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예멘

 


'''예멘 인민 민주 공화국
جمهورية اليمن الديمقراطية الشعبية'''
''Jumhūrīyat al-Yaman ad-Dīmuqrāṭīyah ash-Sha'bīy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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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국장[1]
기간
1967년 ~ 1990년
면적
360,133km²
인구
2,585,484명(1990)[2]
수도
아덴
정치체제
일당제 사회주의 국가
국가원수
주석
주요 지도자
알리 살렘 알 베이드(1986~1990)
언어
아랍어
종교
수니파
민족
예멘 아랍인
통화
남예멘 디나르
1인당 GDP
268$(1990)[3]
건국 이전
남아라비아 연방[4]
멸망 이후
예멘 공화국
1. 소개
2. 역사
2.1. 독립 과정
2.2. 독립 이후
3. 한국과의 관계
4. 기타
5. 부활?


1. 소개


'''위치'''
[image]
지도에서 보면 현 예멘 공화국의 동남쪽 지역에 존속하였던 사회주의 국가. 남예멘(جنوب اليمن)으로도 불린다. 1967년에 건국되어 1990년까지 존속하였으며 당시 수도는 유구한 항구도시인 아덴.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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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예멘의 유일 정당인 '예멘 사회당'(Yemeni Socialist Party)기. 현재는 의회에서 5석짜리 군소 좌파야당으로 활동중이며, 사회민주주의를 받아들이면서 민주적인 정당으로 탈바꿈했다.

2.1. 독립 과정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오스만 제국이 패배한 이후 남예멘 지역은 영국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영국은 아덴 일대는 직접 통치하였으나 내륙 지방에서는 각 지역의 셰이크들의 통치권을 인정하는 간접통치를 유지하였다. 일부 부족들이 반영 폭동을 일으켜도 영국을 지지하는 다른 부족들의 손으로 진압되었으므로 한동안 영국령 예멘은 아덴을 중심으로 경제적 번영을 구가하며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허나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반영 아랍 민족주의가 확산되면서 영국의 통치도 종식을 고하게 되었다.
1947년, 아덴의 노동자들이 영국의 팔레스타인 정책에 저항하는 파업을 일으킨 것을 시작으로 반영 노동운동이 확산되었다. 이에 영국은 입법평의회를 설립하여 예멘인들에게 자치권을 부여하는 것으로 예멘인들의 불만을 달래려 했지만 1949년에 선포된 선거법이 소득을 기준으로 중산층 이상에게만 선거권을 부여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예멘인들의 불만은 가중되었다. 1952년, 부족의 유지들과 자유주의 지식인들이 남아라비아 연맹을 창설하고 영국과의 타협을 통해 독립을 쟁취하고자 했는데 이들의 보수적 성향 때문에 대중적 기반을 확보하는 것은 실패했다. 이에 반해 압둘라 알아스낙이 지휘하는 아덴 노동조합의회는 강력한 반영 노동운동을 전개하면서 주도권을 잡았다.
1962년, 알아스낙이 인민사회당을 결성하고 독립운동을 본격화하였으며 예멘 왕국이 쿠데타로 붕괴되었다. 위기감을 느낀 영국은 아덴의 직할통치령과 내륙의 자치지역을 병합하여 남아라비아 연방을 형성함으로 예멘인들의 불만을 무마하고 보수적인 부족들의 지지를 얻고자 했다. 인민사회당은 이에 격렬히 반발했으나 1963년 1월, 영국은 이를 묵살하고 남아라비아 연방을 형성하고 1968년에 독립시켜주겠다고 약속하였다. 한편 북예멘의 쿠데타에 영향을 받은 학생과 지식인들이 1963년 6월, 북예멘의 수도 사나에서 민족해방전선을 결성하고 무장 독립운동을 시작하였다. 1963년 10월, 민족해방전선은 남예멘 북부 산악지대인 라드판에 진입한 것을 시작으로 1964년에는 아덴까지 진출했다.
이 과정에서 지지층 이탈로 쇠락을 겪게된 인민사회당은 1965년 6월, 다른 단체들을 규합하여 남예멘 해방조직을 결성하고 역시 무장투쟁에 나서게 된다. 나세르가 지배하던 이집트는 남예멘 해방조직과 민족해방전선에게 통일전선을 구축하라고 조언하였고 이에 1966년 8월, 민족해방전선과 남예멘 해방조직이 남예멘 해방전선으로 통합하였다. 허나 이집트의 지지를 받던 아스낙이 남예멘 해방전선의 지도자로 추대된 것에 불만을 품은 민족해방전선은 1966년 10월 합작을 파기하였다.
1967년 9월에 이르러 아덴이 함락 직전에 이르렀고 남아라비아 연방은 사실상 사형선고를 받게 되었다. 이쯤되자 독립단체들은 맛이 간 남아라비아 연방이 아니라 서로를 적으로 삼아 내전을 벌였고 민족해방전선은 남에멘 해방전선을 붕괴시키고 독립전선을 자신들을 중심으로 통일시켰다. 영국도 민족해방전선을 협상대상으로 지목함에 따라 영국은 남예멘의 독립을 인정하게 되었다. 민족해방전선은 11월 30일, 남예멘 인민공화국을 선포하였다.

