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호(기자)

 



'''이상호
고발뉴스 대표기자
'''
'''이름'''
이상호
'''구독자'''
40.8만명[1]
'''총 조회수'''
107,994,894회[2]
'''채널 개설일'''
2012년 6월 30일
'''링크'''

1. 개요
2. 생애
3. 사건사고 및 논란
3.1. 국산 방탄헬멧의 성능에 대한 의혹 제기
3.2. 세월호 사고 당시 활동
3.3. 영화 '다이빙 벨' 논란
3.5. 젝스키스 관련 DSP미디어 비리 취재
3.6. 삼성 X파일 관련 폭로
3.7. 김광석 다큐 영화 제작 및 서해순에 대한 연쇄살인 의혹 제기
3.8. 윤지오 사건 모금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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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MBC 출신 프리랜서 언론인이다. 서울 영일고등학교[3]연세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1995년에 문화방송 공채 기자로 입사했다. 문화방송 기자로 있을 당시 탐사전문기자로 활동했고 MBC 퇴사 후 현재는 GO발뉴스 라는 탐사보도 전문 인터넷방송의 진행자로 활동하고 있다.

2. 생애


  • 대학시절의 삶이 의외로 기자가 된 이후의 삶만큼 파란만장했다. 87년 6월 항쟁의 희생자 이한열 열사의 1년 직속후배이며 1학년 과대표였어서, 이한열(당시 연세대 경영학과 2학년) 열사가 최루탄에 습격당했을 때 바로 근처에서 시위하던 무리였다고 한다. 그 사건이 나기 직전에 2학년 과대표 이한열이 1학년 과대표 이상호에게 '내일부터 일반 시민들도 많이 나올 테니, 오늘까지는 우리(학생들)만으로 제대로 해 보자'고 시위에 데리고 갔다고 한다. 종로학원에서 같이 재수를 하고 연세대에 같이 입학한 강모씨에 의하면 얼떨결에 과대를 맡게 되었다고 한다.
  • 그뿐만 아니라 어릴때 서예를 하면서 원래부터 예술가가 꿈이어서, 90년대 초반에 연예인이 되려고 한 적도 있었다.[4] 연예기획사 오디션도 봤다가 떨어지면서 포기했었는데, 이후 대학원에 들어가서 언론인이 되겠다고 결심하였다. 하지만 언론고시를 보는데 자꾸 떨어지고, 특정 신문사 시험에서는 초반 과정을 다 합격해서 인턴까지 하고 최종면접에 갔는데, 거기서 떨어지는 바람에 절망감과 더불어 너무 분노하는 상태까지 갔다고 한다.
  • 그러다가 신문에서 우연히 본 것이 KBS 슈퍼탤런트 선발대회였고, 거기 나온 내용 중에 합격하면 탤런트 활동 뿐만 아니라 '토크쇼 사회자'도 시켜준다는[5] 내용이 있어서, 그걸 보고 다시 과거의 꿈도 떠오르고 욱하는 마음에 지원했다고 한다. 그런데 정말 끼가 있는게 맞았는지 1만여명의 지원자 중 최종 본선 40명까지 들었다고 한다. 당시 합숙때 연기 배우는 것도 좋고 자신과 잘 맞는다고 느끼고[6] 주변 평가도 좋았는데, 중간에 동기들끼리 대화하면서 "내가 사실 연출을 공부하다가 배우가 되려고 마음이 바뀌어서 온 거다"고 허세를 부리자 고3이던 차태현이 연기지도를 해달라고 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최종 수상자 8명[7] 안에 들지 못해, 꿈이 좌절되자 더 욱해서 뒷풀이에서 KBS 간부들에게 'KBS 앞으로 두고보자'고 깽판[8]을 치고 나왔다고..[9] 하지만 그때 생긴 연예계 인맥[10]으로 기자가 된 이후에도 연예계 비리 관련 취재에 도움을 받아 많은 취재를 했었다고 한다.
  • 문화방송 기자로 있을 당시 탐사전문기자로 활동했고 MBC 퇴사 후 현재는 GO발뉴스 라는 탐사보도 전문 인터넷방송의 진행자로도 활동 중이다.
  • 변희재로부터 고발당했다.[11]
  • MBC 보도국 기자 시절에는 시사매거진 2580 등의 시사 프로그램에서 주로 활동하였으며, 연제협 MBC 출연 거부 사태 당시 취재를 맡은 것과 2002년 연예계 PR비 의혹 보도[12] 등을 비롯하여 2000년대 초반 연예계 취재를 활발하게 벌인 적도 있다.
  • 2005년 삼성 X파일 사건[13]을 보도하였는데, 이 때문에 통신비밀보호법위반 혐의로 2006년 징역 6월에 자격정지 1년의 유죄를 선고받았다.
  • 2011년 12월의 전두환 취재로 인해 2013년 1월 MBC에서 '명예 훼손 및 품위 유지 규정 위반'을 이유로 해고되었다. 이후 MBC를 상대로 해고무효확인소송을 제기하여 동년 11월 해고무효판결과 함께 사측에서 복직일까지 월 400만원을 지금하라는 판결을 받으며 승소했다. 이에 대해 MBC 사측에서는 항소를 제기했다. 그러나 워낙 이 사건의 여파 때문인지 가벼운 뇌경색 증상으로 잠시 탐사보도를 접었다.
  • 2015년 7월 9일 대법원은 이상호에게 최종 승소 판결했다. 그런데 이렇게 해고 당한 본인은 타인을 부당해고를 시켰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 2015년 8월 4일 MBC는 이상호에게 정직 6개월 징계처분을 내렸다. #
  • 2016년 5월 2일, 전국언론노동조합 MBC본부는 “이상호 기자가 사측 인사위원회로부터 정직 6개월 징계를 받았다”고 밝혔다. MBC는 이 기자가 정직 기간 동안 연출한 다큐멘터리 <대통령의 7시간>, 해고 기간 동안 연출한 세월호 참사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다이빙벨>을 문제삼은 것으로 알려졌다. 평소 소셜미디어 활동에서 회사의 공정성과 정치적 중립성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렸다는 점도 징계 사유로 들었다.#
  • 결국 진짜 MBC를 떠났다. 이상호는 5월 3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회사에 사의를 전달했다"며 "이제 국민의 기자가 되기 위해 두려운 가운데 MBC를 떠나 광야로 나서려 한다"고 밝혔다.#

