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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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002년에 열린 17회 FIFA 월드컵.
역대 월드컵은 물론 주요 국제 스포츠 대회 중 2개의 나라에서 처음으로 공동개최된 대회이며[2] 21세기에 열린 첫 번째 월드컵이자 아시아에서 열린 첫 월드컵이다. 또한 국내 최초로 '''HD'''로 생중계된 월드컵이다.[3]
2002년 5월 31일부터 2002년 6월 30일까지 32개국이 대한민국과 일본에 각 10개씩 위치한 무려 총 20개 경기장에서 64경기를 치렀다. 이는 양국이 모두 대회 단독 개최를 상정하고 경기장 건설/보수 계획을 세웠는데, 대회가 공동 개최로 결정된 뒤에도 이 계획을 그대로 진행하는 바람에 결국 역대 가장 많은 경기장에서 치러진 월드컵이 된 것. 이 때문에 일본 측에서 32개국 출전, 64경기 → 40개국 출전, 96경기로 늘려달라고 FIFA에 강력히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경기장 하나당 고작 서너 경기만 열렸다. 실제로 무려 2,000억을 들여 지은 서울월드컵경기장도 개막식과 개막전을 포함해 고작 세 경기만 열렸다. 그나마 그 세 경기들도 입장권 시스템 오류에 비인기 경기들만 개최되어 만석을 못 채웠다.
보통 월드컵은 유럽의 프로축구리그 일정에 맞춰서 6월 중순 ~ 7월 중순에 열리는 경우가 많지만, 대회가 열리는 대한민국과 일본은 이 시기가 장마철이기 때문에 대회 16강 토너먼트 이후의 경기 일정에 차질이 생길 것을 우려해서 시기를 조금 앞당겼고, 결국 5월 31일에 개막하여 6월 30일에 폐막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4]
2002년 대한민국을 뒤덮었던 대한민국 축구 역사상 최전성기. 6월 한 달간 대한민국은 말 그대로 붉은색 물결로 완전히 뒤덮였고, 언론 역시 '스포츠 뉴스' 코너가 아님에도 일제히 월드컵 관련소식들만 줄곧 보도할 정도였다.[5] 월드컵이 끝난 7월에도 열기가 남아서 월드컵 관련 뉴스들이 계속해서 등장하거나 예능에서도 월드컵을 소재로 방송을 많이 했었다.
2. 대회 정보
2.1. 공식 명칭
최종확정된 대회 공식 명칭은 '''2002 FIFA World Cup Korea/Japan™'''(한글명: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6] )이다.
본래는 2002 FIFA World Cup Japan/Korea™ 될 예정이었다. 이에 정몽준은 왜 일본이 대한민국 앞에 오냐며 항의했고 제프 블라터 당시 FIFA 사무총장은 영어 알파벳 순서상 J가 K보다 먼저와서 어쩔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여기에 정몽준은 FIFA(Fédération Internationale de Football Association)는 프랑스어를 쓴 단체이기 때문에 프랑스어를 먼저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결국 이게 먹혀서 프랑스어로는 Corée라고 표기하는 한국이 앞선 Korea/Japan으로 정정되었다는 얘기도 있다. 결국 '''어느 나라에서 어떤 언어를 쓰더라도''' 개최국이 포함된 대회명을 언급한다면 '''한일'''로 표기하도록 결정되었다. 영국 가디언지 기사아카이브[7]
그런데 공식 명칭이 결정된 후에도 일본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일한 월드컵이라고 표기하기 시작한다(…). '''사실 결승전을 일본에 넘기는 대신 대회 명칭을 Korea/Japan으로 표기하는 것으로 사전에 일본과 협의했다.''' 그러나 대회를 앞두고 일본이 임의로 협약된 명칭을 어기고 Japan을 앞에 두기 시작하자 사전 협의를 이행할 것을 한국 측이 촉구. 그 과정에서 정몽준이 협의사항을 언론에 공개했다. 당시 정몽준은 Japan을 앞에 표기하고 싶다면 결승전을 포기하라는 식으로 강하게 항의했고 당시 MBC 기사아카이브 이에 한 발 물러선 일본은 대회 기간 동안은 되도록 공식 표기인 Korea/Japan을 사용했다. 조직위 외의 일본 매체에서는 대개 대회 공식 브랜드인 'FIFA 월드컵'으로만 표기하면서 '일한 공동개최'로 수식하는 식으로 에둘러 표기하였다. 외국에서도 2010년 즈음까지 Japan/Korea 월드컵이라 부르는 경우가 적지는 않았다.
그런데 명칭 때문인지는 몰라도 2002년 월드컵의 주체를 일본보다는 한국으로 알고 있는 외국인들이 많다. 뭐니뭐니해도 대회기간 내내 한국 팀이 너무 성적이 좋았기 때문이다.
2.2. 주제가
- 원래 FIFA에서 지정한 대회 공식 음악은 미국 가수 아나스탸샤(Anastacia)의 'Boom'이었으나, 대회 조직위원회의 의사를 반영하지 않은 채 제멋대로 정한 터라 정작 개최국인 대한민국과 일본 사람들의 외면을 받게 되었다. 오히려 유럽과 대만에서 그럭저럭 좋은 성과를 보인 편. 이 공식 앨범에는 한국 대표로 god가 부른
도 수록되어 있었지만, 그다지 좋은 평을 받지 못했고 월드컵 특수를 누리지도 못했다.
- 대회 조직위원회는 독자적으로 음악을 선정하여 나온 것이 박정현과 나얼(브라운 아이즈) (이상 '대한민국'), 그리고 케미스트리#s-2, 소웰루 (이상 '일본')이 부른 'Let's Get Together Now'. 대회 개회식과 폐회식에서도 이 노래가 불려졌지만, 윤도현의 '오 필승 코리아'나 조수미의 'Champions' 같은 노래에 비해서는 흥행하지 못했다.
- 그리스 작곡가 반젤리스(Vangelis)가 한국의 아리랑과 사물놀이[8] , 일본의 전통 북[9] 소리를 조합해서 만들어냈다는 공식 입장가(入場歌) 'Anthem'은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 곡을 편곡한 JS Radio Edit 버전도 널리 활용되었다.
2.2.1. 응원가
대회 공식 주제가보다 월드컵 특수와 맞물려 나온 여러 노래들이 인기를 얻었는데, 특히 클론의 '월드컵 송'과 '발로 차'[10] , 윤도현 밴드의 '오 필승 코리아'만 울려퍼졌던 2002년 여름이었다.[11] 거기에 추가로 크라잉 넛의 '필살 오프사이드'나 레이지 본의 'Go West'(펫 샵 보이즈 버전의 리메이크) 정도가 인기있었다. 그리고 월드컵이 끝난 후에 축구 응원가와 헌정가요 등을 모은 붉은 악마 공식 음반이 유니버설 뮤직을 통해 출시되기도 했다.
조수미의 Champions(챔피언)도 대호평을 받았다. 이 때문에 반젤리스의 입장가와 함께 2002년 월드컵 관련 영상의 단골 BGM으로 사용되고 있다.[12]
2.3. 엠블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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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 왼쪽의 엠블럼이 대회 엠블럼으로, 이 엠블럼의 도안은 한일 월드컵 이후부터 월드컵을 상징하는 공식 도안으로 몇 번 사용되었다. 이후 2006년 독일 월드컵,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엠블럼에도 같이 포함되어 나왔고, 2014년 브라질 월드컵부터 사라졌다. 아마 FIFA가 IOC의 오륜기처럼 월드컵 로고에 일종의 관습적인 상징을 만들려고 하던 시도했으나 반응이 좋지 않아 흐지부지 된 듯하다. 2014년부터 월드컵 로고는 월드컵 트로피를 바탕으로 디자인하고 있다. 참고로 엠블럼이나 로고는 개최국이 아니라, 개최국의 요청 사항을 참고로해서 FIFA의 마케팅 대행사에서 제작한다.
한국의 경우 유치 전부터 현재의 엠블럼이 확정되기 전까지는 2002 World Cup Korea 로고를 많이 사용하였다.[13] 일본도 마찬가지로 이 무렵에 2002 World Cup Japan 로고를 사용했다.
2.4. 마스코트
'엠블럼' 문단에 첨부된 사진을 참조. 대회 마스코트는 월드컵 역사상 최초로 단일 마스코트가 아닌 3가지 유형의 마스코트로 만들어졌으며 3D로 제작되었다. 정식 명칭은 아트모(Atmo). 스페릭스(Spheriks)라고 불리는 외계인 종족인 이 마스코트는 코치를 상징하는 아토(Ato)와 2명의 선수를 상징하는 니크(Nik), 캐즈(Kaz)로 이루어져 있다. 공동개최라는 대회 특성상 마스코트도 특정국가의 상징물에서 벗어나 외계인을 모티브로 삼았으며 디자인도 영국의 인터브랜드(Interbrand)에서 맡았다. 인기는 별로였다.
마스코트를 이용한 만화와 애니메이션도 제작되었다. 제목은 스페릭스. 애니메이션은 TV판과 극장판을 모두 만들었다. 아동용으로 그냥저냥 무난하다는 평가를 받는 듯하지만 대중적으로 그리 큰 성공은 거두지 못했고 이런 마스코트가 보통 그렇듯 대회가 끝난 뒤에는 잊혀졌다. 한창 대회가 진행되는 동안에 국내에서도 재능TV와 KBS 2TV를 통하여 방영되었다.
여담인데 한국에선 진돗개랑 삽살개를 한국 측 마스코트로 정해야 한다고 논쟁을 벌인 바 있다. 진도군에선 '진돗개를 2002년 월드컵 마스코트로!'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자체로 마스코트 도안까지 만들어 크게 홍보전을 펼쳤으며. 한국삽살개보존회에서는 '독도 지킴이 삽살개'라는 인터넷 홈페이지를 개설한 후 월드컵 마스코트 지정 운동을 벌였다. 하지만 보다시피 결론은 둘 다 김칫국 마시는 소리로 끝났다. 애초에 독도 이야기가 나온 시점에서 일본이 동의할 수가 없는 문제다.
1988 서울 올림픽의 호돌이나 2018 평창 동계올림픽/2018 평창 동계패럴림픽의 수호랑과 반다비는 캐릭터 인형이 없어서 못 팔 정도로 꽤 성공적이었는데, 2002 월드컵의 마스코트는 과연 기억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지 할 정도로 인기가 없었고 캐릭터 인형이 있더라도 거의 땡처리 판매 신세였다.
2.5. 공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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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공인구로는 피버노바가 사용되었다. 열정(Fever)과 신성(Nova 新星)의 합성어로 기존의 축구공과는 다른 화려한 디자인이 특징이다. 1978 FIFA 월드컵 아르헨티나 이후로 오랜만에 새 디자인을 적용한 사례. 흰색 바탕에 돌개무늬가 4개 그려진 디자인이었다. 그 때문인지 처음 공개되었을 당시에도 상당한 화젯거리였다. 그래서 골키퍼들이 뜬 공을 처리할 때 고생이 많았다고 한다. 한국어나 일본어가 아닌 제3의 언어를 사용했다. 그래도 마스코트에 비하면 축구공 자체의 인기는 디자인 자체가 특이해서 꽤 좋았다. 당시 학생들이 갖고 놀던 축구공 대부분이 피버노바였을 정도로 인기였으며, 비슷하게 생긴 복제품도 많았다. 특수 기포강화 플라스틱을 사용해서라고 하는데 공이 가벼운 편이다.
2.6. 경기장
2.6.1. 개최도시 선정 및 주 경기장 문제
본 대회를 전후로 열린 1998년, 2006년 월드컵은 동네가 동네이니만큼 거의 모든 경기장이 재활용, 리모델링이었다. 하지만 2002년의 경우, 축구 인프라가 열악한 한국에선 아쉬운 대로 서울올림픽주경기장을 재활용하려고 밑밥을 깔다가, 대회 준비 과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도 전부터 지리한 말싸움의 장을 열고 말았다.
"잠실 주경기장 재활용" 떡밥을 덥썩 문 서울시청에서는 "설마 서울을 개최지에서 제외하겠어?"라는 안이한 판단하에 개최 당시 내걸었던 경기장 신축 약속을 뒤집는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안 그래도 IMF 외환위기 여파에 허덕이고 있는데 자금은 어디서 조달할 것인가?" 운운하면서 경기장 신축에 부정적인 여론이 차츰 표면화되었고, 이는 곧 서울에 축구전용구장을 굳이 만들어야 하는가에 대한 논쟁으로 이어졌다. 이윽고 서울 전용구장의 대안으로 잠실종합운동장 리모델링, 인천문학경기장 증축, 수원월드컵경기장 주경기장 선정, 신축 돔구장과 겸용 등등 별의별 안이 나왔지만 결국에는 1998년 5월 6일 김종필 총리 서리의 주재로 열린 국무회의에서 상암동 주경기장 신축안을 확정하였다.
잠실 리모델링 안은 상암신축 비용을 능가하는 초월적인 금액이 나온데다가 FIFA 실사단 평가에서 최악의 평가를 받아 폐기되었고, 문학경기장의 경우는 "주 경기장이 수도에 없는 게 말이 되느냐?"는 여론이 지배적이었던 데다가 축구전용 구장이 아니라는 이유로 제외되었다. 수원월드컵경기장은 관중석 수 미달로 주 경기장 후보군에서 제외, 돔 구장 신축 안은 뚝섬 돔 경기장 건으로 안 좋은 야구계의 여론, 그리고 신축 약속을 안 지킨 서울시에 대한 부정적 여론으로 인해 실현될 가능성이 적었다. 다만 인천, 부산, 대구는 각각 전국체전, 아시안게임, 유니버시아드로 건설이 이미 확정된 경기장이었다. 그러나 인천 문학 경기장은 착공이 늦어져서 역설적으로 전국체전에 활용하지 못했다.
