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용그룹

 


'''쌍용그룹'''
'''雙龍 | SSANGYONG GROUP'''
[image]
'''국가'''

'''정식 명칭'''
쌍용그룹
'''영문 명칭'''
Ssangyong Group
'''한문 명칭'''
雙龍
'''창립일'''
1939년 3월 15일
'''창업주'''
김성곤
'''유형'''
기업집단
'''모회사'''

'''상황'''
해체
'''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수표로 34(저동2가)
1. 개요
2. 기업정신
2.1. 1974~1989
2.2. 1989년 이후
3. 역사
3.1. 창업과 초기 성장기(1939 ~ 1975)
3.2. 김석원 체제(1975 ~ 1995)
3.3. 해체(1995 ~ 2002)
4. 역대 그룹임원
5. 계열사 목록
6. 산하 기관
7. 공익재단
8. 이모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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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62년 설립된 시멘트 업체인 쌍용양회공업을 모기업으로 하는 기업집단이었다.
이름인 '''쌍용'''은, 쌍용양회의 첫 공장인 영월공장의 소재지인 서면[1] 쌍용리에서 따왔다. 현재 태백선 쌍룡역이 있는 그 동네다.
주요 계열사는 쌍용양회, 쌍용레미콘, 쌍용기초소재, 한국기초소재, 쌍용로지스틱스, 대한시멘트[2]가 있다.
당시 홈페이지 도메인은 www.ssy.co.kr이었다.[3] 과거 주소였던 www.ssangyong.co.kr로도 접속이 가능하다.

2. 기업정신



2.1. 1974~1989


  • 사훈: 성실하고 정직하자, 창의를 발휘하고 노력하자

2.2. 1989년 이후


  • 기업이념: 신뢰, 혁신, 인화
  • 사가 <쌍용찬가>: 작사는 이은석, 작곡은 유병무가 맡았으며, 창립 50주년을 맞이했던 1989년 2월 10일에 제정되었다.
(1절) 온 세상에 펼쳐라 널리 펼쳐라
광활한 우주에 환히 비춰라
눈부시다 찬란하다 우리의 미래
(2절) 뛰는 가슴 안아라 힘껏 안아라
설레는 소리로 크게 외쳐라
높푸른 꿈덩이 황금빛 우리날
(후렴) 일하자 더욱 일하자 한없이 일하자
겨레 위해 나라 위해 인류를 위해
쌍용 쌍용 쌍~용 영원하라

3. 역사



3.1. 창업과 초기 성장기(1939 ~ 1975)


1939년 성곡 김성곤(1913 ~ 1975) 창업주가 경북 대구시에서 설립한 비누공장인 삼공유지합자회사를 모태로 했으며, 1948년 금성방직을 세워 면방직에 진출 후 고려화재 설립에도 참여해 금융업에 처음 손을 뻗었다. 1954년 연합신문과 동양통신을 인수해 언론사업을 시작했고, 1959년 학교법인 국민학원을 인수해 육영사업을 개시했다. 1962년 쌍용양회를 세워 '쌍용' 명칭을 쓰기 시작했으며 1967년에 태평방직과 금성방직을 대한농산에 팔았고, 같은 해 삼화제지와 금성해운을 세웠다. 1969년에 종합조정실을 발족해 그룹의 형태를 갖췄다.
김성곤 회장은 박정희 대통령과 절친한 사이였는데[4] 1965년 민주공화당 재정위원장을 맡아 재벌의 정치자금 모금을 담당하였다.[5] 김성곤 회장은 집권당 정치인(공화당 재정위원장) 겸 재벌총수(쌍용그룹 회장) 겸 언론사주(동양통신 사장)로 정계, 재계, 언론계를 아울러서 1971년까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그룹도 이 시기 급성장했다.[6] 1975년 김성곤 회장이 사망한 후 장남 김석원(1945 ~ )이 경영권을 승계하였다.

