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오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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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물농장>, <1984>, <카탈로니아 찬가>로 유명한 영국의 작가.Who controls the past controls the future. Who controls the present controls the past.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하고,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
- 그의 소설 1984에서 나오는 당의 슬로건
더 타임스에선 전후 가장 위대한 영국 작가의 2위로 그를 선정했고[1] , BBC 투표에서는 지난 천 년 동안 가장 위대한 영어 작가 3위로 뽑혔다.[2]
2. '조지 오웰'이라는 이름
본명은 '에릭 아서 블레어(Eric Arthur Blair)'. '조지 오웰(George Orwell)'이란 이름은 필명이며, 남성의 이름으로 흔한 '조지'와 영국의 이스트 앵글리아 지방에 있는 '오웰' 강을 합친 것이다.
흥미롭게도 그가 <1984>에서 주인공의 이름으로 사용한 '윈스턴 스미스' 역시 윈스턴 처칠의 이름에 흔한 성인 '스미스'를 합친 것이다. '윈스턴'은 원래 지명이다.
이 필명에 관한 일화 하나. 어느 날,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프랑스 파리의 호텔에 머물고 있었는데, 어떤 이름 모를 영국인이 자신을 '에릭 블레어'라고 소개하며 인사하길래 헤밍웨이가 퉁명스레 답했다. "그래서? 뭐?" 그러자 그 영국인이 '''"그리고 '조지 오웰'이라고도 하지요."''' 라고 말하기에 헤밍웨이가 깜짝 놀라 "이런 젠장, 진작 말씀하시지. 자, 어서 한잔 합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1984>를 본뜬 소설이 나올 때나 대체역사물을 쓸 때 작가들이 이 본명을 자주 쓴다. 대표적인 예로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가 있는데, 책 맨 앞의 작가 주석에다가 '조지 오웰은 에릭 아서 블레어로 표기하겠다'고 대놓고 적었다.
3. 생애
3.1. 초기
1903년, 인도 벵골에서 아편국 하급 관리인 리처드 블레어와 프랑스계 영국인인 아이다 리무쟁의 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난지 이듬해인 1904년 어머니 아이다, 누나 마저리와 함께 영국으로 돌아왔으며 수도원 산하의 유치원에서 교육받았다. 1913년 시프리언스 사립예비학교에 반액 진학생으로 진학했지만 부잣집 도련님들을 위한 노골적인 상업성을 띄는 면학 분위기와 교장 부분의 야만적 처우 때문에 지옥같은 5년을 보내게 된다. 하지만 성적은 우수하여 왕립 장학생으로 1917년 이튼 칼리지에 진학하였다. 그러나 학업에 흥미를 잃어 주로 독서에 집중하였고, 졸업할 즈음엔 그다지 성적이 좋지 못했다(167명 가운데 137등). 몇몇 교사들이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학생이었다고 한다. 당시 이튼 학교의 교육목적은 식민지 관료, 군인, 제국주의자를 양성하는 것이었는데, 오웰은 이런 분위기 자체를 싫어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 디스토피아를 다룬 소설 <멋진 신세계>를 집필한 영국의 명소설가 올더스 헉슬리가 오웰의 프랑스어 교사였다. 헉슬리도 제국주의자를 양성하는 이튼의 풍조에 적응하지 못해서 어설픈 선생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오웰은 성적이 애매하였기 때문에 더 이상 장학금을 받을 수 없었고 대학교의 살인적인 학비를 감당할 수 없었는 데다가 더 이상 학업에 흥미도 없어져서 대학 진학은 포기하고 인도 제국 경찰관 시험에 응시하였다. 이 시험도 쉽게 붙는 시험은 아니었고 꽤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여 어머니의 고향인 버마 근무를 지원하였다. 당시 버마에는 영국 경찰관이 90명이었고 그 밑에 관리하는 버마 경찰이 1만명이 넘었다. 주급 봉급도 14파운드나 되었는데 오웰은 나중에 이 시절의 수익을 아주 오랫동안 회복하지 못하였다. 버마에서는 1922년부터 1927년까지 5년간 재직하였으며 꽤 성실하게 근무하였지만[3] 제국주의와 백인의 의무를 내세우는 영국인들의 위선에 크나큰 혐오를 느끼게 되었다. 결국 1927년, 크리스마스를 집에서 보내기 위해 휴가를 얻어 귀국하였다가 홧김에 사표를 제출하고 작가의 길을 걷게 된다. 그리고 오웰은 1934년에 <Burmese Days>(국내에서는 <버마시절>로 출간)을 집필해 이 시기를 신랄하게 깠다.
