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준(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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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준 일가. 소남(둘째딸), 소명(맏딸), 부인 이순옥, 유진(차남), 이태준, 소현(막내딸), 유백(장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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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원 김용준의 이태준 초상.
1. 소개
2. 행적
2.1. 광복 이전
2.2. 광복 직후의 행적
2.3. 월북 이후의 행적과 최후
3. 주요 작품
4. 기타


1. 소개


이태준(李泰俊, 1905년 1월 7일 ~ ?)은 한국소설가다. 강원도 철원군 출신으로 본관은 장기(長鬐),[1][2] 족보상 본명은 이규태(李奎泰), 호는 상허(尙虛), 상허당주인(尙虛堂主人)이다. 소설의 완성도가 높기 때문에 '조선모파상'이라는 별명도 있으며, 일반적으로 '한국 근대 단편 소설의 완성자'라고 불린다. 문장가로서도 유명하다. '시에는 정지용, 문장에는 태준' 이라 일컬어졌다. 정지용은 그의 '지용문장독본'의 서문에 이렇게 썼다.

남들이 시인 시인 하는 말이 너는 못난이 못난이 하는 소리 같이 좋지 않았다. 나도 산문을 쓰면 쓴다. - 태준만치 쓰면 쓴다고 변명으로 산문 쓰기 연습으로 시험한 것>이 책으로 한권은 된다.

이태준은 자신의 저서 <문장강화(講話)>[3]에서 주장한 '일물일어설(一物一語說)'에 따라 소설을 썼다.[4] 실제 이태준의 소설은 2020년대에 와서 읽어도 누가 따로 설명하지 않는 한 1930년대 소설이라 믿기지 않을만큼 문장과 구성이 현대 소설과 비슷하다. 게다가 이오덕 선생이 군더더기 없는 문장의 전형이라고 칭찬했듯 깔끔한 표현의 정수를 보여주는 문장가 중 하나였다.

2. 행적



2.1. 광복 이전


휘문고보, 일본 조치대학에서 수학, 1925년에 단편 〈오몽녀〉로 데뷔했다. 그리고 잡지 《개벽》 등 여러 언론사에서 기자로 일하였다. 이때 이상의 천재성에 주목해 그에게 를 쓸 것을 권유, 당시 중앙일보(2.) 사장 여운형에게 부탁해서 이상의 시를 신문에 내도록 도와주었다. 그렇게 해서 나온 시가 오감도이다.[5]
일제강점기에는 카프의 경향파 문학과는 거리를 두었는데, 일제 말엽에는 극도의 빈곤과 공습에 따른 사전 소개로 시골에서 낚시나 하고 살게 되었다. 먼저 간 현진건을 추억하면서 이때 쓴 작품들이 토끼이야기, 해방전후 등[6]이 있다. 일제 연간에 비겁한 지식인의 표상이라고 나중에 욕을 먹었지만 중편 해방 전후는 당대 지식인의 모습을 잘 드러냈다고 해방후 문학상을 받았다.
광복 전까지는 철원에 머물렀다.

2.2. 광복 직후의 행적


8.15 광복 후에는 주로 좌익 계열에서 활동하고 6.25 전쟁 이전에 소련이나 발전하는 북한을 방문차 월북하였다. 이태준이 카프와 대립각을 세우고, 프로문학에 반대하는 순수문학의 대표적 단체인 구인회를 결성하여 주도한 것을 보고 그가 좌익사상과 거리가 멀다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이태준이 카프에 반대한 것은 현실참여를 주장하는 프로문학의 경향성에 반대한 것이지 공산주의 사상을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 그 증거로 이태준은 해방 후 조선문학가동맹 부위원장, 북조선예술문학예술총연맹 부위원장을 역임했으며, 한국전쟁 전에도 여러번 김일성을 찬양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싸우자! 목을 걸구 싸우자! 우리 뒤엔 얼마든지 큰 힘이 있다! 우리 농군이나 노동자두 잘살 수 있는 조선이 되도록 도와 주는 나라두 있다! 성필 씨 같은 사람두 하나는 아니다! 김일성 장군 이하 북조선인민위원회가 모두 우리 편이다! 아니, 남조선에도 온통 우리 농민들이다. 또 거기 지도자들 중에도 우리 편은 한둘이 아닐 것이다! 싸우자 목을 걸고!' 「농토」(1948) 中에서
그러나 위의 <농토>는 토지개혁을 주제로 글을 써내라는 당의 지시에 따라 쓴 것이고 여러번의 검열과정을 거치면서 실제 이태준이 쓴 글과 상당부분 달라졌다는 서정범의 진술도 상기할 필요가 있다.