하지만 알아두어야 할 것은 이 문제가 단순히 한국의 인프라가 열악해서 생긴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일본도 축구인프라는 한국 못지않게(어쩌면 더 심하게) 열악해서 아예 축구인프라를 싹 갈아엎을 심산으로 월드컵을 유치한 것이었다. 다만 일본에서 한국처럼 인프라 신축 - 특히 수도권 주경기장 - 을 두고 서울처럼 큰 잡음이 없었던 것은 '''도쿄가 초장부터 월드컵 유치를 포기'''한 탓이었다. 1960년대에 지은 도쿄국립경기장은 개조로도 FIFA 기준을 맞출 수 없고[14] , 도쿄도 내에 월드컵경기장을 지을 방도도 없었기 때문에 도쿄는 일찌감치 월드컵 대열에서 이탈하고 자연스럽게 사이타마가 월드컵 주경기장 지위를 가져갈 수 있었다. 만약 도쿄국립이 잠실처럼 FIFA 기준을 맞출 방도가 있었다면 이쪽이야말로 막 버블이 꺼지고 있던 시기라 엄청난 논쟁에 시달렸을 것이다.
그리고 서울만큼은 아니지만 꽤나 이슈가 되었던 곳이 전주였다. 이 곳은 종합운동장이 수용인원이 3만 명도 안 되는 데다 당시에는 조명시설조차 없었음에도 개조해서 월드컵을 개최하겠다는 만용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제안이 원체 턱도 없다 보니 결국 전주 월드컵 경기장을 신축하게 된다.
서귀포 월드컵 경기장은 실사단 점수에서 최하위 점수를 받았으나 지역 안배 문제로 포항이 탈락[15] 하면서 자연스럽게 가져가게 되었다.
일본도 그리 좋은 사정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한국보다는 기존 구장을 많이 활용한 편. 다만 일본 역시 월드컵 유치 시점에 운영되고 있던 경기장은 오사카 나가이 및 가시마 스타디움 2개뿐이었다. 양국에 10개씩 모두 20개의 구장에서 경기를 진행했다.[16]
2.6.2. 입지 및 교통
기존에 월드컵을 개최한 유럽과 남미의 경우 시가지 한가운데에 위치한 유서 깊은 대형 축구전용구장들을 개수하여 개최한 경우가 많았다. 반면 한국, 일본 모두 뒤늦게 대도시에 경기장을 신축한 경우가 많은데다 양국 모두 토지 매입 비용이 높은 국가들에 속해 상당수의 경기장들이 도시 외곽에 위치하게 되어 접근성이 불편한 경우가 많았다.
- 한국: 서울과 부산, 인천의 경우 도시 중심부에 위치하거나(부산) 적어도 시가지 경계 지역의 교통 요지[17] 라는 우수한 입지를 가지고 있었다. 수원, 광주는 당시로서는 시가지 외곽이긴 하였으나 그래도 기존 시가지와 무리없이 교통 연계가 가능했던 정도. 물론 지금은 도시 개발이 진행되어 두 경기장 모두 시가지 한복판에 있는 경기장이 되어버렸다. 문제가 제대로 터진 건 서귀포, 전주, 대전, 대구, 울산의 5개 도시였는데, 이 중 대전과 대구의 경우 지하철 연계계획이 충분히 갖춰져 있긴 했으나 중간에 터진 IMF 사태 때문에 개통이 월드컵 이후로 미뤄져 접근성이 매우 떨어지게 되었다. 울산, 전주의 경우 고속도로와 가까이 위치해 선수단이 이동하는 데엔 문제가 없긴 했으나 기존 시가지와 너무 동떨어진 위치에 있다. 서귀포의 경우는 타당성 조사에서도 최하위를 받은 만큼 매우 접근성이 떨어진다.
- 일본: 아무래도 철도교통이 활성화 된 나라고, 당시 기준으로 한국과 인프라 격차가 어마어마한 나라여서 접근성은 나은 편이지만 그렇지 않은 곳도 있다. 무엇보다 일본의 경기장 대부분은 비싼 지가로 인해 한국보다도 더한 외곽지역에 있는 점이 컸다. 요코하마같이 신칸센 역과 인접한 극강의 접근성을 갖춘 곳도 있고, 사이타마나 삿포로, 이바라키, 오사카, 시즈오카 등은 철도역 하나씩은 다 달고 있긴 했으나 그 와중에 오이타, 미야기 경기장은 접근성이 떨어진다.
2.6.3. 사후 활용
- 대한민국: 2002년 월드컵 이후 경기장은 지었으나, 홈 클럽이 없던 서울특별시, 대구광역시, 인천광역시, 광주광역시, 제주특별자치도는 경기장 활용 목적으로 골머리를 앓게 된다. 결국 한국프로축구연맹을 비롯해 수천억 원을 들여 지자체에 축구장을 건설한 지역장들은 지자체가 축구단 만들어서 쓰면 되지라는 발상을 하게 되고, 최종적으로 월드컵 경기장이 있는 도시 중 연고 팀이 없던 지역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축구단들이 생겨난다.
부산아시아드주경기장은 아시안 게임, 인천문학경기장은 전국체전, 대구스타디움은 하계 유니버시아드와 세계육상선수권대회 개최, 광주월드컵경기장은 하계 유니버시아드 유치등등 월드컵 이후에도 많은 스포츠 행사에 사용되었으며 축구전용구장들도 모두 프로구단들이 입주해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경기장 활용이 아주 안 된것은 아니지만 애초 목표로 내걸었던 흑자 경영은 주변 개발이 잘 이뤄져 상업시설의 활성화에 성공한 서울월드컵경기장과 역시 주변지역이 대규모 택지지구 및 공원으로 개발된 광주월드컵경기장 정도 빼면 사실상 실패한 것에 가깝다. 현재 운영권은 인천문학경기장을 빼면[18] 모두 지자체라, 대부분 지자체 조세수입을 축내는 상황. 그렇다고 기업에 운영권을 넘길 수도 없는 것이, 경기장은 비업무용 부동산으로 분류되어서 중과세 대상이 되기 때문에 기업 입장에서는 소유하기보다는 임차하는 게 상대적으로 비용이 덜 먹힌다.
축구뿐만 아니라 - 일본: 대부분의 연고 J리그 구단이 월드컵 경기장과 기존 경기장을 공용하는 형태이다. J리그가 복수 홈 경기장을 유지하는 이유 중에는 기존 경기장이 시립 또는 모기업 소유이고 월드컵 경기장이 현립이어서 양측의 이해가 엇갈리는 탓이 크다. 이 때문에 매 경기 3만 명 이상 가볍게 동원하는 우라와조차 2009년까지는 매년 한두 경기쯤은 기존 고마바 스타디움(21,500명 수용)을 사용했다. 반면 미야기나 시즈오카는 그야말로 허허벌판에 뜬금없이 박혀있는 입지 탓에, 거꾸로 기존 경기장을 기본으로 연간 1~3경기 정도를 소화하고 있다. 시즈오카는 주빌로 이와타와 시미즈 S펄스의 중간 지점에 있다 보니 이들이 붙는 시즈오카 더비를 유치하다가, 지금은 그조차 없이 원정팬 많이 오는 우라와 경기만 치르고 있다. 미야기는 2011년부터 거의 사용하지 않고 있다.
- 한국의 경우 실질적으로 모든 경기장이 'XX 월드컵 경기장'으로 통칭되었으나 모두 정식 명칭이었던 건 아니다.
- 일본 경기장들의 법적 정식 명칭은 '또 따로 있다'. 매우 복잡하므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정규 애칭'을 기재.
보다시피 모두 신축 경기장임에도 종합운동장의 숫자가 상당히 많은 편인데, 이것은 국제대회 행사 유치와 경기장 활용 등의 이유로 지방자치단체들이 종합운동장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3. 유치 과정
월드컵은 그동안 유럽과/아메리카 대륙(남미+북미)이 번갈아 가면서 개최됐지만, 시간이 흘러가며 다른 대륙에도 개최권을 줘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하지만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을 벗어난 곳에서 월드컵을 개최할만한 국력이 있으면서 축구에 대한 관심이 높은 국가는 사실상 아시아 지역의 한국과 일본밖에 없었다.[34][35] 따라서 2002년 월드컵은 사실상 아시아 쪽의 한일 양국 중 한곳에서 개최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에 따라 아시아의 자존심이 되고 싶었던 한국과 아시아 최고를 외쳤던 일본의 치열한 개최 경쟁이 벌어졌다.
양국의 개최 경쟁은 FIFA의 주도권을 둘러싼 유럽과 남미의 경쟁 구도 그리고 새롭게 떠오른 아프리카 축구계의 갈짓자 행보, FIFA 주도권과 차기 후계구도를 둘러싼 주앙 아벨란제 FIFA 회장과 스웨덴 레나르트 요한손 UEFA 회장의 대립, 전통적으로 남미의 경쟁자인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자존심 경쟁 등이 맞물리면서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개최지 선정 투표권한을 가진 24인의 FIFA 집행위원회는 절반으로 쪼개졌고, 전통적으로 친일국가인 브라질이 일본 쪽에 서고 펠레가 공개적으로 일본을 지지하자, 경쟁자인 아르헨티나는 자동적으로 한국 편을 들었고 마라도나는 한국을 지지하였다. 결국 한국 + 스웨덴 레나르트 요한손 UEFA 회장 + 마라도나 ↔ 일본 + 브라질 주앙 아벨란제 FIFA 회장 + 펠레 구도가 형성되었다.
1989년 일본이 첫 월드컵 아시아 개최를 목표로 월드컵 조직위를 결성했고 일본에 자극을 받은 대한민국은 1994년에야 월드컵 조직위를 결성하고[36] 1995년에 일본과 함께 FIFA 월드컵 개최 제안서를 제출한다. 제안서를 제출한 국가가 두 나라밖에 없었으므로 유치 경쟁은 굉장히 치열해졌다. 펠레는 브라질의 우방[37] 인 일본이 개최하기를 강력히 희망했는데 마라도나는 그저 아벨란제와 펠레가 일본 편을 들었기 때문에 그 반대를 위해서 대한민국 편을 들었다.[38] 마라도나는 2002년 월드컵 유치 홍보 계획의 일환으로 1995년 서울올림픽주경기장에서 열린 보카 주니어스 초청 '마라도나 공식 재기전'에 출전했다. 그 경기는 마라도나가 1994년 미국 월드컵, 약물 복용으로 출장정지 처분을 받은 후 첫 번째 공식 경기였기 때문에 세계의 관심을 모은 경기였다. 여담으로 그때 김영삼 대통령이 시축을 하고, 마라도나, 그리고 당시 방한한 카를로스 메넴 아르헨티나 대통령과 환하게 웃는 표정으로 기념촬영을 하였다. 86년 월드컵에서 허정무에게 맞은 게 있고 이걸 21세기까지 잊지 않고 있단 걸 생각하면 의외의 움직임이라고 볼 수 있다.
펠레와 마찬가지로 브라질 출신인 주앙 아벨란제 FIFA 회장 역시 일본의 단독개최를 지지하였다. 당시 아벨란제 회장은 아예 한국은 전쟁 위기가 있으니 일본이 개최해야 한다고 주장하거나, 자신은 매해 휴가를 일본으로 간다고 자랑하는 등 너무나도 노골적으로 일본을 지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일본의 우세가 기정 사실이었지만, 월드컵에 한 번도 진출하지 못한 나라는 월드컵을 개최할 자격이 부족하다[39] 는 한국의 주장이 대두되면서 상황이 미묘하게 돌아가기 시작한다. 실제로 한국은 2년 전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스페인과 독일 등의 유럽 강호들에게 상당한 선전을 펼친 경력도 있었던 덕분에, '월드컵에 한 번도 못 나가본 나라가 진정 월드컵을 개최할 자격이 충분한가?'는 한국의 주장이 다른 나라들 사이에서도 차츰 먹히게 되었다. 이렇게 일본 대세론에 이상기류가 흐르기 시작하는 와중에, FIFA 고위 관계자들이 관전한 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 축구 아시아 챔피언쉽 결승전에서 한국이 시종일관 일본을 몰아붙인 끝에 2-1로 또다시 승리를 거두어 우승컵을 따내 버렸고, 분위기는 급격히 반전되기 시작한다.
일이 이렇게 되자 남미는 그야말로 전쟁터가 되었다. 브라질이 일본에 붙자 이런 브라질에 반대하는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가 한국에 붙었고 거기에 아르헨티나를 싫어하는 칠레가 일본에 붙자 이번에는 또 칠레와 사이가 좋지 않은 페루와 볼리비아가 한국에 붙었다. 그러자 또 볼리비아를 싫어하는 파라과이가 일본에 붙었으니, 한마디로 아시아에서 터진 일에 남미 국가들이 서로 편을 가른 셈인 것이다.
게다가 FIFA의 개혁을 주장하던 레나르트 요한손 UEFA 회장을 필두로 유럽 측 FIFA 집행위원들이 아벨란제 회장을 견제하기 위해[40] 한일 공동 개최를 강력히 주장하고 여기에 그동안 부동표였던 아프리카 측 FIFA 집행위원들까지 유럽 측 FIFA 집행위원들에 동조하기 시작했으며, 열렬히 한국의 개최를 주장했던 정몽준 또한 FIFA 집행위원들이 만장일치로 합의한다면 공동개최에 찬성한다고 말하면서 분위기가 또 한 번 급격히 반전되었다.[41]
때문에 아벨란제 회장으로서는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개최지 결정 이틀 전에 일본 월드컵 조직위원회에 공동개최 의향을 타진했는데, 사실 당시 분위기는 표 대결로 가면 일본이 불리한 상황이었다.[42] 질 바에야 공동개최를 수용하는 게 훨씬 나은 결정. 때문에 일본 월드컵 조직위원회는 어쩔 수 없이 공동개최를 수용했다. 물론 한국은 이미 공동개최를 사실상 승인한 상태였다.
