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양원

 

'''손양원 | 孫良源'''
<colbgcolor=#0075C2> '''출생'''
1902년 6월 3일
대한제국 경상남도 칠원군 상리면 남구리(현 함안군 칠원읍 구성리)
'''사망'''
1950년 9월 28일
인공 치하 전라남도 여수시 미평과수원 골짜기
(현 여수시 둔덕동 617-10)
'''본명'''
손연준
'''학력'''
칠원공립보통학교
(현 함안 칠원초등학교) (졸업)
서울 중동학교
(현 서울 중동고등학교) ( /졸업)[1]
경남성경학원 (수료)
평양신학교 (졸업)
''''''
산돌[2]
'''별명'''
'''사랑의 원자탄'''
'''가족'''
배우자 정양순
아들 손동인, 손동신, 손동장, 손동길[3]
딸 손동희, 손동림, 손동연, 사위 김원하
'''양자 안재선'''
'''종교'''
개신교(장로회)
'''수훈'''
건국훈장 애족장[4]
'''관련 홈페이지'''
링크
1. 일생
2. 기타
3. 저작
4. 관련 문서

[clearfix]

1. 일생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읍에서 손종일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손종일 씨가 개신교 장로인 독실한 개신교 집안이었다고 한다. 경술국치 이후 일제가 동방요배를 강요하자 신앙의 정신으로 불복종하다가 간신히 칠원보통공립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인 1919년에 서울 안국동에 있던 중동학교(지금의 중동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된다. 기록에 의하면 손양원은 이 중동학교에서 낮에는 학업에 열중하고 밤에는 만두를 팔면서 고학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3.1운동 이후 부친이 고향에서 독립운동으로 징역을 살게 돼 손 목사는 심적인 고통은 물론 경제적 어려움까지 겪게 되었고, 결국 손양원 목사는 중동학교에서 키워가던 꿈을 포기하고 학업을 중단해야만 했다. 손 목사의 최종 학력은 중동학교 입학(1919년 4월)과 자퇴(1920년 4월 3일)로 기록되고 있다.
1938년 평양 신학교를 졸업한 뒤 전도사가 되어서 1939년 전라남도 여수시에 있는 애양원 교회에 재직했다. 애양원은 한센병 환자들을 위한 치료-수용 시설로 이곳에서 손 목사는 환자들에 대한 개신교 전도와 환자 구호를 위한 봉사 활동에 전념했다. 그 당시의 일화 중 하나로 환자들 중 상태가 심한 환자들만 격리해놓은 방이 있었다. 간호사들조차 신문지를 깔고 들어가니 그런 행동에 모욕감을 느낀 환자 중 하나가 "우리가 짐승이냐? 우리도 똑같은 사람이다" 라고 외치면서 간호사들 중 하나를 목침으로 때려 죽이는 사고가 일어났다. 이에 손양원 목사는 맨발로 그 방에 들어가 간호사를 죽인 그 환자에게 다가갔다. 잠시 기도를 올리던 손 목사는 상처를 '''직접 입으로 빨아''' 고름을 빼냈다! 한센병이 전염병인지라 이 사실을 알게 된 애양원에서 크게 걱정을 하며 수차례 손 목사에게 검사를 시행했지만 다행히 손 목사는 전염되지 않았는데 이에 손 목사는 진심으로 아쉬워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한 이야기가 "내가 나병에 걸리면 그들과 똑같아질거고 그러면 환자들이 나에게 더 거부감 없이 대할텐데 그러지 못해서 아쉽다."였다고 한다.
1940년에는 평양의 주기철 목사처럼 신사 참배를 거부하다가 체포되어 1945년 8.15 광복 때까지 수감 생활을 하였다. 당시 수감 생활로 건강이 매우 악화되어서 실명 위기까지 왔었다고 한다. 이 때 나온 기도 중 하나가 기독교인들에게 유명한 솔로몬의 부귀보다 욥의 고난이 귀하다는 이야기로 아내 정양순 여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왔다. 그가 수감되어 있을 때 일제는 어떻게 해서든 그의 신앙을 바꿔보려고 했는데, 불교관련 책을 강제로 읽고 감상문을 쓰게 하거나 일본인 스님을 불러서 그가 불교신자로 바뀌도록 설득하게 하였다. 그러나 손 목사와의 종교 담론을 하던 그 스님은 전도가 끝까지 먹히지 않고, 오히려 손 목사의 반론에 할말도 없어지자 결국 분노가 폭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손 목사의 뺨을 때리고 만다. 하지만 손 목사는 오히려 표정 하나 안 바꾸고 "제가 믿는 하나님께서는 원수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도 내어주라고 하셨습니다. 자, 그러니 이쪽 뺨도 치십시오."하며 뺨을 내밀자 그 스님은 아예 이성을 잃고 덤벼드는 바람에 감방 간수들이 끌고 나가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5] 해방 이후에는 목사가 되어서 다시 애양원에서 봉사 활동을 하였다. 출소한 뒤 최초로 설교자로 참여한 예배에서는 설교를 시작하려다가, 그때까지도 버젓이 예배실에 놓여있던 신토 신상을 보고[6] 분노하여 그 자리에서 바닥에 던져 개박살내고는 다시 온화한 표정으로 돌아와 설교를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1948년 발생한 여순사건 때 큰 사건이 일어났다. 바로 두 아들의 죽음이었다. 손양원의 두 아들인 손동인 씨와 손동신 씨는 우익 학생 단체 중 하나인 전국학생연맹에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이를 안좋게 보던 반란군 세력이 반란 당시 기독교도라는 사실을 빌미 삼아서 두 사람을 순천의 동천 인근에서 살해한 것이다. 당연히 그들의 가족들과 애양원 사람들은 크게 슬퍼하고 있었는데 손양원 목사는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행동을 하였다. 두 사람의 장례 예배 때 손 목사는 '''감사 기도를 올린''' 것이다. 감사기도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제가 이 시간에 무슨 답사를 하고 무슨 인사를 하겠습니까마는 그래도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마음이 있어서 몇 말씀 드립니다.

