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리
1. 개요
한국의 소설가이자 시인. 황순원과 함께 한국 현대 소설을 대표하는 작가이다.
주로 순수문학을 창작하였고 고유의 토속성과 외래사상과의 대립을 통해 인간성의 문제를 그렸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인간과 이념의 갈등에 주안을 두었다. 대표작으로는 《화랑의 후예》, 《무녀도》, 《역마》, 《황토기》, 《등신불》 등이 있다.
결혼을 3번 하였는데 첫째 부인은 김월계(김동리보다 6살 연하, 1940년 결혼, 1966년 이혼), 둘째 부인은 소설가 손소희(4살 연하, 1948년 재혼, 1987년 사망), 셋째 부인은 소설가 서영은이다. (30살 연하, 1987년 재혼)[1]
자식으로는 법조인 김평우(김월계 소생, 차남)와 기업가 김기홍(5남) 등이 있다.
2. 생애
1913년 경북 경주 성건리에서 아버지 김임수(壬守)와 어머니 허임순(許任順)의 5남매 중 3남이자 막내로 태어났다. 본명은 김시종이다. 이 본명과 동리라는 이름은 큰형인 김범부(범부는 호이고 이름은 김정설)가 지어주었다. 김범부에 대해서는 여기를 참고. 괴물 형 아래 괴물 동생이 태어난 셈이다.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김동리가 형인 김범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것이 중론이며[2] 화랑의 후예에 나오는 숙부의 모델도 김범부라고 한다.[3] 서울로 올라와 경신고등보통학교[4] 4학년에 재학하다가(현재로 치자면 고1) 중퇴하였다.
1934년 <조선일보> 신춘 문예에 시 '백로'가 입선하면서 등단하였다. 이듬해 <조선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화랑의 후예'가 당선되며 소설가로서도 등단하게 된다. 1937년 서정주, 김달진 등과 '시인 부락' 동인으로 활동한다. 그리고 1941년 절필하기까지 21편의 글을 쓰고 세대논쟁[5] 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중일전쟁이 길어지면서 일제의 압력이 피부로 느껴질 때가 되자 절필한다. 그리고 절필한 뒤로는 일제의 징용을 피해 사천의 양곡배급소에서 일하였다.
1945년 광복을 맞아 임화 등이 ‘조선문학건설본부’ 등을 조직하고 ‘조선문학동맹’으로 통합하자 전조선문필가협회에 참가한다. 여기에 별도로 미당 서정주 등과 함께 조선청년문학가협회를 만들며 좌익계열과는 대립각을 세운다. 하지만 당대 관심은 조선문학동맹 쪽에 더 기울었다. 한때 미군정에서 여론조사를 했을 때 남한의 70%가 사회주의계 정파를 지지하였으니 이는 지식인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6]
해방공간에서 우익의 민족문학론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나갔다고 보면 되지만 사실 당시에는 문학가를 가장해서 좌익공격에 앞장선 이들도 있었던 터라 김동리의 행보를 이념적으로 재단하기는 애매하다. 오히려 우파 문단 쪽에서는 김동리가 '''순수문학에 경도'''되었다고 배척하기도 했다.
이때 그는 소설집《무녀도(巫女圖)》(1947) 《역마(驛馬)》(1948) 《황토기(黃土記)》(1949)들을 출간한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고 동족상잔의 비극을 목도하게 되자 과거 토속성과 외래문화의 대립에 따른 인간성을 그리던 작품에서 어느 정도 이동하여 인간과 이념의 갈등을 주로하는 작품을 썼다. 이 시기에 속하는 작품으로는 《귀환장정(歸還壯丁)》(1951) 《실존무(實存舞)》(1955) 《사반의 십자가》(1958) 《등신불(等身佛)》(1963)이 있다.
1947년 청년문학가협회장, 1951년 동협회부회장, 1954년 예술원 회원, 1955년 서라벌예술대학 교수, 1969년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1972년 중앙대학 예술대학장 등을 역임하였다. 1973년 중앙대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1981년 4월 예술원 회장에 선임되었고, 1983~1989년까지 문협 이사장을 또 맡았다.