3. 사건사고 및 논란



3.1. 국산 방탄헬멧의 성능에 대한 의혹 제기


MBC '신강균의 뉴스서비스 사실은'이란 프로그램에서 국산 방탄헬멧의 성능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였다. 2004년 8월 20일 국산 방탄헬멧에 대해 방탄실험을 한 결과 성능에 문제가 있다며 군 장비 납품절차의 투명성과 파병군인 안전도 우려된다는 보도를 한 것이다.
하지만 국방부는 이에 반발하여 8월 27일에 헬멧에 대한 실험을 별도로 실시했고, 이 결과를 토대로 YTN은 “우리 군이 개발한 신형 헬멧의 방탄성능에 문제가 있다는 일부 언론의 보도와 관련, 국방부는 방탄 성능에 문제가 없다는 반박자료를 내고 방탄 실험장면을 언론에 공개했다”고 보도했다.
그러자 이상호는 '신강균의 뉴스서비스 사실은'에서 국방부가 미군에 납품하려던 불량 헬멧을 미군 헬멧인 것처럼 조작했다고 주장했는데, 이에 대해 YTN 돌발뉴스은 국방부 관계자가 "이것은 미군에 납품되는 것과는 다른 것"이라고 분명히 밝혔는데도 MBC 측이 이 말을 편집과정에서 생략해 마치 ''미군 헬멧도 이렇게 심하게 함몰됐다''고 국방부가 속인 것처럼 보도했다고 밝혔다.
그러자 이상호는 당시 탄속이나 충격량 계측장치도 없는 목동 실탄 사격장에 가서 실험해보자면서 "MBC가 쏜 총알로 해야지..." 라는 말을 했고, 이때문에 밀덕들에게도 대차게 까이고 말았다.
결국 해당 프로그램은 진행자 신강균과 이상호가 SBS의 모기업인 태영건설로부터 핸드백 뇌물을 받은 사건[14]과 맞물리면서 스스로 종영됐는데, 이상호는 핸드백을 4일 동안 들고 있다가 다시 반납했다. 그 직후 삼성 X파일 사건의 취재를 준비하게 된다. 한겨레 기사 참조.]

