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대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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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제17대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한 선거로 2007년 12월 19일에 실시 되었고, 2000년대에 치뤄진 마지막 대선이다.
그 결과 '''이명박''' 후보가 정동영 후보를 득표율 '''22.6%p''', 표차 5,317,708표 차로, 19대 대통령 선거 이전까지 제6공화국 최다 득표차로 꺾고 대통령에 당선되어 제6공화국의 두번째 정권 교체를 이루게 되었다. 득표수가 아닌 득표율 차이는 '''현재도 제17대 대통령 선거가 최고치이다.'''[1] 투표율은 63.0%로 역대 대선 최저 투표율이다.
참여정부의 후반 ~ 말기'''(2006년 ~ 2008년)'''는 부동산 정책 실책과 임기 말 권력누수 현상(레임덕) 등으로 인해 여권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크게 떨어진 상태였다. '''한나라당에서는 개가 나와도 당선된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고, 임기 4년 차에는 대통령 지지율이 10%대까지 하락하기도 했었다.[2] (갤럽 조사 결과 링크) 대통령의 낮은 지지율에다 여권에 대한 실망감까지 더해져 열린우리당은 제17대 총선 이후 치뤄진 재보궐선거와 제4회 지방선거를 포함한 모든 선거에서 연달아 패배하며 과반의석이 붕괴되었다. 망조를 느낀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개혁파인 임종인, 천정배 의원을 시작으로 탈당 릴레이를 벌였다. 당시 열린우리당 내 보수파의 영수 격 인물이었던 김한길과 그를 따르는 초재선 의원들을 주축으로 각자도생을 추구하며 줄줄이 탈당해 중도개혁통합신당, 중도통합민주당 등을 창당하는 등 이합집산을 거듭했으며, 두차례 열린우리당 의장을 지낸 정동영 전 장관과 의장을 지낸 문희상, 김근태 전 의장도 신당에 합류함으로서 기존 참여정부와의 차별성을 추구하려고 했다. 하지만 도로 열린우리당이 된 대통합민주신당의 지지율은 결국 한자리수 지지율을 기록하기에 이르렀고, 설상가상으로 대통령 권한대행을 역임, 안정적인 국정 운영으로 국민들에게 큰 인상을 남겨 여권에서 가장 유력한 대권주자였던 고건마저 불출마를 선언함으로서 여권에서는 박근혜/이명박 대세론을 뒤집을 만한 여력을 가진 뚜렷한 유력 대권주자 없이 정동영(전 통일부장관), 손학규(전 경기도지사), 이해찬(전 국무총리)[3] 등이 최종 경선에 참여했고 지지율과 조직력 측면에서 앞서있던 정동영이 승리함에 따라 여권의 대권주자로 나서게 되었다.
제1야당인 '''한나라당'''은 이명박과 박근혜의 치열한 경선 끝에 '''이명박'''이 승리를 거머쥐어 대선후보로 확정되었다. 한편, 한나라당에 있던 이회창은 16대 대선에서 낙선한 직후 정계 은퇴를 선언했으나 2007년, 이를 번복하고 3번째 대선에 도전하였다.
특이하게도 이 대선은 양자 및 삼자대결도 아닌 '''6자 대결'''이었다. 상세히 뜯어다보면 1강 2중 3약이긴 했지만... 보수, 민주, 진보 모두 모두 단일화 합의에도 실패하였고 후보들 각각이 독자 노선을 고집하였다. 현실적으로 이명박 후보의 당선 가능성이 압도적으로 높았던지라 다음 해 총선을 대비하여 각자도생하려는 전략이었을 것이다.
이력도 다채로웠다. 서울시장을 지냈던 이명박과 MBC 기자, 뉴스데스크 앵커를 지냈던 정동영 그리고 언론노조 출신으로 두 차례 대선 출마경험이 있던 민주노동당의 권영길, 그 외 유한킴벌리 CEO 출신인 문국현과 경기도지사, 노동부 장관을 역임한 이인제, 여기에 지난 대선에도 출마했던 이회창이 뒤늦게 합류하였다.
결과적으로는 이명박 대 정동영의 대결이었다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각자 충분한 의석과 지지율을 보유하여 유례없는 6자토론회가 된 셈. 아무리 요약해도 1강 2중의 3자대결이었다. (특히 이회창은 선거 2주 전까지 여론조사에서 2위였다.) 실제로 선관위 주최 주요 후보 토론회에서도 6인 모두 참석하였다.
2. 경선 과정
2.1. 한나라당의 상황
한나라당은 박근혜 대표 체제 이후 2005년 상반기 재보궐선거를 시작으로 모든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고 있었다.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는 그 화룡점정으로 이를 시작으로 여권은 붕괴하기 시작했고, 야당은 박근혜 대표를 중심으로 결집하기 시작했다. 또한 이명박은 4년의 서울특별시장 임기 동안 청계천 복원과 시내버스 개편 등 굵직한 사업을 성공시켜 대권후보로 거론되었고, 손학규도 경기도지사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때 이명박, 박근혜, 손학규를 빅3라고 불렀다.
단 빅3 중 손학규의 인지도나 지지율은 처참하기 그지 없었다. 물론 아주 듣보 후보 수준은 아니었으나 3년여간 당 대표를 역임하며 탄핵으로 궤멸당한 당을 재건한 박근혜 대표나 시내버스 개편, 청계천 복원을 강력하게 추진한 이명박 전 서울시장에 비해 손학규가 내세울 수 있는 것은 마땅치 않았다. 손학규도 경기도지사 시절 판교테크노밸리를 비롯하여 여러 대기업들을 경기도의 산업단지들에 유치하는 등 성공적으로 도정을 수행했으나[4] , 박근혜나 이명박에 비하면 이른바 '''뉴스를 탈 성과'''는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도지사로서는 성공적이었으나 도지사직을 발판으로 대권에 도전하기 위한 모습은 보여주지 못한 것.
손학규는 경기지사 퇴임 직후 민심 100일 대장정 등의 행보를 보이며 어떻게든 지지율 반등을 위해 노력했으나 이명박과 박근혜의 강력한 철옹성을 넘기 힘들었고, 결국 2007년 3월 19일 한나라당 탈당을 선언한다. 이로서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은 이명박과 박근혜의 양자 대결로 좁혀진다. 이 2명 외에, 당내 중진이었던 홍준표 당시 국회의원과 당내 소장파의 필두였던 원희룡 당시 국회의원이 대선 후보 경선에 참여했다. 참고로 당시 홍준표는 17대 총선 때 서울 동북권에서 당선된 유일한 한나라당 정치인이라는 점, 당내 혁신위원장을 맡았다는 점, 그리고 본인 특유의 독특한 캐릭터 때문에 정치적 지분에 비해 대중들 사이의 인지도 매우 높은 편이었다. 물론 둘은 실제 대권보다는 차기 당권이나 인지도 상승 등을 위한 것이라는 평가가 많았다. 그밖에 역시 소장파인 고진화 당시 국회의원도 경선에 참여했으나 경선 과정에 문제를 제기하며 후보를 사퇴했다.
이명박과 박근혜의 당내 경쟁은 치열했다. 초반에는 박근혜 피습 사건 와중에도 '''대전은요?''' 한 마디로 대전시장 승리를 이끈 박근혜에게 유리하다고 생각되었다. 당시 한나라당에게 있어 박근혜는 위기에 처한 당을 구하고 모든 선거를 승리로 이끈 구세주였기 때문.[5]
그러나 북한의 1차 핵실험과 2007년 재보궐선거가 박근혜에게 악재가 되었다. 선거의 여왕으로 불리던 박근혜였지만, 2006년 10월에 발생한 북한의 1차 핵실험으로 인해 ''''여성보다는 병역의무를 지는 남성이 외교안보 업무를 총괄하는 대통령직에 더 적합하다.''''라는 생각이 한나라당 지지층 사이에 퍼지기 시작하면서 박근혜의 지지세가 빠지기 시작했다.[6][7] 또한, 2007년 재보궐선거에서 한나라당이 부진한 성적을 내면서 박근혜는 또 한번의 타격을 입게 되었다. 수도권 기초단체장들은 공천불복 탈당파에 의해, 대전 서구 국회의원 선거는 국민중심당 + 열린우리당의 비공식적 연대에 부딛혀 패한 것. 박근혜는 당헌당규상 대권-당권 분리 및 대선후보 경선 참여 1년 전 대표직 사퇴 조항에 따라 2006년 6월에 당 대표직을 사퇴한 상황이었지만 당시 한나라당 대표는 친박으로 분류되던 강재섭이었고 박근혜가 전면에 나선 선거였기에 그 책임론까지 덤터기 쓴 것.
아울러 한나라당 내부에서도 전략적으로 수도권 후보론, 경제 후보론이 나오는 실정이었다. 우선 수도권 후보론은 표가 많은 수도권을 정치적 근거지로 하는 인물을 내보내 수도권의 승기를 잡아야 한다는 것으로 영남은 누가 봐도 몰표가 쏟아지는 표밭이었으니 TK 기반의 박근혜보단, 역시 TK 출신이지만 종로구에서 국회의원을 한데다가 서울시장을 역임한 이명박을 내보내는 것이 총 득표에 유리할 것이라는 인식이었다.(영남은 누가 후보가 되더라도 받는 표가 거의 동일할 테니)[8] 경제 후보론은 당시 참여정부의 경제 실정을 강조하기 위한 전략으로 현대건설 평사원으로 출발해 현대그룹 회장 자리를 거쳐 서울시장으로서 경제적 성과를 보여준 이명박이 본선에 더 유리하다는 논리였다.[9] 때문에 이명박 측은 747 공약[10] 을 내걸어 경제 공약을 강조했고, 이를 의식한 듯 박근혜 측은 줄푸세 공약[11] 을 내걸며 맞섰다.
