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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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교육인.
한국 교육계와 목축업계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다. 경기대학교에 관광학과를 전국 최초로 세운 사람이고, 뉴질랜드에 사절로도 보내졌을 정도였다. 1992년에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받기도 했다. 안양대학교의 전신이었던 대신대학교의 마지막 총장이자 안양대학교의 초대 총장이었다. 임기 중에 학교의 이름이 바뀌어 이렇게 되었다.
김치선 목사[1] 와 함께 사후에도 그의 건학 이념으로 안양대학교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다. 안양대학교의 도서관인 일우중앙도서관에서 흉상이 세워져 있다. 안양대학교에서 ‘사고와 표현’이라는 과목을 이수할 때 이 분의 생애를 다룬 전기를 읽고 독후감을 써야 한다. 인생이 꽤 드라마틱했기에 그의 전기는 꽤 읽을만한 편이다.
생전에는 시흥군이였던 금천구의 교육과 보급을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지만, 학군 자체의 상향평준화에는 딱히 관심을 쏟지 않았고, 그 때문에 금천구에서 그의 뒤를 잇는 딱히 걸출한 교육자/유명인이 배출되지 못해 금천구의 교육 수준이 가장 낙후되었다는 어두운 면도 있다. 다만, 그의 교육철학인 "한구석 밝히기"는 성적보다는 학생 개개인의 잠재력 향상에 중점을 두고 있음을 감안해야 한다. 그나마 그가 세운 학교인 문일고등학교가 동일여자고등학교와 함께 금천구 내에서 수능 성적 1, 2등을 다투고 있다.
2. 학력
- 강화공립보통학교 졸업 : 선원보통학교에서 전학.
- 배재고등보통학교 졸업 : 중학교+고등학교 커리큘럼이 이어져 있었다.
- 아오야마가쿠인대학 영문학 학사 : 원래 예과인 영문학 이수 후 본과인 신학과로 넘어가도록 하는 커리큘럼이었는데 영문학 이수 후 태평양 전쟁이 터져 징병을 당했기에 영문학 학사 학위만 받고 신학 학사 학위를 인정 받지 못했다.
- 애주사퍼시픽대학교 철학 명예박사
3. 생애
3.1. 출생과 학창 시절
1920년 3월 6일에 강화도에서 출생하였다. 당시 강화도에서는 개신교가 포교되고 있었기에 그도 자연스레 개신교를 믿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인 김경서 장로는 신앙심이 매우 독실했다. 김경서 장로는 자신의 마을이 교회와 거리가 멀기에 자신의 친구와 함께 자신이 다니는 교회의 지교회[2] 와 교회의 병설 학당을 사비로 세울 정도였다. 그러나 친구가 교회의 공금을 빼돌리는 등 타락해서 지교회를 유지하는 것이 어려워지자 아예 새로운 교회를 세워버린다. 김경서 장로의 정신이 김영실의 일생에 큰 영향을 끼쳤다.
공부를 굉장히 열심히 하여 그 당시 강화도에서 명문이었던 강화공립보통학교로 진학했는데, 공부에 대한 열정으로 집안 형편 때문에 진학하기 어려웠던 중학교로 진학하고만다. 배재고등보통학교[3] 에 진학했는데, 선배의 집에서 기숙을 하고 친구와 함께 자취까지 하면서 굶어가며 공부했다고 한다. 그의 전기들에서 보면 하루는 통학을 하는데 어느 농부가 교복을 입고 있는 자신을 보며 부러워하는 것을 보고 모든 이들을 위한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했다고 한다. 이 경험이 나중에 교육인이 되고 학교를 세우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경성제국대학으로의 진학에 실패하자 당시 배재중학교의 교장이었던 아펜젤러 2세[4] 와 상담을 하여 일본으로 유학을 가게 된다. 아펜젤러 2세는 김영실이 기특했는지 죽을 때까지 마음의 아들로 생각했다고 한다. 당시 신학으로 유명했던 아오야마가쿠인대학으로 진학을 했는데, 영문학을 이수한 후, 신학으로 진학을 하려 했지만, 애석하게도 태평양 전쟁이 터져버렸다. 결국 그는 학도병으로 입영을 하도록 권유받았는데, 거절해도 결국 훨씬 불리한 조건으로 징병당하므로 별수없이 자원입대해버린다.