3.2. 세월호 사고 당시 활동


2014년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때 직접 발로 뛰며 취재하는 모습을 보여줬다.그 중에는

하지만 취재 및 보도라는 기자 본연의 임무에서 벗어나서 사건 자체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모양새를 보이면서 또 한 번 논란의 중심에 섰다. 이주영 해양수산부 장관, 김석균 해양경찰청 청장과 실종자 가족과의 면담 진행 중에 '사상 최대의 구조작전'이라며, 연합뉴스 홍창진 기자의#에 매우 격하게 분노하면서 "넌 내 후배였으면 죽었어. 이 XX야. 연합뉴스! 기자 이 개XX야! 니가 기자야?"라고 발언하였다.

이후 욕설은 너무했다는 지적을 수용하여 사과는 하였으나, 연합뉴스측에선 법적 대응에 나서겠다고 밝혔고 이상호는 "추가 사과는 없으며 소송을 받아들이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 욕설의 대상이었던 연합뉴스 기자는 이후 비판 여론이 거세지자 블로그를 통해 "여러분도 기자 시키면 저처럼 할 거잖아요"라는 해명문을 올렸다.
하지만 이후 이상호의 뇌경색이 재발하였다는 것이 알려지고, 진중권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걱정을 사면서 연합뉴스의 소송에 대한 비판 여론이 일었다. 결국 연합 뉴스에서 내부적으로 소송을 준비한 적이 없다고 발을 빼면서 소송 문제는 일단락 되었다. 이상호 본인은 증세가 경미한 것으로 밝혀지면서 다시 중계를 재개하였다.
이런 논란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속시원한 해결책도 구조 현황도 내놓지 못한 사고 수습의 직접 해당관청인 해수부 장관과 해경 청장을 상대로 끈질긴 추궁 끝에 추후 구조작업에 대해 약속을 받아내기도 하여 당시 실종자 가족들 사이에서 크게 신뢰를 얻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그가 보여준 모습이 제3자로서 정상적인 취재과정이 아니라 사건 자체에 직접 개입하는 모양새로 비춰지면서 그에 대한 비판 여론도 고개를 들게 된다.
게다가 여기서도 욕설 논란 이외에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는데, 바로 "잠수부는 다쳐도 된다. 천추의 한이 남으면 안 된다" 라는 말을 한 것으로, 발언 당시 지지부진한 구조작업 때문에 큰 비난을 받지 않았으나, 며칠 뒤에 정말로 민간 잠수사 중에 사망자가 나오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이 발언이 도마에 오르게 됐다.*
그리고 그가 주장하던 다이빙 벨 투입이 아무런 성과없이 철수하게 되면서 논란을 일으키고 민간 잠수부 사망이 뒤를 잇자 진도 팽목항 취재 현장에서 실종자 가족에게 항의를 받고 쫓겨났다. ##
다이빙벨은 해경과 일반 민간 잠수사의 평균 30분도 되지 않는 잠수 시간에 반해 2시간 30분의 잠수 시간을 기록하였으나, 이는 사고현장인 맹골 수로에서 팽목항 쪽으로 상당히 떨어진 곳에서 시연한 것이다. 심지어 처음에는 팽목항 나루에서 실험하면서 마치 사고 현장에서도 투입 가능한 것처럼 선동했지만, 이를 지적당하자 유속이 느린 적당한 지점을 정해서 다이빙벨을 투입하는 영상을 촬영했다. 투입까지 3번의 시도 (이 중 한번은 장비불량)가 있었을 만큼 다이빙벨 안에서는 유속 영향을 적게 받는 것이 사실이지만 다이빙벨 설치 난이도가 높다는 점을 다소 간과한 것으로 보인다. 세월호 구조시 감압 챔버가 부족해서 구조 작업에 어려움을 겪었다는 내용의 뉴스가 보도되었다.
통영함에도 다이빙벨이 있으나 세월호 구조에 투입되지는 않았는데 이는 이종인 대표의 다이빙벨이 오픈된 wet bell인 반면, 통영함의 다이빙벨은 심해잠수용인 closed bell 타입인 점이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
다이빙벨 떡밥이 사그라들자 이번엔 세월호 침몰 원인이 폭침이라며 고발 방송을 올렸다.방송 내용을 요약하면 세월호 출항 전부터 폭파 협박이 있었고 세월호가 침몰하자 정부에서 일부러 구조에 늑장을 부렸다는 것인데, 너무 비약이 심한 황당한 이야기라 기사화도 거의 되지 못 하고 묻혔고, 사람들의 입으로만 퍼지고 있는 실정이다. 폭침설의 근거는 일단 침몰 당시 배 안의 학생들은 가스와 계란 냄새가 난다는 발언을 하였는데 이를 바탕으로 사제 폭탄의 재료로 쓰이는 부탄가스#s-2유황을 떠올리는 것이다. 구조작업을 지휘했으면서 동시에 구원파 장학생 출신으로 알려져 논란이 되었던 이용욱 전 해경 정보국장이 폭발물 전문가 출신이었다는 증언을 입수, 보도하면서 폭파 가능성에 대한 진지한 조사가 필요함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가스 냄새의 경우 조리시설에 있는 가스가 새어나온 것으로 보는 게 일반적이고, 전에 폭발물 전문가 출신이라는 점이 도대체 폭탄 테러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설명을 못 하고 있어 현재에 있어선 음모론 그 이상 그 이하도 되고 있지 못한 상태다. 그래서인지 정부에 비판적인 언론들마저도 이런 의혹은 올리고 있지 않다.
2016년 2월 12일, 자신의 SNS에 ‘대통령의 7시간’ 영상 일부를 공개했다. ‘대통령의 7시간’은 2014년 4월16일 세월호 침몰사고 당시 박근혜 대통령의 행적을 추적하는 다큐멘터리 영화다. 이 기자는 지난해 12월 자신의 트위터 계정을 통해 “다큐 영화 ‘대통령의 7시간’을 비밀리에 취재‧제작해왔다”고 밝힌 바 있다.#