2.3. 월북 이후의 행적과 최후


한국전쟁 이후에 「미국 대사관」을 비롯한 여러 반미소설 등을 발표했으나, 전쟁 후 권력싸움에 밀려 행적이 묘연해지게 되었다.[7] 좌익 활동과 월북으로 흑역사가 되었다가 해금이 되어 알려지게 되었다.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그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도 금지되어 문단에서 거의 언급되지 못했으며 고향에서도 철저하게 묻혀졌다. 피치못할 경우 언급하려면 '이○준'정도로 마지못해 언급되는 정도였고, 당시 이태준에 대한 연구하려던 어느 학자는 이태준의 고향인 철원군 사람들에게 욕설과 같이 모욕도 당했던 적도 있다. 박헌영, 김원봉처럼 남북 모두에서 외면당하는 그런 부류가 된 것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그의 행적에 따르면, 월북하여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부위원장을 역임하였다가, 1957년 숙청시기에[8] 종파분자 및 해당 행위로 비판을 받았다. 비판을 받은 이유가 참 가관인데 이태준이 쓴 소설은 전쟁 당시 북한상공에서 추락한 개념없는 미군조종사를 비꼰 '반미소설'이었다. 그러나 북한 당국에서 공화국에서는 포로를 학대한 적이 없는데 여기 나온 인물은 미군포로를 위협한다며 미국이 공화국을 침략할 명분을 주었다며 반동분자라고 몰아갔다. 사실 정치와 거리가 먼 활동을 했던 이태준이 숙청된 것은 먼저 월북한 한설야, 최승희, 안막 등의 활동 때문이기도 하다. 최승희 일파 역시 나중에 김일성으로부터 추방된다. 그러나 최승희나 한설야가 사후 복권된 반면 이태준은 아직도 북한에서 금기시되는 이름이다. 이후 평양직할시에서 첫 추방된 뒤 해주시 황해도일보사 인쇄공으로 배치되었으나 1974년에는 다시 강원도 장동탄광 노동자지구로 재추방되었으며, 그 뒤 고철 수집 등을 하며 힘겹게 살다가 아내가 죽은 뒤 행방불명되고 말았다고 한다. 관련 기사.[9]
월간중앙 등에 나온 탈북자 증언에 의하면 이태준의 여러 작품들은 북한에서 문학을 동경하는 학생들에 의해 비밀리에 읽히고 있다고 한다. 위에 언급된 이태준 일가의 최후 역시 그런 문학도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소문이다.
1962년 증언에 따르면 국군과 유엔군이 평양을 수복했을 당시 피난을 못 가고 강동군 승호리에 숨어있었는데, 부인을 통해 귀순교섭을 해왔지만 중공군의 갑작스런 개입으로 실현되지 못했다고 한다. 관련 기사. 90년대 초반 신동아에 소개된 선우휘의 증언에 따르면 전쟁 중 적어도 두 번 정도 반공유격대가 이태준을 북에서 빼서 남한으로 귀환시키려고 했다.

3. 주요 작품


<오몽녀> (1925)
<무서록>
<복덕방> [10]
<가마귀> [11]
<밤길>
<영월영감>
<토끼 이야기>
<고향> (1933)
<제이의 운명>
<농군> (1939)
<문장강화> (1940) [12][13]
<돌다리> (1943)
<해방전후> (1946)
<쏘련기행> (1947)[14]
<농토> (1948)
<먼지> (1950)[15]
<행복>
<달밤> [16]
<패강랭> (1938)
<사상의 월야> (1946)

4. 기타


2009 개정 교육과정 천재교과서 중학교 국어 4 검정교과서에 '돌다리'가 수록되었다. 이후 2015 개정 교육과정 해냄에듀 문학 교과서, 미래엔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달밤'이 수록되었다. 2018학년도 수능특강에 소설 '달밤'이, 수능완성에 소설 '패강랭'이 수록되었다. 2020학년도 수능특강에 소설 '복덕방'이 수록되었다.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248번지에는 이태준이 월북 전까지 글을 집필한 '상허 이태준 고택'이 있으며 서울특별시 민속자료 제11호이기도 하다. 지금은 1999년 외종손녀 조상명이 1933년 이태준이 지은 당호인 수연산방을 내걸고 찻집을 열었다. 또 1992년 상허학회가 조직되어 이태준에 대한 연구를 이끌고 있다.
동화도 꽤 많이 썼기 때문에 동화와 재밌는 단편들을 묶어서 어린이용 책으로 남한에서 출간된 적도 있다.