당시 상황은 '''당내 지지도'''는 박근혜가 앞섰고, 이명박은 서울특별시장 시절의 성공적인 시정 덕분에 '''여론조사 지지율'''이 앞선 상태였다. 둘의 우세한 분야가 다르고 정도도 비등해서 경선 룰에 따라서 승패가 갈릴 수도 있는, 그야말로 초접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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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문에 서로를 향한 네거티브가 엄청났는데 이런 진흙탕 싸움 속에서 둘의 비리는 이때 다 수면 위로 올라왔다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상대방의 약점이란 약점은 모조리 들춰내어 공격하였다. 여담으로 그 유명한 발언(...)이었던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 "저거 어떻게 쥐어박고 싶었어", "엄청난 검증의 쓰나미가 몰아닥칠 것입니다"도 이 때 생겨난 것이다.
이후 선거 직전까지 BBK 논란이 계속되고, 후술하겠지만 느닷 없는 이회창의 독자출마로 보수 표 분열까지 우려되는 상황에서 이명박 측은 급히 박근혜에 SOS를 친다. 당시 이회창이 필사적으로 박근혜 영입에 나섰기 때문인데, 최종적으로 박근혜가 한나라당 잔류를 택하고 이명박 지지를 선언하면서 한나라당은 단일대오를 구축하게 된다. 친박계 곽성문 의원이 개별적으로 탈당해 이회창을 지지하고, 박사모도 공식적으로 이회창 지지를 선언했지만 어디까지나 소수의 이탈일 뿐이었다.
최종적으로 이명박이 49.6%를 얻어 48.1%의 박근혜를 1.5% 차이로 따돌리며 접전 끝 승리를 거뒀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당시 서로를 향했던 네거티브 폭로전은 모두 '''명백한 사실'''로 밝혀졌다. 이명박 측에서 주장한 최태민-최순실 의혹은 최순실 게이트가 터지면서 비로소 사실로 밝혀졌으며, 이명박의 재산 형성 의혹, DAS 실소유주 의혹 등 역시 2020년 대법원에서 유죄로 판결 확정이 나면서 사실로 확정되었다.13년 전 이명박-박근혜 '경선 폭로전'…모두 사실로 결국 두 사람 모두 문재인 정부 들어 상기 혐의로 유죄가 확정되면서 수감되었다.
2.1.1. 한나라당의 대선 경선 결과
2.2. 범여권의 상황
당시 언론에서는 민주당계 정당들과 원내 진보 정당들, 그리고 정치적 성향이 민주당계 정당들에 가까운 것으로 인식되던 무소속 대권 주자 등을 모두 일컬어 '범여권'이라고 표현하였다. 하지만 참여정부의 청와대에서는 이 표현을 탐탁치 않아 했던 것으로 보이며, 특히 천호선 대변인의 브리핑을 빌어 한나라당을 탈당해 대통합민주신당으로 이적하여 대선 후보 경선을 완주한 손학규를 범여권 인사로 인정하지 않는 태도를 보이기도 하였다. 비노계인 정동영 후보에 대해서는 범여권이 맞다면서도 엄격히 따지면 이미 대통령이 무소속(노무현은 범여권 정계 개편 과정에서 탈당했다)인데 범여권이라고 부르는 게 적절할지 모르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언론에서는 딱히 대체할 만한 용어가 없는 탓인지 제17대 대선이 끝날 때까지 계속 범여권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2.2.1. 열린우리당에서 대통합민주신당까지
참여정부의 부동산 정책 실책 등으로 여당은 국민들의 신임을 잃어갔으며 정권교체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당시 시대상을 반영하는 유행어로는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가 있다. 게다가 당시 여당이었던 열린우리당은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의 참패로 인해 거의 붕괴에 직면해 있었다. 이러는 중에도 여권에서도 유력후보는 존재했으니, 그는 바로 고건 전 총리였다. 노무현 탄핵 사태 당시 잠깐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으면서도 무난한 행정능력을 보이며[13]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고 넓은 계층에게 인정받으며 초창기 모든 후보 여론조사에서 1위를 차지할 정도였다. 고건 대통령 대행은 노 대통령 처럼 특정 정당 지지발언을 하지는 않았다. 또한 직설적인 화법의 소유자도 아닌지라 논란이 될 발언을 한 적도 없었다. 정치인이 아닌 전형적인 관료형 인물이었기 때문에 보수, 진보 양쪽에서 무난한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성과가 신통치 않았는지 결국 불출마를 선언했다. 이런 배경은 훗날 정계 은퇴한 뒤 밝혔는데, 야당에게 기울어질대로 기울어진 민심도 한몫했지만, 무엇보다 본인이 호남출신임과 동시에 노무현 정부의 낮은 지지율과 집권여당의 낮은 지지율로 국민적인 지지를 얻기는 어렵다고 다고 판단하여, 대선 도전은 포기했다고 밝혔다. 이로서 여당의 대권후보는 점점 오리무중으로 빠지고 만다.
그나마 유력 후보라 할 만한 사람은 정동영과 김근태 정도인데 이 두 사람은 통일부 장관 자리를 두고 사생결단 매치 [14] 를 벌인데다 두 후보 모두 여러 선거에서의 참패 책임이 있었다. 그나마 김근태는 당 대표를 맡지는 않았지만[15] 특히 정동영의 경우 2006년 지방선거 당시 당 대표로서 대참패의 직접적 책임을 지고 있는 상태였다.
이 두 사람을 제외하고 당시 유력 후보군으로 이해찬, 한명숙 전 총리, 천정배 전 법무부 장관이 있었다. 모두 다 내각 출신인데 유력 대권주자가 없자 대통령과 청와대가 당 내 중진 및 신임하는 인사들을 내각에 기용시켜 무게감을 더해주려는 배려였다.
당 상황이 개판이 되고 당내 후보군이 다 상처투성이인 상황에서 김한길계는 범여권 재편을 목적으로 탈당을 결행, 중도개혁통합신당을 창당했고, 이를 신호탄으로 '''대선후보군을 포함한 현역 의원 상당수의 연쇄 탈당'''이 시작되었다. 이후 중도개혁통합신당측과 손학규를 중심으로 한 한나라당 탈당파가 연대하고, 민주당 탈당파가 여기에 합류하였으며 열린우리당이 해체하여 흡수되는 형식으로 모여서 대통합민주신당이 결성된다.
창당 직후 대통합민주신당은 바로 대선후보 경선에 착수했으나 후보들 상태가 다 거기서 거기인지라(...) 엄청난 수의 후보가 쏟아져나와 컷오프를 해야 했다. 통합신당파의 지지를 받은 정동영, 한나라당 탈당파로서 인지도나 긍정적 측면에서 우월했던 손학규[16] , 구 열린우리당과 친노계의 집중지원을 받은 이해찬이 범여권 Big3으로 불렸으며, 친노계에선 추가로 한명숙 전 총리와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 김두관 전 행정자치부 장관이, 구 민주당계 탈당파에선 추미애 전 의원이, 그리고 전 열린우리당 의장이었던 신기남 의원과 천정배 전 법무부 장관까지 9명이 출마했다. 다른 유력후보였던 김근태나 정세균 의원은 출마를 포기했다.
8월 27일 컷오프에서 추미애, 천정배, 신기남, 김두관 4인이 탈락한다. 이후 시작된 본선 경선에서는 한명숙, 유시민 후보가 차례대로 후보직을 사퇴하며 같은 친노계인 이해찬을 지지했다.[17] 결국 남은 빅3 중에서 가장 강력한 조직력을 지니고 있던 정동영이 후보로 선출된다. 손학규는 한나라당 탈당파라서 당 내 조직력이 너무 미약했고 애시당초 탈당을 함께 한 동반자들도 거의 없었으며,[18][19] 이해찬은 유시민, 한명숙의 지원을 받았지만 친노계 후보였기에 배척받았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박스떼기 논란이 터져버리는 등 해당 경선도 진흙탕 싸움 이미지에서 벗어날수는 없었다. 이후 정동영은 어떻게든 범여권 및 진보진영 후보와 후보단일화를 시도하려 했으나 입싸움(...)으로만 끝난채 모두 실패로 끝난다.
공교롭게도 이때의 빅3는 11년 후 각각 다른 정당의 당 대표 선거에서 당선된다.[20]
2.2.1.1. 대통합민주신당의 대선 경선 결과
2.2.2. 민주당
2003년 열린우리당의 분당 이래 참여정부 및 열린우리당, 친노계와 철천지 원수가 된 구 동교동계 중심의 민주당은 2007년 열린우리당의 붕괴 속에 이익을 보고 덩치를 키워 열린우리당을 대신하여 범여권의 대표로서 대선에 임하려 했다. 김한길계 탈당파의 중도개혁통합신당과 합당하여 중도통합민주당이 된 것이 그 예이다. 그러나 김한길계는 소통합에서 대통합으로 노선을 변경하여 다시 당을 깨고 대통합민주신당에 합류, 이에 중도통합민주당은 당명을 다시 민주당으로 돌려놓고 독자노선을 추구한다.
