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기(농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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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대한민국의 前 농구선수, 감독, 행정가. 前 한국농구연맹 총재이다. 농구인 김상식의 아버지로도 유명하다.
1936년 경성부(현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났다. 배재고등학교, 고려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였다.
2. 선수 및 감독 시절
현역 시절 최고의 테크니션으로 명성을 날린 선수로 굉장히 보수적이고 경직된 당시 농구계에서 화려한 드리블로 군계일학의 기술을 과시했으며 원핸드 점프슛을 일찍 익힌 선구자 중 한 명이다.[3]
선수 은퇴 후 국가대표 감독을 맡아 대한민국 농구 사상 처음으로 ABC(아시아남자농구선수권)대회(제5회, 1969년 방콕)[4] 와 아시안게임(6회, 1970년 방콕)에서 우승하는 대업적을 남겼다.
3. 총재 이후
2018-2019시즌부터 외국인 선수의 신장 제한을 단신 186cm이하, 장신을 2m 이하로 제한하면서 농구팬들에게 가루가 되도록 까이고 있다. 빠른 농구, 즉 단신 용병 가드들을 활용한 경기 템포를 끌어올려서 평균 득점을 높여 팬들에게 박진감 넘치는 경기를 보여주겠다는 것이 그 취지인데, 2m가 넘는 선수들이 경기 템포를 느리게 한 적도 없으며, 득점이 저조한 적도 없었다. 오히려 데이비드 사이먼이나 버논 맥클린 등의 선수는 팀의 주 득점원이자 기둥이다. 게다가 현재 KBL 구단의 선수 구성을 보면 대부분의 구단이 센터를 외국인 선수로 두고, 단신 포워드를 두고 있는데, 당장 다음 시즌부터 강제 리빌딩을 해야하는 수준에 이르게 되며, 국내 선수들도 2m이하의 선수들만 상대하면 국제 무대에서의 경쟁력에 큰 문제가 생긴다. 당장 중국이나 호주, 뉴질랜드만 해도 2m 넘는 선수들이 널렸다.[5] 도대체가 누구를 위한 규정인지 의문만 증폭시키는데 이 소식이 해외에 알려지면서 비웃음을 사게 되면서 결국 방열과 함께 농구팬들에게 공공의 적으로 낙인찍히게 된다. 이후 임기가 끝나는 2017~18 시즌을 끝으로 총재직에서 물러났다.
[1] 현 서울특별시[2] 경향신문 1966년 1월 19일 김영기 선수 은퇴하는가[3] 당시에 슛을 한 손으로 하면 자세가 불안하다며 감독들이 난색을 표했다고 한다(농구의 원조인 미국에서는 1930년대 중반에 한 손 슈팅이 처음 도입되기 시작했고 50년대 경기를 보면 원핸드 슛이 이미 정석이 됐음을 알 수 있다). 물론 농구라는 게임의 기틀이 잡힌 오늘날 상식으로 보면 말도 안 되는 얘기다(오히려 두 손으로 던지는 게 공의 궤적상 불안하다).[4] 1969년 11월 29일, '''당시 아시아 농구최강이었던''' 필리핀과 결승전에서 붙었는데, 신동파가 '''50득점'''을 올리며 필리핀에게 멘붕을 선사했고 대한민국 국대는 95-86로 승리하여 8전 전승 우승을 달성했다. 여담으로 필리핀에서는 이 날 신동파가 보여준 원맨쇼에 충격을 받아 급기야 그를 추앙하기 시작했고 이후 한국팀과의 교류전이 있을 때마다 "무조건 신동파를 출전시켜달라"고 요구할 정도로 신동파는 필리핀인들 사이에서 엄청난 인기를 누리게 된다.[5] 심지어 2m가 넘는 가드들도 수두룩하다. 우리나라에 2m 넘는 가드라고는 최준용 정도가 전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