결국 FIFA는 양국의 역사적 특수성을 고려, 한 쪽이 월드컵을 개최하면 다른 한 쪽은 엄청난 좌절감에 빠질 것이라는 명분을 가지고 집행위원 만장일치로 FIFA 사상 최초의 공동개최를 선언하게 된다.[43]
일본 처지에서 단독개최 실패는 유치단의 전략 판단 실수가 부른 참극이었다. 같은 대륙에 두 후보지가 나오는 실수를 범한 피파와, 일본을 지지한 아벨란제의 삽질, 그리고 그런 아벨란제만을 믿고 유치 전략을 편 일본의 삽질 때문에 한국보다 개최 준비에 앞섰으면서도 결국 공동개최를 허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공동 개최안을 수용한 후, 일본은 "단독 개최에는 실패했지만 결승전이라도 우리가 치르겠다"고 주장했고 이에 대한민국 측은 "추첨으로 정하자"고 주장했다. 결국 실무 협의 결과, 개막식과 개막전, 본선 조 추첨식, 대회 공식 명칭 우선권을 대한민국이 가져가고, 지역 예선 조 추첨식, 폐막식과 결승전을 일본이 가져가는 것으로 결정이 되었다. 대한민국 역시 국민 정서상 대회 공식 명칭이 일한 월드컵이 된다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일 월드컵이라 불리는 대신, 실리라 할 수 있는 결승전은 일본에 넘겨줬다. 덧붙여 본선 조 추첨식과 3, 4위전은 한국에서 치르고, 지역예선 추첨식과 IBC(국제방송센터) 기술조정센터는 일본 쪽에서 하는 것으로 협의되었다.
그래도 한국 입장에서는 당시 브라질 출신의 FIFA 아벨란제 회장의 일본 유치론과 그에 반대되는 한국을 제창하는 여러 국가들 그리고 정몽준 회장의 여러 노력들 덕분에 공동 타이틀인 한·일 월드컵으로 개최될 수 있었다. 그리고 2026년에 캐나다, 미국, 멕시코를 모두 묶은 북중미 월드컵 이전까지를 보더라도 최초로 국가 공동으로 주관, 아시아 최초, 21세기 최초의 월드컵 대회를 개최하는 전무후무한 사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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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한일월드컵 공동개최 발표 당시 김영삼 대통령과 하시모토 류타로 총리 두 정상은 서로의 공동개최를 축하하며 한일 양국 두나라가 2002년 월드컵 결승전까지 올라가 멋진 맞대결을 펼치자는 덕담이 오가긴 했다.[44][45]
4. 역대 조직위원장
4.1. 한국 측
4.2. 일본 측
- 나스 쇼 (1997~2003)
5. 참가팀
5.1. 지역예선
각 지역 별로 예선을 통과한 팀(본선 진출/플레이오프)들은 다음과 같다.
- 남미(4.5장): 아르헨티나, 에콰도르, 브라질, 파라과이, (우루과이)
- 북중미(3장): 코스타리카, 멕시코, 미국
- 아시아(4.5장): 대한민국●, 일본●, 중국, 사우디아라비아, ( )
- 아프리카(5장): 카메룬, 나이지리아, 세네갈, 튀니지, 남아프리카 공화국
- 오세아니아(0.5장): ( )
- 유럽(14.5장): 프랑스★, 러시아, 포르투갈, 덴마크, 스웨덴, 폴란드, 크로아티아, 스페인, 이탈리아, 잉글랜드, 슬로베니아, 터키, 벨기에, 독일, (아일랜드)
유럽 지역예선에서는 전 대회 4강 진출국 네덜란드가 포르투갈과 아일랜드에 밀려 지역 예선에서 탈락했고, 독일은 홈에서 잉글랜드에 1-5로 털려서 플레이오프로 떨어져 우크라이나를 제치고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 다만 잉글랜드는 1994 FIFA 월드컵 미국 지역예선에서 탈락했기 때문에 UEFA 계수를 엄청나게 갉아먹어 톱시드에서 잘려 아르헨티나가 톱시드인 조로 들어갔다.
남미 지역예선에서 아르헨티나가 압도적인 1위를 한 반면, 브라질은 홈에서 7승 2무, 원정에서 '''2승 1무 6패'''를 기록해 안방 챔피언 신세로 전락하고 3위로 본선에 올랐다. 특히 꼴찌를 기록한 칠레에 0-3으로 패하기까지 했다. 에콰도르는 브라질을 제치고 지역예선 2위를 차지하는 저력을 보이며 첫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 우루과이는 전 대회에 이어 이번에도 대륙간 플레이오프로 갔다.
참고로 월드컵 역사상 최다 점수 차 경기 및 월드컵 역사상 한 경기 당 최다 득점자가 이 대회 오세아니아 지역 예선에서 나왔다. 호주 대 미국령 사모아의 경기로 '''31-0'''이라는 기록적인 점수가 나왔으며 호주의 아치 톰슨은 이 경기에서 '''혼자 13골'''을 퍼부었다.
5.2. 조 추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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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12월 1일,[47] 부산 벡스코에서 월드컵 조 추첨행사가 열렸다. 총 13명의 조 추첨자가 선정되었으며, 한국 측 인사로는 정몽준 대한축구협회장, 월드컵 국가대표 홍명보 선수, 바둑기사 조훈현 9단, 산악인 박영석, 배우 송혜교, 국제심판 임은주 등 6명이 선정되었고, 일본에서는 오카노 순이치로 일본축구협회장과 프랑스 월드컵 때 일본 주장으로 활약했던 이하라 마사미 등 2명으로 결정되었다. 나머지 5명의 인원들은 대륙별 안배원칙에 따라 브라질 축구황제 펠레, 네덜란드의 요한 크루이프, 카메룬의 로저 밀러, 중국의 여자 축구스타 쑨웬, 프랑스 월드컵 공동위원장을 역임한 미셸 플라티니가 선정되었다.
A조 ~ D조는 대한민국에서 경기를 치르게 되었고 E조 ~ H조는 일본에서 경기를 치르게 됨에 따라 대한민국은 자동으로 '''D조 1번째'''에 배정되었고 일본은 '''H조 1번째'''에 배정되었다. 지난 월드컵 개최국이자 우승국인 프랑스는 우승국 자격에 따라 '''A조 1번째'''에 배정되었다. 한편 A조와 C조의 2라운드 진출 팀은 일본에서 F조와 H조의 2라운드 진출 팀과 토너먼트를 치르게 되고, E조와 G조의 2라운드 진출 팀은 한국에서 B조와 D조의 2라운드 진출 팀과 토너먼트를 치르게 된다.
대진표 결과를 보면 조별리그의 아르헨티나-잉글랜드, 이탈리아-크로아티아[49] , 잉글랜드-스웨덴 전과 8강전의 잉글랜드-브라질, 그리고 결승전의 독일-브라질 등 세계적인 관심을 끄는 빅매치는 대부분 일본에서 열리게 되었다.
한편, 중국은 조 추첨 전에 예선전을 한국에서 치를 수 있도록 FIFA 측에 요청했다. 중국 본토에서 가까워 흥행에 유리한 점과, 중일관계 등을 고려해 중국은 C조에 배치되는 것으로 미리 결정을 하고, 조추첨을 시행했다. 그로 인해 또 다른 아시아 대륙의 사우디 아라비아는 자연스럽게 일본에서 경기를 치르게 되었다.
조 추첨 결과 F조가 이번 대회 최악의 죽음의 조로 꼽히게 되었다. 그러나 A조가 다른 의미로 죽음의 조가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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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한국 추첨자 선정에서 한국 축구의 전설로 불리는 차범근이 제외[50] 되고, 축구와 관련이 없는 비축구 스포츠계 인사들이 채워지는 것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가 많았으며, 특히 스포츠 분야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배우 송혜교가 선정된 것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상당했다.[51] 아마도 차범근이 프랑스 월드컵의 경기 진행 도중 대표팀 감독에서 경질되는 등 오랫동안 대한축구협회와 마찰을 빚은 전력 때문에 추첨자 선정에서 배제된 것으로 보인다.[52] 행사에는 재미교포 출신 가수 유승준이 그 당시에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가수로 소개되어 축하공연을 했다.[53] 행사의 남자 MC도 재미교포인 릭 윤이 맡았다.
6. 대회 진행
6.1. 참가 선수 명단
6.2. 개막식 & 폐막식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개막식에서는 초박형 LCD 모니터로 에밀레종을 재현하거나[54] 차세대 통신기기 IMT-2000을 든 도우미들이 경기장 지붕에서 레펠을 타고 내려오는 등 각종 이벤트로 당시 일본에 가려있던 한국의 디스플레이, IT 기술을 잘 홍보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 개막식 자체는 멋들어졌다는 평이지만, 1988 서울 올림픽 개막식때와는 다르게 대중들에게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활약상이 돋보이다보니 상대적으로 묻혀졌다.
6.3. 조별 리그
조별 리그 결과에 따른 순위는 아래 표와 같다.
특이하게도 2개 조(D, G)에서 모든 팀이 1승씩 거두었으며, 2승 1패를 거둔 팀은 없다.
-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A조
-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B조
-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C조
-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D조
-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E조
-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F조
-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G조
-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H조
6.4. 결선 토너먼트
7. 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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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한국 측 중계진
8.1. KBS
- TV 메인 캐스터: 서기철, 전인석, 최승돈, 이재후
- TV 스튜디오 MC: 장웅, 김동우, 박현우, 조건진
- 라디오 캐스터: 이명용, 이천규, 김윤한
- 해설위원: 허정무, 이상철, 이강석, 최경식, 최수종
8.2. MBC
8.3. SBS
9. 기록
- 골든 슈: 호나우두(브라질) 8골[55]
- 골든 볼: 올리버 칸(독일)[56]
- 실버 볼: 호나우두(브라질)
- 브론즈 볼: 홍명보(대한민국)[57]
- 야신상: 올리버 칸(독일)
- 최우수 심판: 피에르루이지 콜리나
- 페어 플레이상: 벨기에
- 최고의 인기팀: 대한민국
- 올스타팀
- 가린샤 클럽 신규 가입
- 살리프 디야오(SEN): 덴마크전 때 동점골을 뽑은 이후 상대 선수를 걷어차 경고누적으로 퇴장당함.
- 호나우지뉴(BRA): 잉글랜드전 때 경고처분에 항의하다가 퇴장당함
10. 올스타팀
11. 최종 순위
12. 팀별 리뷰
13. 흥행
월드컵 수익금은 18억 달러(약 2조 1,600억 원)로 TV 중계권료가 10억 8,000만 달러(약 1조 2,960억 원)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후원업체로부터 들어오는 돈도 3억 달러(약 3,600억 원)나 된다.
그러나 FIFA가 엄청난 수익을 올린 것과 달리 공동개최국인 한·일 양국의 흥행은 기대에 못 미친 것으로 보인다. 가장 큰 원인은 공동개최를 하다보니 경기장 건설에 막대한 비용이 들었기 때문이다. 한국은 10개 경기장을 신축하는 데 2조 원에 육박하는 돈을 쏟아부었다.# 하필 한국, 일본이 공동개최하여 양국 간의 경쟁의식이 과열된 영향이 컸다. 통상적으로 월드컵을 위해 10개 안팎의 경기장이 사용되는 데 반해 2002 월드컵 때는 양국이 5개정도가 아닌 각각 10개의 경기장을 개축/신축하였으니... 이는 원래 단독 개최를 상정하고 경기장 신축 계획을 잡았던 것인데, 공동 개최 결정 후에도 계획을 백지화 하지 않고 그대로 밀어붙였기 때문이다. 다만 대회 운영과 준비를 한 한국월드컵조직위원회(KOWOC)는 2002년 1662억 원 흑자를 보았다. 또한 축구 열기가 높은 유럽과 남미에서 오기에는 너무 멀어서 관광객도 예상에 못 미쳤다. 한국 쪽에서 열린 경기는 비인기팀 경기의 경우, 경기장 관중석이 많이 비어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일본 역시 관중이 대량으로 비는 일이 생겼는데 알고보니 입장권 대행 업체인 '바이롬'의 각종 잘못이 원인이었다. 이런 공석 사태가 발생한 뒤 FIFA는 마지 못해 대회 이후 잘못을 인정했다.[58]
길거리 응원 문화가 확실히 자리잡았다. 한국의 4강 진출이라는 호성적을 등에 업고 전국에서 이뤄진 거리 응원을 FIFA 측에서는 매우 감명깊게 관찰했고, 2006년 대회부터는 아예 FIFA에서 '''팬 페스트'''(FAN FEST)라는 이름으로 공식적으로 거리 응원 행사를 기획하게 된다.
14. 대회 이후
2000년대 초반 들어 J리그에 스타 선수들을 빼앗기며 침체기에 들어서는듯 했던 K리그는[59] 월드컵 이후 축구 붐에 힘입어 약 10년 간 평균관중이 증가하였다. K리그는 그 후로 18년이 지난 2020년 현재 K리그1 12팀, K리그2 10팀 합쳐 22개 팀으로 운영되고 있다.
월드컵 구장은 서울, 수원, 전주 경기장을 뺀 나머지 구장이 전부 화이트 엘리펀트가 되었다. 인천과 대구, 광주는 월드컵경기장 사용을 포기하고 관중 수에 맞는 새 전용구장을 지었다.
히딩크 감독에 대한 자서전, 일대기 등이 서점의 베스트셀러 코너를 점령하였으며 정몽준 당시 대한축구협회장은 이후 인기로 정계에 진출, 대선후보경선까지 오르게 된다.
4강이라는 성적은 한국 축구에 너무 큰 기대를 갖게 만들었다. 특히 2002년 월드컵 만큼의 성과를 내지 못할 경우 곧 잦은 감독 교체로 이어졌다. 일례로 2006 FIFA 월드컵 독일까지 국가대표팀 감독을 3번 바꿨고 결국 딕 아드보카트 감독을 선임해서 대회를 치러 조별예선 1승 1무 1패로 16강 진출에 실패했다.[60] 또한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대한민국 대표팀을 원정에서 사상 최초로 16강 토너먼트에 진출시킨 허정무 감독도 비판받았다, 또한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에서 1무 2패로 예선 탈락한 홍명보 감독도 사실 대회를 1년도 남겨두지 않은 상황에서 팀을 맡았었다.
