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기(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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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寅起
1922년[1] ~ 1997년 7월 2일 (향년 74~75세)
대한민국의 전 법조인 및 정치인이다. 본관은 강릉(江陵)[2]#.
1922년 강원도 양양군 양양면 구교리(현 양양읍 구교리)[3]#에서 아버지 김진우(金振瑀)와 어머니 김해 김씨 김우선(金瑀善) 사이의 3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양양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춘천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4학년 때 항일단체 상록회에서 활동하다 발각되어 1년 간 투옥되었다. 그 후 일본으로 유학, 나가노(長野)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주오대학 법학부에 입학하였으나 중퇴하였다. 이후 최종적으로 보성전문학교 법과에 입학하여 졸업하였다.
이후 조선변호사시험에 합격하여 판사로 근무하였다.
8.15 광복 후 서울지방법원 판사, 서울고등법원 판사, 서울지방법원 부장판사, 사법대학원 교수,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로 근무한 바 있고, 이후에는 변호사를 개업하여 서울변호사회 상임위원을 지내기도 했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 후보로 강원도 고성군-속초시-양양군-인제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공화당 정일권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1974년 9월 신민당 김영삼 총재 체제가 출범하자 한병채, 이용희, 진의종, 김재광, 한영수 등과 신민당에 입당하였다.
金寅起
1922년[1] ~ 1997년 7월 2일 (향년 74~75세)
1. 개요
대한민국의 전 법조인 및 정치인이다. 본관은 강릉(江陵)[2]#.
2. 생애
1922년 강원도 양양군 양양면 구교리(현 양양읍 구교리)[3]#에서 아버지 김진우(金振瑀)와 어머니 김해 김씨 김우선(金瑀善) 사이의 3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양양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춘천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4학년 때 항일단체 상록회에서 활동하다 발각되어 1년 간 투옥되었다. 그 후 일본으로 유학, 나가노(長野)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주오대학 법학부에 입학하였으나 중퇴하였다. 이후 최종적으로 보성전문학교 법과에 입학하여 졸업하였다.
이후 조선변호사시험에 합격하여 판사로 근무하였다.
8.15 광복 후 서울지방법원 판사, 서울고등법원 판사, 서울지방법원 부장판사, 사법대학원 교수,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로 근무한 바 있고, 이후에는 변호사를 개업하여 서울변호사회 상임위원을 지내기도 했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 후보로 강원도 고성군-속초시-양양군-인제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공화당 정일권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1974년 9월 신민당 김영삼 총재 체제가 출범하자 한병채, 이용희, 진의종, 김재광, 한영수 등과 신민당에 입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