'''첫째''',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들이 나오게 하셨으니 하나님 감사합니다.

'''둘째''', 허다한 많은 성도들 중에 어찌 이런 보배들을 주께서 하필 내게 맡겨주셨는지 그 점 또한 주님 감사합니다.

'''셋째''', 3남 3녀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두 아들 장자와 차자를 바치게 된 나의 축복을 하나님 감사합니다.

'''넷째''',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다 하거늘 하물며 두 아들의 순교이리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다섯째''', 예수 믿다가 누워 죽는 것도 큰 복이라 하거늘 하물며 전도하다 총살 순교 당함이리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여섯째''', 미국 유학 가려고 준비하던 내 아들,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에 갔으니 내 마음이 안심되어, 하나님 감사합니다.

'''일곱째''', 나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여덟째''', 내 두 아들의 순교로 말미암아 무수한 천국의 아들들이 생길 것이 믿어지니 우리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홉째''', 이 같은 역경 중에서도 이상 여덟 가지 진리와 하나님 사랑을 찾는 기쁜 마음, 여유 있는 믿음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합니다.

'''열 번째''', 이렇듯 과분한 축복 누리게 되는 것을 감사합니다.

이와 함께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은 바로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자신의 아들로 삼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반란이 진압된 이후 손 목사는 실제로 반란군 인사 중 안재선이란 좌익학생이 손 형제를 살해했다고 자백하자,[7] 이를 용서하고 안재선 씨를 자신의 양자로 삼은 것이다.
안재선 씨의 처형이 격분한 마을 사람들과 애양원 환자들에 의해 집행되려 할 때, 손 목사는 설교일정이 잡혀 있었다. 그래서 당시 여고생이던 딸 손동희 씨에게 '빨리 가서 안재선 씨가 마을 사람들에게 처형당하는 것을 말리고 자신의 뜻을 사람들에게 알려주라'고 부탁했는데, 당연히 손동희 씨는 자신의 친오빠들을 죽인 살인자를 살리는 것도 모자라 한 가족이 되지 않겠다며 고집을 부렸다. 하지만 아버지의 간곡한 부탁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처형장으로 가면서도 '이놈을 죽일까, 살릴까?'하고 수백 번도 더 고민했다고 한다.[8] 그렇게 목숨을 건진 안재선 씨는 자신의 행동을 참회했고 진심으로 손양원 목사를 자신의 아버지로 따랐다.
1950년 6.25 전쟁이 터지고 북한군이 호남 지역으로 진격해 오자 모두들 피난을 준비하는 동안에도 손양원 목사는 환자들을 내버려 두고 갈 수는 없다며 끝까지 애양원에 남았다. 당시 환자들은 한센병 환자인 자신들을 북한군이 해치지는 않을테니 손 목사에게 떠나라고 종용했으나 이를 듣지 않았다. 그리고 여수로 진격한 북한군에게 기독교 목사라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북한군에게 붙잡혀 다른 사람들과 함께 감금되어 있을 때에도, 식사 시간 때마다 들어오는 주먹밥 중 가장 작은 것을 집어먹었고 그마저도 반으로 쪼개서 감방의 사람들 중 가장 굶주리고 있던 사람에게 "나는 본래 소식가라서 이것만으로도 족합니다."라며 나눠주곤 했다고 한다. 그리고 모진 고문을 받은 끝에, 같이 갇혀있던 사람들과 함께 1950년 9월 28일 총살당했다.
안타깝게도 이때는 인천에서 한창 인천상륙작전을 시행하고 서울이 수복된 때였기에, 만약 이로부터 단 이틀만 더 버텼으면 그도 무사히 살아남았을 수도 있었다.