3.2. 군인과 교사로서의 커리어
전쟁 내내 일본군의 만행에 질려버렸는지 일본이 패전한 후 귀국하기 전 회식자리에서 처음으로 술을 마시고 취했을 때 칼을 빼들고 다시는 일본에게 이런 수모를 당하지 않을 것이고 일본은 옛날에 우리나라에게 사람 가죽 300장과 고환 3말을 조공으로 바쳤었다고 (...)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주사를 부렸다고 한다. 물론 기독교인이기에 이후에 크게 후회했다고 한다.
해방 후에 아펜젤러 2세의 소개로 미군정청에서 일하였는데, 당시의 한국의 열악한 사정과 심각한 비리를 통감하고 사직한다. 그 후 숙명여고에서 교편을 잡게 된다. 그러나 숙명여고에서 함석헌을 강연으로 초대했을 때, 함석헌이 강연에서 당시 한국의 열악한 주입식 교육 제도를 비판한 것을 옹호했고 이 일로 문남식 교장과 의견충돌을 일으켰다. 숙명여고에 머물고 싶은 마음이 없어진 김영실은 서울고등학교로 이직을 하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남식 교장은 김영실을 촉망받는 교사라고 추천서를 써주었다고 한다.
서울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다 6.25 전쟁이 터져버린다. 피난을 제대로 가지 못하고 공산군 치하에서 살게 되었는데 공산당의 잔악함에 질린 그는 고향인 강화도로 겨우 피난가서 공산당이 강화도에서 후퇴할 때까지 숨어 지낸다.이후 수복된 서울에서 다시 교사로 일하다가 공군으로 자원 입대했다. 당시의 열악한 사정상 국군 공군에게 교본이 있을리가 없었고 미군 공군의 교본을 번역해서 새로운 교본을 제작하는 일을 하게 된다. 중공군의 남하 이후 대구에서 일본군 학도병 경력을 참작받아 중위로 임관하게 된다.
3.3. 목축업자와 교수로서의 커리어
미군정에서의 경험과 전란을 겪고 피폐해진 국토를 보고 느낀 경험을 바탕으로 양을 기르는 목축업을 부업으로 삼게 된다.[5] 그리고 대위 승진과 함께 대전의 항공대학교 교관실장으로 부임하게 된다. 이후 한신대와 경기대에서도 겸임 교수로 부임하게 된다. 아버지처럼 대전에 천막으로 된 개척 교회를 세우게 되는데 이 교회는 현재의 보문교회의 전신이 된다. 이후 소령으로 진급하며 공군 본부로 발령이 나게 되는데, 시흥에서 양을 계속해서 목축하게 된다. 이후 시흥고등공민학교에서 명예 교장 역할도 맡게 된다.
4.19 혁명 이후 강화도에 대한민국 국회의원으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이후 공군에서의 지인이었던 김세준의 영향을 받아 겸임교수로 제직하고 있었던 경기대에 관광학과를 설치하였다. 이는 국내 최초로 관광학과를 설치한 것이다. 이후 기르고 있었던 백여마리의 양을 다 처분하고 젖소를 사고 목축한다. 이후 정부에 의해 뉴질랜드로 젖소를 구입하러 가는 사절단으로 지목되는데, 당시 국내에서 젖소에 대해 잘 알면서 영어에 능통한 몇 없는 인물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뉴질랜드에서 인종차별을 당한 경험을 뉴질랜드 정부에게 항의하는 패기를 보였고 결국 수상을 만나고 매시 대학교[6] 와 축산시험장을 견학하였다. 매시 대학교 총장에게 매시 대학교를 우리나라 학생이 유학할 수 있도록 부탁하였고 그후로 매년 2명의 학생이 매시 대학교로 유학하는 제도가 생겨났다.
교육계에 종사하지만 축산업에서 큰 업적을 세웠기에 서울 농협 조합장 직에 오르게 되었고 일본 도쿄의 네리마 구의 네리마 농협과 자매결연도 성사시킨다. 서울 농협의 서울시 교육금고를 조흥은행으로 넘긴다는 소문을 듣고 문교부 장관에게 항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일이 농협중앙회에게서 눈엣 가시였는지 해고 통보를 받지만 해임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내는 등 저항한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사표를 내라는 압력을 받고 결국 굴복한다.[7] 그런데 공교롭게도 훗날 안양대학교의 학생증은 조흥은행의 후신인 신한은행으로 발급한다.