[1] 장기 이씨는 전국적으로 200명 안팎에 불과할 정도로 희귀 본관이다. 장기 이씨에 관한 가계도는 국립중앙도서관이나 정독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지 않고, 부천역 인근에 있는 족보도서관(사설)에 소장되어 있다.[2] 이태준의 본관이 장수 이씨라는 이야기도 있다. 참고 자료[3] 월북 작가 책이지만 여러 번 재판을 하여 21세기가 된 지금도 서점에서 구할 수 있다. "글 쓰는 방법 강의"이라는 제목대로 문장 작법의 교과서라고 할만한 명저이다. 글을 쓰겠다는 사람은 반드시 읽어야 할 책으로 첫손 꼽힌다.[4] 하나의 사물과 개념을 표현하기 위해선 가장 적합한 하나의 단어만이 있다는 이태준의 주장. 사실 최초의 일물일어론자는 귀스타브 플로베르이며, <보바리부인>이 여기에 입각해 쓰인 리얼리즘 소설이다.[5] 이태준이 아니었으면 오감도는 발표 되지 못했을 작품이었다. 하도 독자들의 반발이 심해서 (심지어 이 시를 쓴 사람을 찾아내서 죽이겠다는 협박도 있었다고 한다.) 이태준은 사무실에 오감도 원고를 갖고 갈 때 항상 사표를 같이 들고 다녔다.[6] 해방전후의 묘사를 빌리자면 일 안하고 낚시나 다닌다고 순사에게 혼나고 엄한 사상범들 가방 속에서 이태준의 책이 나와서 곤욕을 겪고 아는 선배 부탁으로 라바울 승전기나 끄적거리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간다.[7] 이태준의 정치적 연고는 소련파였으나 훗날 혹부리 영감에게 밀려버렸다.[8] 1980년대 나온 반공서적에는 고문후 총살이라고 하는데 신빙성은 없다.[9] 이태준 자신이 누구보다도 아끼던 자식들 역시 강제이혼, 행방불명, 사망 등으로 일가가 흩어졌다.[10] 문장도 문장이거니와 주제도 오늘날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쭉 존재할 노인들의 소외문제를 다룬 작품이기때문에 1937년도의 작품이라는게 느껴지지 않는다. 여담으로 여기서 나오는 영감과 속물적이기 그지없는 무용수 딸의 모델이 무용가 최승희와 그의 아버지 최준현이라는 예기가 많다. [11] 1937년에 출간된 단편집의 표제작이기도 하다. <색시>, <우암노인>, <3월>, <손거부>, <까마귀>, <순정>, <바다>, <점경>, <철로>, <장마>, <복덕방> 등 11편이 수록되었다.[12] 시집이나 소설이 아니고 글 쓰기 지침서이다. 文章講話, 强化가 아니다. 여러 번 개정판이 나왔고 지금도 팔리고 있다. 오래 전 나온 책이나 글을 쓰고자 하는 이에게는 이만한 책이 아직 없다.[13] 이 책이 얼마나 권위가 있었느냐 하면, 문장강화에 자신의 글이 실렸느냐 안 실렸느냐가 당시 문장가들의 필력의 잣대였을 정도였다고 한다.[14] 평양 조소문학협회의 주선으로 1946년 레닌그라드 대외문화협회를 방문하면서 쓴 기행문. 여담으로 갈 때는 비행기, 귀환때는 열차를 이용했다. 모스크바, 레닌그라드뿐 아니라 스탈린그라드, 트빌리시, 예레반까지도 다녀왔다. 2016년 국내에서 출판된 이태준 전집 시리즈에서는 이것과 함께 중국 기행도 같이 실렸다.[15] 월북 이후 북한 문화예술지에 기고한 작품이다.[16] 이를 표제작으로 1934년에 단편집이 출간되었다. <불우선생>, <결혼의 악마성>, <서글픈 이야기>, <기생 산월이>, <봄>, <아담의 후예>, <어떤 날 새벽>, <코스모스 이야기>, <꽃나무는 심어놓고>, <달밤>, <아무 일도 없소>, <실락원 이야기>, <은희부처>, <촌뜨기>, <천사의 분노>, <미어기>, <마부와 교수>, <어떤 화제>, <만찬> 등 19편이 수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