3.2. 밑바닥 생활
사표를 낸 뒤, 그는 이모가 사는 파리로 이주하였다. 처음에는 글로 먹고 살 생각이었지만 현실은 시궁창. 한 호텔에서 하루에 열세 시간씩 접시닦이로 일하다 돈을 벌기는커녕 병만 얻고 돌아왔다. 런던으로 돌아온 뒤엔 <버마 시절>을 집필하기는 했지만 가정교사 일도 잠시 하였고, 홈리스 생활을 하던 중에 켄트로 가서 홉 줍는 일도 하다 한 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기도 하였다.
바로 이 때의 경험을 밑천으로 <Down and Out in Paris and London,1933>(국내에서는 여러 판본에 따라 제목이 조금씩 다르게 출간되었다. <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등)이라는 책을 쓰게 되었고, 이 책은 조지 오웰을 르포작가로서 세상에 알린 첫 작품이 되었다. 이 책에는 그가 실제로 겪었던 노숙생활에서 본 부랑자, 일용직 노동자, 불량배 등 다양한 사람들의 생활을 생생하게 묘사한 내용이 가감없이 포함되어 있다.[4] 이는 지금도 영국 하층민의 생활을 현실적으로 그려낸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이 르포로 주목받은 오웰은 그간 그의 출판하였던 빅터 골란츠로부터 탄광 노동자의 생활에 대한 글을 써줄 것을 요청받았는데, 그렇게 탄생한 <위건 부두로 가는 길>(The Road to Wigan Pier, 1937)은 오웰의 첫 히트작이 되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글쓰기 만으로 먹고 살만한 수준이라는 것이지 빈곤이 해결된 것은 아니라서 한동안은 경제적으로 크게 고생해야 했다. 15개월 동안 서점 점원으로 일한 것도 이 시기의 일로, 이 때의 경험은 <엽란을 날려라>(Keep the Aspidistra Flying,1936)의 집필로 이어졌다.
3.3. 스페인 내전 참가와 〈카탈로니아 찬가〉
1936년 12월, 결혼 6개월 만에 스페인 내전의 소식을 듣고 바르셀로나로 달려갔다. 이곳은 마르크스주의통일노동자당(POUM)의 장악 아래 평등한 분위기가 넘쳐흘렀다. 오웰은 여기서 인간다운 희망을 얻었다. 하지만 상황은 열악해서 전투는 얼마 없었지만 추위와 굶주림으로 많은 의용군이 죽어 갔다고. 스페인판 참호전에서 가장 무서운 적은 이와 쥐였다고 한다. 허나 1937년 5월 바르셀로나 사건으로 카탈루냐 공산당이 카탈루냐의 자치를 취소하고 마르크스주의통일노동자당을 분쇄하는 사건이 벌어지는 등 스페인의 현실은 조지 오웰의 이상과는 너무도 달랐다. 마침 휴가를 얻어 바르셀로나에 있던 조지 오웰은 어제의 동지들이 서로 죽여대는 모습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았다.
전선으로 복귀한 조지 오웰은 저격당해 목을 관통당하는 중상을 입었지만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5] 그런 와중에, 조지 오웰이 소속된 마르크스주의통일노동자당이 스페인 공산당 측에게서 트로츠키파로 의심받기 시작하였고[6] , 별 생각없이 마르크스주의통일노동자당의 의용군에 입대한 상태였던 조지 오웰에게도 수배령이 떨어졌다. 사경을 헤매던 오웰은 경찰이 자신을 잡아 총살하려고 급습을 준비한다는 소식을 듣고 아내와 함께 겨우 스페인을 탈출하여 프랑스를 거쳐 영국으로 귀환했다. 이때의 경험은 다큐멘터리 <카탈로니아 찬가>에 잘 묘사되어 있다. 조지 오웰이 스페인에서 겪은 일들을 더 알고 싶으면 다큐멘터리 《카탈루니아 찬가》를 읽어볼 것.
