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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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

플라타너스,

너의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

너는 사모할 줄을 모르나,

플라타너스,

너는 네게 있는 것으로 그늘을 늘인다.

먼 길에 올 제,

홀로 되어 외로울 제,

플라타너스,

너는 그 길을 나와 같이 걸었다.

이제 너의 뿌리 깊이

나의 영혼을 불어넣고 가도 좋으련만,

플라타너스,

나는 너와 함께 神이 아니다!

수고론 우리의 길이 다하는 어느 날,

플라타너스,

너를 맞아줄 검은 흙이 먼 곳에 따로이 있느냐?

나는 오직 너를 지켜 네 이웃이 되고 싶을 뿐,

그곳은 아름다운 별과 나의 사랑하는 창이 열린 길이다.

'''다형(茶兄) 김현승 <플라타너스>'''

1. 약력
2. 소개
3. 관련 문서


1. 약력


1913.4.4 ~ 1975.4.11
다형(茶兄)[1][2] 김현승.
대한민국시인. 1913년 평양 출생.
6남매 중 2남으로 출생하였다. 이후 6세까지 부친의 목회 첫 부임지가 위치한 제주도 제주읍에서 성장하였다. 7세 이후에는 전라남도 광주로 이주하여 숭일학교 초등과정을 수료하였다. 평양숭실중학교를 졸업한 후 1936년 숭실전문학교에 입학해 문리과를 3년 다니다 1년을 남겨두고 병환으로 중퇴했다. 이후 조선대학교 교수로 1951년부터 8년간 재직하다 임종까지 모교인 숭실대학교 교수로 지냈으며, 1970년 한국문인협회의 학회장을 맡기도 하였다.
1934년 숭실전문학교 재학 당시 장시 <쓸쓸한 겨울저녁이 올 때 당신들은> 이 양주동 당시 숭실전문학교 교수의 추천으로 동아일보에 게재되면서부터 등단하였다.

2. 소개


이른바 '''눈물과 보석과 별의 시인'''이다.
1932년 숭실전문학교 의 교사로 있던 양주동, 이효석의 강의를 들으며 습작에 몰두하였으나 1933년 위장병으로 부득이하게 학업을 중단하게 되었고 부모가 있는 광주에 다시 내려가 요양을 하였다. 몸을 추스린 후 복학하여 시 작업에 몰두하는데, 겨울방학이 되어서도 기숙사에 혼자 남아 밤이 늦도록 시를 썼다고 한다. 그때 <쓸쓸한 겨울 저녁이 올 때 당신들은> , <어린 새벽은 우리를 찾아온다 합니다> 등의 시들을 학보인 <숭실>에 발표하였는데 이것이 양주동의 눈길을 끌어 1934년 동아일보의 문예란에 발표하여 그 당시 관례이자 관행이였던 신춘문예나 잡지 추천제도에 상관없이 문단에 등단하게 되었다.
1935년 조선시단과 동아일보 그리고 교지를 통해 <유리창>, <철교> , <이별의 시> , <묵상수제> 등을 발표하였는데, 이 무렵의 시는 식민지 시대의 고통받는 민족의 비애를 낭만적인 이미지로 자연을 예찬하고 인간의 탐구정신을 담아내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의 시어들은 지나치게 세련되고 지적 언어를 구사하는 모더니스트의 성향을 보였고 같은 해 비평가 홍효민은 김현승을 "혜성처럼 나타난 시인" 이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고, 정지용 , 김기림 , 이태준 등도 그에게 격려와 찬사를 보내어 이름이 시단에 일찍부터 알려지게 되었다.
1936년 경 고질적인 위장병의 재발과 숭실학교의 신사참배 거부로 인한 폐교[3]로 김현승은 졸업을 1년 남긴채 광주에 돌아와 숭일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되었다. 그러나 숭일학교에서도 역시 신사참배 거부 사건에 연루되어 학교에서 파면되는 수모를 겪었다.
1948년 광복과 더불어 광주의 호남신문에 잠시 있었으나 숭일학교로 자리를 옮겨 교감으로 취임하였다. 그는 이 무렵 경향신문을 비롯하여 여러 신문과 잡지에 <내일> , <민성> , <창> , <조국> , <자화상> 등과 같은 시편을 발표하였고 서정주, 김동리 , 조연현등과 교류하며 문단활동의 폭을 넓힌다.
1950년에는 <생명의 날>, <가을 시첩> 등을 발표하였고 이때부터는 작품의 성향이 다소 바뀌어 인간의 고독이나 허무와 같은 근원적 문제에 대하여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또 이러한 성향은 기독교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는데, 절대적인 신을 확인하고 그에게 더 가까이 가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도 볼 수있다. 기독교 정신에서 보여지는 높은 윤리성의 실현을 과제로 삼고, 생명,순결,진실등의 관념으로 수렴하려는 태도를 보여준다.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난 뒤에 광주에서 박흡, 장용건, 손철, 이동주 등과 계간지 <신문학>을 창간하기도 하였다. 1951년 4월에 조선대학교 교수로 임명되었다. 자신의 4살 아들이 병을 얻었으나 전쟁으로 인한 물자 빈곤, 그리고 가난 때문에 약도 제대로 쓰지 못한 채 잃게 되었고 이 비극은 그의 시 <눈물>에서 애통함을 엿볼 수 있다. 1955년에는 한국문학가협회 중앙위원으로 피선되었고 제1회 도문화상을 수상하였다.
1957년에는 첫 시집 <김현승시초(金顯承詩抄)>를 발간하고, 1958년에 제1회 한국시인협회 수상자로 결정되었으나 수상을 거부하여 화제였다. 1960년 교수로 몸담고 있던 조선대학교의 문리과대학장 자리 교섭을 받았으나 사절하고 모교인 숭실대학교 부교수를 취임하였다. 1961년, 한국문인협회의 이사로 피선되었고 이듬 해인 1962년 12월에 재선되었다. 1963년 김현승은 2번째 시집 [옹호자의 노래]를 간행하였다. 여전히 시풍을 간직하였으나 정치에 대한 현실에 대하여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1964년에는 숭실대학교 교수로 승진되었고 1968년에 3번째 시집인 <견고한 고독>을 내놓는다. 인간의 근본적인 허무로 인한 고독의 발견을 노래한다. '''견고한 고독'''은 현실에 타협하지않고 홀로 맞서, 시대를 거부하는 내면의 의지였던 것이다. 1970년 4번째 시집 <절대고독>에서도 이 같은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무렵 <현대문학>의 추천위원으로 활동하며 이론서 <한국 현대시해설>을 간행했다.
1970년부터 1973년까지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에 3선 되고, 숭실대학교 문리대 학장을 역임하였다.
1973년 <김현승 시집전>을 출간하고, '서울시문화상' 예술부문을 수상한다. 3월 하순, 차남의 결혼식을 치르고 고혈압으로 쓰러져 한달만에 회복하였고 이 뒤로 신앙에 몰두하여 병원과 교회를 오가는 생활을 하였다.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몸으로 다시 숭실대학교에 강의를 나갔다가 1975년 4월, 숭실대학교 채플 시간 도중 쓰러지며 서대문구 자택으로 옮겨졌으나 사망하였다.

3. 관련 문서


[1] 커피중독자로 여겨질 만큼 유난히도 커피를 좋아해 호를 이렇게 지었다고 한다.[2] 그의 호를 따, 모교인 숭실대학교에서 매년 다형문학상을 시상하고 있다.[3] 자세한 내용은 숭실대학교 문서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