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철(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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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勇澈
1958년 生.
1. 개요
2. 생애
2.1. 초년 시절
2.2. 검사 시절
2.3. 삼성그룹 법무팀 시절
2.4. 퇴사 이후 삼성그룹과의 갈등
2.5. 삼성 비자금 의혹 폭로
2.6. 삼성 비자금 특검의 조사를 받음
2.7. 삼성 비자금 사건 이후
3. 평가


1. 개요


대한민국의 검사를 역임한 변호사이다. 삼성그룹의 비자금 운용을 폭로한 것으로 유명하다. 한동안 삼성의 압력으로 변호사일을 하지 못하고, 빵집주인을 했으나, 광주광역시 교육청 개방형 감사담당관에 임명되어 2019년까지 9년간 재직하였다.

2. 생애



2.1. 초년 시절


1958년에 전남 광주에서 태어났다. 1976년에 광주제일고등학교(51회)를 졸업하고 같은 해 고려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다.
1983년 제25회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1986년 사법연수원 15기로 수료했다. 연수생 시절에 검찰도 법원도 아닌 신문사를 현장교육기관으로 택해 경찰기자 생활을 했다. 한 연수원 동기 변호사의 말에 따르면, "이제 죽도록 법전만 보며 살 텐데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것 해봐야지 않겠느냐"며 언론사로 갔다고 한다.

2.2. 검사 시절


1989년에 해군법무관으로 병역을 마치고 인천지검에서 검사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 후 대전,부산,서울지검 등을 거쳤으며, 인천지검 부천지청 부부장 검사를 거쳤다. 검사 생활에는 특수수사통으로 이름을 날렸다.
검사 시절 음주 사고를 내고 도망간 친동생과 만취 상태에서 폭행한 처남을 구속하도록 했다. 그것 때문에 친가 및 처가 형제들과 의절한 상태로 지냈다. 그 정도로 검사로서의 직분과 원리원칙에 철저하게 생활했다.
1996년 29만원 거사의 비자금을 수사하던 도중 쌍용그룹 김석원 회장이 관리하고 있는 61억의 비자금이 든 사과상자를 찾아냈다. 당시 청와대에서 수사를 공개하지 말라고 검찰총장을 압박했으나, 그러한 지휘에도 굽히지 않고 수사를 계속하였다. 결국 그것 때문에 부천지청으로 좌천성 발령이 났다. 이로 인해 1997년 8월 1일 삼성그룹으로 자리를 옮겼다.

2.3. 삼성그룹 법무팀 시절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의 재무팀과 법무팀에서 일했다. 1999년 이상호 기자의 삼성 X파일 사건이 터졌을 때에는 당시 안기부 미림팀장이었던 공운영과 박인회를 이학수 부회장이랑 같이 만났으며, 박인회가 안기부에 근무하다 해직된 친구의 구직을 돕기 위해 테이프를 사라는 식으로 협박하자, 이것이 공개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판단, 이학수에게 "맞을 매는 맞아야 한다. 삼성이 감수해야 한다"고 얘기했다.
2002년 1월부터 2004년 7월까지 2년 반 동안은 삼성그룹 법무팀장으로 근무했다. 삼성그룹 측의 주장에 따르면, 비은행권 회사의 재무 업무를 담당하면서 에버랜드 사건의 기소를 막았다. 그 밖에 현직 판사와 검사들을 삼성그룹으로 스카우트하는 등 법무팀 인사에도 관여했고, 검찰 내 인사들의 리스트를 작성해 관리했다. 삼성그룹 측의 주장에 따르면, 7년 동안 연봉과 스톡옵션으로 102억 원을 받았다고 한다.[1]
그러나 2004년 6월에는 승진제의를 뿌리치고 삼성그룹에 사표를 냈다. 이건희를 신격화하는 사이비 종교 같은 사내 분위기에다가 똑똑한 사람들을 바보 노릇하게 만드는 현실을 참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에버랜드 전환사채 문제, 대선자금 수사와 관련돼 삼성그룹 측에 문제제기를 하고 개선을 요구했지만 이뤄지지 않은 것, 그로 인해 업무에서 배제된 것 역시 이유가 되었다. 창사 이래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에서 스스로 걸어나간 최초의 팀장이라 하였다.[2]

