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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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학력 및 신력[1]
3. 생애
3.1. 유년기와 학창시절
3.2. 유학 및 포교 활동
3.3. 국내 포교 및 대한신학교 설립
4. 이모저모
4.1. 김구와의 인연
4.2. 손양원 목사와의 인연
4.3. 박형룡 목사와의 인연
4.4. 박태선과의 인연
5. 같이 보기

'''"내가 한국에서 얻은 유일한 소득은 김치선을 얻은 것이다."'''
- 영재영(Luther Lisger Young) 선교사 -[2]


1. 개요


'''한국의 예레미야'''
3.1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이자 김영실 박사와 함께 안양대학교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고 안양대학교의 전신인 대한신학교의 설립자이자 2대 교장[3]이다. 대한예수교장로회(대신)를 세운 목사이자 정신적 지주이기도 하다. 삼백만 전도 운동을 펼친 것으로 기독교 계에서 유명하다.
호는 '고봉'이다.

2. 학력 및 신력[4]


영생중학교 졸업
영생고등학교 졸업
연희전문학교 졸업[5]
평양신학교 입학, 고베중앙신학교 편입 및 졸업
웨스트민스터 대학교 신학박사 학위 취득(Th.M)
댈러스 신학교 구약학 전공 및 신학박사 학위 취득(Th.D)[6]
고베중앙교회 개척 및 담임목사
동경신숙중앙교회 담임목사
메구로 교회 개척 및 담임목사
남대문교회 6대 담임목사
장로교 야간 신학교[7] 설립
창동교회 개척 및 담임목사

3. 생애



3.1. 유년기와 학창시절


1899년 9월 14일[8] 함경남도 서호진에서 출생하였다.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고 한다.
당시 그의 아버지는 배 40척을 가진 부호였지만 1913년의 폭풍으로 인해 재산을 모두 잃는다. 이로 인해 할아버지도 잃게 되고 가족 모두가 화전민으로 전락한다. 그러나 김치선의 서당 선생 김응보의 만류로 인해 김치선만이 서호진에서 남아서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다.
그런데 캐나다 장로교 소속으로 한국으로 파송된 영재영(Luther Lisger Young) 선교사[9]가 서호진을 방문하게 된다. 김응보의 추천으로 김치선은 함흥에서 영재형 선교사에게 길러지며 공부할 수 있었다. 김치선의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영재형 선교사는 김치선 가족이 함흥에서 모여 살 수 있도록 지원을 해주었다.
그렇게 김치선은 영재영 선교사의 지원을 통해 영생중학교와 영생고등학교를 나올 수 있었다. 영생중고등학교에 재학을 하면서 3.1운동에 참가하여 1년동안 서대문형무소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감옥에서 모진 고문을 받으며 목사가 되겠다고 결심을 했다고 한다.
이후 연희전문학교에 진학하게 된다. 그런데 당시의 심각한 순혈주의로 인해 캐나다계 백인이었던 영재영 선교사가 영생중고등학교 교장에 재직한다는 것에 지역민들이 불만을 품고 '''영생중고등학교에 방화를 하게되고'''(...)[10] 김치선은 꼼짝없이 타죽을 위기에 놓인 영재영 선교사를 죽을 고비를 넘겨가며 겨우 구했다고 한다. 은혜를 보답받은 영재영 선교사는 매우 감격하며 김치선을 양아들로 삼았고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주었다고 한다.[11]
그 후 평양신학교로 진학하여 목사가 되려고 했던 김치선은 일본으로 건너가서 재일교포들을 전도하려고 했던 영재영 선교사의 호출을 받아 고베중앙신학교로 편입한다. 이후 본격적으로 전도활동을 시작하게 되고, 고베중앙신학교를 졸업하며 목사 안수를 받게 된다.

3.2. 유학 및 포교 활동


이후 영재영 선교사가 주선하여 미국 필라델피아의 웨스트민스터 대학에서 Th.M 학위를 받고, 텍사스의 댈러스 신학교에서 Th.D학위를 받게 된다.[12] 그러나 이후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가 극심해지자 가족과 함께 영재영 선교사가 살고 있는 일본 고베로 떠나게 된다.[13] 이후 고베에서 고베중앙교회를 개척하여 목회활동을 시작하게 되고, 민족주의적인 설교로 당시 재일교포들과 불신자들에게까지도 지지를 얻게 된다. 교회에서 목사와 교인 모두 한복을 입고 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이러한 열광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일본의 다른 지역에서도 순회목사 자격으로 설교를 자주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의 내선일체 정책이 시행되고 나서 사상범으로 구속되고, 일본어로만 설교할 것을 강요받는다. 또, 동경신숙중앙교회로 담임목사 일을 옮긴 이후 그의 열광적인 인기를 질투해서 담임 목사 자리를 빼앗으려는 다른 목사들이 많았고 개척해 두었던 메구로 교회로 담임 목사 일을 옮긴 후 눈물로써 목회를 하게 된다. 또, 영재영 선교사는 태평양 전쟁이 일어난 이후 일본에 의해 강제로 출국을 당해버린다.