당시 대표팀에서 맹활약한 박지성, 이영표, 차두리 등이 유럽 무대에 진출하게 되었고, 이는 현재도 많은 한국 선수들이 유럽 주요 리그에서 활약하게 되는 밑바탕이 되었다. 이 당시 한국 대표팀은 미래를 위해 유망한 청소년 선수 4명을 훈련 파트너로 대표팀에 합류시켰다. 정조국, 여효진, 최성국, 염동균이었는데, 이들 중 여효진은 이렇다할 성장을 보이지 못했고 최성국과 염동균은 2011년 K리그 승부조작 사건으로 제명 되었다. 그나마 정조국만이 현재까지도 제주에서 선수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이 대회를 끝으로 월드컵에서는 연장전 골든 골 제도가 더이상 시행되지 않는다.[61] 골든 골 제도는 연장 중에 한 팀이에 골을 넣으면 바로 그 팀을 승자로 처리하여 바로 경기가 종료되는 방식이다. 이 제도가 폐지됨에 따라 이후의 대회에서는 연장에 돌입할 경우 무조건 연장 후반까지 경기를 끝마쳐야 한다.
2009년 열린 FIFA 총회에서 FIFA는 더 이상의 공동개최는 없다는 선언을 내었다. 하지만 이 선언은 2018년 월드컵 개최에서 폐기되어 벨기에-네덜란드[62] , 포르투갈-스페인이 공동개최를 추진하였다. 투표 결과 둘 다 러시아에 밀려 떨어지기는 했지만. 이후 2026년 월드컵이 캐나다, 미국, 멕시코 3국 공동개최로 결정되어 "최초"이기는 하지만 "최후"의 공동개최 타이틀은 공식적으로 없어졌다. 2030년 월드컵에서도 우루과이-아르헨티나가 공동개최를 추진한다고 하니 공동개최는 앞으로도 명맥을 이을 것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2002년 월드컵은 피파에서 "개별개최로 신청된 나라를 임의로 묶어서 공동개최로 만들어버린" 것이므로 처음부터 공동개최로 신청하는 것과는 이야기가 다르기는 하다. 한마디로 월드컵 개최 유치전에서 무승부가 난 유일한 월드컵인 것이다.
이탈리아 세리에 A의 AC 페루자 소속으로 활약했던 안정환은, 어이없게도 대회에서 이탈리아를 상대로 골든 골을 넣었단 이유로 AC 페루자에서 방출당해 커리어가 밑바닥을 치기 시작했다.[63] . 남아공 월드컵 조추첨 직전에는 이탈리아와 스페인이 한국과 재대결하고 싶다는 의지를 표명하였다.
주로 일본쪽에서 한국 대표팀의 도핑이나 심판매수 의혹등을 계속 제기하고 있다. 오죽하면 2020년 울산 현대가 AFC 챔피언스 리그 4강에서 비셀 고베를 이겼을때의 비디오판독을 두고 또 2002때처럼 심판매수를 했니 어쩌니 하는 지경.
10년 후인 2012년 한국에서는 2002년 월드컵 10주년을 맞이하여 K리그 올스타전을 2002년 당시의 대표팀과 2012년 현재의 K리그 올스타와의 경기로 꾸몄다. 이후 6년 후인 2018년에도 개막한 지 16년째가 되던 날 2002년 당시 멤버들과 고등학교에 입학한 '월드컵둥이'들과 개막식이 열렸던 서울월드컵경기장 인근에서 풋살 경기를 벌였다. #
이 대회에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 엔트리에 이름을 올렸지만 실제로는 그라운드에 얼마 서있지도 못한 카카는 브라질이 이 월드컵에서 우승한 덕에 겨우 20분 정도만 뛰고 월드컵 우승 멤버가 되었다.
이경규가 간다가 2002 월드컵 특집방송으로 부활하여 좋은 반응을 얻자 이후 한국 지상파 방송 3사는 다음 대회인 독일 월드컵부터 기존의 예능 프로그램의 월드컵 특집과 더불어 월드컵 특집예능을 방영하는 등 월드컵 시즌에 맞춰서 특집방송을 경쟁적으로 편성하게 되었다.
이 대회 본선 16강전~4강전에서 대한민국과 대결한 나라들이 훗날 개최된 2006년부터 2014년까지의 월드컵에서 공교롭게도 대결한 순서대로 모두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16강전 상대 이탈리아는 다음번 2006 FIFA 월드컵 독일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8강전에서 대한민국과 대결한 스페인은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사상 첫 우승을 달성했으며, 4강전에서 대한민국과 대결한 독일 또한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에서 우승을 거머쥐었다.[64] 하지만 3,4위전 당시 만났던 터키는 2018 FIFA 월드컵 러시아 지역예선에서 탈락하면서 이 법칙은 깨지고 말았다.
15. 대회 공식 스폰서십
15.1. FIFA 월드컵 스폰서
- 어바이어: 미국 통신회사
- 아디다스: 독일 스포츠용품 회사 (월드컵 공인구 제공)
- 버드와이저: 미국 맥주회사
- 코카콜라: 미국 음료회사
- 후지 제록스: 일본 후지필름과 미국 제록스의 합작. 프린터 제조업 회사
- 후지필름: 일본 정밀화학회사
- 현대자동차: 대한민국 자동차회사
- 질레트: 미국 면도기회사
- JVC: 일본 전자제품회사
- 마스터카드: 미국 신용카드회사
- 맥도날드: 미국 패스트푸드회사
- 필립스: 네덜란드 전자제품회사
- 도시바: 일본 전기 및 전자회사
- 야후!: 미국 포털사이트회사
- 듀라셀: 미국 알카라인 건전지회사[65]
15.2. 한국 측 스폰서
- 현대해상: 보험회사
- KCC: 페인트 및 건자재 회사
- KB국민은행: 2000~2001년까지 주택은행이었다.
- KT: 통신업체. 이전에는 한국통신이라는 공기업이었다.
- 대한항공: 국적기 항공사
- 호텔롯데: 숙박업
- 포스코: 제철회사
15.3. 일본 측 스폰서
16. 군악대 / 취타대 행사 참여
자국 팀 경기에서 자국 군대가 행사를 지원한 최초의 월드컵이다.
한국팀의 경기에서는 국방부와 군부대에서 행사 지원을 해 주었다. 한국팀이 출전하는 경기에서 대한민국 국방부 취타대가 참여 한 것은 물론이고 해당 경기장 근처 군부대의 군악대가 국가 연주에 참여하였으며 해당 부대가 경계지원을 해 주었다.
또한 상대국 국가와 한국팀 국가는 군악대의 군악 반주를 통한 한국 성악가와 상대국 가수 독창[66] 으로 라이브로 국가가 불러졌다.
그 어떤 나라의 경기에서도 월드컵 본선에서 자국 군대가 국가 연주에 참여한 것은 전례가 없었으며 한국이 최초가 된 것이다.[67] 방송으로 관현악 버전으로 애국가가 연주 된 스페인전을 제외하고 경기 전에 양 국 국가 연주시에 상대국 국가와 대한민국 애국가가 군악대의 취주악 판으로 연주되었다. 참고로 대한민국 군악대가 연주한 해외 국가는 폴란드, 미국, 포르투갈, 이탈리아, 독일, 터키 국가로 스페인과 한국인이 열창한 미국 국가를 제외하고 상대국의 국가로 주로 한국에서 친숙하거나 널리 알려진 세계적인 가수들이 초청되어 한국 군악대의 연주에 맞춰 해당국 국가를 제창했다. 참고로 다른 경기에서는 군악대가 와서 상대국 국가와 애국가를 연주했지만 스페인전에서 군악대가 오지 않은 이유는 스페인 국가가 가사가 없기 때문에 가수가 와봐야 별 의미가 없어가지고 한국 국가에서 가수가 와서 애국가 부르고 한다는 것은 형평성이 맞지 않기 때문에 스페인전에서는 유일하게 군악대가 안오고 애국가도 스페인과의 형평성에 맞춰서 관현악 판으로 방송을 통해서 틀어 줬었다고 한다. 그리고 2030년 대한민국이 월드컵 개최에 성공할 경우 2002년에 이어 28년만에 자국팀 대한민국의 경기는 대한민국 국방부 협조로 취타대와 근처 군부대 군악대가 국가 연주 행사 지원을 할 가능성이 높고 이 경우 상대국 가수들이 초청 될 가능성이 높다.
17. 기타
17.1. 경기 내적인 부분
- 최초로 골대 골망에 사각 골망이 아닌 육각 골망을 사용한 월드컵 대회이다. 이후 2010년 월드컵을 제외하면 월드컵에서는 육각 골망을 쓰고 있다.
- 대회 시작으로부터 6개월 전인 2001년 11월 30일에 디펜딩 챔피언의 차기대회 본선 자동 진출권 폐지가 결정되었다.[74] 그래서 이 대회의 우승국인 브라질도 2006 월드컵 지역 예선에 참가해야 했다.
- 서드 골키퍼가 규정화되면서 팀 엔트리의 등록선수가 22명에서 23명으로 늘었다. 그래서 당연히 23번 등번호를 다는 게 가능했다.[75]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이 등번호의 주인공은 대전 시티즌의 레전드 골키퍼인 최은성.[76]
- 지역예선에서 못했던 팀들이 본선에서는 엄청 선전하고 되려 지역예선이 잘했던 팀들이 부진했다. 지역예선에서 칠레[77][78] 나 베네수엘라 상대로조차 고전하며 지역예선 탈락을 걱정한 끝에, 그나마도 에콰도르한테 밀려 3위로 올라온 브라질이 우승했다. 지역예선에서 잉글랜드에 1-5라는 전설적인 점수로 대패를 당하고 플레이오프로 떨어져 우크라이나를 힘겹게 이긴 끝에 올라온 독일이 준우승을 차지했다. 스웨덴에 밀려 플레이오프까지 간 끝에 오스트리아를 이긴 터키도 3위를 하는 대이변을 만들었다. 반면 네덜란드를 떨어뜨리고 조 1위 본선 직행의 위업을 달성했던 포르투갈은 미국과 대한민국에게 연달아 깨지며 조별리그에서 탈락했고, 브라질을 제치고 2위로 본선에 오른 에콰도르 역시 멕시코와 이탈리아의 맛집으로 전락해버리고 탈락했다. 이탈리아 역시 조별리그에서 부진한 끝에 겨우 16강에 올랐지만 한국에 1:2로 패했다. 남미 1위의 압도적 화력을 보여준 아르헨티나는 잉글랜드의 오웬이 픽 쓰러지며 얻어낸 페널티킥으로 실점해서 얻게 된 1패가 원인이 되어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 유럽 예선을 1위로 통과한 나라들 중 스페인과 잉글랜드만 살아남아 8강에 진출했지만, 각각 한국과 브라질에 패했다. 결국 4강에서 대륙별 지역 예선 1위 팀이 모두 전멸했다.
- 유난히 본선 무승, 본선 전패 팀이 7팀씩이나 나왔다. 그 중에서도 본선 무승 전패 팀이 3개국[79] 이나 나오는 진기록이 펼쳐졌는데, 이 중 슬로베니아만 유일하게 2득점이 있으며 중국과 사우디아라비아는 아예 0득점을 기록해 각각 뒤에서 2, 1위를 기록했다.
- 스웨덴 대 세네갈의 16강전, 한국 대 이탈리아의 16강전, 터키 대 세네갈의 8강전은 골든 골로 승부가 갈렸다. 세네갈은 스웨덴에 선제골을 내주었으나 막판에 동점골을 성공시킨 데 이어 연장전에서 골든골을 성공시킴으로써 8강에 올랐으나, 8강전에서는 터키에 골든골을 허용하고 말았다. 결승전을 제외하고 2라운드 최대의 빅 매치[80] 였던 브라질 대 잉글랜드 전에서 브라질은 잉글랜드의 오언에게 선제골을 내주었지만[81] , 히바우두와 호나우지뉴가 잇달아 골을 성공시키면서 2:1로 역전승을 거두었는데 특히 호나우지뉴가 직접 프리킥으로 작렬시킨 역전골은 이 대회 베스트 골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 이 당시 한국 대표팀 멤버들 중 가장 오랫동안 현역 선수로 뛴 선수는 아이러니하게도 한 경기도 나서지 못했던 현영민이다. 현영민은 2017 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 해외 축구를 접하기 어려웠던 이때 당시에는 경기장이 만석되는 일은 거의 없었는데, 해외 축구를 쉽게 접할 수 있고 인기가 매우 높아진 요즘 시대에 월드컵이 한국에서 열린다면 비인기 팀 간의 경기라도 전 경기 만석일 것이다. 수강신청처럼 티켓 구입 경쟁률이 치열할 것이다.
- 한 국가에서 벗어나지 않은 국가들은 다음과 같다.
- 대한민국 : 프랑스, 우루과이, 대한민국, 미국, 스페인, 남아공, 슬로베니아, 파라과이, 중국, 코스타리카, 포르투갈, 폴란드
- 일본 : 잉글랜드, 카메룬, 사우디아라비아, 아르헨티나, 나이지리아, 스웨덴, 크로아티아, 에콰도르, 일본, 러시아, 튀니지, 벨기에
17.2. 경기 외적인 부분
- 정몽준 부회장에 말한 바에 따르면, 아버지(정주영 회장)에게 공동개최 사실을 말하자 "몽준이가 하는 일이 다 그렇지 뭐…"라고 했다고. 일본을 제치고 서울 올림픽을 따낸 정주영으로서는 성에 차지 않았을 수 있긴 하지만….[84]
- 이 시절 카메룬 대표팀은 민소매 유니폼을 도입했는데, 제프 블라터가 보기 안 좋다고 비판했다. 근데 블라터는 여자 축구 선수 핫팬티 착용을 주장한 적이 있어서 까였다(...). 결국 카메룬 대표팀은 민소매 유니폼 안에 반팔 언더웨어를 받쳐 입고두 겹으로 입은 것을 볼 수 있다 뛰었는데, 이렇게 하니 기능성 유니폼의 의미가 없어졌다. 그것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어쨌거나 1승 1무 1패로 탈락했다. 마지막 3차전에서 강호 독일을 넘지 못하고 패해 16강 진출에 실패했다.
- 이때를 기점으로 서포터즈 클럽인 붉은 악마가 유명해졌다. 2002년 당시에는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을 정도. 특히 매 경기마다 펼친 카드 섹션 퍼포먼스가 매우 화제가 되었다.
각 경기별 카드 섹션 문구는 다음과 같다.
