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용

 



<colbgcolor=#878787><colcolor=#ffffff> '''성명'''
정지용(鄭芝溶)
'''이명'''
정지룡(鄭池龍)
'''본관'''
연일 정씨[1]
'''출생'''
1902년 6월 20일
충청북도 옥천군 읍내면 향청리
(현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하계리)[2]
'''사망'''
1950년 9월 25일 (향년 48세)
평양직할시 또는
경기도 양주군 이담면으로 추정
'''학력'''
옥천공립보통학교 (졸업)
휘문고등보통학교 (졸업)
도시샤대학 (영문과 / 학사)
1. 개요
2. 생애
3. 이야깃거리
4.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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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흔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늬는 산새처럼 날러갔구나!

-「유리창 1」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향수」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

보고 싶은 마음

호수만 하니

눈 감을 밖에.

-「호수 1」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꿩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

-「고향」

정지용(鄭芝溶, 1902년 6월 20일 ~ 1950년)은 대한민국시인이다. 본관은 연일(延日), 아명은 지용(池龍), 세례명프란치스코(方濟角)이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납북되었고 사인은 폭사로 추정된다.


2. 생애


1902년 6월 20일 충청북도 옥천군 읍내면 향청리(현 옥천군 옥천읍 하계리)[3]에서 아버지 정태국(鄭泰國)과 어머니 하동 정씨 정미하(鄭美河) 사이의 4대 독자로 태어났다. 옥천공립보통학교휘문고등보통학교, 도시샤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1926년 『학조』 창간호에 「카페·프란스」를 발표하면서 등단하였다. 서정주, 이용악과 함께 한국 시단의 3천재로 불리우던 오장환의 스승이기도 하다. 구인회의 창립멤버이기도 하였고 일제의 탄압이 이어지자 모더니즘, 그 중에서도 이미지즘에 눈을 돌리기도 하였다. 그 결과는 1941년에 출판된 그의 시집 《백록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시집은 청록파에 영향을 주었다.
청록파(조지훈, 박목월, 박두진)와 윤동주, 그리고 이상은 그가 추천하였다.[4] 그리고 일제와 미국과의 전쟁이 시작된 1942년 이후 붓을 꺾고 글을 쓰지 않았다.
1945년 8.15 광복 후 좌파 문인 단체인 조선문학가동맹의 아동문학분과의 위원장이 되었으나 문학 활동은 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대신 문학 외의 글을 투고한 흔적이 남아있는데, 그의 일반적인 문학작품 이미지를 생각해보면 과격한 어조의 글도 종종 보인다. 이 시절 투고한 글 중에서 일본의 침략자 근성을 비난할때 모모타로를 언급하면서 섬나라 도둑근성 동화라면서 디스하기도 하며 대만 원주민에 대한 기고를 한 적도 있다. 그리고 좌우의 대립이 극렬해지자 월북을 선택한 동료들과는 달리 전향을 선택, 보도연맹에 가입했다. 그런데 그 전향한 것도 보도연맹 입안추진자였던 오제도가 정지용에게 가서 강요로 가입해달라고 재촉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6.25 전쟁이 터지고 피난길에 오르지 못한 채 서울특별시에 남아 있게 된다.
그리고 인천 상륙작전이 끝나고 수복한 서울에서 그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한 때 납북된 것인지 월북한 것인지를 확인하지 못해 1988년 7.19 해금조치를 통해 그의 시가 해금되기 전까지 정X용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다. 현재 그의 사인은 납북되던 중 소요산 부근에서 폭격에 휘말려 사망하였다는 것이 가장 유력하다. 기사 이 증언은 북한 시인 박산운이 정지용과 함께 납북되던 중 정지용의 최후를 목격했던 소설가 석인해의 이야기를 소개한 회고문을 통해 알려졌다. 다만 주의할 점이 박산운은 정지용이 자진해서 월북하다가 소요산에서 폭격으로 사망했단 식으로 말하고 있는데, 정지용이 소요산에서 사망한 것은 맞는 걸로 보이지만 자진월북 운운은 박산운이 정치적 의도에서 포장하기 위한 목적으로 보인다는 분석이다. 그것을 제외하면 정지용의 사망 당시 정황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단 점에서 신빙성이 높은 증언이라 보인다. 이 증언이 소개되기 전까진 평양으로 끌려가 감옥에 투옥되던 중에 폭격으로 사망했다는 것이었다. 역시 평양감옥까지 끌려갔다가 탈출한 계광순 전 의원(1909~1990, 4, 5, 6대 국회의원 역임)의 증언으로 계광순은 자신은 9월 23일 탈출했지만 정지용은 감옥에서 폭격으로 사망했다고 증언한 바 있었다.
그러나 이와 별개로 정지용이 월북한 후 북에서 활동하다 숙청 혹은 탄광행이 되었다는 말도 있어서 확실한 건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2000년에 북한에 있던 셋째 아들(정구인)이 아버지 정지용을 찾겠다고 이산가족 상봉 신청해서 찾아온 적이 있다. 상봉대상자에 아버지, 어머니, 형, 조카를 다 넣은 것. 결국 큰 형(정구관)과 상봉했는데, 아버지의 행방을 묻는 형에게 북으로 가던 중 폭격으로 사망했다는 주장을 되풀이했다. 숙청이나 탄광행이라면 유가족이 이렇게 활동할 리는 없을 거라는 점에서 정지용의 월북 가능성은 낮은 것으로 보인다. 당시 정구인은 량강도 방송위원회 중서군 주재원 책임기자로 일하고 있다고 밝혔었다.
북한의 조선대백과사전에 의하면 정지용의 사망일자를 9월 25일로 쓰고 있다. 다만 조선대백과사전에선 정지용의 사인에 대해선 밝히지 않고 있다.
자녀로는 3남 1녀가 있다. 앞서 언급한 정구관, 정구익, 정구인, 정구원이다. 이 중 정구인은 북한에 남았으며 정구익은 한국전쟁 때 병사했다. 장남인 정구관과 딸 정구원은 남한에 남았다. 장남인 정구관은 정지용이 1988년 해금 조치된 직후 '지용회'를 세우고 정지용의 복권 활동을 행했다. 이 지용회에서 매년 정지용 문학상을 발표한다.