그리고 희대의 탈당전문가 '''이인제가 때를 같이하여 국민중심당을 탈당하고 민주당에 입당한다!!!'''
그 직후 시작된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은 처참했다. 인지도가 떨어지는 장상[23] 이나 신국환[24] 은 그렇다 쳐도, 나름 네임드 정치인인 '''조순형, 김민석까지 이제 막 당에 들어온 이인제에게 압도적으로 쳐발리며 민주당은 대선후보 타이틀을 풍운아 이인제에게 넘겨주고 만다.''' 군소정당으로 전락한 민주당에 전국적인 인지도나 조직동원 능력에서 이인제를 따라잡을 상대는 없었고,[25] 조순형 등 다른 후보들은 이인제를 막기 위해 차출되다시피 한 거라 선거 준비가 안되어 있기도 했다.[26]
이후 정동영은 이인제와 단일화 협상을 진행했으나, 모두 무위로 돌아갔고, 이인제는 독자노선을 선언한다. 그리고 이에 반발하여 조순형, 김홍업, 이낙연 등 당내 지역구 국회의원들은 모두 탈당해버리고 대통합민주신당에 동참한다. 결국 당에는 김종인 등의 비례대표 의원 4명에다(비례대표는 탈당하면 의원직까지 상납해야 하기에 개인적 입장을 내비칠수도 없었다.) 지역구 의원은 이인제와 최인기 등 2명만 남게 되었다.
이런저런 탈도 많은 경선과정이긴 했지만, 어찌됐든 충청도의 거물이었던 이인제는 충청지방을 기반으로 10% 안팎의 건재한 지지율을 보이기는 했다.
2.2.3. 민주노동당
범여권으로 분류하긴 힘들지만 反한나라당 연대로 같이 거론되던 민주노동당도 17대 대선을 앞두고 꽤 격렬한 논쟁을 겪었다. 지난 대선에선 권영길로 무난하게 후보를 추대했지만,[27] 2007년 민주노동당이 처한 환경은 많이 달라졌다. 우선, 17대 총선의 성공을 본 NL계가 당에 대거 입당하면서 당내 세력비가 바뀌었고, 2006년 당내 인사들이 연루된 간첩사건인 일심회 사건을 두고 NL과 PD가 크게 대립하였으며 그 이후의 제1차 핵실험을 두고 같은 갈등이 반복되었다.
결국 2007년 대선을 앞두고, 유력주자가 없던 NL은 권영길과 연대하여 권영길을 후보로 추대하려 했고, PD는 의정활동으로 스타덤에 오른 노회찬, 심상정을 앞세워 반격하였다. 최종적으로는 압도적인 인지도와 NL의 지원을 받은 권영길이 2%라는 아슬아슬한 차이로 후보로 선출되었지만 이 과정으로 당원사이의 갈등이 터져버리고 이는 훗날 민주노동당 분당으로 이어지게 된다. 물론 정동영도 권영길에게 단일화의 손길을 내밀었지만 이도 거절당했다. 이는 참여정부가 가진 경제정책과 노동정책에서의 보수성에 기인했다. 실제로 참여계가 진보정당으로 가기 이전까지는 평행선을 달리기도 했고.
2.2.3.1. 민주노동당의 대선 경선 결과
2.2.4. 창조한국당
범여권의 양대 정당이 이처럼 개판으로 돌아가면서 야권 지지자들과 재야 및 시민단체들은 대안 모색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일부 온건보수 진영에서는 고건을 다시 한 번 설득해보려 했으나 고건은 불출마 의지가 확고했고, 대신 유한킴벌리 CEO 출신의 문국현을 새로운 범여권 후보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난다. 문국현 본인도 정치욕심이 있었는지 모든 회사에서의 직함을 내려놓고 창조한국당을 창당하면서 대선에 나선다.
특히 자신의 사재를 아낌없이 퍼부어 창당 및 선거자금으로 활용하였다. 열린우리당에서 탈당한 김영춘 의원[28] 과 정범구 前 의원[29] 이 문국현 지지를 선언하며 창조한국당에 입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젊은층에게 인기를 얻으며 초반 20%에 근접하던 지지율은 시일이 지나 유력후보에게 관심이 집중되면서 10% 미만으로 폭락한다.
2.2.5. 기타
열린우리당을 탈당한 김선미 의원은 과학기술계 인사인 정근모씨가 창당한 참주인연합에 입당, 이 듣보정당(...)을 단숨에 원내정당으로 만들어주었으나 아무 의미도 없었다. 이후 정근모는 이회창 지지를 선언했으나, 후보 사퇴까지 진행하지는 않아서 투표용지에 이름을 올릴 수는 있었다.
이수성은 국회의원 및 문민정부의 국무총리 등을 역임하며[30] 약간의 인지도를 보여왔으며 무소속으로 출마를 결정하였다. 이때 열린우리당 잔류파인 김혁규, 김원웅 의원을 비롯해 강운태 전 장관과 이홍구 전 국무총리 등이 참여했다. 하지만 얼마 안가 레이스에서 중도하차했으며 정동영을 지지했다는 설이 돌았으나, 본인은 부인했다.
2.3. 국민중심당 & 이회창
자민련을 대신하여 충청지역정당으로 부상한 국민중심당은 일찌감치 당 대표 심대평을 대선후보로 선출한 상태였으나[31] 심대평 본인도 대권 가능성이 없다고 보았고 다만 정계개편의 목적 및 충청권 유력정당이 대선후보도 못낼순 없다는 자존심으로 후보등록을 한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재야에서 암중모색하던 '''이회창이 11월 정계은퇴를 번복하고 5년만에 대선 출마를 선언하면서 17대 대선은 느닷없이 안개 속에 빠져 버린다.'''
이회창은 전략적으로 국민중심당과 연대, 심대평은 바로 후보를 사퇴하고 이회창 지지 선언을 한다. 이에 반발하여 당시 국민중심당의 원내대표였던 정진석 의원[32] 이 탈당하여 한나라당에 입당, 이명박 지지 선언을 하는 등 진통이 있었으나 대구의 한나라당 곽성문 의원이 탈당하여 이회창 캠프에 합류하는 등 호재도 생겼다.
이회창은 이명박의 전략이 경제에 치우쳐져 있음을 노리고, 북핵위기 등을 틈탄 안보분야에 강점을 두어 보수 후보로서의 차별화를 두었다. 또 이명박의 BBK 논란 및 과거 선거법 위반 논란 등을 공격하며 자신의 대법관, 대쪽총리 이력을 연관시키는 등의 노련함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지역적으로는 충청권에 국한된 지지로 인해 표의 확장성에서 한계를 맞이했다. 그리고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이회창이 이 문제를 타파하기 위해 필요한 연대 대상은 바로 '''박근혜'''였다.
박근혜와 연대만 된다면, 이회창은 지역적으로 단번에 TK를 탈환하고 PK에도 일정부분 영향력을 뻗고 수도권 보수표까지 일부 흡수할 수 있었다. 이렇게 되면 경상도라는 강력한 지지기반을 상실할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의 득표는 크게 깎여나갈 것이고, 그렇다면 경상도 표 절반과 수도권 표에 기반한 이명박, 수도권 리버럴과[33] 호남지역과 수도권과 전국의 민주세력의 골수 지지를 받고 있던 정동영, 충청도 표와 경상도 표 나머지 절반을 먹고 들어가는 이회창이라는 삼자구도를 만들 수 있었다.
16대 대선 정국 당시 앙금이 있던 두 사람[34] 이었지만 일단 아쉬운 것은 이회창이었기에 여러 차례 읍소하며 헬프를 친다. 이에 호응하여 곽상문 등 강경 친박의원 일부와 박사모 등 일부 지지세력이 이회창에게 합세했으나 정작 박근혜 본인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회창은 세 차례에 걸쳐 박근혜의 집을 찾아가 삼고초려를 보여주려 했으나 박근혜는 한 번도 만나주지 않고 이후 이명박의 지지유세에 합류하는 것으로 답변을 대신했다. 이명박의 당선이 기정사실화 되는 상황에서 이회창 지지로 3자구도가 성사되고, 정말로 정동영 후보가 당선되는 사건이 일어나면 박근혜와 친박 자체가 보수 패배의 원흉으로 몰려 멸종되는 일이 될 수 있다. 굳이 안정적인 상황에서 모험걸만한 제안이 아니었던 것. '''이것으로 17대 대선의 승리자는 사실상 결정되었다.'''