- 길거리 응원은 대단한 장관이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대한민국을 연호하며 응원하는 모습은 모두의 찬사를 자아내기에 충분했다.[89][90] 월드컵의 단골손님인 훌리건도 찾아볼 수 없었고, 응원 이후 스스로 쓰레기를 치우는 높은 수준의 시민의식을 보여주었다. 심지어 초상집도 월드컵 앞에서는 예외가 아니었다(...).[91] 그러나 몇몇 시민들[92] 이 시내버스 천장 위에 올라가는 등의 지나친 행동을 보인다거나 수많은 인파 속에서 소매치기, 성추행 등의 범죄도 벌어졌었다.
- 한일 양국에서 인기를 끌고있던 이박사는 응원가에서 코리아재팬과 재팬코리아를 둘다 부르는 묘수를 보여줬다.
- 데이비드 베컴을 위시한 스타 플레이어들의 헤어 스타일이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베컴의 모히칸풍 헤어스타일(일명 닭벼슬)은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끌며 누구나 따라하는 간지의 대명사가 되었지만, 호나우두의 뭐라 설명하기 힘든 머리(일명 다리미)는 만인에게 큰 웃음을 주며(...) 월드컵이 지구촌 축제가 되는데 이바지하기도 했다.
- 대회에 참가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들 중 군 복무를 마치지 않은 선수들은 대회 종료 후 모두 병역 혜택을 받았다. 이미 1990년대에도 월드컵 16강 가면 병역혜택을 줄 것이라는 소문이 돌 만큼 그 가치를 높게 평가 했었고, 아예 법으로 이미 그렇게 정해진 것이라고 믿고 있던 사람들도 많았다. 월드컵이 열리기 직전인 2002년 5월 10일 뉴스를 보면 16강 진출 시 병역특례에 관해 관계부처 차관회의를 곧 열겠다고 할 정도로 법개정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또 5월에 국회의원 147명이 16강 진출 시 병역혜택을 줄 수 있는 병역법 시행령을 개정하도록 이한동 국무총리에게 건의문을 전달하기도 했으니 마냥 즉흥적으로 이뤄진 일은 아니다. 6월 14일 인천 문학 경기장에서 포르투갈을 이기고 16강 진출이 확정되었을때 김대중 당시 대통령이 라커룸으로 들어와 선수들을 축하해주는 일이 있었고, 이 자리에서 대표팀을 격려하는 차원에서 성과와 보상에 대한 얘기가 오고갔는데, 당시 대표팀 주장이었던 홍명보가 "젊은 선수들이 고생을 많이 했는데 이들에게 병역에 관한 혜택이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건의했고,[95] 이에 김 대통령은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겠다."라고 답했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일사천리로 절차가 진행되었는데 여당 야당뿐 아니라 설문조사를 해도 국민의 과반이 찬성하는 것으로 나와서 반대 의견은 힘을 잃었다. 원래 국방부와 병무청은 반대 입장이었다. 이렇게 병역 혜택을 받은 선수는 현영민, 김남일, 최태욱, 설기현, 이영표, 이천수, 차두리, 안정환, 박지성, 송종국 등이다. 참고로 많은 사람들이 4강 진출로 병역 혜택을 받았다고 생각하는데, 이미 16강 진출 기념으로 16강전이었던 이탈리아 전과의 결과와 상관없이 병역 혜택이 주어진 것이다.[96] 사실 축구든 야구든 특정 종목에만 따로 특혜를 주는 것은 잘못된 것이고 특히 어떤 대회를 통해서 즉흥적으로 여론에 따라 법을 바꾸는것은 냉정하게 봐서 잘못된 것이다.
- 반한 감정이 심한 일본의 니코동에서는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한국팀에게 유리하게 편파 판정을 했다고 여겨지는 부분을 짜깁기한 영상이 '최저(최악)의 시합'이라는 제목으로 투고되어 있는데, 해당 영상에는 각종 혐한태그(이건 심해, 알면 알수록 싫어지는 나라, 국제시합은 전쟁입니다(ニダ), 남 톤수르(똥술)랜드[97] , 조선인은 사람이 아니다[98] 등)가 달려 있어 영상이 니코동에 투고된 2007년부터 2016년까지 한국을 줄기차게 까는 용도로 사용하고 있다. 보러 가기/니코동 로그인 필요 문제는, 당시 축구를 제대로 보지도 않은 초중딩들이 이 영상 하나만 보고 최악의 월드컵 선정이니 어쩌니 하며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고 떠들고 다니는 것. 물론 하도 떠들고 다니다보니 이 영상의 내막에 대해 아는 사람들도 많아져서 이런 소리했다가 되려 "축알못 일뽕이냐"며 욕을 푸짐하게 먹는 경우도 늘어나고 있다.
- 사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일본에서 한국을 몇수 아래로 얕잡아보는 정서가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 대해서 그렇게까지 크게 신경을 쓴 편은 아니지만,[99] 2002 월드컵을 기폭제로 해서 반한정서가 크게 퍼지게 되었다. 구체적으로는 일본이 16강에 머문방면에 한국이 4강에까지 올라간데다가 2002 월드컵이 좀 지난 시점에서 일본에 한류열풍이 불고 그동안 일본의 몇 수 아래로 평가받던 한국 전자업체와 자동차업계가 크게 성장하며 돋보이기 시작하자 한국을 위협적으로 보는 시선들이 많아지면서 반한감정이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분출되기 시작했던 것. 사실 일본 인터넷상의 혐한 정서도 사실 2002년 한일월드컵이 시점이다.
- HD로 중계가 된 첫 번째 월드컵이다. 전체 64경기 중 개최국인 한국과 일본의 경기와 주요 경기를 포함 48경기가 HD로 중계되었다.월드컵 주관방송사 HBS의 홈페이지에 나와 있다.[100][101] 당시 정보통신부에서는 한국과 일본이 각각 치르게 될 32경기 중 24경기 이상을 HD로 제작해 총 48경기 이상을 HD로 제작하고 이 중 43경기 이상을 실황 중계한다고 밝혔다.출처아카이브 당시에 월드컵 HD 중계 편성 정보를 알려주던 사이트가 있었다.당시 월드컵 경기 방송 일정을 알려주던 사이트 아카이브[102]
17.3. 각 팀별 흥미로운 에피소드
- 아일랜드 축구팬들은 조별리그는 일본에서, 토너먼트는 한국에서 치르는 바람에 두 나라를 오가야 했다.[103] 체류 비용을 걱정했지만, 한국이 일본보다 물가가 싸다는 사실을 알고 안도하기도. 거기다 지자체에서 여행객을 위해 둔치에 텐트촌까지 마련해 줘서 체류비가 많지 않은 이들이 무척 좋아했다. 아무튼 그렇게 체류비가 남아서 '기왕 온 김에 관광 더 하고 가자'고 남은 아일랜드 팬들이 꽤 많았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아예 영어 원어민 강사로 채용되어서 말뚝 박은 사람들도 있었다. 덕분에 2002년 기점으로 국내에 아일랜드인들이 많아졌다고.
- 체류비 이야기를 하자면 터키 기자들을 뺄 수가 없다. 원래 자국 성적은 잘해야 16강이라 여기고 있었기에 터키가 계속 토너먼트에서 승리하자 터키 기자들은 자국의 선전에 좋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체류비 문제로 난감함을 겪어야 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일본 물가가 한국보다 비싼 것을 비판했다.
- 스페인 대표팀은 월드컵 기간 중에 한국의 토종개를 길렀다. 시장에서 보신탕이 될 운명에 처한 강아지를 보고 가엾게 여긴 스페인 기자가 1만 원을 주고 구해왔다고. 이 토종개는 호세 안토니오 카마초 감독의 이름을 따서 '카마친(작은 카마초)'이라고 불렸다. 카마친은 스페인 선수들에게 몹시 사랑받았지만, 공항 검역에 걸려서 선수들이 스페인으로 돌아갈 때 못 데려갔다고 한다. 카마친에게 정이 들었던 이케르 카시야스는 공항에서 헤어질 때 눈물을 글썽였고, 라울은 잘 돌봐주라며 거금을 주고 갔다. 이후 카마친은 스페인 선수단이 머물던 숙소 관리자에게 맡겨졌다고 하는데, 몇 개월 후에 카마친을 그리워한 페르난도 모리엔테스가 사람을 보내서 정식으로 데려갔다는 이야기도 있고, 그냥 한국에서 살았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정확한 근황은 알려진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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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강 한국전 승부차기에서 스페인의 4번째 키커로 등장하여 실축한 호아킨의 암울한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 올리버 칸은 한국에서 마셔본 두유, 베지밀의 맛에 반해서 한국에 있는 내내 베지밀을 달고 살았다. 이를 신의 음료라 극찬했으며(...) 대회 끝나고 고국으로 돌아 갈 때도 한 박스 부쳐갔다고 한다. 지단의 경우는 음료수인 2% 부족할 때를 매우 좋아해서 훈련내내 물 대신 2%만 마실 정도였다고 한다.[104]
- 브라질 대표팀 또한 여러가지 일화를 갖고 있다. 목욕탕에 때를 밀러간 호나우두는 때밀이 아저씨가 팬이라고 하자 자신의 팬티와 모자, 슬리퍼를 선물로 줬다. 호베르투 카를루스는 호텔 직원과 탁구를 했는데, 번번이 지는 바람에 오기가 생겨서 계속 도전했다고. 그리고 브라질 대표팀은 노래방을 무척 좋아했으며, 카를루스와 호나우지뉴는 당시 오락실에서 유행한 펌프 잇 업을 즐겨 했다고 한다.
- 지네딘 지단은 대회 직전 한국과의 평가전에서 부상을 당했고 이후 부산의 한 병원에서 검사를 받고 병원 관계자들과 기념 사진을 찍었다. 근데 그 병원에서는 이 사진을 멋대로 광고용으로 써버렸고, 지단은 나중에 이 소식을 전해듣고 어이없어했었다.
- 세네갈 대표팀 선수 파디가는 대구에 왔을 때 모 귀금속 가게에서 가족들에게 사 줄 목걸이를 고르고 있었다. 근데 파디가를 금은방 절도를 하러 온 아프리카 노동자로 오해한 금은방 주인이 경찰에 신고를 하는 해프닝이 있었고, 나중에 혐의가 풀리자 무안해진 금은방 가게 주인은 파디가에게 그 금목걸이를 선물로 주었다.
- 포르투갈의 세르지우 콘세이상은 호텔 미용사 아가씨에게 반해서 날마다 머리를 손질하러 갔다. 콘세이상은 엄청 끈질기게 구애를 했지만, 결국 차이고 말았다. 미용사 아가씨는 콘세이상이 유명 축구 선수인 줄 모르고 그냥 외국인 노동자(...)인 줄 알았다고 한다.
- 16강 전을 앞두고 이탈리아 대표팀의 숙소에 뱀이 출현하면서 선수단이 크게 분노한 일이 있었다. 혼비백산이 아니라 분노인 이유는, 이탈리아는 로마시대부터 군단 숙영지에 뱀이 출몰하면 필패한다는 징크스가 존재했기 때문이다.[105]
- 우루과이 대표팀은 천안연수원에 베이스 캠프를 차린 후 몸도 풀겸 삼성SDI 천안공장 축구동호회와 경기를 가졌다. 비록 친선경기이긴 하나 컨디션 점검 차 레코바, 몬테로, 실바 등 정예 멤버가 출격했는데, 예상외로 2골이나 내주면서 5-2로 승리했다. 우루과이 스포츠기자들은 골을 넣은 직원의 이름과 나이를 묻기도 했다.# 참고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도 우루과이 상대로 2골을 넣어본 적이 2번밖에 없다.[106] 그리고 우루과이 대표팀은 연수원의 미니 냉장고를 매우 탐냈기에(...) 삼성에서 그들의 고국길에 선수 전원에 미니 냉장고를 선물해 주었다.
17.4. 그 외
- 대한민국의 경우는 사람들끼리 모아다가 반을 갈라서 한쪽은 폴란드를, 다른 한쪽은 포르투갈을 응원하도록 약속하고 응원했으며, 3/4위전에서는 터키와 맞붙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인터넷을 통해 널리 퍼진 형제의 나라 이야기에 힘입어 관중석에서 대형 터키 국기를 내걸어 주기도 했다. 실제로 터키 현지에서는 한국 응원단의 이런 호의에 감동한 터키인들이 한둘이 아니었다고. 터키에서도 이때를 터키 축구의 황금기라고 추억하다 보니 현재까지도 이런 호의를 기억하는 터키인들이 꽤나 많은 편이다. 그래서 3/4위전이 열리던 시기에 터키에서 여행중인 한국인들에게 숙박비와 식사비를 받지 않았다고 한다.
- 형제의 나라로 알려진 터키 대표팀은 아예 터키 서포터즈가 있어서 일방적으로 형제의 나라인 터키 위주로 응원을 했다.
- 다만 한국 관중들도 세 팀만은 찬밥 취급을 했는데, 그 세 팀은 바로 중국, 미국, 이탈리아였다.
- 중국은 악명 높은 소림축구 때문에 외면을 받았다.
- 미국은 이 당시 극에 달한 반미 여론 때문에 한국 내에선 가장 더 외면 받은 팀들이었다.[107][108]
- 이탈리아는 한국과의 16강전을 이틀 앞두고 나온 토티의 자만섞인 기자회견으로 경기당일 관중들로부터 집단야유를 받았으며, 발언의 주인공 토티는 연장전반, 할리우드 액션으로 페널티킥을 유도하려다가 실패하고 이를 발견한 심판에 의해 경고누적으로 퇴장당했으며, 결국 토티가 쫓겨난 이탈리아는 연장 후반 12분 안정환에게 골든골을 내주고 1대2로 역전패를 당하며 8강 진출에 실패했다.[109]
- 일본의 경우는 인기 있는 팀들만 노골적으로 응원하고 심지어는 자기가 응원하지 않는 팀에게는 노골적으로 야유를 보냈다. 주로 잉글랜드, 브라질, 이탈리아, 독일 등의 강호들만 좋아했으며,[111] 나머지는 무시했다.
