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재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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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전경
배재고등학교
培材髙等學校
Paichai High Sch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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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gray> '''교훈'''
크고자 하거든 남을 섬기라
'''분류'''
광역단위 자율형 사립고등학교[1]
'''개교'''
1885년 8월 3일 배재학당
'''교장'''
제22대 고진영
'''교감'''
송연길
'''학생 수'''
39학급 1,312명
'''교직원 수'''
80명
'''성별'''
남자고등학교
'''상징동물'''
호랑이
'''교목'''
향나무
'''교화'''
모란꽃
'''교색'''
파랑색
'''주소'''
서울특별시 강동구 고덕로 227
'''학교법인'''
배재학당
(培材學堂)
'''관할교육청'''
서울특별시교육청 (강동·송파)
'''홈페이지'''
홈페이지
1. 개요
2. 학교 연혁
3. 학교 상징
3.1. 배재교가
4. 학교 시설
5. 학교 생활
5.1. 주요 행사
6. 운동부
7. 출신 인물
8. 이용 가능한 대중교통
8.1. 버스
8.2. 지하철
9.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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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울특별시 강동구에 위치한 남자고등학교.
경신고등학교와 더불어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된 고등학교로 개신교계 근대 서양식 교육기관이며, 선교사가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사학이다. '''배재학당'''이라는 이름은 고종 황제가 직접 내린 이름으로, 인재를 기르는 집이라는 의미이다. [2]
개교 당시부터 현재 위치에 있던 것은 아니고 원래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에 있었다.[3] 이전 당시 넓은 정동 부지가 높은 지가로 인해 안팔려 가까스로 운동장만 팔아서 이전하였고[4], 나머지에는 배재학당이 소유한 배재학당 역사박물관[5]과 배재정동빌딩 2동이 우뚝 서있으며, 옆길에는 배재공원이 조성되어있다.


소개 영상 (2014)
원테이크 립덥 (2017)

2. 학교 연혁


  • 1885년 8월 3일 : 미국인 의료선교사 헨리 G. 아펜젤러가 의사 윌리엄 B. 스크랜턴[6]의 병원을 교실로 개조하여 시작
  • 1886년 6월 8일 : 고종 황제, 배재학당 설립을 재가. ‘배재학당(培材學堂)’이라는 학교명을 하사
  • 1887년 12월 1일 : 학교본당 신축낙성 (현 서울 정동)
  • 1909년 4월 23일 : 구한국 사립학교령에 의하여 배재고등학당 설립인가
  • 1912년 6월 : 연희전문학교의 모체가 된 기독교연합대학을 학당안에 특설함
  • 1914년 3월 2일 : 중학본과와 사범전수과 설치를 조선총독부로부터 인가[7]
  • 1916년 2월 : 조선총독부로부터 고등보통학교 설립인가[8]
  • 1916년 3월 : 동관 신축 낙성 (정동 교사)
  • 1922년 4월 4일 : 조선교육령에 의하여 5년제로 변경
  • 1923년 3월 : 서관 준공
  • 1925년 9월 17일 : 일제에 의해 배재고등학당이라는 교명을 폐지
  • 1940년 8월 7일 : 재단법인 배재중학교 유지재단 설립인가
  • 1945년 : 광복으로 잠시 휴교, 그 해 미군정 하에서 재개교
  • 1950년 6월 25일 : 6․25 사변으로 휴교
  • 1950년 6월 27일 : 전시 중 부산 초량동에서 임시개교
  • 1951년 8월 21일 : 교육법 개정으로 구제 중학교를 중학교(3년)와 고등학교(3년)으로 병설운영
  • 1953년 9월 30일 : 서울 본교로 복교, 부산 분교를 폐지
  • 1958년 11월 16일 : 우남학관 낙성
  • 1960년 9월 13일 : 아펜젤러관 준공
  • 1984년 2월 28일 : 교사를 서울특별시 강동구 고덕로 227 (고덕1동 313)으로 이전
  • 1985년 : 개교 100주년 기념탑 제막
  • 1995년 2월 : 보람관(체육관, 식당) 준공, 개교 110주년
  • 2002년 2월 : 고덕동 교사 내 아펜젤러 기념 예배당 준공
  • 2002년 6월 8일 : 100주년 기념탑 뒤로 정보종합센터(주시경관) 준공
  • 2004년 1월 : 정동 배재 옛터에 배재빌딩 신축 낙성
  • 2005년 : 개교 120주년. '앞선 교육을 통한 세계 속의 배재학당'을 비전으로 정함
  • 2008년 2월 : 본관 5층 컨설팅룸 준공
  • 2009년 3월 : 본관 4층 과학관 준공
  • 2010년 3월 : 자율형 사립 고등학교 출범(13학급, 455명)
  • 2012년 2월 : 우남관(기숙사, 식당, 체육관) 준공(400명 수용)
  • 2015년 3월 : 개교 130주년. 제21대 이재하 교장 취임
  • 2017년 10월 12일: 배재 인조잔디구장(운동장)개관
  • 2020년 2월 : 제135회 졸업