3. 본선
야권도 여권도 치열한 경선과정을 거치며 힘겹게 후보를 선출했지만, 참여정부 말기에 대한 국민의 불신감에 힘입어 정권교체는 기정사실화 되어갔고 참여정부의 국정실패와 대통합민주신당내 빈약한 인재풀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나온 결과 정권교체의 주인공은 이명박이었다. 당시 화두였던 경제회복을 전면에 내세우며 승세를 이어갔고, 삼자구도에도 불구하고 50%를 가뿐하게 뛰어넘는 위엄을 보이기도 했다. 반면 민주당 대선 후보로는 처음으로 기호 1번으로 출마한 정동영 후보는 이명박의 절반에도 못미치는 지지율을 보이며 부진을 면치 못했으며, 오히려 출마도 하지 않았던 이회창의 지지율에도 밀리면서 안습한 구도만 계속 이어졌다.[35]
출마 직후의 이회창은 이인제와 같은 충청도 출신임에도 상대적으로 중량감이 더 컸는지 충청도 기반의 이인제의 지지율을 죄다(...) 흡수했고 이명박을 위협할 정도로 강세를 보였으나 얼마안가 거품이 빠져버려 정동영 후보의 절반까지 폭락하고 만다. 이로서 대선 후반에는 정동영 후보는 이명박의 절반, 이회창은 정동영 후보의 절반이라는 지지율이 고착화되어갔다. 노무현 대통령의 임기말 개최된 2007 남북정상회담으로 여권측에서는 반등을 기대하기도 했으나, 노무현 본인의 지지율에만 기여할 뿐 대선 구도에서는 정동영 후보의 지지율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본선에서도 어김없이 다른 후보들은 이명박의 BBK의혹을 집중적으로 공격했으나,[36] 이명박은 경제를 강조하는 마이페이스 노선을 걸어갔고 지지율 순위가 뒤집어지는 일은 없이 결국 아래의 개표 결과까지 이어지게 된다.
3.1. 극단적인 선거운동의 차이 : 포지티브 vs 네거티브
워낙 당 및 후보 지지율이 낮게 나와서 그런지 몰라도 대통합민주신당과 정동영 후보측은 안그래도 불리한 선거를 '''더 불리하게 만드는 무조건적인 네거티브 전략'''으로 나섰다.[37] 물론 선거운동이 이상적으로 무조건 포지티브하게 갈 수만은 없고 어느 정도 네거티브가 필요하긴 하지만 정동영 캠프의 문제는 '''아예 포지티브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당시 정동영 캠프의 대선 CF는 '''정동영이 어떤 사람이고 뭘 하겠다'''가 아니라, '''이명박은 이러이러해서 안되는 나쁜 사람이니 지지율 2위인 정동영을 찍어달라'''로 점철되어 있었다. 심지어 TV로 나가는 지지자 찬조연설도 보수계 인사인 이장춘을 영입하여 '''이명박이 나에게 BBK 명함을 직접 줬다'''며 BBK 공격으로만 활용하여 국민들에게 어필을 했지만 지지율은 요지부동이었다.
반대로 이명박과 한나라당 캠프는 아주 정석대로 포지티브하게 선거전략을 짰다. 2위 후보와 워낙 격차가 커서 네거티브는 쓸 필요도 없었고...(...) 이명박의 대선 홍보 영상은 시장 국밥집에서 이명박이 국밥을 먹으며 욕쟁이 할머니에게 욕과 함께 일 열심히 하라는 격려를 듣는 영상이었다. 이는 어려운 경제상황에서 서민들을 위해 열심히 일하겠다는 메시지가 담긴 광고였다.# TV 방송된 지지자 찬조연설은 '''부산의 20대 대졸 취준생'''이 '''가는 데마다 원서써도 떨어지고 또 떨어지고 취업할 길이 없다!!'''며 경제를 살려 나같은 사람들 취직 좀 잘 되게 해달라 애원하는 간절함이 묻어 있었다.[38] 물론 정동영도 마냥 디스만 하는 광고만 만든 건 아니었고, 이런 네거티브성 CF는 주로 인터넷 매체를 이용한 하위 광고였다. 이런 걸 제치더라도 정동영의 TV광고는 주로 본인의 과거사를 통해 감성을 전달하는데 그쳤을 뿐, 비전이나 공약을 전혀 전달하지 못했기에 광고 대결은 이명박의 압승이었다. 이러한 전략은 광고와 더불어 대선 운동의 모범사례로 회자되고 있다.
사실상 네거티브의 전략은 '이명박 vs 안티 이명박'의 구도로 굳혀졌는데, 어찌되었든 주인공은 이명박이라 관심은 이명박에게 쏠리는 결과만 낳을 뿐이었다. 덕분에 안티 하나라도 더 만드려다 중도층의 표는 이명박에게 기울어져 결과적으론 대통합민주신당의 자멸로 끝나버린 전략이 되고말았다.
양측의 선거전략 차이 외에도 이명박에게 호재, 정동영에게 악재로 적용한 것이 초유의 다자구도였다. 이는 대선 TV토론과 연계되는데, TV 토론에만 무려 6명이 참가하다보니 후보 한 명 한 명에게 주어지는 기회가 적었다. TV 토론 참가 기준은 '''원내 의원 5인 이상인 정당의 후보''' 혹은 '''최근 여론조사상 지지율 3% 이상 후보'''로 이명박, 정동영, 권영길, 이인제(이상 원내 정당 후보)[39] 와 이회창, 문국현(지지율 3% 이상 후보) 총 6인이 참가하여 후보 한 명 한 명에게 주어지는 시간이 충분치 못하고 이는 각 후보들이 자기 자신을 어필하고 토론을 통해 상대를 공격할 기회가 부족했음을 의미한다. 물론, 그 적은 시간들조차도 대부분의 야권 후보들은 BBK 공격하느냐 바빴다. 그나마 이회창 정도가 간혹 날카로운 공격을 펼쳤지만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다.
3.2. BBK 주가조작 사건
17대 대선은 한나라당 경선이 끝난 그 시점부터 이명박 후보의 독무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리버스 버전으로 회자되는 19대 대선은 잠시나마 안철수 후보가 오차범위내로 바짝 추격하기라도 했지만 이 선거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명박이 압도적 선두에 있었다. 출처
자연스레 후보 검증도 이명박에게만 집중되었고, 그의 최대 약점인 BBK 사건은 대선 이슈로 부상하게 된다.
4. 출구조사
5. 개표
선거일 오후 6시에 발표된 출구조사 결과, 이명박 후보가 50% 안팎의 득표율로 압승을 할 것으로 예측되었다.[40] 예상 득표율 차이가 너무나도 커서 출구조사 결과만으로도 이명박 후보의 당선이 거의 확정된 분위기였다. 출구조사 발표 당시 각 당의 반응을 모은 돌발영상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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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이명박 후보의 압도적인 포스를 보여주는 짤. '''개표 4%가 갓 넘은 상황'''에서 당선 확실이 떠 있다. 당선 유력이 뜨지 않고 그냥 바로 확실이 떴다. SBS는 16대 때 그러했듯 자체적으로 그 시점에서 이명박 후보의 당선을 일찌감치 선언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앞서나간 건 아니다. 해남 땅끝마을부터 개표가 시작되어 정동영 후보가 앞서 나갔다. 당연하겠지만 개표가 채 1%도 진행되기 전에 이명박 후보가 역전했고, 이후 순위가 뒤집히는 일은 없었다. 결국 이명박 후보가 직선제 실시 이후 19대 대선 이전까지 최다 득표차인 5,317,708표 차로 당선되었다.
다만 출구조사와는 달리 과반에는 미치지 못했고, 대선 득표수 자체가 줄어든 사례라 정치적 무관심을 질타하는 목소리도 높았다. 최종 개표 결과 16대 대선 당시 노무현 후보의 득표율보다 0.2% 적은 48.7%로 마무리 되었다. 그리고 역대 최악의 대선 투표율(63.0%)로 인해 득표수는 노무현보다 약 53만표 적은 1149만여 표가 나왔다. 그러나 대부분 보수표인 이회창 표가 이명박 표를 갈라먹은것도 감안해야 한다. 그걸 감안하면 사실상 정동영의 패배는 더더욱 압도적인 패배. 이명박과 이회창의 득표를 합치면 1505만 표에 득표율은 63.7%, 정동영 후보와의 득표차는 정동영 후보의 득표수를 훨씬 넘기는 890만여 표였다. 이 때문에 대선 이후 민주당 내에서 잃어버린 500만표론이 나오게 되었다.
호남권과 충북 보은지역을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이명박이 득표율 1위를 기록했다. 정동영 후보는 호남권과 충북 일부지역에서만 득표율 1위를 기록했다. 16대 대선에서 노무현이 영남권에서도 선전한 것과 달리, 이 선거에서 정동영의 영남권 득표율은 전임 김대중 후보의 영남 득표율에도 미치지 못하는 부진을 보였다. 정동영은 PK에서 약 10% 초반, TK에서 6% 남짓의 득표율을 기록하는 데 그쳤다. 특히 정동영의 TK에서의 득표율은 호남에서의 이명박의 득표율(약 9%)보다 더 낮은 수치였다. 참고로 진보 계열 후보 TK 득표율이 보수 계열 후보 호남 득표율보다 낮게 나온 것은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된 13대 대선 이래 처음 일어난 일이다. 기초자치단체 기준으로 봐도 정동영 후보가 호남을 제외하면 충북 보은(그나마 여기서도 득표율은 35%정도에 불과했고, 보수표를 이회창 후보가 대거 분산시킨 결과였다.)을 제외한 모든 지역구에서 이명박의 득표율에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거나 3위인 이회창에게도 밀리는 부진을 보였다.