뒤이어 1937년, 조지 오웰은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을 출간한다. 본디 스페인 내전 이전에 쓰인 이 책은 이 시기에야 출간되었다. 오웰이 사회주의자로서의 의식을 표현한 첫 번째 책으로 간주되기도 하는데 오웰의 장기인 '정치성 발언 파트'가 처음으로 뚜렷하게 구분되어 나타난 책이기 때문이다. 그 뒤에 심신이 피로해진 조지 오웰은 모로코로 떠나 요양하면서 <숨 쉬러 나가다 (Coming up for air, 1939)>를 집필하고 농사를 지으면서 1년간 생활하게 되었다.
3.4. 2차 세계대전과 "동물농장"
1939년, 아돌프 히틀러가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이 사건은 오웰에게 복귀의 계기가 되었다. 오웰은 세계대전을 제국주의의 음모로 보고 반전을 주장한 독립노동당을 탈퇴한 후, 전쟁 발발 8일 후인 9월 9일에 영국 육군에 입대를 신청했지만 건강 상의 이유로 반려되었다. 이후 선전을 위한 집필도 제안했으나 사상 문제 때문인지 이 역시도 거부당했다. 그나마 영국 육군의 보조 조직인 홈가드에 입대하는데 성공했다.
오웰은 1941년에 BBC에서 대인도 선전방송의 원고와 라디오 프로그램[7] 을 담당했으나, 제국주의적 태도와 검열 등에 불만을 품고 그만두게 되었다. 1943년부터 그는 '트리뷴'에서 문예 편집자로 일했으며[8] , 1945년에는 스탈린 체제 소련을 풍자한 우화 <동물농장>을 출간하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의 영국과 동맹 관계였던 소련과 스탈린을 신랄하게 깠기 때문에 한동안 출판은 어려웠으며, 심지어 쓰는 와중엔 런던 공습 중에 원고가 타버릴 뻔했다. 하지만 스탈린주의를 비판하는 내용이 공산주의 전체에 대한 풍자로 왜곡된 덕분에[9] 미국에서 광범위하게 출판되었다. 특히 갓 정부가 수립된 대한민국에서는 미국의 지원을 받아 세계 최초로 <동물농장>을 번역한 나라(언어권)가 되었다.
<동물농장>이 애니메이션화될 때, 그 배후에는 CIA가 있었다는 설이 있다. 소설과 달리 애니메이션에서는 민중혁명으로 돼지 나폴레옹 일당이 몰락하는 최후가 나온다.
3.5. <1984>와 죽음
<동물농장>으로 유명해진 오웰은 런던이 싫다는 이유로 스코틀랜드 주라 섬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이 시기의 그는 결핵과 아내를 잃은 충격과 슬픔에서 고생했으며,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1946년도에 <1984>를 집필하여 1949년 11월에 드디어 출간하였다. 그는 병이 심하지만 않았다면 <1984>도 그다지 어둡지는 않았을 것이라고도 말하기도 하였다 . 그로부터 2개월 뒤인 1950년 1월 21일, 결국 폐결핵으로 숨을 거두었다.
그는 사회주의자였지만 소련식 체제를 혐오하였다. 소련은 마르크스는 물론이고 심지어 레닌의 이상마저도 퇴색시켜 버린 독재 국가에 불과하다고 간주한 것이다. 특히 <동물농장>과 <1984>는 그가 생각하는 소련식 스탈린주의를 멋드러지게 풍자한 것으로 명성이 높다. <동물농장>과 <1984>, 이 두 걸작품은 이후에도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로 리메이크되었으며, 특히 <1984>의 빅 브라더는 개인의 모든 정신과 생활까지 체제에 따라 빠짐없이 감시하는 상황을 비유하는 대명사로까지 정착되었다. 나아가 이 소설의 영향으로 소설 속의 오세아니아처럼 정부가 개인의 삶을 총체적으로 통제하는 전체주의 사회를 '오웰리언(Orwellian)'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4. 여담
1950년 1월 24일에 사망한 조지 오웰의 모든 저작권은 2021년 1월 말에 완전히 소멸한다.