3. 학교 상징



3.1. 배재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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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롸롸롸롸[10]

씨스뿜빠[11]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가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배재학당 교가는 그 '''간결함'''과 '''강렬함 '''덕분에 악마의 중독성을 자랑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다른 교가는 학교를 졸업하면 그런 게 있었는지도 가물가물하지만, 배재학당 교가는 졸업하고 10년, 20년이 지나도 바로 다시 부를 수 있다. 처음에는 뭐 이런 교가가 다 있나(...) 싶지만 2년차 들어가서 숱한 조회와 2번의 배양전을 거치고 나면 이미 입에 착 달라붙어 있다. 때문에 기본적으로 2번 반복하는 교가를 기분 타고 무한 반복하는 경우까지 생길 정도다.
심지어 강동구 지역의 다른 학교 학생들도 자기 학교 교가보다 배재 교가를 더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으며, 수능 응원에서 배재고 응원단과 다른 응원단이 같이 응원을 하는 상황이 오면 배재 교가를 다른 학교 응원단도 따라부를 정도다. 아들 아펜젤러(역시 배재에서 교직을 맡고,교장까지 했다)가 모교인 프린스턴 대학교의 응원가에서 멜로디를 따왔다고 한다. 학교 교표도 묘하게 비슷하다. 당연히 연세대는 배재나 프린스턴 대학교 교표를 따라한 것이고.

4. 학교 시설


정문을 배재중학교와 공유하며, 대형 강당인 '''아펜젤러 기념 예배당'''을 시작으로 효창운동장의 1.5배 크기를 자랑하는 '''고등학교 운동장'''[12], '''고등학교 본관''', 기숙사이자 학생식당인 '''우남학사'''[13], 자연친화적 분위기의 아늑한 '''우남동산''', 교육지원부와 도서관, 주시경실(자습실)이 위치한 '''주시경관''', 설립자를 기념하는 '''아펜젤러 동상''', 정동 배재 옛터의 2채의 쌍둥이 건물 中 '''배재학당 서관'''[14] 등이 있다.

5. 학교 생활


모든 요일이 7교시이다. 7교시가 끝난다고 학교 일과가 끝나는 것이 아니고 월.수.금 정규수업 이후엔 방과후 수업(1강)을 진행한다. 방과후 시간이 끝나면 석식시간을 가지고 이후 자습(2강)-20분 쉬는시간-자습(3강)을 가진다. 방학에도 방과후가 있고, 2개를 신청해야 한다. 수요일 4교시에는 채플시간이 있으며. 불규칙하게 목요일 6, 7교시는 동아리 활동을 하거나 창체활동, 교육을 하기도 하였으나 규칙적으로 6교시 동아리, 7교시 창체(담임시간)을 갖게 되었다.

5.1. 주요 행사


  • 독서 토론회 : 연중 수시로
  • 특별 예배 : 부활절, 추수감사절, 성탄절, 수능격려 등 특정일
  • 배재자율탐구대회 : 5월~12월
  • 교내 UCC 대회 : 5월 중
  • 협성토론대회 : 5월~6월
  • 배재학력경시대회 : 6월, 7월, 11월 중
  • 동아리 포트폴리오 경연 : 8월 중
  • 영어작문대회 : 8월 중
  • 수학여행(1학년) : 10월 중 [15]
  • 수련회(2학년) : 10월 중
  • 영어토론대회 : 11월 중
  • 배양전 : 11월 중[16]

6. 운동부


'''럭비부''', '''축구부''', '''야구부''', '''농구부'''만 이어지고 있다. [17]
특히 '''축구부'''의 역사와 전통이 깊은데 축구부는 1902년에 창단하여 1921년 제1회 전조선축구대회에 참가하였고신명철의 스포츠 뒤집기 : 한국 스포츠 종목별 발전사-축구(1) 초창기 한국 축구 발전에 공헌하였다.高校蹴球(고교축구)어제와오늘 힘껏차고달린 半世紀(반세기)축구熱風(열풍) 몰고올 大統領金盃(대통령금배) (2) 高校蹴球(고교축구) 어제 오늘
2016년 대통령배 대회에서 결승전에 진출했다. [18]
럭비부도 축구부 못지 않게 유명하다. 배양전의 상대인 양정고등학교와 더불어 럭비 명문이다.