- 조별리그 이탈리아 대 에콰도르 전에서는 에콰도르 선수들에게 야유를 보냈다.
- 조별리그 아르헨티나 대 잉글랜드 전에서도 아르헨티나 선수들에게 야유를 보냈다.[110]
- 16강 세네갈 대 스웨덴 전에서도 세네갈 선수들에게 야유를 보냈다.
- 제3국 간의 경기에서도 한국 관중들과 일본 관중들의 태도가 대조적이었는데, 한국 관중들은 주로 강팀보다는 약팀을 응원, 그것도 일방적이 아니라 서로 공정하게 응원하거나 아예 응원단을 둘로 쪼개서 양쪽을 서로 응원한 반면, 일본은 인기팀 위주로 응원을 했다. 특히 일본에서 열린 잉글랜드와 이탈리아, 브라질 경기를 보면 일본인지 유럽이나 남미인지 헷갈릴 정도인데 세네갈은 16강전을 일본에서 치렀는데, 한국에서 조예선을 할 당시 한국인들이 세네갈 국기를 흔들고 세네갈 극소수 관중들과 어울려 세네갈을 응원해줘서 일본도 그러겠지 여겼더니만 죄다 스웨덴만 응원해서 실망했던 적이 있다. 그래서 한국 측에 부탁하여 응원 도구와 몇몇 물품을 일본에서 공수받기도 했다.[112] 이렇게 보면 아르헨티나는 한국에서 경기를 했어야 했다. 일본에서 경기하는 바람에 조별리그를 통과하지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 월드컵 본선에 오지 못한 나라들의 대형 국기가 경기장에 종종 걸리기도 했다. 웨일즈 국기나 이스라엘 국기 등등. 이쪽 나라 축구팬들이 구경와서 자국팀도 언젠가 월드컵에 진출하기를 바라며 걸어놓은 것도 있지만, 지역적 혹은 정치적인 앙숙인 국가를 도발하기 위해 내걸기도 했다[113] . 한국 대표팀 경기에는 항상 네덜란드 국기가 걸려 있었는데, 이는 히딩크 감독의 고국이 네덜란드였기 때문. 그래서 2002 월드컵 진출에 탈락해서 기가 죽었던 네덜란드 사람들도 나름 위로를 얻었다고. 거기다 히딩크호가 승승장구 하니 "아이 신나~" 분위기(...).
- 이 해 2002년에 태어난 아이들을 '월드컵둥이'라고 부르고 1999년생 이래 대한민국에서 가장 중대한 시기에 태어난 마지막 세대다.[114][115] 그리고 일부 가정에선 대한민국의 월드컵 4강 신화를 기념해서 아이 이름을 '사강'이라고 지어준 경우도 있다고. 참고로 월드컵둥이들은 현재 21~22세이다. 세월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있는 부분. 또한 이 시기 월드컵 응원에 도취한 남녀들이 눈에 맞아 임신을 하여 2003년 3월~ 4월 출생률이 잠깐 급증하기도 하였다. 다만 따지고보면 출산율이 올랐다고 해도 오히려 출생아 수는 줄어들었고 전체 출산율도 2001년의 1.30명보다 낮은 1.19명이었기 때문에 생각보다 건전하게 놀았다고는 할 수 있다.
- 임산부들에게는 힘들었던 시기 중 하나. 특히 7월에 아이를 낳은 임산부들은 고통을 겪어야 했는데, 이때는 거의 만삭이라 아직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태아들이 신생아의 시력, 청력, 신체 구조가 거의 같아서 바깥 소리를 거의 대부분 들을 수 있었다. 골이 들어가면 엄마 배속에서 발로 엄마를 차던 아기들이 굉장히 많았다.
- 이 길거리 응원에 숨겨진 뒷이야기로, 실제 FIFA에서는 대형 전광판을 이용한 야외 방영조차도 중계비를 걷어갔다. 당시 금액으로 약 2,000만원 정도였다는데, 한국 쪽은 돈독 오른 놈들이라 욕을 하면서도 돈 내고 야외 방영을 했고, 일본 쪽은 안 내고 안 했다(...).
- 대회 전 우려가 되었던 훌리건 문제는 그리 나타나지 않았는데, 일단 한국과 일본이 공권력에 있어서 남다른 국가였던 것이 한 몫 했다. 거기다 한국에서 조 예선 경기를 하는 나라들은 극성 훌리건이 드문 국가들[116] 이었고, 일본 쪽은 잉글랜드나 아르헨티나 등 전투력이 남다른(...) 국가들이 있었으나 역시 별다른 소란을 벌이지 못했다. 당시 일본 경찰은 훌리건 제압용 무기만 따로 고안했고, 진압 훈련도 상당히 많이 했다. 한국이야 전경들의 숙련도가 남다르니 필요 없었을 듯.
- 사회와 격리된 공간인 교도소와 구치소에서도 이 기간만큼은 밤 늦게까지 TV를 보면서 월드컵 응원을 허용했다. 또한 종교를 불문하고 정숙을 지켜야 히는 신성한 공간인 사찰, 성당, 교회 등지에서도 이 기간 동안에는 떠들썩하게 응원을 하였으며, 심지어는 장례식장에서도 응원전이 펼쳐졌다. 이 외에도 평소에는 조용한 공간에서도 월드컵 기간 동안만큼은 많이 떠들썩하게 응원했다.
- 일부 한국군 군부대에서는 단체로 영내 연병장 응원을 하기도 했다. 특히 부대 주변 민간인들도 초청한 경우도 있었으며, 심지어 심야시간의 경기시 일부 부대는 한국팀 경기에서 국가 연주시에 국기강하식을 동시에 하기도 했으며, 군인인 만큼 영내 응원시 애국가 연주시 거수경례는 반드시 했다.
- 포르투갈전을 하루 앞두고 미군 여중생 압사 사건이 일어났다. 그렇지 않아도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당시 아폴로 안톤 오노에게 뺏긴 금메달과 미국전 무승부 때문에 반미감정 고조되고 있었는데, 이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되었다. 하지만 월드컵 기간 중에는 4강 신화의 열기에 묻혔다.
- 대회 기간 당시 경찰의 어처구니 없는 삽질로 현재까지 풀리지 못한 미제 사건이 있는데, 그게 청주 물탱크실 주부 살인 사건이다. 또 6월 6일에 경기도 파주시에서 미군 고압선 공사 중 사고로 1년여간 투병하던 전동록이 숨졌으나,[117] 미국전 당일에 열린 6월 10일 장례투쟁은 경찰의 원천봉쇄와 국민들의 무관심으로 사그러들었으며 사건조차 묻혔다.(한겨레 기사)
- 월드컵을 앞둔 때부터 김대중 대통령의 차남 김홍업의 비리 혐의가 드러나 파문이 일었는데, 검찰은 대회 뒤에 소환하려 했으나 여론의 뭇매를 맞고 6월 20일에 긴급 체포하게 된다.
- 당시 많은 남자 중학생들과 고등학생들이 월드컵에 빠졌던 나머지 그해 1학기 기말고사 전교생(특히 남학생) 평균 점수가 수직 하락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실제로 월드컵 때문에 학교 기말고사가 연기된 사례도 많았고... 심지어 그해 말에 있었던 2003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의 평균이 낮게 나왔던 것도 이것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118]
- 2002년 월드컵 당시 대학들은 월드컵 기간 중에 수업이 있으면 월드컵 관람에 지장이 있다는 이유로 여름방학을 예년에 비해서 일찍 했다고 한다.
- 2014년 JTBC 드라마 《12년 만의 재회 - 달래된장국》에서 한일 월드컵 당시의 경기 영상이 등장한 바 있다. 2002년 6월 당시 중원병원 로비에서 직원들과 손님들이 월드컵 중계 방송을 보는 설정으로 이야기가 시작되기 때문. [119]
- 코미디언 이주일도 이 경기를 관람한 적이 있었다. 그는 폐암 말기로 병원에서 시한부 판정인 3개월을 훨씬 넘겨 한국팀의 4강 신화를 휠체어를 타고 관람할 수 있었다. 월드컵 첫승 제물이었던 폴란드전 당시에 보건복지부 장관의 초청을 받아 직접 경기를 관람하였으며, 이후 대표팀이 포르투갈을 이기고 16강에 진출한 후 이탈리아전에서 안정환이 골든골을 터뜨렸을 땐 너무 기뻐서 "암까지 이겨내고 건강을 반드시 되찾겠다"고 모 방송에 인터뷰를 하였다. 그러나 그건 그의 생전 마지막 모습이 되었다. 월드컵이 종료되고 2달 뒤 폐암 투병 끝에 별세했기 때문이다.
- 이 월드컵 기간동안 가요계와 드라마계, 예능계는 그야말로 대불황이었다. 사람들 관심이 Only 월드컵이었으니까. 비몽이 타이틀 곡인 코요태 4집(50만장 판매)정도가 극히 드문 예외였다.
- 마지막으로 한일 월드컵의 4강 진출을 기억하는 대망의 마지막 세대는 1995년생~1997년생 정도까지 겪었다.
- 북한 조선중앙TV에서 일부 경기를 중계방송했다. 대략 30여경기를 중계방송했는데 전부 녹화후 편집해 중계였으며 한국, 일본의 조예선 3경기는 중계하지 않았으며 8강에 진출한 미국의 5경기도 중계하지 않았다. 한국과 일본의 경기는 16강 경기만 녹화중계했다.
- 대한민국과 터키의 3/4위전 당일 제2연평해전이 발생했다. 당시 국내 언론사들은 월드컵 관련 보도에만 집중했고 특히 국가적 비상 사태를 우선적으로 보도해야 할 지상파 3사도 3/4위전 결정전 중계에 초점을 맞추고 사건을 단신으로 다루었다. 이후 한국에 있던 외신들이 긴급 기사로 다룬 것과 대조되면서 이에 대해 강한 비판을 받았다. 한편 선수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묵념을 한 이후 경기를 시작했다.[120]
- 동시기에 개최되었던 2002 NATE배 온게임넷 스타리그는 하필 타이밍이 안 좋게 한일 월드컵 기간과 동시기에 개최되어 버렸고, 결국 결승전 관중수가 한일 월드컵의 열기에 묻혀버려 대략 700명 정도 밖에 안되는 온게임넷 스타리그 사상 최악의 흥행 실패 대회로 남게 되었다. 심지어 우승자인 변길섭은 아예 스타리그 우승자인지 모르는 경우도 있고, 준우승자 강도경도 스타리그 준우승 2회 기록을 콩라인 자격 요건을 충족시켰지만 이 대회에서 준우승을 한 것도 묻혀서 이것마저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을 정도이다.[121]
18. 관련 마케팅
- 이 대회 마케팅에서 단연 두드러진 건 이동통신사였다. SK텔레콤은 붉은악마를 후원하며 '대~한민국'과 '오~ 필승 코리아' 같은 응원 구호나 응원가를 써먹었고, KTF는 '코리아팀 파이팅'으로 밀었다.
- FIFA 공식 파트너인 현대자동차는 2000년에 EF 쏘나타 월드컵 에디션을 내놓은 바 있으며, 2001년에 뉴 EF 쏘나타와 베르나, 라비타 등 3개 차종부터 휠 꼭지에 월드컵 엠블럼을 박은 '월드컵 에디션'을 출시했다가 2002년에 아반떼 XD, 트라제 XG, 테라칸, 리베로 등 4개 차종에도 확대했다. 4강 진출 뒤엔 생산기간을 8월까지 연장했다.