3. 이야깃거리


  • 군사정권 시절때, 그에 대해서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금기'의 대상 자체였다.(코렁탕)[5] 모 월간지에선 정지용의 자진월북설을 제기해서 논란이 된 적이 있다. 그 기사에 의하면 정지용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있었는데 모윤숙[6]이 정지용의 행방을 거제도에서 필사적으로 찾았지만 정지용이 자신의 신분을 끝까지 감추고 북한행을 선택했다는 것. 그러나 이 기사는 정지용의 유족들이나 지인들에 의해서 터무니없다는 소리만 들었다.
  •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향수>, <유리창1>,가 있다. <향수>의 경우 가곡으로도 나왔기때문에 이쪽으로 알 사람도 꽤 될듯. 가곡 <향수>의 인트로는 90년대 모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보릿고개시대를 소재로 한 코너의 삽입음으로도 쓰였다.
  • 노태우 정부 시절 전까지는 친북인사로 규정되는 바람에 시가 교과서에 실리지 못했다고 한다. 전두환 정부 시절까지는 정지용 시인이라는 인물 자체가 대한민국 정부 공인의 친북 성향 문인으로 낙인되어서 그의 시작(詩作) 대부분이 모두 금서목록으로 지정되었기 때문인데 당시 서점 및 출판계에서도 정지용 시인에 대한 시집을 출간할 수 없었고 당시 정지용 시인의 시집을 출간할 경우 국가보안법으로 처벌받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출판계 어느 곳도 정지용 시인의 시집에 대한 출간이나 출판을 꺼려했던 것으로 알려졌다.[7][8] 1988년에 정지용 시인 시작들이 금서목록에서 해금되면서 이 때부터 출판계에서 본격적으로 정지용 시인의 시집이 뒤늦게 출간되었다. 그래서 40대 이상 되는 어른 중에는 정지용의 시가 수능 시험 등에 출제되는 것을 매우 신기하게 여기는 경우도 많다.
  • 정지용 시에 가락을 붙여 만들었던 노래들이 금지곡 지정을 면하고자 가사를 바꾸게 되는 일도 많았다. 가장 대표적인 노래가 채동선의 고향. 박화목이 개사한 망향, 이은상이 개사한 그리워로도 알려져 있다.

  • 출생지인 옥천군에서는 정지용시인을 기념하는 지용제가 매년 개최하고 지용제 중에 지용문학상도 진행된다. 생가도 있는데, 가보면 동명이인 정지용의 싸인을 많이 볼 수 있다. 옥천역에 그의 시비가 있다.#
  • 일본 교토 도시샤대학은 그가 나온 학교이며, 윤동주와 함께 시비가 세워져 있다. 교토를 찾는 한국인 관광객들이 간간히 들러는 곳이기도 하다.
부천시 소사본동에 은거지 터가 있다.로드뷰

4. 시


별똥 떨어진 곳
마음에 두었다
다음날 가보려
벼르다 벼르다
이젠 다 자랐소.
[1] 감무공파 27세 '''용(溶)''' 한(翰) 영(英) 식(植) 수(洙) 항렬.[2] 출생지인 39번지에 정지용생가가 있다.[3] 부친 정태국 대 까지는 옥천군 동이면 수북리 꾀꼴마을의 연일 정씨 집성촌에서 거주했다고 한다.#[4] 1933년에는 《가톨릭 청년》의 편집 고문으로 있으면서 이상의 시를 실어 등단 시켰고 1939(38세)에는 문장지의 시부문 추천위원이 되어 조지훈, 박두진, 박목월, 김종한, 이한직, 박남수 등을 등단시켰다. 마지막으로 윤동주는 강처중과 정병욱의 요청에 따라 추천사를 써주며 등단시킨 셈.[5] 전두환 정권시절때인 1982년, 정보당국에 고용된 익명의 필자가 '추적 정지용'이라는 단행본을 펴냈는데, 이 책은 저자가 실존인물인지 자체가 불명이다. 책의 구성을 보면 정지용에 대해 어떤 정치적 이미지를 고정하려는 목적으로 다른 잡다한 언설로 시종일관하고 있어, 사실에 관한 논의를 '마녀사냥'식 사상논쟁으로 몰고가려는 의도가 아주 강한 내용이다.#[6] '렌의 애가'로 유명해서 사전에도 실려있다. 친일인명사전[7] 부득이 이를 출간해도 통일원(현재의 대한민국 통일부) 및 통일원 장관의 특별 허가가 내려져야 출간이 가능하겠지만 시기가 그런지라 이 역시 쉽지 않았다.[8] 본래 출판 관련은 현재의 문화체육관광부의 소관이지만 정지용 시인의 시집들은 당시 기준으로 정부 공인 금서목록으로 지정되었고 또한 친북 인물로 지정되었기 때문에 당시 통일원의 특별 허가가 있어야만 출간이 가능하였다. 다만 단순 열람이나 상업 판매보다는 대부분 학술 및 연구 목적으로만 허가가 가능하였다. 납북으로 인정되어 해금된 1988년부터는 이같은 절차가 폐지되어서 문화체육관광부의 고유 소관하에 정지용 시인의 시집의 출간이 허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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