3.3. 영화 '다이빙 벨' 논란


독립영화 감독으로 데뷔(...)해서 안해룡 감독과 함께 세월호 다이빙벨과 관련한 다큐멘터리 영화 다이빙벨을 찍었다. 세월호를 다룬 첫번째 다큐로서 의미가 있는 작품이었으나, 다이빙벨 투입논란을 일으켰던 이종인 알파잠수 대표는 사실 다이빙벨 투입후 희생자를 더 찾는 건 의미가 없다며 자진철수를 했던 인물이고, 다이빙벨이 성공했다는 것도 사실과 다르다는 견해가 많아서 당시 유족들 가운데 상당수는 다이빙벨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일각에선 방영 반대에 나서기도 했다.#1, #2 정치적 편향성을 가진 사람이, 그것도 해당 건과 직접 관련이 있는 인물이 만든 영화이기 때문에 매우 민감한 상황.
2014년 10월 2일 개막하는 제19회 부산국제영화제(BIFF)에 '다이빙벨'이 상영될 것으로 알려지자, 2014년 9월 24일 일반인 희생자 유족이 상영 중단을 촉구하기도 하였다. 단 1구의 주검도 수습하지 못해 유족들을 우롱하고 제품실험만 하는 데 그친 다이빙벨에 관하여 일방적인 주장만 담은 영화를 상영할 경우, 세월호 침몰의 진상을 밝히는 데 오히려 도움이 안 된다는 등이 이유였다. #
이에 '옳다꾸나(?)'한 서병수 부산시장도 당시 부산국제영화제 주무국인 부산시 문화체육관광국에 “<다이빙벨>의 상영이 부적절하다. 상영 중단을 검토해라”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주무부서인 영상문화산업과의 간부가 이용관 집행위원장한테 전화를 걸어 상영 중단을 요청했다.
하지만 집행위원회는 곤혹스러워하면서도 <다이빙벨> 상영을 계획대로 진행하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선정위원회를 열어 선정한 개막·폐막작 등 313편의 작품을 이미 기자회견 등을 통해 공개적으로 발표한 상태에서 갑자기 특정 작품 상영을 중단하면, 지난 18년 동안 지켜온 부산국제영화제의 전통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셈이라는 것이다.# 그 외에 영화의 중립성이나 완성도 부족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세월호를 다룬 첫번째 다큐인 이상, 그러한 영화를 상영하는 것이 의미가 있다는 점도 함께 고려되었다.
결국 부산영화제는 서병수 시장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고 '다이빙벨'의 상영을 강행했다. 그러자 2015년 1월 감사원은 부산영화제를 감사했고, 부산시는 3개월 후 이용관 부산영화제 전 집행위원장과 전·현직 사무국장을 수천만원 규모의 횡령 및 배임 혐의로 고발했다. 그리고 2015년 2월 25일 열린 정기총회에서 이용관 위원장의 임기는 끝났는데, 영화계에서는 이용관 전 위원장이 "정치 보복으로 사실상 해촉된 것이나 다름없다"고 보았다.#
그 후 2016년 7월 31일, 베를린 영화제에 상영하기로 되었던 '다이빙 벨'의 상영이 취소되었다. 그런데 이 문제를 두고 이상호는 한국 영화계가 베를린 영화제 측에 정치적인 외압을 넣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하였고, 김동호 부산국제영화제 이사장에게 "니가 막은 거지?"라며 SNS 상에서 폭언을 퍼부었다. 그런데 원래 김동호 이사장은 정치권의 압력에 맞서 영화인들의 자유를 지키려고 싸웠던 인물이었기 때문에 이상호의 폭언에 대해 영화계 인사들은 크게 반발하였다.#