이회창 후보는 출구조사 결과 13%대 득표율로 선거출마비 반액을 날릴 것으로[41] 예측된 출구조사를 뒤집고 15.07%를 얻어 '''0.07% 차이'''로 선거비 전액을 돌려받는 데 성공한다.[42] 2008년 민주화 이후 선거진 대선 중 무소속 역대 최다 득표율을 기록하고 있으며 한동안 깨지기 쉽지 않은 기록이라 보인다.[43]
하지만 이회창은 충청권과 영남권에서 2위의 득표율을 기록하였을 뿐 16개 광역자치단체 중 어느 지역에서도 득표율 1위를 기록하지 못했다. 충남에서 이명박과 1.1%차 접전을 벌였을 뿐, 다른 지역에서는 압도적으로 밀렸다. 다만 기초자치단체 기준으로 이회창 후보는 충청남도 공주시, 보령시, 연기군, 부여군, 서천군, 홍성군, 청양군, 예산군에서 1위를 했다.
요약한 개표 과정 SBS 뉴스.기사 그리고 개표 당시의 영상이 남아있는 뉴스들. 개표 10%후보자 연고지개표 22.3%특징지역개표30.5%개표 40%개표 44%. 아주 그냥 학살인게, 보통 대선 개표에서는 1위 - 2위 후보 간 표차가 벌어지더라도 중간중간 2위 후보가 표차를 줄여가면서 벌어지는데,[44] 이 때 선거에서 1-2위 실시간 개표현황을 보면(화면 아래에 나오는 것들) 이명박 - 정동영 표차가 '''계속해서 불어나기만 하고 있다'''. 개표 총평 기사1 개표 총평 기사2 개표 총평 기사3 개표 결과 정리
이명박 후보 당선 장면. 당선 확정이 되었을 시점이 850만 표대다. 그나마도 SBS인 경우 '''개표율 6% 시점부터 이미 당선'''이라고 표기해버렸다.(...)[45] 사실 당선 확정은 말도 안되는 것이, 당선 유력 및 확실의 경우 통계학적인 방법을 이용하여 예측하는 것이기 때문에 표차가 크다면 개표 초반에도 뜰 수가 있으나, 당선 확정은 남은 모든 표를 2위 후보가 가져가도 현재 1위 후보가 승리하는 상태를 의미하므로 순수한 산수의 영역으로 적어도 표가 '''절반 이상 개표되어야 가능'''하다. 보통은 개표가 90% 이상 진행되어야 당선 확정이 뜬다. 그 예로 18대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는 개표 96% 정도에서 당선이 확정되었다. 당선 확실이 뜬 순간부터 '''"(카운트다운) = {(남은 표수) - (1위 후보와 2위 후보 간 표차)}/2."'''의 공식에 따라 산출하며 저 카운트다운이 0이 되었을 때 당선 확정이 된다. 물론 이런 예측발표가 가능했던 이유는 18대선에선 박근혜, 문재인 후보둘은 오차범위 이내에서 대결하였기에 함부로 당선확정을 발표할순 없었지만 17대 대선에선 1,2위 득표율 차이가 '''22%나 넘었기에'''(결선투표제도 아닌지라) 만약 이게 틀렸다고 가정하면 말 그대로 지상파3사, 여론조사 업체들 전부 폐업해야 하는 수준인지라.... 사실 17대 대선은 누가 봐도 이명박 후보 당선확정인지라 그냥 발표한 것 같다.
이명박 후보의 대통령 당선은 개표 76.5% 시점에서 되었다. 이 시점의 표차가 대략 373만표 정도였는데 표차가 계속해서 더 불어나 결국 최종 1, 2위 후보 간 표차는 531만 7,708표 차였다. 호남과 제주, 정동영 후보가 1위를 거둔 충북 보은 옥천지역의 표가 저때 다 떨어져서 표차가 전혀 안 줄고 있었으니까.[46]
6. 결과
6.1. 주요 후보의 지역별 득표수와 득표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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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후보는 호남과 충북 보은지역을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정동영 후보에게 승리는 거뒀고, 보수와 진보가 경합했던 서울에서도 더블스코어 차이로 압승하였다. 특히 텃밭이였던 대구경북에선 무려 70% 정도의 득표율을 받았으며, 고향인 포항에선 '''무려 80%'''라는 압도적인 득표율을 기록하기도 했다.
반면 정동영 후보는 텃밭이었던 호남과 충북 보은지역에서만 1위를 거두며 참패했을 뿐더러 그나마의 충청북도 보은군에서도 겨우 '''98표''' 차의 신승이었을 뿐이다. 이용희의 영향으로 민주당 세가 강한 그 지역에서조차 겨우 98표 차이로 이겼던 것이다. 말 그대로 텃밭을 뺀 모든 지역에서 참패를 한 셈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 텃밭인 호남에서도 득표율이 이전보다 떨어졌는데, 이전 대선들에서 김대중, 노무현 후보가 호남에서 92%-97%대의 득표율을 기록한 반면 정동영 후보는 호남에서도 75%-80%초반의 득표율을 기록하는데 그쳤으며, 전라남도 광양시에서는 70%의 득표율도 거두지 못했다.
정동영에게는 더욱 참담한 결과로, 부산, 울산, 대구, 대전, 경남, 경북, 충남 이 7곳에서는 이회창에게도 밀려 3위로 처졌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정동영은 직선제가 실시된 제13대 대통령 선거 이후로 가장 낮은 득표율(26.1%)을 기록한 2위 후보가 되었다.[49] 이 때 기록한 정동영의 부진은 제19대 대통령 선거 때 홍준표가 24%로 갱신하면서 깨졌다.[50]
이회창 후보는 시도 단위에서는 1위를 한 곳이 없었으나 시군구 단위에서는 충청남도 지역에서 1위를 차지한 곳이 몇몇 있었다. 전국 최다 득표율을 기록했던 예산군을 비롯해 홍성군, 보령시, 서천군, 공주시, 청양군, 부여군, 연기군 등 충청남도 일부 지역에서 1위를 차지했다.
6.2. 결과 분석
서울특별시 지역에서 보수계열 정당이 승리한 최초이자 유일한 대통령 선거이기도 하다. 6공화국 출범 이래 계속해서 김대중, 노무현이 승리했고, 다음 선거에서는 문재인이 승리한 전적 속에서 이명박은 유일하게 서울에서 대선에 승리한 보수 계열 후보로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더욱이 진보계열이 서울에서 승리하긴 했어도 대개 접전의 양상을 띈 다른 선거와는 달리[51] 이명박 후보는 정동영 후보를 2배가 넘는 표차로 압승을 거뒀다. 이는 전국적인 여론이 이명박에게 쏠린 점도 크지만, 넘사벽급 시정 능력을 보여준 서울특별시장 경력도 한몫했다. 실제로 이 대선에서 이명박이 서울에서 올린 득표율 53.2%는 비영남 지역 최고 득표율이었다. 또한 극단적인 양자 대결 구도였던 제18대 대통령 선거를 제외하면 대통령 직선제 부활 이후 유일무이하게 '''서울에서 과반수 득표율'''을 올린 동시에 직선제 부활 이후 '''서울 최고 득표율'''을 올렸다.
한나라당의 텃밭인 대구·경북에서는 이명박 후보가 70% 이상의 득표율을 얻었다. 특히 이명박의 고향이나 다름없던 경상북도 포항시에서는 80% 이상의 득표율이 나왔다. [52] 하지만 부울경에서는 50%대 득표율에 그쳤는데, 이는 이회창 후보의 보수표 분산에 의한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15대 대선과 비슷한 상황이었으나, 정동영은 중부 지방에서도 완패했기에[53] 김대중과 노무현이 당선되었던 15대 대선 및 16대 대선과 같은 이변은 일어나지 못했다.
호남의 경우, 이전의 대선과 달리 친민주당 성향이 더더욱 강한 광주,전남권보다 전북권에서 정동영 후보의 표가 더 나왔다. 아무래도 정동영 후보의 연고이자 국회의원을 역임했던 텃밭이 전북 순창군이었던 점이 영향을 끼친 듯.