2.2. 독립 이후


1967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여 예멘 국민 해방 전선의 주도로 남예멘 인민 공화국(جمهورية اليمن الجنوبية الشعبية)이 세워졌으며 민족해방전선 서기장 카흐탄 알샤아비를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민족해방전선은 민족전선으로 개칭하고 조직을 개편했는데 전국을 6개로 분할하고 인민위원회를 설치하였다. 민족해방전선은 남예멘 독립전쟁 시기까지만 해도 특정한 이념을 주장하진 않았으나 1967년 말의 주도권 싸움 끝에 사회주의자들이 주류세력이 된 상태였다. 이에 반발하는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의 대립이 이어졌고 1969년 6월, 루바이 알리를 중심으로 한 강경파가 알샤아비를 축출하고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루바이 알리는 사회주의 노선을 강화하여 토지개혁과 국유화를 실시하였고 1970년 11월, 신헌법을 공포하여 국명을 예멘 인민 민주 공화국으로 변경하였다. 특이한 점은 서아시아에서 유일한 사회주의 국가였다는 점. 그런데 굳이 더 찾아보자면 오만 남부지역에 존속했던 반정부계 사회주의 단체였던 도파르 해방 전선(DLF, جبهة تحرير ظفار)이 있다. 이 반왕정 조직은 당시 오만의 국왕이였던 사이드 국왕의 통치에 불만을 품고 오만에 사회주의 공화국을 세우려 했는데 1970년 사이드 국왕의 아들이었던 카부스 왕자가 무혈 쿠데타를 일으켜 즉위한 이후 무력 진압을 펼치면서 흔적도 없이 궤멸하였다.
북예멘과는 우리나라나 과거 독일과 같이 애증의 관계 속에서 공존하였다. 1972년 처음으로 카이로에서 남북이 정상회담을 가지며 향후 통일을 하겠다는 선언까지 했는데 남북의 내부 갈등 문제와 1977년에 발생한 이브라힘 알함디 북예멘 대통령의 암살사건, 1979년에 발생한 국경 분쟁으로 통일 계획이 유보되었다. 그래도 남북예멘 관계는 꽤나 좋았는데, 북예멘은 아랍사회주의에 영향을 받은 민족주의 중도좌파를 표방하였고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과도 친해 사회주의 국가인 남예멘과 그렇게 심각한 성향적 차이가 있지 않았고 또 두 국가의 분단 과정에서 심각한 무력분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1980년대 중반부터 소련의 개방정책과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으로 인해 북예멘이 점점 우위를 점하게 되었고 무엇보다도 남측과 남북국경 지역의 유전개발이라는 현실적인 이익이 맞물리면서 다시 통일 분위기가 조성되어 2년 뒤인 1990년 남북 합의에 의해 통일을 이룬다. 그러나 1994년 오랫동안 지속되던 남북 갈등으로 인해 예멘 내전이 발발했고 남예멘이 '예멘 민주 공화국'으로[5] 다시 분리독립을 선언하였지만 결국 내전에서 패전한 남예멘이 북예멘에 흡수통일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런 예멘의 조급한 통일 뒤에는 무력충돌→회담을 통한 합의→합의내용 파기→무력충돌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과정이 숨겨져 있었다.
단, 통일 예멘의 국가는 남예멘 국가를 그대로 사용하다 가사를 조금 바꿔서 사용하고 있으며 이런 사태 후에도 바뀌지 않았다.

3. 한국과의 관계


북한 단독수교국으로 일찍이 수교하였으며 대한민국과는 1990년 5월 18일, 통일 선포 나흘 전에 수교하였다가 통일 이후에는 통일 예멘공화국으로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4. 기타


공산주의 국가 중에서는 특이하게 국교를 채택하고 있었다. 사실 이는 공산주의기는 하지만, 본래 아랍권 국가이기도 했던 데다가 주변에 오만, 사우디아라비아 등 석유 부국들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미국 국무부가 1979년에 최초로 지정한 테러지원국 원년 멤버 중 하나였다.
의외로 사회주의 정권 시절에는 여권신장이 잘 이뤄지기도 했다.

5. 부활?


2010년대 들어 북예멘을 시아파 후티 반군이 장악하고 남예멘을 수니파가 장악하는 형국이 이어지면서 다시 재건국될 가능성이 나타나고 있는 상황이다. 남예멘 분리주의세력은 2013년 1월 14일과 2016년 4월 18일에 아덴에서 분리주의 시위를 벌였다.## 2015년 2월 25일에 사회주의 민병계열인 민중저항위원회가 남예멘 대통령관저를 장악한 적이 있었다.# 2017년 5월부터 남부 과도위원회를 구성해 예멘 정부를 대신해 독립 정부 수립절차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자세한 사항은 예멘 내전(2015년)남부 과도위원회 문서 참조.

[1] 지금도 남부 분리 세력이 이 당시의 국기와 국장을 사용하고 있다.[2] 북예멘은 당시 인구 716만 명이었다.[3] UN 통계. 참고로 당시 북예멘은 384$였다.[4] 영국 보호령[5] 구 남예멘의 국호와는 조금 다르다. 국호에서 '인민'이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