3.4. 서부전선 포격 사건 관련 SNS


[image]
과거 총풍사건을 들먹이며 아니면 말고 식으로 떠벌렸다. 여기에 낚인 네티즌들이 음모론을 제기하고 있다.##

3.5. 젝스키스 관련 DSP미디어 비리 취재


2000년에 젝스키스가 해체하자 강제해체 당했다는 루머가 돌았고, 이에 팬들은 매우 격분했다.[15] 대표적인 예가 팬들이 조영구 차를 사장 차로 오인하고 반파시킨 사건일 것이다.기사, 기사 이 사건은 팬클럽에서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이호연 사장이 1100만원 수리비를 전부 보상함으로써 마무리됐다.기사
이런 팬들의 성화는 DSP미디어의 비리를 폭로한다는 투서를 보내는데 까지 발전했고, 이를 바탕으로 이상호가 MBC의 시사프로그램 '피자의 아침'이라는 아침방송에서 5부에 걸쳐 방송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이호연 사장은 경찰조사를 받았다. 당시 경찰조사를 받은 이유는 탈세를 위한 음반판매량 축소와 팬클럽비 유용 등이다.# 그러나 경찰조사 결과는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그 위에 쓰여진 젝키 팬의 글은 검사와 경찰 관계에 관한 기본 상식 조차 없고, 그저 음모론으로 몰고 가고 있어 신경쓸 부분이 아니라고 보인다.) 이 점에서 당시 이상호 기자 보도의 신빙성에 의심이 강하게 든다. 그 보도 내용대로 라면 처벌이 당연히 수준이기 때문이다. 이상호는 후일담에서, 무혐의 처분을 받았지만 탈세와 관련해선 나중에 수억원대의 추징금은 물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후 2001년 7월 시사매거진 2580에서 가요계 전반의 실태를 담은 보도를 내보내게 된다.
왜곡 보도가 단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 해당 방송을 보면 다음과 같이 내보내고 있다. "젝스키스 멤버 부모: 콘서트로 돈을 받은 적이 없다. 99년 11월 이후 (9개월 간) 93만 원 받았고, 그 후로 한 푼도 못 받았다."이상호 기자 홈페이지 원문 (참고로 콘서트로 돈을 받은 적이 없다는 부분도, 전술한 경찰 조사 결과 글에서 보듯이 무혐의 처분이 나왔다)
이를 근거로 젝스키스가 한달에 100만원 정도 벌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위 내용의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위 발언은 2001년 7월 시점에 한 것이 아니고, 과거 2000년도 피자의 아침 취재 당시 젝키 부모가 이런 발언을 했었다는 내용을 증거자료로 쓴 것이다. 그런데 인용하려면 제대로 인용해야지 '''의도적으로 "앨범판매 대금"이란 단어를 빼서 내용을 왜곡하고 있다.''' 저렇게 써놓으면 누가봐도 "99년 11월 이후로는 단돈 93만원만 벌었구나. 개쓰레기 소속사네"라고 생각할 것이 아닌가? 이는 사실이 아니다. 피자의 아침 원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젝스키스 멤버 부모: 일단은 콘서트로 돈을 받은적이 없다는 얘기구요. 그리고 수당식으로 앨범판매 대금은 작년 11월 이후 93만원 이후에 받지 못했다. 그리고 대만에 내다 판 CD판매대금도 한푼도 못받았다." 즉 '''앨범판매대금 항목에 관해서 99년 11월 이후 93만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젝키의 마지막 앨범인 4집은 99년 9월 9일에 발매됐다.''' 발매하고 3달 뒤면 앨범은 이미 팔릴대로 팔린 상태고 증가분은 거의 없을 상황이다.[16]