2.4. 퇴사 이후 삼성그룹과의 갈등


2004년 8월 법무법인 하나의 대표변호사로 일하다가 법무법인 서정의 파트너로 합류하였다. 2005년 8월 신동아와 비보도를 전제로 한 인터뷰에서 "대한민국 국회의원 중 삼성 돈 안 받은 사람이 몇이나 있나. 검찰도 받고 언론도 받는다. 백담사에 가 있는 전두환을 지원하기도 했다."라고 주장했고, 삼성의 로비 대상이 검찰뿐 아니라 "국세청에도 언론사에도 다 있다"는 말을 하였다.
2005년 9월 12일에는 한겨레신문의 기획위원으로 합류했다. 그 후 2007년 5월 24일에는 한화 김승연 회장 폭행 사건에 대한 글을 썼는데, 같은 날 한겨레신문에는 삼성 에버랜드 사건은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에서 개입한 것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익명의 전직 삼성 임원이 증언한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그 직후 법무법인 서정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이때 중앙일보의 한 간부가 "당신을 조처하지 않으면 앞으로 다른 기업 사건을 (수임) 못하게 하겠다"는 취지의 이야기를 하며 휴직을 권고했다고 주장하였다.[3]

2.5. 삼성 비자금 의혹 폭로


2007년 10월,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을 통해 삼성그룹 비자금 조성 의혹을 폭로했다. 첫째 삼성그룹 주요인사들이 모두 '''차명계좌'''를 갖고 있으며, 이를 통해 삼성그룹은 '''거액의 비자금을 관리'''해왔다는 것, 둘째 삼성그룹이 '''경영권을 불법으로 승계'''했으며, 이에 관해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증인 조작 등 사법 방해'''를 했다는 것, 셋째 에버랜드 사건뿐 아니라 국세청의 세무조사, 공정위의 부당거래조사도 치밀한 각본에 따라 진상이 은폐됐다는 것, 넷째 삼성그룹은 이건희의 직접 지시에 의해 '''검사들을 관리'''해왔으며 그들에게 정기적으로 '''떡값을 제공'''해왔다는 것 등이 그 내용이었다.
이러한 폭로는 제1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당시 정가에 메가톤급의 폭풍을 몰고 왔다. 이로 인해 삼성 비자금에 대한 수사를 주장하는 여론이 높아지자 검찰 내에 특별수사·감찰본부(특본)가 설치되었다. 그리고 국회에서는 '삼성 비자금 의혹관련 특별검사의 임명 등에 관한 법률'이 발의되었고, 통과되었다. 그 과정에서 삼성그룹은 물론이고, 검찰, 언론사, 국세청, 국회까지 수많은 곳들이 마치 벌집을 쑤신 것처럼 난리가 났다.
그 후 2007년 11월 27일과 11월 28일 양일간 특본의 수사에 출석해 삼성그룹 경영권 불법승계 과정, 비자금 조성 및 용처 등에 대해 진술하였다. 진술을 마친 후, 특본의 수사에 대해 주말 수사를 피하는 등 시늉만 하는 경향이 강했고, 첫날 조사를 할 때에도 검찰이 묻는 게 아니라 자신이 먼저 진술해야 했다며 검찰의 수사를 비난하였다.

2.6. 삼성 비자금 특검의 조사를 받음


그 후 조준웅 특별검사팀이 활동을 시작하자, 2008년 3월 11일에 삼성그룹 금품 로비의 정황을 담은 진술서를 특검에 제출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에는 정관계 금품 로비를 담당했다는 삼성 측 임원 30여 명의 명단과 로비 정황을 담은 자료를 제출했다.
그러나 특검은 3월 24일 임채진 검찰총장과 이귀남 대구고검장, 이종백 전 국가청렴위원장이 금품 로비를 받았다는 것에 대해 무혐의 결론을 내렸다. 그러자 이에 대해 "내 경험에 따르면 1개 기업의 비자금 수사에도 회계분석 등을 위해 상당한 수사 기간과 인력이 필요"하다면서 "삼성의 경우 60개의 기업이 연결된 기업군을 수사하고 장기간 동안 수많은 사람이 연관된 것인데, 어떻게 파견 검사 세 명과 수사 경험 없는 사람들이 모여 수사를 끝낼 수 있냐"고 비판하였다. 그리고 특검 중 마지막 조사에서 진술을 거부하였다.[4]
그 후 특검의 수사결과 발표에 대해서 "신빙성이 의심되고, 모순에 차고, 수시로 변하는" 모습으로 서술되었다고 비판하였다. 특검이 그의 증언과 그가 제출한 물증의 증거 능력에 의심을 표하자, 이에 대해 의외라면서 "내 말이 앞뒤가 안 맞는다고 추궁당한 적이 한 번도 없"다고 주장했다. 오히려 말을 바꾼 건 자신이 아닌 삼성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주장이 거짓이라면 자신을 구속해야 한다고 말했다.
2008년 7월 16일 특검 수사에 대한 1심 선고 공판에서는 "법이라는 게 강자를 대변하고, 강자의 도구로 쓰이고 있다. 수조원의 자산을 가진 사람을 위한 법과, 그 아래 자산을 가진 사람을 위한 법을 따로 만들어야 할 판"이라고 비난했다. 또 이 판결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유산을 주는 게 뭐가 잘못됐냐는 것"이라고 요약했다.