3.3. 국내 포교 및 대한신학교 설립


일제가 태평양 전쟁에서 패망할 징조가 보이자 해방을 직감한 그는 한국으로 돌아와서 전도 활동을 시작한다. 남대문 교회의 담임 목사로 추대받아 남대문 교회 6대 담임 목사가 된다. 일제가 패망하여 광복이 되자 정부의 핍박이라는 장애물이 사라졌기에 전도에 모든 힘을 매진한다. 당시 남북한 인구 총합 3000만이 십일조 300만을 낼 수 있도록[14] 각 마을 동리마다 교회를 세우자는 '''삼백만 전도 운동'''이라는 대부흥 운동을 전개한다. 이때 나라를 위해서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하는 모습에서 '''한국의 예레미야'''라는 별명이 생겨난다. 그는 이러한 대부흥운동을 전개하면서 제자 양성의 필요성을 느껴 남대문 교회에서 ‘장로회 야간 신학교’라는 이름으로 신학교를 개교한다. 그후 자신이 2대 교장으로 재직한다.
그런데 6.25 전쟁이 일어난다. 미처 피난가지 못한 목사와 교인들이 공산군 치하에서 기독교 연맹이라는 어용단체에서 이용당하지만 공산군에게 이용당하기 싫었던 김치선 목사는 피난을 간다.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에 부산의 부산중앙교회에서 생활한다. 이후 전쟁이 끝나고 문교부에서 4년제 신학교 인가를 받자 대한신학교라는 이름으로 학교를 개칭한다. 이는 예장대신의 명칭의 어원이 된다.

3.4. 대한예수교장로회(대신) 설립


그러다 큰 위기가 찾아온다.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 군사정부가 남산대한신학교 땅을 빼앗아 그 자리에KBS TV 방송국, 중앙정보부 건물을 지어버린 것이다. 학교를 빼앗긴 김치선 목사는 난감해하다가 반(反)WCC단체인 ICCC(국제기독교연합)의 칼 맥킨타이어 총재를 만나 한국에서 성경장로회를 창립한다는 조건으로 용산구에서 신학교 건물을 매입했다. 그 후 김치선 목사는 더 이상 외국의 선교비를 받지 않고, 한국 내의 자본으로 대한신학교 중흥의 길을 나서게 되었는데, ‘한국인에 의해, 한국인의 돈’으로 대한신학교 건물을 세우려고 했다. 나름 ‘한국인의 힘으로 세워진 자생교단’이라는 타이틀을 내세우게 된다.
이후 ICCC와의 계약 내용에 따라 1961년 대한예수교성경장로회를 설립하고 초대총회장에 오르게 된다. 대한예수교성경장로회는 이후 대한예수교장로회(대신)(이하 예장대신)으로 개칭한다. 대한예수교장로회가 극심한 분립 과정을 겪는 동안, 예장 대신은 순전히 김치선 목사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교단이라 예장 계열 교단 중 분립 과정과 상관 없는 자생 교단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게 된다.
이후 뇌암 판정을 받고 병세 악화로 1968년 2월 24일 소천하였다.

4. 이모저모



4.1. 김구와의 인연


김치선 목사가 남대문 교회 담임목사로 재직하던 시절, 김구는 남대문 교회의 교인이었다. 상술했듯이 김치선 또한 민족주의적인 설교를 자주했던 독립운동가였기에 굉장히 막역했던 사이라고 했다. 김구의 아들 김신의 주례도 김치선 목사가 서주었다고 한다.
그랬기에 이승만 박사는 김치선 목사를 요주의 인물로 생각하고 감시했다. 이승만 정권 시절 난데없이 형사들이 집에 들이닥쳐 인천구치소에 연행했다가 풀어준 일도 있었다고 한다(...).