99년 11월 이후 상황에 대해서 훗날 밝혀진 바를 보면 다음과 같다. 2016년 무한도전에서 이재진이 말한 바에 따르면, 2000년 5월 해체 당시 멤버 부모들이 모두 소속사에 찾아와 정산을 받아갔다고 한다. 해체 몇개월 후에는 경찰 조사 과정에서 부모들에게 수천만원씩 전달되기도 했다.[17] 99년 11월 이후 단돈 93만원을 받았다는 보도는 사실무근인 것이다(나머지 정산에 관한 내용은 젝스키스/정산 문제 문서 참조).
사실 2001년 시사매거진 2580 방송 뿐만 아니라 2000년 피자의 아침 방송에서도 왜곡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보인다. 왜냐하면 "앨범판매대금"이란 주어를 빼고서 "작년 11월에 93만원 받고 그 이후로 한 푼도 못 받았다"고 방송 화면을 내보냈기 때문이다.http://imgur.com/a/1lKQ6 정상적으로 전달하려면 앨범판매대금에 관해서 그렇게 받았다고 문장을 작성해야 할 것이다. 추가로 마지막 정규 앨범이 99년 9월초에 나왔다는 점도 보도되어야 할 것이다.
이외 이상호의 저서 '이상호의 GO발 뉴스'를 보면 "젝스키스는 1년에 100만원을 벌었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젝스키스/DSP 관련 루머 문서에서 보듯이 이는 말도 안되는 소리다. 몇가지만 뽑아보자면, 2016년 11월 7일 SBS 꽃놀이패 방송에서 이재진은, '''데뷔하고 1년도 안되어서 1억5천5백만원하는 대신동 빌라를 부모님께 사드렸다'''고 말했다. #[18] 이재진은 2013년 3월 여성동아 인터뷰에서는 "젝스키스 데뷔 후 몇 개월 만에 부모님께 집을 사드리고도 남을 만큼 벌었으니까요"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사드리고 남은 금액도 있을 것이다. 데뷔 1년차 이후 3장의 앨범을 더 냈으며 그 중 커플이 최고 히트를 기록했으니, 1억 5천보다 훨씬 많이 벌었을 것이다. 또한 2015년 1월 27일 tvN 현장토크쇼 TAXI 방송에서 장수원은 당시 행사를 한번하면 멤버당 300만원을 받았다고 말했다. 강성훈은 당시 초상권으로 돈을 많이 벌었다고 밝혔다. 2000년 6월 16일 피자의 아침 방송내용을 보면, 소속사 측은 행사에 있어서는 멤버들에게 70%를 준다고 항변하고 있다. 15년 뒤의 장수원 발언과 맞춰보면 당시 회사가 사실을 말한 것이다. 참고로 이를 통해 당시의 젝스키스 1회 행사료를 계산해보면, 2570만원이다. 99년도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S.E.S.가 행사 1회당 1000만원을 받는다고 쓰고 있는데[19], 이보다 많은 액수다. 당시 대졸신입 월급 평균이 130만원 정도 할때이니, 2570만원은 굉장히 큰 액수다.[20]

3.6. 삼성 X파일 관련 폭로


2017년 1월 17일에 이상호는 본인의 기사매체인 고발뉴스에서 문재인이 2005년에 삼성 X파일 관련 특검을 반대했고 이에 관한 해명을 요구했으나 여러 차례 무시했다는 고발을 했다. 오히려 당시엔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특검을 요구했지만 문재인이 시기상조라고 이를 무마시켰다고 하고 박근혜 정부 들어서 문재인이 말하는 재벌 개혁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영상
영상에선 노회찬 의원의 이름까지 나오면서 본인만의 주장이 아님을 어필했다. 조기숙 교수는 이 일에 대해 전화로 얘기를 나눴지만 이상호는 언론에 보도된 것이니 해명은 알아서 하란 식으로 발뺌했다고 한다.# 이에 대한 반발로 친노, 친문성향의 고발뉴스 후원자들이 후원을 철회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대선 후 맘마이스에서 이 일을 언급하며 '대한민국에 많은 기자가 있지만 문재인 후보를 지키기 위해 해고당한 사람은 아마 나 밖에 없을 것이다'란 주장을 하여 더욱 미운털이 박히게 되었다.