한편 이회창 후보는 자신의 고향인 충청권에서 선전했다. 특히 충남에서 이명박 후보와 불과 1.1% 차이로 패배하면서 새로운 충청권의 맹주로 떠올랐는데 정작 이회창이 15대, 16대 대선에서는 충청권에서의 패배로 승리를 내주었던 것을 생각하면 아이러니. 사실 이회창 후보는 본적이 충남 예산일뿐 태어난 곳은 황해도, 성장한 곳은 호남, 서울 등으로 지역색이 명확하지 않은 후보였으나 17대 대선에서는 세종시 문제로 이명박 후보가 충청권에서 반감을 샀기 때문에 이회창 후보가 선전할 수 있었다.[54] 다만 광주에서는 문국현 후보에 밀려 4위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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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구조사 세대별 결과에서는 이전까지의 선거와 꽤나 다른 결과가 나타났는데 20대, 30대를 포함한 전 세대에서 이명박 후보가 1위를 하였다. 정동영 후보는 20대에서 20.7%로 전 세대 중 가장 낮은 득표율을 올렸고 대신 문국현과 이회창이 각각 15.9%, 15.7%를 득표하며 선전했다. 이는 당시 20대들의 한나라당과 대통합민주신당, 이 양자 유력정당에 대한 불신감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30대와 40대에서는 정동영 후보가 각각 28.3%, 27.1%를 득표하며 나름 선전했으나 이명박 후보에 10%P 이상으로 쳐져 2위를 보였다. 그래도 30대의 경우 이명박 후보가 40.4%로 전세대 중 가장 낮은 득표율을 보이면서 여전히 민주당계 지지 성향이 강하게 남아 있음을 보여주었으나 40대에서는 이명박이 과반 득표를 하면서 완승해 386세대들의 대통합민주신당과 정부 여당에 대한 불신감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한편 이회창은 정통보수 이미지를 어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20대에서 가장 높은 득표율을 올리고 기성세대로 올라갈수록 낮은 득표율을 올렸다. 당시의 20대들은 각종 비리 혐의를 받고 있던 이명박 후보와 노무현 정부의 실패한 이미지를 안고 있던 정동영 후보보다는 깨끗하고 참신한 이미지의 문국현 후보와 보수적이기는 하지만 대쪽 이미지를 가지고 있던 이회창 후보에게 기대를 걸었던듯 하다. 한편 권영길 후보는 30대에서 6.1%로 가장 높은 득표율을 올렸으며 이인제 후보는 60대 이상에서 0.9%로 가장 높은 득표율을 올렸다.
6.3. 20대의 정치불신 현상
20대는 이 선거에서 46.6%에 불과한 투표율을 기록해 20대들 사이에서 정치 자체에 대한 무관심과 회의과 늘어났음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와 같은 20대의 정치불신 경향은 16대 대선에서의 노무현 열풍, 17대 총선에서의 탄핵 역풍, 민주노동당의 선전 등과는 흐름을 완전히 달리하는 결과였다. 이것 때문에 86세대에게서 20대 개새끼론이 처음 나오게 되는 사건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들(1980년대생)들은 민주당 지지 성향이 강한 편이고 당시 민주당이 너무 무능해서 투표를 안 했다는 평가가 클 뿐이지, '''586세대의 영향을 좋든 나쁘든 세게 받았기 때문에''' 후에 노무현의 자살 이후 '''민주당이 무능해도 지지하겠다'''는 정서가 강해져. 30대가 된 10년 후 19대 대선에서는 문재인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보내면서 강성 민주당계 정당 지지 성향을 보이게 된다. 이후 86세대는 과거 20대들을 찬양하며 '드디어 이들이 철이 들고 깨달았다'라는 구시대적 찬사를 보냈으며, 이후 현 20대들이 민주당을 크게 지지하지 않자 다시 표적을 90년대생에게 돌리기 시작했다.[55] 특히 현 40대들은 그러한 경향이 매우 강하다.
10년 뒤 19대 대선에서도 소수 정당 후보였던 유승민, 심상정이 20대에서 각각 13.2%, 12.7%라는 득표율로 선전하는 등 20대에서의 소수정당 선전 현상은 어느정도 보편적인 현상이기는 하지만, 10년 전과는 매우 다르다는 영향이 크다. 17대 대선 당시의 20대들은 보수 성향이라고 보기에 매우 어려웠으며, 진보 진영이 무능해서 투표를 안했을 뿐, 북한에 대한 친화적 감정, 미국/일본에 대한 적대성, 사회주의 경제에 대한 환상 등 '''진보 성향이 강했다'''. 그러나 19대 대선에서의 20대의 경우 투표율이 30대 및 40대보다 높았으며, 보수적인 경제 정책을 주장한 안철수나 보수적인 안보 정책을 주장한 유승민의 대한 지지가 눈에 띄게 높은 편이었기 때문에, 지지하기는 하지만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세력 자체에 대한 불신 성향은 17대 대선에서만 드러나는 특징으로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결국, 이는 일시적이 현상이었고 그 당시의 20대였던 현 3040대들은 민주당이 본인들에게 피해를 입히더라도, 무능하더라도 그래도 계속 지지를 보내겠다는 경향[56] 이 강하다.
7. 기타
KBS 개표방송. 개표방송 초반에 원더걸스의 Tell Me를 후보들 캐릭터가 추는 영상을 만들어 보여주기도 했다. 이 영상은 대선 마라톤 코너에서 나온 영상으로 당시 KBS는 최승돈 아나운서와 개그맨 김학도가 마라톤 중계 형식으로 개표 상황을 전하는 코너를 했다. 실제로 17대 대선 당시 Tell Me의 인기에 힘입어 많은 후보들이 Tell Me를 로고송으로 쓰고 싶어했으나 JYP 측에서 "국민적인 히트를 얻은 노래가 특정 후보를 위해서 쓰이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다" 라는 이유로 모두 거절했다.#
MBC의 선택2007 개표방송 오프닝 영상.
MBC의 선택2007 출구조사 결과 영상.
선거 결과 표에서 보듯이 1987년 직선제 이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에서 가장 후보가 난립한 선거였다. 이는 워낙 이명박의 독주였던 구도도 컸지만, 다음해에 총선이 예정되어 있다는 점도 한몫했다. 여권(개혁권)에서도 4명, 야권(보수권)에서도 4명 , 진보권에서도 2명이 나왔다. 사퇴를 빼도 3명, 2명, 2명. 군소후보까지 후보는 총 12명 이었으며, 이는 제19대 대통령 선거의 15명으로 기록이 깨지기 이전까지 후보가 가장 많은 선거기록을 갱신했다. 금민 후보는 역대 최연소(45세)를 기록했다. 반면 최고령 이회창 후보의 나이는 72세였다.
참고로 이 대선은 허경영의 존재감이 눈부신(...) 선거였다. 허경영은 정근모와 사회당의 금민을 거뜬히 넘겼고, 영남, 강남 등 보수정당의 지지율이 높은 곳들에서 이인제를 이겼다. 읍면동 단위로 보면 허경영 후보는 울진군 서면에서 '''13.6%'''를 득표하기도 하였다. 17대 대선의 허경영 후보의 경우 박빙 대결이 아니라서 관심을 받은 측면도 있다. 제18대 대통령 선거때라면 박근혜 문재인 양자대결에 초점이 맞춰져서 이 정도의 관심은 못 받았을 터인데 17대 대선은 워낙 이명박의 독주라서...
이인제는 원래 새천년민주당이 이름을 바꾼 2005년 민주당을 사실상 접수하다시피 했고, 대선 초기까지만 해도 이인제는 그의 출신지인 충청도를 기반으로 10%를 상회하는 지지율을 보이며 토론회에도 참석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회창이 출마를 선언하면서 충청도의 지지층을 죄다 빼앗아 버리자 소수점대의 지지율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또한 이인제 항목에도 알 수 있듯이 이인제는 잦은 당적 변경으로 신임을 잃어갔고 민주당도 당차원의 문제로 지지율을 잃어갔지만, 이회창은 무소속이 오히려 메리트로 작용한 것이다.
역대 대선 가운데 SKY 대학 출신이 가장 많이 출마한 대선이기도 하다. 학부 출신으로만 따졌을 때 서울대학교 출신이 정동영(국사학과), 권영길(잠사학과, 현 바이오시스템소재학부 바이오소재공학전공), 이인제(행정학과), 심대평(경제학과), 정근모(물리학과), 이수성, 이회창(이상 법학과)까지 모두 7명이며, 고려대학교 출신도 이명박(경영학과)과 금민(법학과)까지 2명이나 있어서 SKY 출신자가 무려 9명이나 출마했다. 허경영은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전관은 육군사관학교, 문국현은 한국외국어대학교[57] 출신이다. 석박사를 해외 대학에서 나온 경우는 정동영(영국 웨일스대학교]), 정근모(미국 미시간 주립대학교), 금민(독일 괴팅겐대학교)의 3명이 있다.[58]
보통 대선 직후에는 패배한 정당 측에서 불복하고 개표과정에서의 음모론을 제기하는 것이 관례(?)로 남아있으나, 해당 대선에서는 어찌나 표차가 컸는지(...) 이마저도 적은 편이었고 여당 측과 네티즌들 사이에서도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이는 지난 대선에서 한나라당 측에서 불복을 시전하다 국고만 낭비한 채 수포로 돌아가며 역풍을 맞은 사례도 원인으로 볼 수 있다. 일부 진영에선 음모론 대신 국개론을 시전했지만 이것도 묻혔다.[* 정작 국개론이 힘을 발휘한건 15대 대선과 1992년 대선이었다.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1991년)의 김대중후보는 농촌 유권자의 친 민자당(현재 자유한국당) 친 노태우성향을 비판하며 유권자의 책임을 지적했다. 이로 인해 그의 발언에 수긍하지 않는 청중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이미 30년전인 1992년 대선때부터 계급배반투표의 논리가 공식적으로 쓰이기 시작했던 것이다.후보가 유세장서 유권자 비판 1992년 대선 김대중후보 표 잘못찍어 제 발등도 찍었다, 민주당 유권자 책임강조 게다가 앞선 지방선거에서도 역대급 참패를 당했던 민주당으로서는 해당 대선을 통해 분위기를 뒤집는 데 실패했으며, 나아가 차기에 개최될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의 참패에도 영향을 끼치면서 역대급 3연벙을 당하게 되고,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로 분위기를 뒤집기까지 본격적인 암흑기를 겪게 된다. 물론 2년간 개최된 보궐선거에서는 연달아 민주당이 승리하긴 했으나, 중요한 자리는 많지 않았기에 유의미한 승리라고 보기는 어렵다.