2.7. 삼성 비자금 사건 이후


2010년 2월 삼성을 생각한다라는 책을 펴냈다. 삼성의 치부를 적나라해도 너무나 적나라하게 까발린 이 책은 2010년 2월 첫째주부터 Yes24와 알라딘의 주간 종합 판매순위 1위에 올랐다.
특히 이 책은 언론사들이 광고를 거부해 화제를 더 많이 끌어모았다. 인터넷 언론들은 이 책이 광고를 하지도 못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기사들을 쏟아냈고, 이로 인해 광고도 없이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여러모로 '역대급' 책이다.
전남대학교 대학원 철학과에 입학하기도 했다.#
2010년 12월부터 광주광역시교육청 감사담당관(개방형직위, 4급 상당 지방계약직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다. 대부분의 내부 고발자들이 비참한 여생을 보내게 마련인 것에 비하면, 다행히도 상당히 잘 풀린 편?이라는 평이 있으나 광역지방자치단체의 감사관은 초임검사보다 봉급이 적다(오직 명예와 책임감으로만 직무를 수행하고 있는것) 2013년 3급 상당으로 재계약하였으며, 2019년 말에 광주교육청 감사담당관 직을 사임하였다.

3. 평가


그의 폭로덕분에 앞으로 삼성그룹을 비롯한 재벌그룹에서 탈세, 편법상속, 비자금관리 등을 하는 것이 상당히 어려워졌다. 국내 재벌기업들에게 적법경영을 강제했다는 점에서 매우 임팩트 있는 한방을 터뜨린 셈이라고 할 수 있겠다.


[1] 이에 관해서는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김용철 변호사가 '삼성을 생각한다'라는 저서 54페이지에서 반박하였다. 일설에 따르면, 2002년 김용철 변호사의 아들이 결혼하자 이건희 회장은 100만 원, 이재용 전무는 100만 원, 이학수 실장은 500만 원의 축의금을 냈다고 한다. 당시 이건희 회장은 계열사 사장 경조사에 보통 30만 원을 보냈다고 한다.[2] 이에 대해 삼성 측은 김 변호사가 무능해서 밀려났다고 주장했다. 다만 이렇게 되면 앞에서 나왔듯이 삼성이 승진과정에서 밀려날 정도로 무능한 사람에게 102억이나 안겨줄 정도로 사람 보는 눈이 없다는 말이 된다.[3] 하지만 법무법인 서정은 한화 관련 업무를 맡고있는 법인으로서, 칼럼이 문제가 되어서 김용철 스스로 2개월 휴직하기로 했으며, 외부압력은 없었다고 반박했다. 삼성은 자신들이 오히려 법무법인의 선배 변호사에게 "김 변호사가 서정에서 계속 근무할 수 있게 해 줄 수 없겠느냐"는 부탁까지 했다고 주장했다.[4] 그 이유는 조사 중 파견 검사 하나가 그에게 딜을 제안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비자금과 관련하여 문제된 검사나 평검사가 향후 어디까지 성장할 지 모르는 사람들인데, 잘못 말한 것이나 잘못 기억한 것으로 해명해줬으면 좋겠다며, 그 대가로 특검 발표 시 그에게 명예 훼손 소송이나 민사 소송에서 피해가 없도록, 그가 거짓말한 것은 아니라고 발표하겠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김용철은 "해명을 위한 수사에는 더이상 협조 않겠다" 하였고, 마지막 조사에서 진술을 다 한 뒤 진술 거부로 해달라고 요청했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