3.7. 김광석 다큐 영화 제작 및 서해순에 대한 연쇄살인 의혹 제기


과거 백지연의 피플 인사이드 프로그램에 나와서 완전한 증거가 부족하여 기사화 하지 못했지만 김광석이 자살한 게 아닌 타살로 추정한다고 폭탄 발언을 해서 한동안 난리가 났고 그동안 암암리에 떠돌던 김광석 타살설을 표면에 떠오르게 했다. 이상호와 김광석의 유족들은 김광석의 아내인 서해순을 김광석과 딸인 서연양을 살해한 범인으로 지목했고 이어진 미디어 매체 노출에서 서해순의 다소 감정적인 언행 때문에 대중들은 서해순을 범인이라고 확신하며 경찰측의 재수사를 요구하게 된다.
김광석이 죽은 뒤 20년 동안 계속 취재를 하다가 사망 의혹에 관한 다큐 영화를 제작하여 2016년 제20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일어나, 김광석>이라는 가제로 상영하여 특별언급상을 수상했고 국내외 유수영화제에 공식 초청되며 주목 받았다. 2017년 5월 제70회 칸 국제영화제 마켓에서 일부가 공개돼 해외 영화관계자들의 이목을 끌기도 했다. 2017년 8월말에 <김광석 1996 01 06> 이란 제목으로 전국 개봉한다고 한다. 본인은 각종 고소도 각오하고 있다고 밝힌 만큼 어떤 파장이 일어날지 미지수다.
김광석 자살에 대한 논란은 김광석 의문사 의혹을 참고.
그러나 경찰 조사 결과, 결국 서해순은 '''무혐의'''로 처리되었고, 서해순의 변호인인 박훈 변호사는 유족 측의 근거없는 의심을 이상호가 부풀려서 유포하였다고 비난하였으며 서해순을 범인으로 몰아간 이상호와 언론 매체, 네티즌들에 대한 비난이 이어지고 있다. 한편 서해순은 무고죄 등의 죄목으로 이상호를 고발했고, 다큐영화를 통해 서해순을 범인으로 지목하는 영상물을 만들고 서해순을 범인으로 몰아간 이상호는 미디어 권력을 동원하여 한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고 여론을 선동 했다는 비난에 직면해있다. 하지만 여전히 국민적 의혹에 비춰 수사가 미흡하지 않았냐고 말한다거나,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는둥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서해순측 박훈 변호사는 11월 14일에 김광석의 친형 김광복과 이상호를 무고 및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하였고 경찰은 고소사건 관련하여 수사에 나섰다.
2018년 7월 3일 서울지방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는 “이상호 기자를 형법상 명예훼손 및 정보통신망법상 명예훼손 등 혐의로 불구속 기소하는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한다”고 밝혔다. 이에 이상호는 경찰의 수사결과에 대해 "실망스럽다"는 입장을 밝혔다.
2019년 5월 29일 서울서부지법은 서해순측이 이상호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민사) 소송의 1심 판결에서 이상호가 서해순에게 5,000만원(이상호가 2,000만원, 이상호와 고발뉴스가 공동으로 3,0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시했다.
2020년 1월 29일, 서울고등법원은 위 사건의 항소심 판결에서 이상호가 서해순에게 1억 원(이상호 단독으로 4,000만 원, 이상호와 고발뉴스가 공동으로 6,000만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하였다. 항소심 재판부는 기사 내용의 허위성, 서해순의 정신적 고통의 정도를 1심보다 더 크게 판단한다면서 배상금액을 2배로 늘렸다.
5월 28일, 대법원은 위 항소심 판결에 대한 상고를 심리불속행[21]하면서 항소심 판결을 확정했다. 이상호와 고발뉴스는 항소심 판결에서의 1억원 뿐만 아니라, 지연 이자인 2000만원도 서해순에게 지급해야 한다.