이때 북한군들이 총을 쏘던 순간, 젖먹던 힘으로 손에 묶인 밧줄을 기적적으로 풀고 정신없이 뛰어서 탈출하여 다행히 살아남은 김창수라는 생존자가 있었고 그는 세상에 손 목사가 죽기 직전까지의 모습을 알렸다. 장례식 때 손양원 목사 장례의 '''상주'''를 맡은 안재선 씨가 가장 슬퍼했다.
'''손 목사의 장례식 모습. 상복을 입은 키큰 남자가 안재선 씨이다.'''
'''손 목사의 장례식이후 가족사진.'''
손 목사는 안재선 씨가 자신을 따라 목사가 되기를 희망했지만 그는 손 목사의 두 아들을 죽인 데 대한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평생을 참회하며 살았고, 1979년에 생을 마감할 때까지 평신도로 사역 활동을 하면서 마지막까지 손 목사의 아들들을 살해한 것을 참회했다.[9] 그의 아들인 안경선 씨는 '''"신학교에 가 못 이룬 꿈을 대신 이뤄달라"'''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목사가 되었고, 현재도 손 목사의 유복자 막내아들인 손동길 씨를 작은아버지로 모시면서 함께 연락하며 지내고 있다.
손양원의 묘지는 그가 봉사했던 애양원 근처에 있으며 손양원이 총살당한 곳인 여수시 둔덕동에는 그를 추모하는 작은 공원이 만들어져 있다.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기타


손양원 목사가 활동한 애양원이 있는 여수시에는 그를 기념하는 기념관이 있다. 기념관은 여수공항 뒷편 도성마을에 위치하고 있고, 여수 35번순천 96번의 종점이라서 쉽게 찾아올 수 있다. 손양원의 영향 때문인지 여수를 비롯한 전남 동부권 지역은 전남 지역 내에서도 개신교 성향이 비교적 강한 편이다.
손양원 목사의 생애를 다룬 책으로는 딸인 손동희 씨가 쓴 <나의 아버지 손양원 목사>와 소설 <사랑의 원자탄>이 있다. 2012년에는 그의 생애를 다룬 창작 오페라 '손양원'이 제작되기도 했다. 다만 오페라의 경우엔 개신교 색채가 강해서 종교적 입장에 따라서 호불호가 갈리는 편이다. 2013년 12월 25일 성탄 특집으로 KBS가 '죽음보다 강한 사랑 손양원'이라는 특집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2015년 10월 고향인 함안군에 손양원 목사 기념관이 개관되었다. 개신교 진영에서는 국민의례국기에 대한 경례의 방법이 국기에 머리를 숙여 절을 하는 방법에서 가슴에 손을 얹는 형태로 바뀌어 정착된 것이 손양원 목사의 노력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경북 포항시에 위치한 한동대학교에는 손양원 목사의 이름을 딴 Residential College인 손양원RC가 개설되어 있다. 2018년 3월 1일 기준 교내 기숙사 중 하나인 벧엘관이 손양원RC 전용관으로 쓰이는 중이다.
'''백범 김구와 손양원의 기념사진.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은 남자가 손양원이다.'''
손 목사는 백범 김구와도 인연이 있다. 안재선 씨를 용서한 손 목사의 일화를 들은 김구는 손 목사야 말로 '''공산당을 진정으로 이긴 사람'''이라고 말하며 큰 존경심을 표했으며 1949년 4월 17자 서울신문에 손양원 목사의 선행과 대인배적 면모를 알리는 글을 게시했다. 이 둘의 인연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데, 김구는 자신이 세우려고 계획하던 학교의 교장으로 손 목사가 적임이라 생각하고 손 목사를 직접 찾아가 교장직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손양원 목사는 나병환자들을 버리고 떠날 수가 없다고 말하며 김구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고 이에 다시 한 번 감명을 받은 김구는 손 목사에게 친필 휘호를 적어주었다. 김구가 전해준 이 휘호는 현재 애양원 근처 손양원 목사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손양원순교기념관에서 손양원 목사의 유복자 막내아들 손동길 목사가 2015년부터 기념관에서 직접 안내를 맡고 있다. 손양원 공식 홈페이지 안내
2019년 10월 5~6일, 여수 진남문예회관에서 2019 손양원목사 순교 70주년 뮤직&드라마 콘서트를 상연했다. 첫날 권오봉 여수시장, 주승용 국회부의장, 최도자 국회의원 등이 자리했다.