3.2. 김석원 체제(1975 ~ 1995)


1976년 쌍용중공업을 세우고 이듬해 쌍용종합건설을 세운 뒤 1976년 이란국영석유공사와 합작해 '한이석유'를 세웠고, 1983년에 효성그룹으로부터 효성증권(현 신한금융투자)을 인수하고 1986년에 동아자동차까지 인수했다. 1997년 외환위기 직전에는 계열사로 쌍용(무역업-현 GS글로벌), 쌍용자동차, 쌍용중공업(현 STX), 쌍용양회, 쌍용건설[7], 남광토건, 쌍용화재(현 흥국화재), 쌍용정유(현 에쓰오일), 쌍용투자증권(현 신한금융투자) 등을 거느린 총매출 25조원, 재계 순위 5~6위의 거대재벌이었다.

3.3. 해체(1995 ~ 2002)


그러나 문어발식 경영과 과도한 부채로 위기 요인이 계속 누적되어 오다가, 1997년 외환위기에 직격탄을 맞았다. 열혈 자동차 애호가였던 김석원 회장의 '''자동차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화근이었던 것으로 지적된다.[8]
김석원 회장은 1986년 동아자동차를 인수하였고, '''외국 자동차회사도 인수했다'''. 영국의 팬더 웨스트윈드라는 회사였는데, 1970년 후반에 이미 망해서 법정관리 중이던 것을 모피를 수출하던 진도그룹에서 1980년 인수하였다가 1987년 쌍용그룹에 넘긴 것이다. 쌍용은 아예 생산라인을 국내로 옮겨와 칼리스타라는 자동차를 만들었으나 1994년까지 '''단 78대만 판매되고 단종'''되었다.
사실 1997년 이전까지 쌍용자동차를 제외한 나머지 계열사들은 대부분 흑자였다. 시멘트, 정유, 제지 등 경기를 별로 타지 않는 업종이 중심이었기 때문. 그러나 '''쌍용자동차 한 회사의 적자가 그룹 나머지 계열사 전체 흑자의 몇 배였다.''' 회장의 과도한 관심에 따른 고급, 고가차 위주의 정책이 적자가 누적된 원인이라는 분석이 있다. 1990년대만 해도 소형차나 준중형차들이 한국 자동차 시장의 주류였는데, 쌍용자동차는 이 분야에선 전혀 힘을 못쓰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정작 김석원 회장은 금뱃지를 노리고 정치판을 기웃거리고 있었다.[9] 1996년 신한국당 공천을 받고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구 달성군 지역구에 출마해 당선되었으나, 전두환비자금 61억원을 사과상자에 담아 보관하고 있다가 들통이 나면서 큰 곤욕을 치렀다.[10] 이렇듯 최고경영자의 정치 외도와 각종 구설수로 힘든 사이에 경영실적은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김석원 회장은 결국 쌍용자동차를 포기하기로 결정하고, 당시 자동차산업 진출을 목전에 두고 있던 삼성그룹과 자동차업계 만년 3위였던 대우그룹에 매각을 제안하였으나, 삼성은 빚이 너무 많다면서 거절했고, 대우는 쌍용그룹의 위급한 상황을 감지하고 가격을 후려쳤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우물쭈물 하는 사이에 외환위기가 닥치면서 '''모든게 끝났다'''
김석원 회장은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11] 경영에만 집중하겠다고 선언했으나, 이미 '''늦어도 한참 늦은 상태'''였다. 결국 국내외 채권단들이 김석원 회장의 경영권을 박탈하고 직접 구조조정을 진행하면서, 쌍용그룹은 해체 수순을 밟게 되었다. 한 마디로 '''개인의 취미와 회사경영을 구분못한 무능한 재벌 2세''' 때문에 전체 그룹이 부실화 된 것이다. 2000년에는 모기업 쌍용양회에 일본 태평양시멘트 지분까지 유치하기도 했으나 2002년 워크아웃 후 사실상 해체 수순을 밟았다.
이후 김석원은 2004년 회사자산 310억원을 빼돌렸다가 구속됐으나, 2007년 2월 노무현 대통령 취임 4주년을 기념해 특별사면을 받고 친인척 및 옛 참모들과 함께 재기를 모색하다가 신정아 게이트에 연루되면서 다시 구설수에 올랐다. 2008년 7월에는 위장계열사 4곳에 부당지원한 혐의로 징역 4년을 받고 항소했지만 이듬해 항소심에서 징역 1년 6개월 및 집행유예 2년을, 2011년 서울고법으로부터 징역 2년 6개월 및 집행유예 4년, 사회봉사 200시간을 각각 선고받았다.
모기업이던 쌍용양회는 채권단이 최대 지분을 갖고 2대 주주인 일본 태평양시멘트가 경영권을 행사해 오다가, 채권단과 태평양시멘트가 2016년 한앤컴퍼니라는 사모펀드에 지분을 매각하였다.