3.8. 윤지오 사건 모금 관련


2019년 3월 14일 윤지오는 이상호 고발뉴스 유튜브 뉴스방 생방송에 출연하여 장자연 문건과 국정원 개입 의혹 밝히면서 장자연 사건 국정원 개입 의혹 가능성에 힘을 실어주었다. 하지만 윤지오가 거짓 증언 논란이 나오면서 윤지오를 출연시킨 이상호에 대한 책임론도 나오고 있다.
그로부터 반년이 지나 윤지오의 각종 의혹에 대한 수많은 증거들이 나온 2019년 10월에도 여전히 정신 못 차리고 유튜브 방송에 나와서 "메세지가 안 되니까 메신저를 공격한다"며 언론보도 행태를 공격하는 등 면피성 발언을 하고 있다. 반대로 윤지오는 '모금은 본인이 원해서 한 것이 아니라 이상호 기자가 부추겨서 한 일'이라며 책임전가를 하고 있는 상황이다.

[1] 2020. 2. 10.[2] 2020. 2. 10.[3] 김건모와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동창이라고 한다.김건모는 화곡고등학교를 졸업했다.[4] 실제로 끼가 상당해서, 악기도 좀 다루고 노래도 일반인치고 상당히 잘 한다고 한다.[5] 나중에 알고보니 남자는 해당이 없고 여자 탤런트들을 KBS 토크쇼 보조진행자로 출연시켜준다는 뜻이었다고 한다.[6] 괌에서 합숙하는 코스도 있었다고 한다. 거기서 수영복 심사 등도 했다고.[7] 당시 수상자는 대상 박상아, 금상은 송윤아/임세미/김광필, 은상은 차태현/정혜정, 동상은 이형철/이효진이었다.[8] 진짜 화났던 이유는 본선 진행 후반에 피디를 비롯한 관계자 몇몇에게 본인이 3등안에 확실히 들거 같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그전 합숙과정에서 주최측에서 여성 동기들만 대회 협찬사 간부들 술자리에 접대를 시키려고 데려가는 걸 보기도 하고 동기들 사이에 로비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소문이 파다해서 약간 의심을 했었는데, 최종 결과가 나오자 그런 불합리한 로비의 영향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9] 상을 못받아서 KBS 전속 탤런트는 못 되었어도 40인 안에 들었더 경력이 생겼기 때문에 다른 기획사를 찾아 연예인이 되거나 할 여지는 꽤 있었지만(실제로 그런 사람들도 있었다) 연예계 비리에 눈을 뜬 이상호는 혐오감이 들어 포기하기로 했었다고 한다.[10] 특히 당시 40인까지 올라갔던 동기들 일부는 수십년이 지나도 어느 정도 서로 연락을 한다고 한다. 송윤아같은 경우는 20년이 지난 뒤에도 동기 중 한명이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자, 동기 전체에게 연락해서 돕자고 독려하고 본인이 가장 큰 돈을 내는 선행을 했다고 한다.[11] 여담이지만 변희재는 이상호를 사망유희 토론의 진행자로 데려오기도 했었다. 그러나 황장수 편을 끝으로 토론대결이 없어졌다.[12] 당시 같은 회사였던 은경표 PD 등 여러 사람들이 잡혀나가게 되며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여담으로 당시 제보자였던 가수 시후(본명 박지우)는 훗날 천인공노할 개쌍놈의 짓을 저질렀다.[13] 당시에는 이상호 X파일 또는 삼성그룹 X파일 사건이라고 불리웠다.[14] 태영건설의 흑역사 항목 참조.[15] 해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젝스키스/해체 문서 참조 바람. 훗날 멤버들이 밝힌 바에 따르면 강제로 해체당한 것은 아니다.[16] 해체 이후에 비정규 음반이 발매되긴 했다. 2000년 5월 31일 비정규 음반으로 고별앨범 블루노트가 발매됐고, 4곡을 제외하고는 기존의 곡들로 채운 앨범이다. 당시 86,900장이 팔렸다.[17] 부모 인터뷰에서는 콘서트 대금을 못 받았다고 하는데 이후 경찰조사 결과에서 무혐의가 나온 것을 보면, 해당 돈은 콘서트 대금 등의 항목이라고 보인다.[18] 98년도에 1억5천이면 강남에 집도 살 수 있었다.[19]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9092900209113001&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9-09-29&officeId=00020&pageNo=13&printNo=24313&publishType=00010 [20] 참고로 젝스키스의 총 활동기간은 햇수로 3년 1개월, 음반활동기간으로는 2년 정도로 짧았었다.[21] 쉽게 이야기해서 볼 것도 없이 사실 관계가 명백하므로 대법관이 심리하지 않겠단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