판도라TV에서는 칭찬릴레이라는 영상 시리즈를 만들어 올리기도 했다.완결편 문국현→정근모→이회창→이인제 →전관→금민→권영길 순으로 이어졌으나.. 당시 민주노동당 측에서 영상의 취지가 당의 노선과 맞지 않다는 이유로 거절하여 맥이 끊겼다. 그 뒤로 허경영이 정동영후보를 칭찬을 했다.
7.1. 마지막 대통령 선거(경남 마산시, 경남 진해시, 충남 연기군)
이번 대선에서는 세 지역이 사실상 대선상으로는 마지막 대통령 선거를 치루게 되었다. 경상남도 마산시와 진해시, 충청남도 연기군인데 마산시는 2010년 창원시와 통합을 하게 됨에 따라 마산시 자치 행정상으로는 이번 대선을 마지막으로 선거를 치루게 되었다. 2010년 창원시와 통합하게 되면서 다음 2012년 대선부터는 창원마산합포, 창원마산회원 선거구별로 치뤄졌다.
진해시도 자치시로서는 이번 대통령 선거를 끝으로 대통령 선거상에서는 단일 선거구 역할을 마치게 되었으며 2012년 대선부터는 2010년 창원시와 통합되어서 창원 진해구로 분류됨에 따라 창원진해 선거구로 분류되어 치뤄졌다.
충남 연기군은 세종시로 승격 및 출범하기 이전에 치뤄진 마지막 대선으로서 다음 대선부터 2012년 세종시로 출범하여 충청남도에서 분리되어 특별자치시가 됨에 따라 충남도와 다른 선거구로 치렀다. 기초자치단체를 두지 않았기 때문에 세종시 단일 선거구로 치렀다.
7.2. 대선 격전 지역
매우 싱겁게 끝난 승부였던데다 지역 구도마저 확고하게 잡혀 있어[59] 격전지가 거의 없었다. 시, 군, 구 단위에서 1, 2위 후보 간 표 차가 1,000표 미만의 격전지는 아래와 같다.
- 충청북도 보은군 - 98표 차 정동영 승
- 충청남도 논산시 - 156표 차 이명박 승
- 충청남도 서천군 - 321표 차 이회창 승
- 충청북도 옥천군 - 553표 차 이명박 승
- 충청남도 금산군 - 942표 차 이명박 승
충남 일부 지역은 이회창 후보 강세지역이었는데, 서천군은 이회창 후보가 승리한 8개 시군(전부 충남) 중 1곳이었다. 논산시, 금산군 또한 이회창 강세가 나타났지만, 다른 충남 지역들에 비해서는 정동영 후보 지지세도 만만치 않아 삼파전으로 전개되었고, 결과는 결국 근소한 표차지만 두 지역 모두 이명박>정동영>이회창 순으로 나왔다.
호남과 위에 서술된 지역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서는, 정동영 후보는 이명박 후보의 득표에 크게 밀리는 모습을 보였다. 즉, 정동영 후보는 국민들의 지지적인 면에서 이명박에게 전혀 상대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7.3. 제19대 대통령 선거와의 대조
이 선거 후 10년 만에 실시한 제19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이 17대 대통령 선거와 방향이 정반대인 결과가 나왔다. 19대 대통령 선거의 결론 문서를 참고할 것.
7.4. 2018년, 의외의 재조명
2018년 시점에서 더불어민주당의 이해찬 대표, 바른미래당의 손학규 대표, 민주평화당의 정동영 대표가 모두 이 대선에서 대통합민주신당의 경선 후보로 출마했다는 사실이 재조명되기도 했다. 이명박 후보가 워낙 압도적으로 승리한 선거라 선거 당시에도 다른 대선들에 비해 관심을 덜 받았고 이후에도 크게 회자되는 편이 아니었으나 10여년이 지난 시점에서 세 원내정당의 대표가 모두 이 대선의 경선주자 출신이 당선되었다는 사실은 단순한 우연의 일치라기보다는 이 대선에서 노무현 정권에 대한 국민적 실망감으로 국민들이 민주당계 정당을 심판했으나 10여년이 지나며 심판의 대상이 보수정당으로 바뀌었고 이 때의 민주당계 정당(대통합민주신당)의 지도자급 인사들이 다시 한국 정치의 주류로 등장하게 된 필연적 결과로 분석해볼 수 있겠다. 좋게보면 그만큼 경륜을 가진 인물들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10여년이 지났음에도 한국 정치가 세대교체에 실패했음을 증명하고 있다.
[1] 참고로 19대 대선은 17.1%p이다. 대한민국 헌정사로 확대한다면 2대 대선의 63.2%p이다.[2] 다만 대선이 있던 임기 5년 차에는 지지율이 다시 반등하여 20% 중후반대를 기록하면서 임기를 마감했다. 집권 마지막(2008년)분기 지지율이 27%였는데 이는 역대 대통령 퇴임 지지율 중 가장 높은 수치이다. 김영삼(6%), 김대중(24%), 이명박(23%), 박근혜(5%)[3] 정렬 순서는 지지율 순. 전 보건복지부 장관 유시민은 중도 사퇴.[4] 손학규는 경기도지사였을 때 노무현을 '경제를 포기한 대통령'(일명 '경포대') 매도하여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는데, 이는 '나는 대기업들을 경기도에 유치하여 경기도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였는데, 노무현은 경제 분야에서 한 게 없다'라는 인식에서 나온 발언이라고 해석된다.[5] 이이제이의 만화 한국현대사에서는 당시의 박근혜를 한나라당의 '예수 그네스도'로 묘사한다.[6] 13대 대선 직전에 일어난 북한의 KAL기 테러도 비슷한 효과를 냈다. 민간인인 김대중이나 김영삼보다는 군 장성 출신의 노태우가 국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에 더 적합하다는 인식이 퍼져 노태우가 승리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7] 병역의무를 진다는 것 뿐만 아니라, 남성이 여성보다 돌발 상황에 있어서 더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대응할 것이라는 사회적 고정관념 또한 일정 부분 작용하였다.[8] 미국 공화당에서 후보를 선출하는 방식도 전통적으로 이런 식이다. 어차피 보수층들은 공화당을 지지할 것이니, 보수층에게만 어필하는 강경 보수 성향의 후보보다는, 중도표도 끌고 올 수 있는 온건 보수 성향의 후보를 내보내야 한다는 것이다.[9] 박근혜는 당시 당 대표만을 역임해서 경제 운영에 대한 능력을 보여줄 기회가 없었다.[10] 7% 경제성장률, 4만 달러 국민소득, 7대 경제 강국[11] 세금을 줄이고, 규제를 풀고, 법질서를 세우자는 신자유주의적인 경제 정책이다. 당시 친박이었던 유승민이 기획했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실제로 줄푸세를 입안한 사람은 김광두다.[12] 기호 5번 고진화 후보는 중도 사퇴했다.[13] 그러나 노무현과의 관계는 끝이 개운치 못했는데, "나와 정부에 참여한 사람들이 다 왕따가 됐다. 결과적으로 실패한 인사였다"라는 악평을 내리며 사실상 둘은 결별한 사이였다.[14] 노무현 대통령이 유력 주자들을 내각에 입각시키면서 통일부와 보건복지부를 제안했는데, 당시 대북정책이 온건 기조였던 데다가 북한도 제2연평해전 이후로 딱히 사고를 치지 않았고(핵실험 이전이었다.) 해서 통일부 장관의 정치적 위상이 훨씬 높았기에 두 유력 정치인이 충돌했던 것. 결국 정동영이 이겨서 통일부 장관을, 김근태가 보건복지부 장관을 맡았다. 참고로 2016년 복지 문제가 강조되면서 보건복지부의 위상이 더 높아진 때도 생겼으나 2018년 현재는 남북관계 개선의 조짐을 보이고 있는 상황이라 다시 통일부의 위상이 서서히 올라가고 있는 상황이다.[15] 정확히는 정동영이 17대 총선/4회 지선 때 두 번이나 사퇴하면서 비대위원장을 맡기는 했었다.[16] 한나라당에선 분명 인지도, 지지율 등등 다 밀려서 탈당했지만 한나라당의 제3후보가 바로 범여권 정당의 유력후보가 될 지경이었다.(...)[17] 참고로 경선 과정 TV토론에서 한명숙은 대리모를 '''아이 대신 키워주는 사람'''으로 해석하고, 유시민은 멧돼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특전사를 투입하겠다고 말해 일반인들의 웃음과 범여권 지지자들의 한숨을 자아냈다.(...) 특히나 유시민은 지고나서는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문국현을 지지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그래도 대선을 40여일 앞두고는 다시 정동영 지지를 선언하며 대선 캠프에 합류했다. 하지만 유시민을 따라 문국현을 지지한 김영춘은 끝까지 창조한국당에 잔류하였고 결국 2012년까지 당을 떠나 돌아오지 않게 된다(...).[18] 손학규는 어떻게든 소장파들을 동반탈당시키려고 노력했지만 무위로 돌아갔다. 남경필, 원희룡 등이 대표적으로 이들은 손학규가 나가고 양강구도가 되면서 이명박을 지지하게 된다.