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 제2공화국

 




'''포르투갈 공화국'''
'''República Portugue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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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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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의 본토와 식민지
존속 기간
1933년 ~ 1974년
수도
리스본
언어
포르투갈어
종교
가톨릭
민족
포르투갈인
인구
8,500,000명(1950년)
통화
포르투갈 이스쿠두
정치체제
의원내각제, 권위주의, 일당제
국가원수
대통령
정부수반
수상
주요 수상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
마르셀루 카에타누
이전
포르투갈 국가독재
이후
포르투갈 구국군정,
포르투갈 제3공화국
1. 개요
2. 역사


1. 개요


1933년에 포르투갈에서 포르투갈 국가독재가 끝난 후에 성립된 포르투갈의 2번째 공화국이자 독재 정권이다.[1] 이스타두 노부(Estado Novo, 포르투갈어로 '새로운 국가' 라는 뜻)라고도 한다. 1974년에 카네이션 혁명으로 멸망했다.

2. 역사


1926년 군사 쿠데타를 계기로 포르투갈 제1공화국은 소멸하고 포르투갈 국가독재라는 헌법 공백기가 시작되었다. 쿠데타를 계기로 입각한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는 특이하게 군인이 아니라 재무 장관으로 공직을 시작한 경제학 교수 출신이었다. 살라자르는 재임 기간 동안 세계 대공황의 여파에도 불구하고 기적적으로 포르투갈의 경제를 되살리면서 엄청난 명성을 얻었고 이것을 통해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1930년 국민연합이라는 정당을 창당함으로써 정계에 뛰어든다.
결과적으로 살라자르는 1932년에 군인 출신 총리도 몰아내고 총리 자리를 얻는 데 성공했다. 포르투갈이 안정을 찾기 시작하자 권력을 놓고 싶지 않았던 군사 정권은 포르투갈 안정의 최대 공로자인 살라자르가 주장한 새로운 체제에 따라 헌법 제정을 했다. 이 헌법은 국민 투표를 통과했고 1933년 정식으로 포르투갈 공화국을 선포하게 된다.
살리자르는 의원내각제의 특징을 악용해서 1932년부터 1968년까지 36년동안 뇌출혈로 쓰러질 때까지 총리 자리를 지키면서 포르투갈의 실권을 손아귀에 쥐고 독재 정치를 펼쳤고 군인 대통령조차 그의 꼭두각시로 전락했다. 파시스트극우 세력을 탄압하면서도 파시스트적인 조합주의 경제 정책과 극단적인 권위주의[2] 정권을 유지하면서 살라자르의 마음대로 산업을 통제하고 성장을 유지시킬 수 있었다. 강력한 디플레이션 정책과 부채 지불을 통한 건전한 예산 유지로 매년 포르투갈의 재정은 흑자를 기록했다. 독재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Futebol(축구), Fado(파두, 포르투갈의 음악), Fatima(파티마, 종교)의 3F 정책[3]을 비롯한 우민화 정책 덕분에 정권은 공고하게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러나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면서 살라자르 정권은 해외 식민지들의 독립이라는 심각한 문제에 당면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해외에 식민지들을 지배하였던 영국이 전쟁 중에 본국에 지원을 해주는 대신 독립을 약속한 결과 아프리카와 아시아 지역의 식민지들의 독립을 인정했고 동남아아프리카 식민지를 유지하고자 했던 프랑스조차 알제리 전쟁,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등으로 프랑스 제4공화국 정권이 무너지면서 결국 1960년대를 기점으로 해외 식민지들의 독립을 인정했는데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중립을 지켰던 포르투갈의 살라자르 정권은 식민지들의 지배를 고수하면서 이 시기 포르투갈은 유럽 최후의 식민 제국주의 국가라는 국제적인 비판을 받게 되었다. 수많은 아프리카 지역이 열강에서 독립하면서 앙골라, 기니비사우, 모잠비크 등 포르투갈이 지배하고 있던 지역에서도 독립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인도에서 유지하고 있던 고아 같은 경우 인도군이 그냥 쳐들어와서 탈환해 버리기도 했다. 그러나 살라자르 정권들은 이들 식민지들의 독립 요구를 묵살했고 1961년 이후 앙골라, 기니비사우, 모잠비크 등 포르투갈의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포르투갈로부터 독립을 요구하는 독립군 조직들이 저항하기 시작했다. 살라자르 정권은 군대를 파견해 식민지 반군들의 무력 반란을 진압하기 시작했고 포르투갈 식민지들은 포르투갈 식민지 전쟁이라는 긴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포르투갈군에 비해 앙골라, 기니비사우, 모잠비크 등 식민지 내의 독립군 게릴라들은 보잘것 없었지만 그래도 완강하게 저항하면서 전쟁은 장기전 양상으로 치닫게 되었고 식민지들의 독립 이탈을 무력으로 막겠다고 전쟁 비용으로 투입되는 막대한 자금도 국가 재정에 큰 부담이 되었다. 1968년 살라자르를 쫓아내고 총리가 된 카에타누 역시 독재 정치와 식민지 탄압 정책을 이어 갔고 이러한 독재 정치와 장기화되어 가는 식민지 전쟁으로 인해 내부적으로 정권에 대한 반발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1974년 4월 25일 청년 좌파 장교들에 의한 카네이션 혁명이 일어나면서 제2공화국 정권은 결국 붕괴되었다. 그리고 카네이션 혁명을 일으킨 좌파 장교 세력들이 잠시 동안 구국 준타(Junta de Salvação Nacional)라는 군정을 실시했다가 이듬해인 1975년에 자유총선에 의거한 제헌의회를 세웠고, 1976년에 새 헌법을 공포해 민주화를 완료했다.
결국 민정 체제로 복귀하긴 했지만 1974년 4월 25일 카네이션 혁명과 1975년 민정 체제 복귀 사이의 기간에 상당한 정치적 긴장과 경제적 소요가 있었다. 제2공화국이 붕괴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수도 리스본을 중심으로 총파업 수준의 대규모 파업이 몇 번이나 일어났는데 이는 40여년 동안 정치적, 사회적으로 무권리 상태에 처해있었던 노동자들의 불만이 폭발하면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공기업, 사기업을 가리지 않고 일정 규모 이상 기업에 속해 있는 거의 모든 포르투갈 노동자들이 파업에 참여했다. 결국 1974년 당해 일정 규모 이상 모든 포르투갈 기업에서 대폭 임금 인상이 이루어졌고 새로운 노동조합총연맹이 결성되었으며 동시에 옛 독재 체제에 적극적으로 부역했다고 지목된 많은 고위 공무원과 기업 임원이 해임되었다. 동시에 포르투갈 북부 시골 지역에서는 극우 가톨릭 사제들을 중심으로 카네이션 혁명의 결과를 무위로 돌리고 다시 옛 독재 체제로 돌아가고자 시도하는 운동이 횡행했다. 실제로 극우 가톨릭 사제들의 부추김을 받아서 좌파 장교 세력에 반대하는 시위가 몇 번이나 일어나기도 했다.

[1] 포르투갈 제2공화국 = 포르투갈 국가 독재기 + 이스타두 노부(1926~1974)로 보기도 한다.[2] 가톨릭 교회와 결탁하였기에 교권 파시즘으로 보기도 한다.[3] 전두환3S 정책과 비슷한 정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