21세기 기준으로도 굉장한 장신(6피트 2인치 반. 거의 190 cm)이었다. 그래서 막장을 취재할 때 엄청 고생했다고 한다. 막장의 갱도는 높이가 1미터 (3~4피트)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경우가 많아 몸을 거의 반으로 접어야 했다.
자유주의자(리버럴)를 '권력을 탐하는(숭배하는) 무권력자'들이라 평하기도 했다(Liberal: a power worshipper without power.) 이는 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다.라는 책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잠시 에스페란토 운동에 가담하기도 했다.
수필 가운데에 〈영국 요리에 대한 옹호〉라는 작품이 있다. 원문 실천문학사에서 출판한 산문집 '코끼리를 쏘다'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은 영국 요리가 무조건 맛이 나쁘다는 것은 오해이며 영국요리가 맛 없기로 소문난 이유는 가정식 위주로 발달했고, 그 가정들이 가난에 시달려 제대로 요리를 할 여건이 못되어 그것이 제대로 알려지지 못했을 뿐더러 외국인들이 싸구려 펍에서만 영국 요리를 접해서 그런 것이다.
독립노동당원이자 인문주의적 무신론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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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살던 집 앞에 놓인 텔레스크린 CCTV. 재미있지만 합성이다. #
한국 기자 조갑제가 존경하는 인물이기도 하다.[10]
한국의 비디오 아티스트인 백남준이 조지 오웰의 1984에 영향을 받아 조지 오웰의 이름을 딴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라는 작품을 만든 적이 있다. 놀랍게도 백남준이 표방하는 비디오 아트는 일방적으로 통신이 이루어지는 텔레비전이 아닌 쌍방향으로 교류가 이루어지는 텔레비전을 특징으로 하기 때문에 텔레스크린과 비슷한 부분도 있다.
훗날 버닝썬 사건을 생각하면, 의미심장하다.
하츠 오브 아이언 시리즈의 대체역사 모드 카이저라이히: 대전의 유산에서 단골로 등장한다, 생디칼리즘화된 영국에서 빅브라더가 되거나 빅브라더를 살해하는 루트가 있다.
5. "오웰 리스트"
말년의 흑역사가 있는데, "오웰 리스트(Orwell List)"란 것이다. 1949년 3월, 노동당 정부가 정보검색부 등을 통해서 반공선전을 할 때, 오웰은 친공(친소)적인 영어권 작가들을 다룬 리스트를 한때 청혼했던 여성인 실리아 커원(Celia Kirwan)에게 넘긴 적이 있다.# 리스트 명단에는 E.H 카, 찰리 채플린(!)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는 2003년에야 공개되었는데, 그래서 "빅 브라더를 반대하던 그가 냉전 시대에 빅브라더의 하수인이었다니!"(동아일보)하고 경악하는 경우도 많다고. 초기에 공개된 기사 제목 가운데 하나도 "Socialist Icon Who Became an Informer"(정보원이 된 사회주의자의 아이콘)이다.
리스트가 공개된 때의 충격은 아직 살아있던 오웰의 친구(대표적으로 그보다 열살이 어렸던 마이클 풋 전 노동당 당수)들까지도 경악했을 정도라고 한다. 하지만 단순히 이 리스트만으로 그를 매카시즘으로 바꿨다고 보기 어렵다. 무엇보다 그 리스트는 '체제 전복 위험 인물 리스트'가 아니라 단순하게 ''''방첩 활동을 하기엔 부적합한 사람들''''을 언급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대 소련용 선전을 위해 원고청탁이나 방송을 맡기기엔 부적합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우리나라로 치면 '이 사람은 위험하다'가 아니라 '이 사람을 대북선전 전문가로 고용하지 마시오'라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위키피디아에서도 "unsuitable as writers for the Department......"라고 적었다. 처음에는 대개 언론사의 선전으로 '조지 오웰이 알고보니 정부의 끄나풀이었다니!'라는 식의 충격적인 반응이 퍼졌으나 아직 살아 있는 동시대 언론인과 지인들의 회고를 통해 저 명단이 무슨 대단한 살생부도 아니고, 오웰에게 스탈린주의자들은 스페인 시절부터 유언비어와 음해를 한 악연이면 악연이지, 오웰이 이들을 지켜야 하는 의리도 딱히 없었고, 무엇보다 저 명단이 기껏해야 그냥 해당 정부 부서의 단편적인 목적을 위한 작은 명단에 불과했다는 점이 부각되며 다시 잠잠해졌다.