4. 역대 그룹임원


  • 회장
    • 김성곤 (1939~1975)
    • 김석원 (1975~1995/1998~2000)
    • 김석준 (1995~1998)[12]
  • 부회장
    • 김채겸 (1990~1991)
    • 이승원 (1991~1993)
    • 김석준 (1991~1995)
    • 이주범 (1991~1996)
    • 우덕창 (1994~1997)
    • 김기호 (1997~1998)
  • 회장 비서실장
    • 김태문 (1980~1993)
    • 김영주 (1994~1995)
    • 성영소 (1995~1998)
  • 종합조정실장
    • 이승원 (1969~1976)
    • 진성섭 (1976~1979)
    • 우덕창 (1979~1980)
    • 장석환 (1980~1990)
    • 차형동 (1990~1993)
    • 김덕환 (1994~1998)
  • 구조조정본부장
    • 홍금표 (1998~2000)
    • 장기택 (2000)
    • 강복수 (2000~2002)

5. 계열사 목록


  • (주)쌍용 (현 GS글로벌): 구 금성산업-쌍용산업. 종합무역상사로 2002년 워크아웃을 받다가 2006년 미국 모건스탠리 PE를 거쳐 2009년 GS그룹에 매각됨.
  • 쌍용양회: 그룹의 핵심이었으나 2000년 일본 태평양시멘트에 매각되었다가 2016년 한앤컴퍼니라는 사모펀드에서 지분을 인수하였다.
    • 시멘트사업부문
    • 골재사업부문: 2009년 쌍용레미콘으로 분사됨.
  • 쌍용머티리얼 (현 유니온머티리얼): 2000년 쌍용양회의 신소재사업부문이 분사하여 설립되었으나, 이후 일본 태평양시멘트에 팔렸다가 2017년 3월 유니온에 인수되었다.
  • 쌍용자원개발: 2000년 일본 태평양시멘트에 세트로 팔렸다가 2017년 쌍용양회에 합병됨.
  • 오주개발: 레미콘 업체로, 1997년 정식편입 후 2002년 쌍용양회에 합병됨.
  • 우진산업: 1998년 오주개발에 합병됨.
  • (주)국민: 한동안 위장계열사였다가 1998년 정식편입 후 이듬해 오주개발에 합병됨.
  • 국민콘크리트공업: 2000년 일본 태평양시멘트에 매각된 후 2003년 청산됨.
  • 국민레미콘: 1999년 배조웅[13]에게 매각됨.
  • 대한양회공업: 옛 개풍그룹 계열사로, 1975년 쌍용양회에 합병됨.
  • 쌍용건설: 2006년 계열분리 후 2016년 기준 도급순위 23위의 대형 건설사로서, 고급 건축과 인프라 분야에서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다. 싱가포르의 그 유명한 마리나 베이 샌즈 호텔도 쌍용건설의 작품. 워크아웃을 거쳐 공적자금이 투입되어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가 최대주주가 되었는데, 캠코에서 계속 매각을 시도하다가 무산된 상태에서 자본이 완전잠식될 정도로 재무구조가 악화되어 2013년 2월 다시 워크아웃에 들어갔다가 #[14] 결국 2013년 12월 30일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법정관리 하에서 M&A가 추진되어 2014년 12월 두바이 투자청이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되고 # 2015년 3월 법정관리에서 벗어났다. 창업주 김성곤의 차남이자 김석원의 동생인 김석준 회장이 계속하여 회장직을 맡고 있기는 하나, 이는 오너로서 경영권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워크아웃 당시 채권단이나 새로운 대주주인 두바이투자청이 전문경영인으로서의 능력을 인정하였기 때문.#1 #2