[1] 1998 프랑스 월드컵 이후 FIFA 규정이 바뀌면서 유니폼 전면에는 국기가 아닌 축구협회의 로고 또는 별도 로고를 새기도록 규정했음에도 터키 축구 국가대표팀은 자국 국기를 달고 출전했다. 이로 인해 당시 터키 대표팀 유니폼에는 별도 로고가 없다.[2] 하계와 동계 올림픽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공동 개최 사례가 없으며 세계육상선수권대회 역시 단일 국가, 단일 도시에서 개최됐다. 지역별 스포츠 대회 중에서는 UEFA 유러피언 챔피언십이 2000년에 벨기에와 네덜란드의 공동개최로 열린 적이 있고 이후 종종 공동개최 사례가 나오고 있다.[3] 세계최초는 1990 이탈리아 월드컵이다. 이탈리아 방송사 RAI와 일본의 NHK가 이탈리아와 스페인의 일부지역에서 진행했다. 2002 월드컵까지는 일부 지역 한정으로 일부 경기만 HD중계였지만 이후 열린 2006 독일 월드컵부터는 전 경기가 전 세계에 HD로 중계되었다. 올림픽의 경우 세계 최초 HD는 1988 서울올림픽이다. 아날로그 방식의 HD이지만 당시 일본에서 실험방송 개념으로 제작되었었다. UHD의 경우 2018 평창 동계올림픽이 최초. [4] 당시 디펜딩 챔피언인 프랑스가 조별리그에서 탈락한 원인 중 하나이기도 했다. 여기를 참조해보자.[5] 전혀 관련이 없을 것 같은 프로그램들도 월드컵을 다룰 수 밖에 없었다. 6시 내고향 같은 지역 프로그램들도 시골의 월드컵 즐기는 풍경을 방송했으며, 심지어는 클래식 공연도 지휘자 및 연주자 전원이 Be the reds 티셔츠를 입고 공연할 정도였다.[6] '대한민국/일본'이 아니다. 공식 포스터에 대한 검색결과[7] FIFA에서 어떤 언어를 사용하더라도 동일해야 한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즉 일본에서 일본어를 사용해 대회명을 언급하더라도 일한 월드컵이 아니라 한일 월드컵으로 불러야 한다.[8] 김덕수 참여[9] 일본의 태고 연주 그룹 KODO 참여[10] 월드컵송의 경우 전 대회인 프랑스 월드컵 때 나온 노래였지만, 곡이 워낙 좋고 몇년 되지 않은 노래라 2002년에도 사용되었다.[11] 하지만 이후 2006년 월드컵 때는 따로 응원가를 만들지 않아 축구팬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월드컵의 인기를 이용해먹었다는 식으로 보였기 때문. 사실 2006년 초 애국가를 리메이크한 응원가를 만들었지만 신성한 애국가를 응원가로 만들었다며 비판만 받았다. 이후 2006년에 응원가를 만들지 않은 이유에 대해 YB에서 밝히기로는 밴드 이미지가 월드컵이나 축구 관련으로 굳혀질까 그랬다고. 2006년에는 버즈가 오 필승 코리아를 편곡해 부르게 된다.[12] 그런데 MBC에서는 한때 이 노래를 국가대표팀 경기 중계에서 득점이 나올 때마다 삽입하여 빈축을 샀다. 과유불급[13] 당연히 한국의 양대 항공사에서도 기체에 이 로고가 붙어져 있었다.[14] 이 마개조는 2020년이 되어서 시행하게 된다.[15] 영남권에만 대구, 울산, 부산 세 곳이 있어서 포항까지 주게 되면 지역 편중 논란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16] 당초 한국에서는 특별시+광역시에 7개 경기장을 건설하는 것으로 계획했지만 일본과 비율을 맞추고자 10개로 늘렸고 이때 추가된 수원, 전주, 서귀포는 국고지원을 받지 않는 조건으로 경기장을 유치했다.[17] 상암(수색)과 인천 문학동 지역은 미개발지이긴 하였으나 당시에도 강변북로, 제2경인고속도로 등과 연계된 시내외 교통의 중심에 해당했으며 2002년 당시 이미 도시철도 연계가 완비되어 있었다.[18] SK 와이번스가 운영.[19] 2008년 3월 5일부로 대구스타디움으로 정식 명명되었다.[20] 월드컵 기간 중에는 본 관중석과 그라운드 사이에 가변좌석을 설치하여 축구전용구장으로 운영했지만, 월드컵이 끝난 후 가변석을 철거하고 육상트랙을 설치해서 종합운동장으로 변했다. 당초 설계를 종합운동장으로 했다고 한다.[21] 가변석 철거 후 현재는 40,245석.[22] 당초 전국체전용으로 기존 구장을 신축 또는 리모델링하려고 했는데, 월드컵 유치로 계획을 수정하여 경기장 규모를 키웠다. 1997년 외환 위기로 서울 축구전용구장 신축 반대 여론이 제기되면서 한때 월드컵 개막전 장소로 거론되기도 했다.[23] 문학과 마찬가지로 한때 월드컵 개막전 장소로 거론되기도 했다.[24] 위치가 서귀포시여서 '서귀포 경기장'으로 통칭되기 쉽지만 정식으로는 제주를 달고 있다.[25] 이후 가변석 철거, 보수 공사로 인해 2013년 현재는 29,971석이다.[26] 명명권 채택으로 2005년부터 닛산 스타디움으로 명명되었다.[27] 광주와 유사하게 월드컵 기간 중 가변좌석을 활용하여 5천 석 정도를 늘렸다. 현재도 축구 경기에는 사용 중이나, 광주와 달리 처음부터 육상경기장 명목이었다.[28] 명명권 적용으로 2014년 이후 '얀마 스타디움 나가이'. 한일 월드컵에 사용된 경기장 중 가장 먼저 완공되었다.[29] 명명권 적용으로 2007년 이후 '도호쿠전력 빅 스완 스타디움'. 2014년에는 명명권을 덴카가 구입했다.[30] 야구장-축구전용구장 간 전환이 가능한 구조이다.[31] 명명권 적용으로 2013년 이후 '노에비아 스타디움 고베'. 덧붙여 이유는 불명이지만 FIFA의 경기 기록에는 2007~2012년 사용된 스폰서 명칭 '홈즈 스타디움 고베'로 기재되어 있다. FIFA는 원래 경기장의 스폰서 명칭을 인정하지 않는다.[32] 양쪽 골대 뒤 임시 스탠드를 설치한 상태에서의 수용 인원으로, 대회 종료 후에는 임시 스탠드를 철거하여 34,000석으로 조정되었다. 단, 홈팀인 비셀 고베가 상단 스탠드를 열지 않아 J리그에서의 정원은 30,132석으로 되어 있다. 이전 버전에 서술된 6만 석짜리 경기장은 이전 홈으로 사용하던 고베종합운동공원 육상경기장 (애칭 유니버시아드 기념 경기장) 으로 이 경기장과는 무관하다.[33] 예를 들어 관중석 중 지붕이 덮이는 면적이 20%도 되지 않으며, 관중석도 4강전 등 주요 경기 용도의 기준에 맞지 않는다.[34] 2002 월드컵 개최지 관련 논의가 한창 뜨거웠었던 1990년대 당시, 한국은 1988 서울올림픽과 1993 대전 엑스포 개최를 성공적으로 개최하면서 국민들의 자신감이 하늘을 찔렀고, 경제규모 세계 11위에 OECD도 가입한 상태였다. 일본도 1991년 버블 붕괴 여파로 성장률이 1% 아래로 떨어지는 침체기를 맞았지만 그래도 1995년에 1인당 국민소득 4만 달러를 달성했으며, 여전히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었다.[35] 사실 국력만 따진다면 호주도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호주는 축구 인기가 높지 않았고 월드컵 개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외에 인도는 그때나 지금이나 축구는 노관심, 중국은 천안문 사태 여파로 국제왕따이던 상황에다가 일단 축구실력이 너무 허접해서...[36] 대한축구협회는 1988 서울올림픽 폐막 직후인 1989년 정부에 2002년 월드컵 유치를 제안했으나, 1993 엑스포 준비에 정신이 없었던 시점이라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했다.[37] 이미 20세기 초반부터 브라질에는 상당한 규모의 일본계 이민자들이 있었다. 때문에 현재도 일본과 브라질의 교류는 다른 아시아국가들에 비해서 활발한 편이다.[38] 마라도나와 펠레는 그들의 조국인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처럼 서로 사이가 안 좋기로 유명하다. 20세기 최고 축구선수 선정을 두고 둘이 자존심 대결을 벌이면서 끝내 피파는 펠레, 마라도나 둘 다 최고 선수로 선정하면서 둘 다 엄청 기분 나빠 했다.[39] 실제로 일본은 1994년 월드컵 지역예선에서 첫 본선 진출을 거의 다 이룬 상황에서 이라크에 발목을 잡히고 본선 티켓을 한국으로 내주면서 떨어졌다. 그리고 다음 대회인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야 첫 출전을 한다. 그런데 사실 이때도 지역 예선에서 홈에서 한국에 역전패당하는 등 고전한 끝에 조 2위로 떨어져서 플레이오프를 치러야 했고 각 조 2위끼리 치르는 플레이오프에서 이란과 연장 접전을 벌인 끝에 가까스로 본선 진출 티켓을 얻었다. 이후 2022년 월드컵 개최지로 선정된 중동의 카타르가 2018년 러시아 월드컵까지 본선에 진출하지 못했기 때문에, 1934년 이탈리아 이후로 무려 88년 만에 월드컵 출전 경험이 없는 나라가 월드컵을 개최하는 최초의 사례가 되어버렸다. 때문에 카타르는 '돈으로 월드컵 출전권을 샀다'는 오명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카타르 월드컵은 이미 개최 과정에 많은 비리가 있었다는 것과 개최 준비 과정에서 수많은 문제점들이 드러나면서 논란이 끊이질 않고 있다. 월드컵 진출경력 운운이 유치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월드컵 진출 경력은 해당 국가가 축구라는 종목에 대해 얼마나 유무형의 지원과 투자를 하고 있는지를 파악할 수 있는 좋은 기준이 된다. 특히 한국은 그냥 운좋게 한두번 참가해본 것도 아니고 아시아 최초의 FIFA 월드컵 본선 참가 독립국(1938년 월드컵에는 네덜란드령 동인도가 참가)인 동시에 1996년 기준으로도 월드컵 본선에 4회나 출전한 독보적인 위상을 지니고 있었으니 말빨이 먹힐 수 수밖에 없었다. 한국의 경제력이 일본에 비해 많이 밀리던 시기이긴 했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일본은 자기보다 한 수 아래 경제력인 한국만큼도 축구에 투자를 안 하는 나라'''라는 프레임을 이 월드컵 경력 하나로 만들어버릴 수 있었다.[40] 당시 유럽 측 집행위원들은 조앙 아벨란제 회장의 장기집권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41] 아프리카가 한국 찬성 분위기로 돈 것은 다른 이유가 있는데, 직전에 열린 미국 월드컵이 아프리카 국가인 모로코를 꺾고 개최지로 선정된데다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탓에 상업성 문제에도 이 점을 강조하며 일본의 개최를 지지하고 있는 아벨란제를 견제할 필요가 있었다. 상업성 면에서 불리한 아프리카 입장에서 이를 두고 보면 유럽, 남미는 물론 상업성에 이점이 있는 아시아나 북미에도 밀려 들러리 신세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실력으로는 그나마 아시아에 확실히 앞서고, 북미도 멕시코 빼면 별볼일 없었으니.....그리고 정몽준은 2006 월드컵의 아프리카 개최를 지지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유럽 상대로도 이중으로 약속을 했기 때문에 후일 4년 후로 아프리카는 연기될 수밖에 없었고, 이런 행보는 추후 그의 FIFA에서의 행보에 매우 불리하게 작용하게 된다.[42] 아벨란제 회장의 장기집권에 염증이 난 유럽세가 반대세력으로 한국을 밀고있는 형태였고 여기에 아프리카세도 가세했으니 일본지지 쪽은 아벨란제 회장과 남미세뿐이었는데 그 남미세까지도 한국파인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페루, 볼리비아와 일본파인 브라질, 칠레, 파라과이로 나뉘어 있었으니.[43] 후에 정몽준 부회장은 "한국이 공동 개최라도 이룬 것은 FIFA 내부의 정치 싸움을 이용했기 때문"이라고 회고했다. 즉 아벨란제로 상징되는 남미파들에 대한 반감을 갖고 있던 세계축구 최강 집단인 유럽세를 활용했던 것.[44] 김대통령, 하시모토 일본 총리, 월드컵 공동 개최 입장 표명[45] 김대통령 하시모토 월드컵 결승전서 만나 멋진 맞대결 펼치자[46] 호주는 원정 0-3 패, 홈 1-0 승. 이란은 원정 0-2 패, 홈 1-0 승.[47] 이날 일본에서는 나루히토 황태자와 마사코 황태자비가 오랜 난임 끝에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현재 23세)를 낳아, 월드컵 조 추첨보다 더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48] 조 추첨 중 남은 3개 팀은 포트 C로 추첨이 이뤄졌음.[49] 전대회 4강 진출국[50] 때문에 국내보다 차범근에 대한 인지도가 높던 유럽에서는 "혹시 차범근이 죽은 것 아닌가?"라는 이야기도 나왔다고.[51] 추첨자 선정 통보를 받았을 때 기자들이 소감을 묻자 "처음에는 이렇게 큰 행사인 줄 몰랐다. 국제적인 행사인 것을 알게 된 뒤 깜짝 놀랐다."는 송혜교의 인터뷰 내용 때문에 이런 논란은 더욱 도마 위에 오르게 되었다.[52] 대신 차범근은 2003년 12월에 열린 2006 독일 월드컵 대륙별 조추첨 행사에서 아시아 대표 조 추첨자로 참석하여 약간의 한풀이는 했다.#[53] 유승준은 당시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립싱크 공연을 해서 작은 논란도 있었다. 이 공연이 본인의 병역논란이 터지기전 마지막 한국공연이었다.[54] 백남준작 '동방으로부터'[55] 5골을 기록한 독일의 미로슬라프 클로제와 브라질의 히바우두는 공동 2위를 기록했다.[56] 마의 6골 벽을 깨뜨린 호나우두도 MVP감으로 손색이 없었지만 기자단 투표가 호나우두가 2골을 넣기 전인 결승전 하프타임에 열렸기 때문에 칸이 수상자가 되었다. 이 대회 이후로 MVP 투표가 결승전 종료 이후에 행해지게 되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그 이후로 2018년 현재까지 골든볼이 우승팀에서 나오지 않고 있다.[57] 골든 볼, 실버 볼, 브론즈 볼을 통틀어서 최초이자 지금까지 유일한 비유럽, 비남미권 선수의 수상이다.[58] 매진되었다는 경기가 수천자리씩 남아있었다. 아직 남은 표가 몇 장이고 경기전까지 어떻게 팔지를 공개하고 절차를 밟아야 하는데 운영을 엉망으로 했었다.[59] 말이 침체기지, AFC 챔피언스 리그에선 2002년까지 있던 5번의 대회에서 한국팀이 3번 우승했다.