그리고 오웰의 개인적인 입장에서 보면 저런 코민테른 계열 주류 공산주의자들은 사실 우익세력 못지 않게 욕 튀어나올 만하다. 조지 오웰의 처지에서 저들은 스페인 내전 참전 시부터 조지 오웰과 조지 오웰이 몸담던, 혁명을 강하게 지향하던 정치세력인 마르크스주의통일노동자당과 그 의용군을 음해하고 박해하던 원수들이다. 조지 오웰을 비롯한 비소련계 좌익들이 우파에게 처맞을 때는 해 준 것도 없고 오히려 소련의 직접적인 힘이 닿는 곳에서는 지들이 더 노선 통일이란 권위주의로 찍어 눌렀던 소련계 좌파가 조지 오웰을 두고 배신자 운운할 건덕지기는 눈곱만큼도 없다. 문제는 한겨레에서 낸 책 소개에서 오웰 리스트에 관한 대목이 나오는데 정보 출처가 어디인지는 몰라도 잘못된 정보가 들어가 비방이 되어 버렸다.
[1] 1위는 필립 라킨, 3위는 윌리엄 골딩, 4위는 테드 휴스, 5위는 도리스 레싱, 7위는 V. S. 나이폴, 8위는 뮤리엘 스파크, 9위는 킹슬리 에이미스, 10위는 앤절라 카터, 11위는 C.S. 루이스, 12위는 아이리스 머독, 13위는 살만 루시디, 15위는 얀 모리스, 16위는 로알드 달, 17위는 안소니 버제스, 18위는 머빈 피크, 19위는 마틴 에이미스, 20위는 안소니 파웰이다. #[2] 1위는 셰익스피어, 2위는 제인 오스틴. 4위는 찰스 디킨스, 5위는 이언 뱅크스, 6위는 J.R.R. 톨킨, 7위는 제임스 조이스, 8위는 도스토예프스키, 9위는 세르반테스, 10위는 마크 트웨인. 영어권 작가가 아닌 사람도 보인다. 1999년 2월 한 달 동안에 BBC 웹사이트에서 진행한 투표로 매겨짐.#[3] 이때 버마어와 힌두어를 익혔으며 능숙한 수준이라 고급버마어를 구사하고 번역도 곧잘 했다고 한다.[4] 가난한 인생이다보니 아이러니하게 음식 묘사가 일품이다. 쫄쫄 굶다가 친구인 러시아인 웨이터 보리스가 일하는 호텔에서 훔쳐온 음식을 먹는 묘사나, 오웰의 친구가 굶다가 갑자기 생긴 돈으로 먹는 빵과 포도주의 묘사가 끝내준다. 파리에서는 주로 가난하고 악만 남은 주방에서 일꾼들의 묘사가 (특히 보리스와 주방장간의 실랑이)가, 일을 잡기 전에 얼마 안되는 돈을 쪼개 버티던 런던에서는 부랑자 생활에 대한 묘사가 주를 이룬다.[5] 총탄에 맞고 먼저 떠오른 생각은 가족 생각 같은 게 아니라 '총알이 내 어디에 맞은거지?', '얼마나 더 살 수 있을까?'라고 한다. 다큐멘터리 <카탈루냐 찬가>에 총탄에 맞았던 당시의 느낌이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6] 이때부터 조지 오웰은 스탈린주의를 경멸하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대표로, 조지 오웰과 스페인 내전에 초기 참전에 함께한 아나키스트는 스탈린주의자에게 가장 많이 학살당하고 탄압당한 탓에 소멸당하게 되었다.[7] 여러 시인을 초청해 시를 읽고 대담을 가졌다고 한다.[8] 이때 쓴 칼럼들 대다수는 한글 번역본이 없는 상태. 일부를 모아 번역한 책으로 한빛비즈에서 나온 <더 저널리스트: 조지 오웰>이 있다.#[9] CIA의 개입이 있었다는 의혹이 있다[10] 물론 사회민주주의자도 우익 취급했던 극좌 성향의 오웰이 반공주의 소설가로 여겨지는 현실을 좋아할리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