  • 남광토건: 1947년 배정일 창업주(1919~1993)가 설립해 한때 업계 순위 10위권 안에 들었던 건설업체. 1986년 쌍용그룹에 인수되었고, 2003년 계열분리 후 사모펀드 몇 군데를 거쳐 2010년 대한전선에 인수되었다가 워크아웃을 거쳐 2013년 8월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2016년 중소 건설업체인 세운건설에 인수되었다.#
  • 파슨스퍼시픽: 쌍용건설과 미국 파슨스 오버시즈와의 합작사로, 1994년 폐업됨.
  • 수정산터널: 2000년대 중반 이후 법인명이 '한국민자도로운영'으로 바뀌었고, 2006년 쌍용건설에 합류 후 2010년 폐업됨.
  • 경북직물염공: 1967년 대한농산에 매각됨.
  • 금성방직: 1967년 대한농산에 매각된 후 1972년 태평방직에 합병됨.
  • 태평방직 (현 (주)대농): 1967년 대한농산에 매각됨.
  • 한남무역: 1973년 금성산업에 합병됨.
  • 유일개발: 제주 오라지구 개발사업자로, 2003년 계열제외 후 2005년부터 제이유네트워크[15]가 소유해 '탐모라리조트'가 됐으나, 2006년 모기업 부도로 2009년 폐업됨.
  • 서해에너지: 2001년 STX그룹으로 합류 후 2005년 STX에너지에 합병됨.
  • 오산에너지: 2001년 대성그룹에 매각된 후 2005년 대성산업에 합병됨.
  • 쌍용해운: 외항해운 및 연안해운을 하는 해상 물류업체로, 2017년 쌍용양회에 흡수 합병되었다.
  • 쌍용정보통신: 구 쌍용양회 종합전산실 전산팀-우성정보산업-쌍용컴퓨터. 대표적인 대기업계 SI로, 2017년 한앤코시멘트홀딩스에 매각됐다가 2020년 아이티센에 매각되었다. 현재는 수익성 좋은 중견 SI로 취급받고 있으며 공공 분야에서 특히 경쟁력이 뛰어나다.
  • 쌍용엔지니어링 (현 인본건설): 2001년 그룹에서 분리된 뒤 인본건설이 되었다.
  • 쌍용자동차: 국내 5대 완성차 메이커 중 하나로, 1998년 대우그룹이 인수했다가 채권단 체제를 거쳐 2004년부터 중국 상해기차한테 또 인수되었다가 기술력 먹튀당하고 2009년에 버림받아 또 법정관리받은 채 극한적인 노사분규에 시달렸다. 인도 마힌드라 그룹에 다시 인수되어 그럭저럭 굴러가고 있다. 중국이 가지고 있을 때보다 가시적인 실적이 나오고 있다.
  • 쌍용제지: 전문용지(크라프트지) 제조업체로 설립되었는데, 미국 스카트[16]와의 기술제휴로 미용티슈도 생산했다. 1998년 미국 P&G에 인수되었다가, 전문용지 제조부문은 제외하고 미용티슈 부문은 모나리자 계열사인 쌍용C&B로 매각되었다. 쌍용제지는 2000년대 중반 P&G도 지분을 매각하고 철수한 후 2014년에는 지류 제조사업을 중단하였다. 쌍용C&B는 모기업인 모나리자를 포함해서 모건스탠리 PE에 매각되어, 1,700여 억의 매출과 170여 명의 근로자가 종사하는 중견기업으로 유지되고 있다.
  • 쌍용스카트제지: 미국 스카트 사와의 합작사로, 1982년 쌍용제지에 합병됨.
  • 소피아: 1981년 쌍용제지에 합병됨.