1990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투병생활을 하다 1995년 81세로 사망하면서 첫 번째 부인 김월계와 합장되었다.[7]
쓰러지면서 후처 관련 재산분쟁으로 나름 여성지에 오르내리기도 했다..[8]
2.1. 문학적 성향
스스로 그의 작품을 3개의 성향으로 나누었는데, 하나는 말 그대로 한민족의 삶과 정서를 다룬 《역마》, 《무녀도》 등의 작품이 있다.
또한 다른 하나는 우리 삶을 다룬 리얼리즘 성향의 작품으로써 대표작은 《까치소리》, 《혈거부족》, 《광풍 속에서》가 있다.
나머지 하나는 '예술'에 관련된 것으로 그는 이를 장편으로 시도했으나, 문학적인 평가는 그리 좋지 못하였다.
3. 기타
정치적으론 우파였으나 좌파 성향의 젊은 문인들을 차별없이 끌어안아,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험악한 시대에 외부에서 오는 화살을 막아주는 우산 역할을 해주었다.
서라벌예대 시절 좌익의 혈육이라는 따가운 시선 아래 여러 가지로 압박을 받고 있던 이문구를 제자로 받아들였고 경찰에서 나와 이문구를 조사하려고 하면 "내 제자보고 왜 그래?"라고 실드를 쳐주었다고 한다. 게다가 이문구의 문재를 알아보고 여러모로 도움을 주었으니 여러모로 이문구에게는 아버지 같은 사람이었다고. 이문구 자신도 일가가 참혹하게 살해된 걸 알았기에 김동리에게 은덕을 입었다고 생각했다.[9]스승님의 실드 이문구는 해마다 설이면 빼먹지 않고 김동리를 찾아 세배를 올렸다. 평소 사람좋기로 유명했지만 행여나 누가 김동리를 정치적으로 비난하면 정색하고 맞섰으며 일평생 보수와 진보 문인들을 상호 연결해주며 사상에 구애되지 않고 모두와 교분을 다진 적도 있다.[10]
서라벌예대 시절 가르쳤던 제자들이 모두 등단했다는 것은 전설로 통한다. 가장 유명한 작가는 전업작가로 활동할 생각은 하지않고 교편을 잡던 박경리. 직계 제자는 아니지만 가정 주부로 지내던 강신재를 추천해 등단시켰고, 한국전쟁으로 부산에 체류할때 국졸이 최종학력으로 해병대 복무중이었던 오유권이 가르침을 청하자 선뜻 받아들여 문학을 가르쳤다. 이외수 역시 그가 1970년대에 김동리의 추천으로 전업소설가로서 활동하는데 큰 도움을 받았다.
남민전 사건 재판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구속 문인들의 석방을 위한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었는데, 한 문인 모임에서 김남주 시인에 대해 '김남주는 철저한 공산주의자가 분명하므로 절대 석방해서는 안 된다'고 발언하면서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소속 문인들의 공개 비판을 받았으며, 명예교수로 재직 중이던 중앙대 문창과 학생들은 퇴진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이는 등 큰 파문으로 이어진 적이 있다. 결국 문창과 교수들이 제출한 해촉 의견서가 받아들여져 1988년 9월 명예교수직에서 물러났다.