1963년에 시흥이 서울시로 편입되어 시내의 목장이 공해업소로 지정되었기에 목장을 처분하고 학교 경영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이 일은 김영실이 목축업계에 마음이 떠나 교육계에만 종사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3.4. 학장과 총장으로서의 커리어
학교법인 염원학원을 세운다. 염원학원은 이후 문일학원으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시흥고등공민학교에서의 교장 일을 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시흥 최초의 중학교인 서울남중학교를 세우게 된다. 그리고 서울남중학교는 문일중학교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이후 문일고등학교도 세운다. 학교 일조권 문제로 L모 재벌에게 항의를 하기도 했다. 학교를 세운 이후 외국의 여러 학교와 자매결연은 맺기도 했는데, 애주사퍼시픽 대학교와 자매 결연을 맺으며 애주사퍼시픽대학교 철학 명예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다.
이후 대한신학교를 인수하여 안양대학교로 개명한다. 현재 안양대학교의 한구석 밝히기 정신은 그가 교육론으로 내세운 것이다. 1993년에 한구석밝히기 실천운동본부도 설립하였다. 이후 고향인 강화도에 정규대학을 유치해달라는 강화도 군수의 부탁을 받아 안양대학교 강화캠퍼스를 세우게 된다. 원래 강화도로 안양대를 이전하려 했지만 수도권의 입지가 매우 커져 포기했다고 한다. 우일학원을 세운 후 안양대학교를 문일학원에 분리시킨다.
1992년에 우리나라 교육계에 끼친 공로가 상당하다고 평가받아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받았다. 그리고 2006년 6월 28일에 소천하였다. 향년 87세, 만 85세.
4. 비판
김영실은 감리회와 장로회의 레전드였고 전설적인 교육자였지만 그의 아들들은 그러지 못했다. 그의 아들들도 김영실을 따라 교육자의 길을 걷고자 했으나 안양대학교에 큰 논란을 일으켰다.
그의 아들 김승태가 교비로 싯가 11억 태백 부지를 '''4~5배'''로 구입해 막대한 차익을 거두는 학사비리를 일으켰다. 독실한 개신교인이었던 김영실과 달리 김승태는 학생들에게 300배를 변형시킨 100배를 시키는 등 기독교와 거리가 먼 행보를 보여서 빈축을 사기도 했다.
다른 아들 김광태는 2004년 문일고등학교에 성적조작 논란을 일으켰고 2019년 안양대학교 이사 과반을 '''대진성주회 계열 인사로 채우려는 기행을 벌였다가''' 실패하여 생전의 김영실의 행보와 정반대되는 일을 벌였다. 문제는 이 행동이 안양대 뿐만 아니라 다른 종립대학교에도 민폐를 끼칠 수 있는 행동이어서 종교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5. 저서
- 한구석 밝히기
출판사 : 뿌리 1993/3/1 출간.
- 지식경영의 실천
출판사 : 삼성경제연구소 1998/10/26 출간.
- 민들레 홀씨는 오늘도 날고싶다
출판사 : 한솜 2004/05/30 출간.
- 민들레 홀씨 하나 큰 숲을 이루다
출판사 : 물푸레 2007/02/26 출간 사후출판이다. 그의 제자들이 그가 쓴 원고를 바탕으로 출판했다.
6. 그가 세운 학교들
7. 선거 이력
[1] 대한예수교장로회(대신) 설립자 및 대한신학교 2대 교장. 300만 전도 운동을 펼친 것과 뜨거운 신앙심으로 기독교계에서 유명하다.[2] 학교의 분교같은 것이다.[3] 당시에는 배재고등보통학교에는 배재중학교와 커리큘럼이 이어져 있었다.[4] 미국 출신의 선교사이사 배재학당을 설립한 헨리 아펜젤러의 아들이다. 아버지와 함께 감리회의 레전드로 평가받는 인물이다.[5] 당시의 양은 1마리(...)였다. 양의 수가 불어나서 목축업이라고 부를만큼 판이 크게 커진 것은 시흥에서의 일이다.[6] 뉴질랜드 최대 규모의 대학교이다. 농업과 축산업으로 유명하다.[7] 저서인 ‘민들레 홀씨는 오늘도 날고 싶다.’를 보면 형사들이 사표를 내는 것을 권유했고 김영실이 사표를 왜 써야하는지 물어보니 아예 유치장에 가둬서 사표를 쓸 때까지 감금했다고 한다. 그걸 일주일을 버텨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