  • 쌍용유니참 (현 LG유니참): 일본 유니참과의 합작사로, 1998년 미국 P&G에 세트로 매각된 후 '유니참'이 됐다가 2006년 LG생활건강에 지분매각됨.
  • 쌍용정유 (현 S-OIL): 1999년 2대 주주 아람코가 쌍용그룹 지분을 자사주로 매각함.
  • 범아석유: 쌍용정유의 직영대리점 자회사로, 1998년 퇴출 후 인력이 쌍용정유로 넘어감.
  • 한주석유: 1993년 범아석유에 합병됨.
  • 쌍용중공업 (현 STX): 2000년 한누리투자증권 컨소시엄에 일부 지분이 매각됐으나 이듬해 강덕수 전무가 사들이면서 계열 분리되어 STX그룹의 모체가 되었다. STX엔진, STX메탈(舊STX엔파코) 등으로 각 사업부문이 분리되었는데, 실질적인 후계 회사는 STX엔진. STX그룹도 쌍용그룹의 전철을 그대로 따라가서(...) 과도한 차입경영과 무리한 해외투자를 감행한 끝에 지금은 사실상 해체된 상황이다. #.
  • 쌍용전기: 구 동양중전. 1980년 효성중공업에 인수합병됨.
  • 쌍용정공 (현 심팩): 구 동성개발. 2001년 그룹에서 분리된 뒤 심팩(SIMPAC)으로 독자생존. 금속을 성형하는 프레스 기계를 주로 생산하며 인수합병을 통해 주물 및 산업기계에도 진출했다. 매출 비중은 프레스와 기타가 8 : 2. 전방산업으로 자동차 산업이 매출의 80%를 차지하며 가전이 13%, 나머지가 기타이다. 프레스 분야에서 점유율이 50%에 달하며 15년 기준 매출 2,700억에 영업이익 210억에 달하는 알짜 기업으로 거듭났다.
  • 진방철강: 2004년 미국 모건스탠리에 의해 신규법인 '진방스틸코리아(현 진방스틸)'로 자산매각된 후 2007년에 폐업됨.
  • 용평리조트: 구 고원개발-유국개발-쌍용종합건설 용평사업부-쌍용양회 용평사업본부. 국내에서 가장 큰 스키장과 골프장을 운영하는 종합 리조트 기업으로, 2000년 재분사 후 2003년 세계일보가 인수했다.
  • 용인개발 (현 은화삼컨트리클럽): 골프장 은화삼CC 운영법인으로, 2001년 개인 사업자에게 매각됨.
  • 쌍용운수: 1981년 쌍용종합건설에 합병됨.
  • 동성고속관광: 1998년 폐업됨.
  • 쌍용템플턴투자신탁운용 (현 프랭클린템플턴투자신탁운용): 구 쌍용투자자문-쌍용템플턴투자자문. 1999년 미국 프랭클린템플턴에 지분 매각함.
  • 쌍용화재 (현 흥국화재): 구 고려화재. 2002년 중앙제지에 팔렸다가 2006년 흥국생명에 매각됨.
  • 쌍용종합금융: 구 인천투자금융. 1998년 퇴출 후 2011년 폐업됨.
  • 쌍용캐피탈: 구 쌍용화이낸스-쌍용할부금융-쌍용여신금융. 2003년 골든브릿지에 인수되어 2006년 GB캐피탈, 2007년 골든브릿지캐피탈로 각각 바뀌었으나, 2014년 남이산업에 매각된 후 사명을 '인터레드캐피탈'로 바꾸었다가 2015년 여신전문금융업 허가가 말소되고 2016년 폐업됨.
  • 쌍용경제연구원: 구 쌍용경제연구소. 1997년 청산됨.
  • 삼공합자회사: 1949년 윤정화에게 경영권이 양도됨.
  • 승리전자공업: 오디오 수출업체. 1991년 폐업.
  • 텍스텍: 구 승리기계제작소-쌍용중공업 섬유기계본부. 2001년 STX그룹에 합류 후 2005년 STX엔파코에 합병됨.
  • 동양통신사: 1980년 언론통폐합으로 뉴스통신사업을 신규법인 연합통신에 매각 후 1981년 청산 종결됨.
  • 서울일일신문: 구 연합신문사. 1954년 인수 후 1961년 폐간.