4.2. 손양원 목사와의 인연


어떻게 친해졌는지는 전해져오지 않지만 김치선 목사가 귀국하여 삼백만 부흥 운동을 펼칠 때 손양원 목사가 강사로 참여할 정도로 매우 좋은 사이였다고 한다. 게다가 부흥 운동 강사 라인업이 매우 후덜덜한데, '''손양원 뿐만 아니라 박재봉[15], 배은희[16], 김인서[17], 이성봉[18] 등 개신교 독립운동가 레전드들이 강사로 참여해서''' 삼백만 전도 운동에 같이 매진하였다. 당시 김치선 목사의 영향력이 얼마나 강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
그래서 김치선 목사는 손양원 목사가 아들을 잃자 매우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4.3. 박형룡 목사와의 인연


나무위키에서 박형룡 목사가 한국 교회의 보수화를 이끈 요주의 인물로'''만''' 설명되어 있어 그의 단점만 설명되고 그의 장점은 설명되지 않는데, 박형룡 목사 또한 업적이 많았다.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이하 예장 합동)을 설립한 목사이고, 국내 개혁주의의 가이드라인을 설정한 인물이며, 표준성경주석을 출판하기도 했다.
일제 때 신사참배의 박해를 피하기 위해 박형룡 목사가 일본에서 사역하고 있던 김치선 목사에게 일본으로의 피신을 위해 편지를 보냈고 김치선 목사는 이웃집을 사들여서 그를 위한 거처를 마련해 준 것이다. 박형룡 목사와 김치선 목사는 이후로도 형제지간처럼 지냈다고 한다.
김치선 목사와 박형룡 목사의 관계가 각자의 교단으로 내려와 예장 대신과 예장 합동의 관계는 현재도 돈독한 편이다.

4.4. 박태선과의 인연


전도관의 창시자 박태선이 한때 장로로 있을 당시 남대문교회의 담임목사로 있었다. 물론 김치선 목사는 박태선의 사상을 지지하지 않았다.

5. 같이 보기



[1] 신력은 교회 사역 약력을 의미한다.[2] 후술할 내용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김치선에게 있어 양아버지 같은 존재였다.[3] 초대 교장은 평양여자신학교 교장을 지냈던 윤필성 목사[4] 신력은 교회 사역 약력을 의미한다.[5] 문과[6] 이는 국내에서 최초로 Th.D 학위를 취득한 것이다.[7] 이후 대한신학교로 교명을 변경하게 되고 안양대학교의 전신이 된다.[8] 양력 기준[9] 캐나다인이 한국으로 귀화한 캐나다계 한국인이다. 에큐메니컬 운동의 일환으로 당시 캐나다 교회는 서로 연합하게 되는데, 이 캐나다 연합교회에 합류하지 않은 잔류파 캐나다 장로교회에 소속된 철저한 개혁주의자 선교사였다고 한다. 예장 대신의 신학적 정체성이 이 선교사의 신학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영생중고등학교 교장으로 재직하였다고 한다.[10] 당시의 심각한 순혈주의는 혈통적으로 황인 한국인이 아닌 사람들에게 극심한 배타적인 태도를 낳았다고 한다. 이는 백인에게도 예외가 없었다.[11] 영재영 선교사는 지역민들에게 배푼 은혜가 배신으로 돌아오는 것에 엄청난 충격을 얻었고 아내 또한 이 충격으로 인해 홧병으로 죽자 정신적으로 견딜 수 없었기에 잠시 캐나다로 휴양하러 다녀온다.[12] 상술했듯이 이는 한국인 최초로 Th.D 학위를 받은 것이다.[13] 일제의 강요인데 왜 일본으로 떠냤냐면 한국인에 대한 신사참배 강요가 한국에서는 극심했던 반면에 정작에 본토인 일본에서는 덜 했기 때문이었다. 한국인에 대한 신사참배 강요 자체가 한국 민족말살의 도구로 사용되었기에 본토에선 그 정도가 덜했다는 것이 이해가 될 것이다.[14] 당시엔 십일조는 자금난이 심했던 교회 운영에 있어서 구세주같은 것이었다. 헌금을 강압적으로 내라는 의미도 아니었다.[15] 감리회의 대표적인 부흥사로 회자되는 목사[16] 전북 지역에서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저항파 민족주의 장로회 목사 2명 중 하나이자 대한국민당 총재를 지냈던 정치인[17] '''조선은 조선 사람의 조선이니 조선 사람이 통치해야 한다'''는 명언을 남겼고 민족교회론은 설파하여 개신교의 독립운동을 지도한 목사[18] '''한국의 무디'''라고 불렸던 독립운동가이자 성결교회의 대표적인 부흥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