[60] 아드보카트 감독은 한국이 16강 진출에 실패한 것을 자신의 준비 부족이라고 인정했지만 시간의 부족함도 토로하며 1년도 안 되는 그 짧은 기간 동안 팀워크를 다지는 건 도저히 불가능했다고 말했다.[61] 단, FIFA 주관 성인대회로 범위를 넓히면 2003년 컨페더컵 결승전에서 98분 티에리 앙리가 넣은 결승골이 최후의 연장 골든 골이다.[62] 원래 룩셈부르크도 같이 묶어서 베네룩스 3국으로 하려 했다고 한다.[63] 1994년 미국 월드컵 때는 브라질의 골키퍼 타파렐이 비슷하게 이탈리아에서 쫓겨났다. 하지만 타파렐은 승부차기에서 선방하지 않았으며 로베르토 바조가 실축하였다.[64] 덤으로 이때 상대 팀 골키퍼였던 부폰, 카시야스, 칸은 모두 야신상을 수상했다.[65] 일본에만 이 광고판이 있다.[66] 단 터키전만 유일하게 남성 가수(테너)가 불렀고, 나머지 상대국 가수는 상대국을 대표하는 여성 가수(단 미국전은 한국인이 독창)가 초청돼서 국가를 독창했다.[67] 이는 정몽준 공동위원장의 제안으로 경기 전에 축제 분위기를 고조 시키자는 취지 였으며 FIFA의 승인을 받았다. 사실 모든 출전국을 라이브로 하자는 제안을 했으나, 우선 각 출전국이나 대회 조직위원회는 국가를 노래 할 가수를 선정 및 초청해야 하고 해당 국가의 악보를 입수해야하는 번거로움이 따르며 FIFA의 승인도 받아야 한다는 점 때문에 일본 월드컵 축구 조직위원회는 반대의사를 피력했고, 이에 따라서 한국에서 열리는 한국팀 경기 한정으로만 성악가와 상대국 가수를 초청하여 라이브로 국가를 연주하기로 결정되었다.[68] 3군 통합 기지인 계룡대 관할 군악대이다.[69] 이탈리아의 국제적 가수로 전세계 최고 권위의 130개 국가 극장에서 공연한 적이 있으며 또한 2012년에 한국에 다시 찾아와서 공연한 적이 있는 국제적 가수이다.[70] 포루투갈의 파두가수이며 마리자라는 예명으로 활동한다.[71] 원래는 월드컵 공식 주제가를 부른 미국 가수 아나스타샤가 미국 국가를 부르기로 되어 있었으나 미 대사관의 제안으로 독창자가 바뀐 것이다. 소프라노 정경주는 극동방송 사장인 김장환 목사의 최측근인데 한국 사람이 미국 국가를 독창한 점은 한-미간 친선 관계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계획 이었다는 미국 대사관 측 입장 이였다고 한다. 소프라노 정경주는 미국과 연관이 있다면 주한 미 8군 중령이자 군목인 남편을 두고 있다는 것과 큰 아들을 미국의 의과대학에 보내고 있다는 것인데 이게 인연이 되어서 월드컵 조직위원회가 5월말쯤 미국전 때 미국 국가를 불러달라고 제의해 왔고, 흔쾌히 수락했다고 한다. 월드컵 조직위원회에서 허버드 주한 미국대사가 한국인인 정경주 씨를 추천(미 대사관은 역사적인 한·미전과 양국간의 우호관계 의미를 살리기 위해 한국인 소프라노 정경주를 선택했다고 한다.)했고, 한국인인 소프라노 정경주가 미국 국가를 독창하게 된 것이다.[72] 폴란드의 스타 가수이다.[73] 가수 조영남의 동생이다.[74] 세네갈 쇼크 때문이 아니다.[75] 1998 월드컵까지만 해도 선수 한 명을 희생해서 서드 골키퍼를 데려가기도 했다.[76] 하지만 경기에는 출전하지 않았으며, 이후에도 대한민국 대표팀에서 23번을 받은 선수가 월드컵 본선 경기에는 출전하지 못하다가 2018년이 되어서야 조현우가 처음으로 본선 경기에 출전하였다.[77] 2010년대 이후에 이르러서야 칠레가 강호가 된 거고 이 당시 칠레는 베네수엘라와 둘이 남미의 바닥을 책임진 약골 형제들이었다.[78] 다만 칠레가 바닥이란 말이 억울할 수 있는게 지난 월드컵에선 16강까지 올라갔고, 2년전에 열린 올림픽에선 동메달까지 탄 팀이다. 2010년대 들기 전 까지 이리고 치이고 하는 베네수엘라하고 똑같이 비교할 수가 없다.[79] 슬로베니아, 중국, 사우디아라비아[80] 당시 8강에 브라질, 잉글랜드, 스페인, 한국, 세네갈, 독일, 터키, 미국이 올라왔는데, 이때 당시 우승급 전력이었던 잉글랜드와 브라질이 서로 8강에서 맞붙었다. 그리고 남은 우승급 전력인 스페인은 당시 다크호스였던 한국과 맞붙었다.[81] 오언에게 선제골을 내준 과정에서 브라질의 센터백 루시우 선수의 치명적인 실수가 있었다.[82] 중국, 일본, 대한민국[83] 조별리그 3차전에서 중국을 3:0으로 이기고 C조 2위로 16강 진출, 16강전에서는 일본을 1:0으로 이겼으며 3위 결정전에서는 대한민국을 3:2로 이기며 3위를 차지하였다.[84] 88올림픽 유치 당시는 경쟁 상대가 상당히 만만한 나고야였고 이미 올림픽을 2차례씩이나 진행했던 참이라 "도쿄와 삿포르에서 했는데 또?"라는 식으로 다소 시큰둥해서 일본 측의 개최 열기가 높지 않았었다. 반면 월드컵 유치는 한국은 물론 일본도 갖은 힘을 다 쏟아부었다는 차이가 있다. 다만 올림픽 유치 때와 비교하면 한국의 위상이 훨씬 높아진 상태였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게다가 4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을 이뤄낸 한국과는 달리 일본은 1998년 프랑스 대회에 처음 출전한 것이 고작이라 명분에서도 밀렸다. 하지만 1989년에 월드컵 유치위가 출범한 일본과 달리 한국은 1994년에서야 늦깎이로 부랴부랴 참가했다는 점 역시 88 올림픽과의 큰 차이점. 88 유치전에서도 한국이 후발주자이긴 했지만 나고야가 77년, 한국이 79년에 유치전을 시작해 크게 차이가 나는 편은 아니었다.[85] 경기는 2:0으로 종료[86]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당시 북한이 이탈리아를 꺾고 8강에 진출한 것을 의식한 문구. 붉은 악마 측에서는 깊은 생각 없이 적은 건데, 문구를 미리 발견한 이탈리아 측에서는 항의까지 할 정도로 격하게 반응했다고 한다. 반대로 잉글랜드는 이거 보고 싱글벙글했는데, 그 이유가 다름 아닌 자기네가 유일하게 우승한 월드컵이다. 독일 부분 첨언하자면, 1966년 결승에서 잉글랜드에 패한 나라가 서독이다. 연장전까지 해서 2:4 잉글랜드 승[87] 이번 월드컵에서 우승해 유니폼에 별을 새기자는 의미.[88] See you at K-리그. 월드컵은 끝났으니 이제는 K리그에서 보자는 뜻이다.[89] 이에 대한 일화로 90대 할머니가 3.1 운동 이후 모든 국민이 대한민국을 외치는 것을 본 것이 처음이었다고 한다.[90]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자주 쓰기 시작한 것도 이 월드컵부터다. 그 이전까지는 국제스포츠 중계 시 자막에 보통 '한국'이라고 썼고 신문이나 TV 등 언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즉, 보통 대한민국이라고 정식 명칭을 전부 말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는데 한일 월드컵 이후 언론에서도 꼬박꼬박 대한민국이라고 지칭하기 시작했다.[91] 원본은 2002년 6월 15일자 MBC 뉴스데스크 일부. 장소는 경기도 광주시의 한 장례식장이며, 포르투갈전 다음 날 뉴스 영상이다.[92] 8강전 승리 때에는 수유동의 어느 경찰마저 순찰차 위에 올라갔다. 물론 외친 건 대한민국이 아니라 몰려나온 시민들에게 차도에 나오지 마세요 위험합니다였다.[93] 단, 요코하마와 이바라키, 사이타마 등은 도쿄에서 인접해있으며 일본 수도권에 속하는 지역인지라 도쿄에서의 접근에는 문제가 별로 없었다. 도쿄의 경우 높은 지가로 인해 신축 월드컵 경기장을 지을 여건이 되지 않았고, 기존의 경기장들도 노후화되어 월드컵을 개최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월드컵 유치 신청을 하지 않은 걸로 알려져 있다.[94] 선례는 1958 FIFA 월드컵 스웨덴의 스톡홀름. 같은 주 솔나에서 대신 개최되었다.[95] 참고로 홍명보 본인은 이미 상무에서 병역 의무를 마친 뒤였다.[96] 그리고 이렇게 특정 종목에만 병역 혜택을 준 사례가 있었기에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4강 진출 기념으로 야구 선수들에게 법을 바꿔서 병역특혜를 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당연히 다른 종목들의 심한 반발에 부딪혔다. 올림픽 동메달 이상, 아시안게임 금메달이라는 원칙은 모든 종목에게 같은데 축구와 야구에만 특혜를 준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월드컵과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의 병역 혜택은 사라졌다.[97] 의미는 남한의 '남'+ 니코동의 혐한태그인 똥술 + 영어권의 땅을 나타내는 접미사 'land'[98] 한국사람을 다 싸잡아서 욕하는 건 아니고, 니코동에서 '성형을 자주 하는 한국의 여성을 인간적인 존재로 보지 않는다' 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다만 이 영상에서처럼 그냥 한국을 까고 싶을 때도 빈번히 사용한다.[99] 사실 1990년대 일본/경제가 침체기였다고는 하지만, 1인당 국민소득은 일본이 한국의 4배, 90년대 말에도 3배를 훌쩍 뛰어넘었다.[100] 2002 월드컵부터는 HBS라는 전용 방송사에서 국제신호 제작을 전담했다[101] HBS 홈페이지에 나와있는 원문-A separate High Definition 1080i clean feed was also provided alongside the Standard Definition 4/3 feeds for live coverage of 48 matches of the 64 played at the event, highlights covered all other matches. Eight special HD cameras were employed to achieve the HD production.-대략적인 내용은 8대의 카메라를 사용했으며 1080i로 제작되었고 64경기 중 48경기를 생중계했으며 하이라이트는 전 경기를 제작했다는 내용이다.[102] 여기는 SBS 단독 HD중계 19경기와 KBS 단독 HD중계 3경기를 포함해 총 52경기가 HD로 중계된 것으로 나와있다.[103] 조별리그를 치른 일본에는 약 3만, 그리고 한국에서 열리는 16강 전에는 8천 명이 방문했다. 아일랜드뿐 아니라 독일과 멕시코, 이탈리아도 조별 리그만 일본에서, 결승전을 제외한 토너먼트는 한국에서 치렀기 때문에 두 나라를 오가야 했다. 반대로 덴마크와 세네갈, 브라질, 터키는 조별 리그만 한국에서, 3/4위전을 제외한 토너먼트는 모두 일본에서 치렀다.[104] 여담이지만, 축구 선수마다 수분 보충을 위해 물/이온음료를 선택한다. 2002 월드컵 당시 국가대표 팀닥터였던 최주영에 따르면 안정환은 게토레이와 물을 반반 섞어서 마셨다고.[105] 역시나 그 징크스는 현실로...[106] 1982년 친선전에서 2:2 무승부 기록, 2018년 친선전 2:1 승리 기록[107]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당시 쇼트트랙 금메달 사건과 미국전을 치룬 3일 후 일어난 미군 여중생 압사 사건이 화근이었다. [108] 반면 당시 미국 팀의 일원이었던 랜든 도노반은 한국전이 열린 대구 경기장에서 어르신들이 보여준 호의에 감사를 표하기도 했으며, 귀국 후 한인타운에서 한국 팀을 응원하기도 했다고 한다. 대구광역시는 알다시피 보수성향이 상대적으로 강한 데다가 한국의 보수는 대개 친미적이라 딱히 이상할 것도 없지만.[109] 전반전에도 김남일의 얼굴을 손등으로 가격하여 경고를 먹은 토티였다.[110] 아르헨티나가 약하거나 네임밸류가 낮은 팀은 절대 아니지만 이 월드컵 개최 유치전에서 대한민국 단독 개최를 지지했기 때문에 야유 폭탄을 맞았다. 거기다 일본 현지에 베컴 열풍이 불면서 아르헨티나는 조 내 톱시드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현지팬들에게 제대로 대우받지도 못한 채 광탈하면서 쓸쓸히 떠나야 했다.[111] 근데 우습게도 잉글랜드와 브라질이 8강에서 만났다. 그것도 일본에서.[112] 월드컵을 앞두고 국내에선 성숙된 시민의식을 보여주자는 목소리가 높았다. 애국주의가 통용되던 시대의 끄트머리여서인지 관민이 하나되어 이에 동참했고 본 문단의 내용 역시 이러한 경향의 일례다.[113] 이와 비슷하게 유로 대회에서도 이탈리아를 도발하려고 상대국 팬들이 태극기를 올렸다.[114] 1999년생: 천년의 마지막 출생자, 2000년생: 새천년 밀레니엄 베이비/즈문둥이, 2001년생: 21세기 첫 출생자/제2의 밀레니엄 베이비, 2002년생: 월드컵둥이[115] 2002년생부터 출생아 수가 40만대로 줄어들었다.[116] 터키도 유명하지만, 정작 이쪽은 원정 응원을 많이 오지 못했다.[117] 사고 전부터 공장 건물과 고압선이 가까이 있어 감전 위험이 상당한데도 주한미군은 공사를 강행했으며, 막상 사고가 일어나자 미군측은 피해자 전씨에게 위로금 60만원만 주고 묻으려고 했다.[118] 이 해 여름에는 아폴로눈병이 창궐하기도 하였는데 법정 전염병으로 인한 결석의 경우 공결 처리하는 규정을 악용하여 학교에 가기 싫은 학생들이 서로 눈병을 옮겨주는 풍조가 생겨 수업 결손이 유난히 많은 해였다.[119] 그리고 한국의 8강전이 있던 날, 두 주인공이 검열삭제를 해서 여자주인공이 임신을 하게 된다...[120] 안정환이 마리텔에 출연하여 당시 상황에 대해 밝혔다.[121] 사실 이 대회가 흥행에 실패를 한 건 한일 월드컵의 열기에 묻힌 것도 있지만 그 당시 대회 시드를 받았던 임요환, 홍진호, 김동수, 조정현의 16강 조기 광탈, 그 당시 변길섭과 강도경의 한빛 스타즈 팀킬 결승 등의 요인도 있었다. 그래서 반대편 리복배 2002 KPGA 투어 2차리그 결승전은 아예 8강 스페인전 당일에 열고, 팬들과 선수들이 다 같이 결승이 열린 양재동 한전 아츠풀 센터에서 낮에 열린 스페인전 경기를 응원한 뒤, 축구 경기가 끝나자 바로 결승전을 여는 참신한 시도로 흥행에 꽤 성공했었다. 거기에 대진도 팀킬 경기이긴 하지만 홍진호와 이윤열이라는 흥행 카드들이 올라왔었다. 그래도 다행히 다음 시즌인 2002 SKY배 온게임넷 스타리그는 결승전이 박정석의 가을의 전설 재현이냐 임요환의 전승 우승이냐의 떡밥과 함께 역대 스타리그 최다 결승전 관중인 2만 5천명이 모이면서 흥행에 대성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