6. 산하 기관


  • 쌍용중앙연구소
  • 쌍용중앙연수원: 서울 강북구 우이동에 위치함. 해당 건물은 원래 풍문여고 터에 있던 안동별궁 정화당으로, 1975년 개설 이전엔 김성곤 초대 회장의 별장이었으며 1997년 동양화재에 매각됨.

7. 공익재단


  • 성곡미술문화재단: 성곡미술관 운영재단이다.
  • 성곡언론문화재단
  • 학교법인 국민학원
  • 학교법인 현풍학원

8. 이모저모


[image]
1989년 창립 50주년을 맞이해 제정된 쌍용그룹의 심벌마크는 2마리의 용을 의미하는 회색S + 빨간색S로 이루어진 것인데, 이 마크의 의미는 기간산업과 첨단산업의 조화, 기업과 소비자 간의 조화, 노동자와 사용자 간의 인화를 상징한다.
그러나 이 로고는 해외에서 나치 친위대의 SS와 비슷하다는 지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악명높은(?) 표준어 표기규정에 따르면 '쌍룡'이 되어야하나, '''이미 사람들한테 익숙하다는 이유로 예외''' 판정을 받아서 사명 쌍'용'을 그대로 쓸 수 있었다.[17]
그 외에 현풍중학교, 현풍고등학교, 국민대학교 재단을 소유했던 적이 있는데 아직도 국민대 이사진 중에는 쌍용그룹 출신 인사나 쌍용그룹에 관련되었던 인사가 많으며 현 국민대 이사장도 창업주 김성곤 회장의 손자인 김지용 씨가 재임하고 있다.[18]# ##
스포츠로는 그룹 산하 회사 및 학원에서 4번이나 축구단을 운영하였으며, 1990년대 중반 현대그룹프로야구단 창단을 시도할 즈음에 쌍용도 관심을 보인다는 언론기사가 나온적도 있으나, 구체적인 행동에 나서지는 않았다. 그리고 풋케위키에 따르면 2002 월드컵을 유치하려고 했던 1996년에 대구광역시를 연고로 프로축구팀을 창단하려고 했으나 그 뒤 외환위기가 터지는 바람에 무산되었다고 한다. 또한 창업주 김성곤 회장이 학창시절 유도를 했었고, 한때 대한유도회장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오랜 기간 유도단을 운영하였다. 1982~1992년까지 한국스카우트연맹 회장사이기도 했다.
[image]
광고를 전공한 이들이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지나치다 한 번은 봤을 '''"오늘은 속이 불편하구나"'''로 시작되는 기업광고를 낸 곳이다. 이 작품은 '''1984년''' 스승의 날을 기념하여 주요 신문에 게재했던 것으로서, 보릿고개 시절에 유년기를 겪고 산업화 시기에 청장년기를 보낸 당시의 사람들에게 폭발적인 공감을 얻어, 지금까지도 한국적인 기업PR의 주된 성공사례로 종종 회자되곤 한다.
이 기업에서 발행했던 사외보인 '여의주'가 유명했는데, 2013년 4월호를 끝으로 발행이 중단되었다.
정세균 총리는 정계에 입문하기 전까지 쌍용의 임원으로 근무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유세용 차량인 '''소독차'''(...)가 쌍용 코란도(구) 소프트탑이다.
계열사인 (주)쌍용이 90년대에 PC 게임 시장에 진출했던 적이 있었는데, 화제작인 게임들을 유통했다. id 소프트웨어을 출시하였고, 루카스아츠스타워즈 게임 시리즈 일부와 샘 앤 맥스, 에이도스 인터렉티브툼 레이더 시리즈코만도스 등을 출시하기도 했다. 또한 미국의 게임 유통사인 EB Games와의 제휴로 국내에 EB Games 매장을 여러군데 오픈하기도 했다.