3. 저작


고대영 작곡, 그가 작사한 "주님 고대가"라는 CCM(음악)가 있다.
낮에나 밤에나 눈물 머금고 내 주님 오시기만 고대합니다
가실 때 다시 오마 하신 예수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고적하고 쓸쓸한 빈 들판에서 희미한 등불만 밝히어놓고
오실 줄만 고대하고 기다리오니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먼 하늘 이상한 구름만 떠도 행여나 내 주님 오시는가 해
머리 들고 멀리멀리 바라보는 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내 주님 자비한 손을 붙잡고 면류관 벗어 들고 찬송 부르면
주님 계신 그곳에 가고 싶어요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신부 되는 교회가 흰 옷을 입고 기름 준비 다해 놓고 기다리오니
도적같이 오시마고 하신 예수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천년을 하루같이 기다린 주님 내 영혼 당하는 것 볼 수 없어서
이 시간도 기다리고 계신 내 주님 오 주여 이 시간에 오시옵소서
손양원 목사의 시 중 <꽃이 피는 봄날에만>에는 작곡가 김국진이 1987년 곡을 붙여 현재 새찬송가에 수록되어 있다.
꽃이 피는 봄날에만 주의 사랑 있음인가
열매 맺는 가을에만 주의 은혜 있음인가
땀을 쏟는 여름에도 주의 사랑 여전하며
추운 겨울 주릴 때도 주의 위로 변함없네
솔로몬의 부귀보다 욥의 고난 더 귀하고
솔로몬의 지혜보다 욥의 인내 아름답다
이 세상의 부귀 영화 마귀 유혹 손짓 하나
고생중에 인내하면 최후 승리 이루리라
세상 권력 등에 업고 믿는 자를 핍박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아 회개하고 돌아오라
우상의 힘 얼마가며 인간의 힘 얼마가나
하나님의 심판날에 견디지를 못하리라
저 천국을 바라보니 이 세상은 나그네 길
죽음의 길 피하라며 나의갈 길 막지말라
내게 맡긴 양을 위해 나의 겨레 평화 위해
우리 주님 가신 길을 충성으로 따르리라 아멘

4. 관련 문서




[1] 2014년 명예졸업장 추서[2] 산돌은 '살아있는 돌'이란 뜻이다. 신약성경의 베드로전서에 나오는 표현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3] 아버지 순교 당일 출생[4] 1995년 추서[5] 다만 판본에 따라서는 다른 이야기도 있다. 손 목사가 저 말을 하며 뺨을 내밀자 '''오히려 무릎을 꿇고 "부처님, 감사합니다!! 내 살아 생전에 미륵불께서 현신하신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하다니....!"라며 감격했다고.'''[6] 일제 시대에는 기독교 탄압이 심했고, 그나마도 예배를 보기 전에 신토신상에 참배를 하지 않으면 예배를 드릴 수가 없었다. 그 악습이 해방이 된 뒤에도 태연하게 계속되고 있었던 것.[7] 다만 손양원 목사의 딸 손동희씨가 쓴 '나의 아버지 손양원 목사' 목사를 보면 이때 안재선은 자신은 '''이 둘을 죽이지 않았고 단지 확인 사살만 한 것이라고''' 자신의 범행을 강력하게 부인했는데 오히려 시민들은 '''한번 죽인 걸로도 모자라 죽은 사람에 또 총을 쏘아 두번 죽였냐?'''며 크게 분노했다고 한다.[8] 이후로도 안재선 씨를 가족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우리 오빠들을 살려내던가, 자살로 사죄하라"는 식의 원망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러나 진정으로 참회하는 모습을 보고서는 그를 용서하고 오빠로 받아들였다고.[9] 그의 아들인 안경선 목사의 증언으로는 그가 신학교에 입학도 하고 그곳에서 우수한 성적을 올리며 생활했으나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과 그런 사람의 설교를 누가 들으려하겠냐는 자격지심에 목사가 되길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