[19] 그 외에 손학규가 특히 동반탈당을 위해 강력히 권유했던 워싱턴 동지인 홍준표는 어쨌든 당은 지켜야 한다, 탈당은 안된다며 고사했다. 결국 손학규와 함께 한나라당을 탈당한 무게감있는 정치인은 전무했다. 후일 3선 중진의원이 되는 이찬열이 있긴 한데, 이때 당시엔 당협위원장과 싸우고 나와서 무게감 하나 없는 전직 도의원에 불과했다.[20] 이해찬은 더불어민주당, 손학규는 바른미래당, 정동영은 민주평화당 [21] 한명숙 후보는 국민경선 후보였으나 경선 시작 직전인 9월 14일에 이해찬 후보 지지를 하며 사퇴를 했다.[22] 이해찬 후보를 지지하며 9월 15일에 사퇴[23] 국민의 정부가 이한동 총리의 후임 총리로 지명하였으나 각종 논란 끝에 정식 임명으로는 이어지지 못 함.[24] 관료 출신의 초선의원.[25] 이낙연이나 박주선은 당시에는 대권주자급 중량감은 없었다.[26] 게다가 조순형은 탄핵의 선두에 섰다가 새천년민주당을 말아먹은 이미지가 컸고 김민석은 16대 대선 당시의 어설픈 행보로 인해 철새이미지가 상당히 컸다. 16대 대선으로부터 2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김민석의 이미지는 여전히 친문지지자들에게 부정적인 편.[27] 여담으로 당시 "살림살이 나아지셨습니까?"라는 유행어(?)를 만들었다.[28]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 후보로 부산 부산진 갑에서 당선된 그 사람 맞다. 단 이 시절에는 서울 지역구였다.[29] 김영춘, 정범구는 18대 총선을 앞두고 문국현과 다시 정치적 결별을 하게 된다.[30] 그동안 보수권인 신한국당에 있었지만, 김대중 정부 이후 친여권적 행보를 보였다. [31] 상술했듯이 신국환과 이인제가 여기에 불복하고 탈당해서 민주당에 들어간 것이다.[32] 2016년 새누리당 원내대표[33] 대체적으로 대선에서는 수도권이 민주진영의 손을 들어주는 일이 많았지만, 당시엔 수도권마저 이명박이 압도적인 지지율을 수성하고 있는 상황이었다.[34] 2002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박근혜는 당을 탈당하여 신당을 창당하는 행보를 보였고 결국 대선을 앞두고 다시 한나라당에 복당한다.[35] 하지만 출마하지 않은 후보를 대결구도에 낄 경우 지지율에 거품이 많다는 사실도 감안해야 하고, 실제로도 이회창의 출마 직후 대부분 빠져버려 이회창은 3위로 밀려나게 된다.[36] 여담으로 나경원 의원의 이명박을 실드치려던 목적으로 주어는 없다라는 발언이 논란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홍준표의 "식사하셨어요?"도 이 시기의 일.[37] 민주당은 이후에도 계속 이런 네거티브가 우선시된 전략을 고수했다가, 2010년 지방선거를 빼면 거의 번번히 졌다. 전문가인 손혜원을 영입하고서 제대로 된 홍보전략이 나왔다.[38] 후일 한겨레가 추적 취재해보니, 이 찬조연설을 한 청년은 한나라당으로부터 여러 일자리를 제안받았으나 비교적 괜찮다고 할만한 일자리는 없었고, 이후 어떻게든 일자리를 찾아보겠다며 집을 떠났다고 한다. 찬조연설을 해줬다고 해서 한나라당이 꼭 번듯한 일자리를 제공해야 할 의무는 '''전혀 없기에''' 문제될 일은 아니지만 당사자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이용당했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해당 기사 참조.[39] 권영길은 당시 의석 9석의 민주노동당 후보였고, 이인제는 의석 5석의 민주당 후보였다. 참고로 민주당은 상술하다시피 의원이 대거 탈당하는 촌극에도 불구하고 간신히 5석을 유지할 수 있었는데, 만일 더 적은 의석이었더라면 소수점까지 곤두박질 친 지지율로 인해 군소후보로 전락할 일이었다.(...)[40] KBS-MBC 이명박 50.3%, 정동영 26.0%, 이회창 13.5%, SBS 이명박 51.3%, 정동영 25.0%, 이회창 13.8%, YTN 이명박 49.0%, 정동영 25.3%, 이회창 12.7%, 한국갤럽 이명박 51.3%, 정동영 25.1%, 이회창 13.5%.[41] 출마비용 전액 반환 커트라인은 유효 득표수의 15%이다.[42] 이회창 본인은 150억원이상을 대선출마를 위해서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게다가 이회창은 반 년 뒤에 이어지는 18대 총선에도 출마하는 바람에 당선된 직후에는 부채 120억원을 재산신고하기도 했을 정도.[43] 무소속 역대 최다 득표율은 조봉암이다.[44] 많은 사람들이 빨리 개표되는 건 노년층이 많고 늦게 개표되는 건 젊은층이 많다고 오해하고 있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이런 요지의 발언을 한 사람한테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공직선거법 상 허위사실유포죄에 해당할 수 있다며 발언자제를 요청한 적이 있다. 다만 이런 오해는 자유한국당계(농촌, 구도심)와 더불어민주당계(신도시)가 우위를 보이는 지역이 다르기 때문이다.[45] 사실 SBS는 5년 전에도 저랬다.[46] 당시 17대 국회 후반기 부의장이자 당 상임고문이었던 이용희의 영향력이 상당히 강했기 때문에 보은ㆍ옥천은 보기 드문 여당 우세지역이었다.[47] 제19대 대통령 선거에서 오영국 후보로 갱신되기 전까지 역대 대선 최저 득표율이었다.[48] 제6공화국 출범 이후 '''서울지역 최고 득표율'''이자 '''2위와의 최다표차'''[49] 13대 대통령 선거 2위 김영삼 : 28%, 14대 대통령 선거 2위 김대중: 33.8%, 15대 대통령 선거 2위 이회창: 38.7%, 16대 대통령 선거 2위 이회창: 46.6%[50] 이 때 홍준표도 서울특별시, 인천광역시, 대전광역시, 경기도, 제주특별자치도에서는 3위 안철수에게도 밀리며 3위로 처졌고 전라북도, 전라남도에선 심상정에게도 밀려서 4위, 심지어 광주광역시에서는 유승민에게도 밀리며 5위로 처졌다. 특히 텃밭인 대구광역시와 경상북도에서 50%도 못 받았으며, 경상남도에선 겨우 만여표 차 신승, 부산광역시, 울산광역시는 문재인에게 헌납해야 했다.[51] 박근혜 탄핵으로 인해 조기에 치러진 2017년 19대 대선에선 1,2위간 표차 등 해당 선거의 압도적인 기록을 갱신하던 마당에서 문재인도 이명박이 세운 서울지역 최다 표차 기록만큼은 갱신하지 못했을 정도였다.[52] 물론 포항은 단순히 다른 경북 지역과 달리 박태준의 영향력이 막강하여, 박태준이 DJP연합에 참여할 당시에는 자유민주연합=민주당에 대한 지지도 쎈 편이었으며, 현재 보수 정치인 계보이지만 과거 민주당 출신인 이기택. 김무성의 영향력도 있었다.[53] 서울특별시 등 수도권에서도 정동영후보가 이명박후보에 무려 25%P가 넘는 차이로 완패했고 대전광역시 충남지역과 경상도 지역에서는 이회창 후보에게도 밀려 3위로 쳐졌기 때문에 정 후보가 이명박 후보에 무려 22.6%P차, 530만표차로 밀리는 성적을 거두었다[54] 서울시장이던 이명박은 참여정부가 추진하던 행정수도 계획을 맹렬히 반대했기에 충청권에서 비토정서가 있었다.[55] 더 심각한 것은, 17대 대선 당시 정치불신 현상을 보인 20대들이었던 현 3040대들도 '''90년대생, 00년대생 개새끼론'''을 펼치는 것이다. [56] 이 중 하나의 이유는 '''노무현에게 속죄하기 위해서''' 인데, 현 20대들은 이해할 수 없는 절대왕정국가적 사상이겠지만, 현 3040대들은 권위주의 교육의 막차 세대라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인이라면 신격화라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경향이 아직도 센 편이다. [57] 단 대학원은 서울대학교 출신.[58] 10년 후에 가장 많은 후보가 출마한 제19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서울대학교 출신이 안철수(의학과), 유승민(경제학과), 심상정(사회교육과)까지 총 3명이고, 고려대학교 출신이 홍준표(법학과), 김선동(물리학과, 단 3학년에 제적되어 졸업하지는 못함)의 2명, 연세대학교 출신이 윤홍식(철학과) 1명으로 총 6명이다. 참고로 당선자인 문재인은 경희대학교 출신이다.[59] 영남 이명박, 호남 정동영. 그리고 충남 일부지역들은 이회창이 우세했는데 이 때문에 개표 초반에는 이회창 후보가 잠깐 충남 1위를 달리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