7. 출신 인물


배재학당 출신 인물 참조

8. 이용 가능한 대중교통



8.1. 버스



8.2. 지하철



9. 기타


  • 수도권 전철 5호선을 계획하던 90년대 초반 신문기사에는 고덕역이 '배재고역'으로 표기되어 있고 KTV의 대한뉴스에도 고덕역을 '배재고앞역'으로 부른다. 상일동역고덕역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러한 1996년 개통 직전에 바뀌는데, 고등학교명을 지하철역에 반영하는 것을 반대하는 여론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19]
  • 학년당 학생수가 자사고 치고는 많다. 학년당 13반까지 있고 한반에 34명 정도가 있다. 학년당 400명이 넘는다.
  • 일반고 시절 학년당 18학급까지 운영한 바 있다.[20]
  • 사립고등학교라 그런지 오래 근무하신(30년 가까이)선생님들이 꽤나 계신다. 배재고 졸업생 교사도 있다.
  • 혹시라도 배재고등학교의 선생님들과 학생들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싶다면 구글에 배재위키를 검색해서 들어가면 자세히 나와 있으니 참고하길 바란다.
  • 정동에 학교가 있던 때 종로구 수송동에 있던 중동고등학교와 라이벌 관계였다.
  • 엄청난 역사 덕에 동문회가 엄청나게 빵빵하다.

[1] 2021학년도 역시 자사고로 학생을 선발한다.[2] 종종 동문이 아닌 사람들이 배'''제'''라고 쓰는 경우가 있으나 단어의 뜻이 부정적이어서 동문들이 굉장히 싫어한다. •배제: 제외시키다, 열외[3] 배재고를 비롯하여 역사가 깊은 학교들은 비슷한 위치에 모여 있었으나, 강남지역 개발이 시작되면서 하나둘 이전하였다.[4] 당시 정동 운동장 값=고덕동 전체 부지 값. 이후 옛 운동장 부지에는 주한러시아대사관이 2002년에 완공되었다.[5] 1916년, 1923년에 각각 완공한 배재학당 쌍둥이 건물의 동관과 서관 중 동관이다. 서관은 해체하여 고덕동 교사에 다시 쌓았다.[6] 이화학당의 설립자인 메리 스크랜튼 부인의 아들. 어머니와 함께 선교를 하러 한국에 왔다.[7] 배재학당의 설립이 외국인 선교사에 의해 이뤄지고, 미국 감리교 교단의 지원으로 운영되었기 때문에, 일제가 함부로 제재를 가할 수 없었음.(이 덕분에 여러 독립운동의 기지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음.)[8] 5번과 동일한 이유.[9] 현재는 6/8박자 버전이 아니라 2/4박자 버전을 쓰긴 하지만 노래 자체는 똑같다.[10] "라라라라"는 남성미(?)가 없어서 바꿨다고 한다(...).[11] 아닐 것 같지만 영어단어다! sisboombah. 미식 축구 등을 보면서 외치는 '이겨라!'는 뜻의 응원 구호라고 한다. 경기장에서 폭죽이 날아가 터지는 장면을 묘사했다고 한다.[12] 2015년에는 농구장이, 2017년에는 인조잔디 축구장이, 2018년에는 인조잔디 야구장이 만들어졌다. 예전에는 큰 운동장 가운데를 간이 가림막으로 쪼개 한 쪽은 야구장, 한 쪽은 축구장으로 사용하였으나, 이제 완전히 분리되었다. 서울의 그 어느 고등학교보다도 큰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운동장이다.[13] 우남학사가 지어지기 전 이곳 부지에는 테니스장이 있었다.[14] 동관은 정동에 남아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으로 운영하고 있다.[15] 반별로 중국/일본 중 한 지역으로 선택해서 가게 된다. 2016년부터는 대만도 가기 시작했다. 최근엔 중국과 일본만 간다.[16] 한때 6월에 열기도 했다.[17] 열심히 하는 선수들은 일반 학생들보다 명문대에 훨씬 잘 진학한다.[18] 최종 준우승[19] 배재고의 모 선생님에 따르면 학생들이 새로 생기는 이 지하철역의 이름을 배재고역으로 표기하자고 서울시에 요청했다고 한다. 그러나 서울시는 아직까지 고등학교명을 역이름으로 정한적이 없으므로 안 된다고 하였고 이에 학생들은 역사와 전통이 있는 우리 배재고가 그 시발점이 되면 되지 않겠냐고 다시 한번 요청했다. 그러나 끝까지 거절했다고 한다.... 이후 근처에 있는 한영외고서울 지하철 9호선 연장구간에 한영외고역을 추진중인데 학생들이나 학교측에 적극적인 역명 유치시도가 없었음에도 강동구청에 자발적으로 한영고역으로 역명을 제출하고 지역주민들이 한영외고역을 주장하는 등 과거 배재고가 추진할 당시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물론 이 역은 고교명을 사용하지 않는 기조상 신상일이나 신명일역이 가장 유력하다.(신상일의 반감이 좀 있기에) [20] 이 당시 54명(1,2,3학년 x 18학급)의 동문 목사들이 학교를 방문해 각 학급별로 수업을 들어간 적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