 또 금메달을 차지하면서 본인의 세 번째 올림픽 금메달을 차지했다. 이 대회부터 흔히 양궁 대회 방식으로 알고 있는 토너먼트가 도입이 되었는데, 이 토너먼트의 긴장감이 생각 이상이었다고 한다. 마침 지기 싫어하는 성격에 패배가 너무 아쉽기도 했고, 또 이룰 것은 다 이뤄서 목표도 사라졌기 때문에 그냥 이 대회를 끝으로 은퇴했다.
2.5. 1999년
대학 졸업과 동시에 대학 선배였던 이기영씨[3] 와 결혼하면서 두 아이의 엄마로 평범하게 살아가는가 싶었는데, 1999년에 전격적으로 컴백을 선언했다. 어린 선수 위주의 대표팀이라서 경험 많은 선배가 필요하다는 협회의 판단 아래 협회에서 복귀를 권했다고 한다. 협회에서 복귀를 권했다고는 하지만, 국가대표 선발전은 자력으로 뚫어야 했다. 그런데, 6년의 공백이 무색하게 기어코 선발전에서 1위를 기록하며 김수녕은 다시 국가대표가 되었다. 게다가, 인생의 경험도 늘어서 과거처럼 지는 것을 싫어하는 김수녕이 아닌 좀 더 여유롭게 활을 쏘는 김수녕으로 변했고, 그 결실은 2000 시드니 올림픽에서 맺어졌다.
2.6. 2000년
올림픽 4강전에서 윤미진에게 패하면서 3,4위전으로 밀렸다. 3, 4위전에서는 북한의 최옥실을 누르고 동메달을 차지했는데, 원숙해진 김수녕은 집 장식장에 동메달도 걸 수 있게 되었다고 기뻐했다고 한다. 그리고, 후배들과 함께 단체전 우승을 차지하면서 한국 여자 양궁의 신화를 이어갔다. 이로써 그녀가 차지한 메달의 수는 모두 6개가 되었으며, 이 중 금메달만 무려 4개가 되었다. 이 기록은 역대 한국 선수 사상 최고 기록이다. 그리고 이 대회를 끝으로 진짜 은퇴했다.
3. 특징
김수녕의 장점은 대담성이다. "시위를 떠난 화살에는 미련을 두지 않는다." 를 신조로 삼아 이미 지난 성적에 미련을 두지 않는 모습 때문에 평정심을 잃지 않고 늘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다. 치열한 승부욕은 전성기에는 불패의 모습을 만들어 냈고, 결혼과 출산 이후 복귀한 시점에서는 승부욕을 달인의 달관과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경륜으로 승화시키면서 그야말로 진정한 신궁으로 자리잡았다. 역대 어떤 양궁 선수가 나와도 '''신궁'''이라는 호칭은 오직 김수녕에게만 준다는 점에서 김수녕이 가지는 위상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4. 은퇴 이후
그녀의 실질적인 고향인 청주시에는 김수녕 양궁장이 있고, 세계양궁협회에서는 20세기 최고의 여자 양궁 선수로 김수녕을 선정했다. 2012년 현재는 세계협회에 일하면서 전 세계를 순회하며 지도하고 있다.
은퇴 이후에는 올림픽 시즌때마다 MBC의 양궁 종목 해설위원으로도 만나볼 수 있는데, 해설에서는 위에 서술된 대담성 항목이 무색해지는 모습을 많이 보여준다. 대한민국 선수들이 금메달을 따기 직전이 되면 울먹거리면서 거의 해설을 진행하지 못하기 때문. 이로 인해 처음에는 시청자들에게 해설로서 비판도 많이 받았지만, 나중에 들어서는 어차피 한국팀 선수가 금메달도 땄는데 뭐 그냥 그러려니 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일부 스포츠 마니아들은 '김수녕이 울었다' 라는 말을 '올림픽에서 한국 선수가 금메달을 땄다' 랑 같은 의미로 쓰는 경지에 이를 정도라고 한다.
2014년 1월 9일에 사우디아라비아 왕실 공주의 전담 코치를 맡는다는 기사가 떴다. 기사에 나온 내용으로 보면 대한양궁협회에서 여러 명의 후보 명단을 보내고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골랐다고 한다.
5. 수상 기록
[1] 이후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 진종오가 금메달을 따면서 동률이 되었다.(금4, 은2) 그리고 2020 도쿄 올림픽에도 출전할 의사를 표시했기 때문에 만약 진종오가 메달을 1개라도 더 따면 김수녕의 기록을 넘어서게 된다.[2] 의외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언급이 잘 안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대부분 커리어 최고로 김연아, 김연경, 이상화, 장미란 등을 언급하는데, 시대가 너무 옛날인지라 인지도가 낮은 감이 있다. 참고로 전이경도 금메달이 4개나 있으나, 상대적으로 언급이 덜되는 편이다.[3] 前 유소년 수영코치, 現 백영고등학교 학생인권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