[1] 현 한반도면.[2] 쌍용양회는 포틀랜드 시멘트를 제조하는데, 여기는 슬래그 시멘트를 제조한다. 원래 쌍용그룹 계열사는 아니고, 법정관리 중이던 것을 사모펀드인 한앤컴퍼니가 2012년에 인수한 회사인데, 한앤컴퍼니가 쌍용양회를 인수한 후 2017년에 대한시멘트를 쌍용양회에 매각하는 방식으로 투자금을 회수했다.[3] 현재 이 도메인으로 접속하면 쌍용그룹의 모태였던 쌍용양회 홈페이지로 접속된다.[4] 삼공유지를 경영하면서 박정희의 형 박상희를 남몰래 도왔다고 하고, 해방 이후에는 박상희와 함께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경북지부 결성에 앞장섰으며, 해방정국 시기 미군정 시기 친일경찰의 횡포에 의해 일어난 대구 10.1 사건에서 박상희, 황태성과 같이 핵심적 위치에서 활동한적 있었다. 박상희를 통해 박정희와 친해졌다고. 나이차가 나는 큰형 박상희를 사실상 아버지처럼 따랐던 박정희와도 사석에서 자녀들의 결혼 문제를 상의할 정도의 친분을 가지게 되었다.[5] 당시 정부발주 공사와 해외차관의 10%를 무조건 상납하게 하였다. 재벌들도 창구 단일화로 한쪽에만 뜯기게 되자 오히려 좋아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뇌물의 제도화이다.[6] 여담으로 이 시기 가봉에 백화점을 세웠다가 큰 낭패를 본 일이 있었다. 가봉 항목 참조.[7] 아파트 브랜드로는 '''더 플래티넘'''을 쓴다.[8] 이건 삼성그룹도 마찬가지였다. 유명 클래식카만 100대 이상을 소유하고 있다는 자동차 애호가 이건희 회장의 밀어붙이기로 자동차 산업에 진출했지만, 일단 삼성은 그룹의 덩치가 다르고....결정적으로 투자 초기에 발을 빼는데 성공했다.[9] 1971년 10.2 항명 파동으로 인해 반 강제로 정계를 은퇴한 부친 김성곤 회장의 유언은 "절대로 정치를 하지 마라"였다.[10] 당시 청와대검찰총장의 중단압력을 무시하고 사건을 수사했던 주임검사는 결국 좌천되자 사표를 제출하고 삼성그룹 법무팀으로 스카웃된다. 이 인물이 바로 훗날 삼성의 비자금을 폭로하고 삼성을 생각한다를 출판한 김용철 변호사이다.[11] 이로 인해 1998년에 치러진 대구 달성군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사람이 엄삼탁을 꺽고 당선된 박근혜.[12] 창업주 김성곤의 둘째아들, 김석원의 동생이다.[13] 가수 겸 예능인 탁재훈의 부친.[14] 2012년 7월 이후의 건설업계는 초상집 분위기. 100대 건설사 중 20개 이상이 부도 혹은 워크아웃 상태이다.[15] 그 악명높은 주수도의 제이유가 맞다.[16] 1995년 킴벌리크라크와 합병됨.[17] 유사 사례로 오뚜기가 있다. 씨티은행도 Cit'''i''' Bank로 쓰고 있다.[18] 전임 이사장은 김성곤 회장의 조카이자 쌍용그룹 총괄부회장, 쌍용양회 회장을 지낸 김채겸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