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 베이징 아시안 게임
[clearfix]
1. 개요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에서 개최된 제11회 하계 아시안 게임. 이 시기 대한민국에서는 과거 중국의 지명이나 인명을 한국식 한자로 발음하는 편이 많았기 때문에 거의 북경 아시안게임이라고 일컬었다.
2. 경기
1986 서울 아시안 게임때까지만 해도 중화인민공화국이 앞서기는 했지만 압도하지 못했던 종합 성적이었다. 그런데 중국은 이 대회에서부터 넘사벽의 성적으로 종합 1위를 싹쓸이하게 된다. 중국은 자그마치 금메달 183개, 은메달 107개, 동메달 51개를 받으며 2위인 한국(금 54, 은 54, 동 73)을 크게 앞질렀다.
일본은 3위 (금 38, 은 60, 동 76), 북한은 4위 (금 12 , 은 31, 동 39) 였다. 이 기록은 중국의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계속 깨지지 않다가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금 199개, 은 119개, 동 98개)에서 깨지게 된다. 하지만 금메달 수 자체가 310개에서 477개로 1.5배 늘어난 것을 생각하면, 개최국이 금 메달의 60%를 싹쓸이 하는 아시안 게임은 전무후무했다.
대만은 중화 타이베이라는 이름으로 아시안 게임에 복귀하게 되었다. 대만은 은메달 10개, 동메달 21개의 성과를 거두었으나 노골드라서 순위가 크게 떨어졌다 (16위). 메달 갯수로 치면 4위인 31개. 인도 역시 은메달 8개, 동메달 14개에 비해 금메달은 1개에 그쳤다.
그리고 지난 대회와는 달리 보이코트가 없어 참가국이 늘어났다. 하지만 이라크는 쿠웨이트를 침공했다는 이유로 참가 자격을 박탈당했다.[1][2] 당시 OCA 회원국 38개국중 유일한 불참국이었다.
3. 메달 순위
4. 마스코트
판다 캐릭터로 이름은 판판(盼盼, Pànpàn)이다. 디자이너는 중국 국가1급 미술사 류중런(刘忠仁). 다만 서울 아시안 게임 때는 따로 이름이 없었는지 폐회식에 등장할 때 슝마오(Xiong Mao) 라고 했다. 슝마오는 중국어로 판다란 뜻이다.
5. 이모저모
- 태권도가 정식종목에서 도로 탈락하였다. 대신 가라테와 우슈가 정식 종목으로 진입하여 한국측은 경악한다. 한국측의 강력한 항의와 1994년 IOC에서 태권도를 2000년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결정하면서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종목에 재진입한다. 다소 다른 얘기지만 우리의 효자종목 중 하나인 양궁도, 금메달 갯수를 전 대회의 12개에서 4개로 확 줄여버리는 등 중국의 노골적인 견제와 야욕이 돋보인 대회였다.
- 이 대회로 자신감을 얻은 중화인민공화국은 베이징에 올림픽을 유치하기 위하여 국제올림픽위원회에 2000년 올림픽 유치신청을 하였다. 그러나 호주 시드니한테 져서 탈락하였다.[3] 그래도 11년 뒤인 2001년에는 2008 베이징 올림픽을 유치하는데 성공하였다.
- 개막식에서는 대규모 카드 섹션이 펼쳐졌는데, 이는 1980 모스크바 올림픽 개막식에서 선보인 카드 섹션을 벤치 마킹한 것으로 보인다.
- 한국인들이 중국에 가서 우황청심환을 비롯한 한약재들을 싹쓸이한 나머지 메이드 인 차이나 저질 우황청심환이 판쳐서 상당수 국내 판매를 불허되었고, 결국 사재기 하던 이들의 자업자득으로 끝났다. 참고로 한중수교는 1992년에 이루어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중국은 아직까진 미지의 나라, 신비의 나라였으며 중국싼 짝퉁의 위력이 온누리에 알려지기 한참 전이었다. 물론 자국산 짝퉁에 늘 시달려오던 중국인들은 이런 꼴들을 보고 어처구니없어 했다.
- 호칭 문제로 참가 여부가 불투명했던 대만이 中华台北(중화 타이베이)라는 명칭으로 베이징에 입성. 영어로는 Chinese Taipei라서 문제될게 없었지만 한자표기를 놓고 중국측이 中国台北(중국 타이베이)로 표기할 것을 요구하자 이에 대만측이 발끈하여 中华台北(중화 타이베이)를 쓰겠다고 하여 옥신각신한 끝에 중국이 양보한 것이다.[4] 다만 실제 개막식 현장에서는 대만 선수단이 환대받았는데, 입장 순간 관중들의 박수 소리가 커졌고 귀빈석의 장쩌민 중앙군사위 주석과 양상쿤 국가주석이 얼굴 가득히 미소를 짓고 손을 흔들었을 정도. 해당 영상
- 아시안게임 개최 1년 전에 대회가 열리는 베이징에서 중국인들이 현재까지도 떠올리기 주저하는 무시무시한 사태가 벌어져 전 세계를 경악에 빠뜨렸지만 개최가 취소되거나 하는 최악의 사태가 벌어지진 않았다. [5]
- 남자 마라톤 금메달리스트인 대한민국의 김원탁은 2년 전 서울 올림픽에서 성화 최종 점화자 3인 중 한 명이었다.[6]
- 남자 유도 라이트급 은메달리스트 리창수(북한), 여자 유도 무제한급 동메달리스트 천링전(대만)은 후에 부부의 연을 맺게 된다. 리창수가 탈북 후 남한에 오자 천링전이 찾아와서 결혼을 하게 되어 남한에 정착했다.
- 1988 서울 올림픽에 이어 야구가 시범경기로 지정된 대회이기도 하다. 대만, 일본과 더불어 3개국만이 참가한 종목이라 KBO에서 출판한 한국야구사에서도 단신으로 언급되고 마는 대회로 대만이 금메달, 대한민국이 은메달, 일본이 동메달을 획득했다.
[1] 쿠웨이트는 아시아올림픽평의회 본부가 있는 곳이며, 셰이크 파하드 알 아메드 알 자베르 알 사바 아시아올림픽평의회 의장이 이라크군과의 교전 중 전사했다.[2] 이후 이라크는 2006 도하 아시안 게임에 복귀한다.[3] 당시 중국 정부는 천안문 광장에 TV 스크린을 설치했을 정도로 기대감이 컸다고 한다. 실제로 1, 2, 3차 투표에서 베이징이 모두 1위를 했으니까. 그러나 결국 45대 43 이라는 근소한 표차로 시드니에게 패했다.[4] 중국 입장에서는 하나의 중국 원칙을 확고히 하기 위해 대만을 압박했지만, 한편으로는 이 때문에 대만이 덜컥 불참해버리면 모양새가 안 좋아서 선택의 여지가 사실상 없었다. 어차피 '중화'라는 명칭을 쓴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는 대만이 중국과 한 핏줄이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기도 하고. 중국과 중화의 어감상 차이에 대해서는 해당 항목 참조.[5] 사실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이라는 훌륭한 선례(?)가 있었기는 했다. 이때 경찰이 학생들을 상대로 학살을 벌이는 일이 벌어졌지만 올림픽 하루전에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에 대규모 보이콧은 일어나지 않았다.[6] 서울올림픽 당시에는 건국대학교 재학생 신분이었다. 다른 두 명은 당시 서울예술고등학교 무용과 재학생이던 손미정과 흑산중학교 소흑산분교(현 가거도분교)의 체육교사였던 정선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