이문열과 같이 보수적인 문인들과 김지하를 필두로 진보적인 문인들이 어우러져 문단계의 좌우대립이 계속 지속되었지만 차마 김동리에겐 그러지 못했다. 이념을 막론하고 이미 문단 원로였던 김동리는 제자들이 많아 위상이 높았고 그의 큰형인 전 국회의원이자 동양철학계 거두인 김범부[11] 의 존재감 역시 거대했기 때문에 명예교수직에서 물러나게 하는 정도가 한계였다. 그래도 이미 문단 원로이기도 했던 김동리의 위치도 있고 김남주같은 경우가 워낙 특이했던지라 당시 진보적인 문인으로 이름높던 최인훈이나 신동엽,김수영[12] 과도 큰 마찰없이 잘 지냈고 본인을 공격하며 이름을 알리기도 했던 이어령과도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1989년 8월 18일에 김동리, 황순원, 전숙희, 김남조 등 원로 문인 36명이 '당면한 시국을 염려하는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 이들은 '폭력혁명 세력의 선전도구 구실을 일삼고 있는 일부 목적주의 문학집단을 배격한다'고 밝히고 정치권에 대해 '국론 분열을 조장하는 문익환, 황석영, 임수경, 문규현 등 일부 불순세력의 준동에 대해 시비를 분명히 가릴 것'을 촉구했다. (황석영,수인 1권, 문학동네 2017, p295)
경주 토함산 석굴암으로 들어가는 길에서 조금 빠지면 동리목월 문학관이 있다.
문인들 사이에서도 유명한 주당이었다.
4. 대표작
[1] 하지만 그전부터 연애관계였다. 80년대 정서로 볼 땐 늦둥이 딸뻘 수준. 김민희와 홍상수 스캔들의 원조가 문학판에서 일어났다고 생각하면 된다. 당시엔 오만 여성지에서 다 다뤘던 관계.[2] 심지어 첫 부인인 김월계의 경우 ‘걷는 모습이 얌전하다’는 말로 허락을 하자 당장 결혼했을 정도. 개신교 미션스쿨에서 다녔음에도 그의 소설에서 등장하는 사상이 전통적인 사상들이라거나 유교나 불교에 해당하는 것이 많은 것도 이 형의 영향을 받은 때문이다. 둘째 형은 경주에서 건어물 상을 하고 있었다고.[3] 나이 차이가 16년은 더 나니 숙부 같았을 수도 있겠다.[4] 현 서울경신중학교, 서울경신고등학교의 전신이다.[5] 유진오가 <문장>지에 <순수에의 지향>이라는 평론을 발표하자 김동리가 <순수이의>로 반박하고 김환태가 <순수시비>로 김동리에 찬동하자 벌어진 논쟁이었다. 순수문학논쟁이라 불리기도 하나 이 논쟁 자체는 신세대와 구세대의 문학관의 차이에서 온 논쟁이었으므로 세대논쟁이라 칭한다. 즉 표면적으로는 세대론, 내면적으로는 순수성우뢰액문제를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진 것. 이후 일제의 폭압 등 외부적 요소에 의해 시들해졌다가 광복이 되고 나서 새로이 논쟁에 불이 붙는다.[6] 하지만 이런 상황은 공산당의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이후 뒤집힌다.[7] 그런데 김동리는 손소희가 옆에 묻히기를 바랐다는 말이 있다. 그게 사실이면...[8] 결과는 세 번째 부인이던 서영은의 패소. 첫번째 부인이던 김월계 소생의 자식들이 똘똘 뭉쳐(손소희, 서영은과의 결혼생활 중 자녀가 없었다) 유산 관련해서는 정말 아무것도 주지 않고 서영은을 말 그대로 쫓아냈다. 너무 말도 안 되는 결과라 김동리 생전에 아내들 묏자리까지 다 정해놨는데 첫째부인쪽 자식들이 억지로 합장시켰다느니 하는 등 많은 루머가 여성지를 뜨겁게 달궜는데, 참고로 자식들 측의 변호인은 첫 부인 김월계의 차남 김평우였다.[9] 이문구의 형은 서북청년단에게 가마니로 싸져서 바다에 '''수장되었다'''. 분지 논쟁 때 작가들이 서로 간에 쉴드친 것을 보고 '''자신이 살려면 문단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10] 이문구는 아래 언급되는 자유실천문인협의회에 참여했으나, 스승인 김동리가 공격받자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지도부를 공격하고 탈퇴를 선언한다.[11] 1966년 사망[12] 후에 김수영의 1주기 때 박목월과 함께 추도시를 작성하고 김수영의 시비를 세우는데 도움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