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로프 팔메
1. 개요
스웨덴의 정치인이자 제 26대 총리. 스웨덴 사회민주노동당(SAP)의 당수로, 두 번에 걸쳐 총리직을 역임하며 현대 복지 국가의 롤모델로 꼽히는 스웨덴의 복지 체계를 완성시켰으나 1986년 신원 미상의 범인이 쏜 총에 암살당한 비운의 인물이다.
2. 생애
2.1. 젊은 시절
1927년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에서 부유한 상류층 집안의 자녀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인 팔메 가는 네덜란드 계통의 가문으로 발렌베리 가문을 필두로 하여 스웨덴 정계, 재계의 유력 가문과 사적으로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어머니는 라트비아계로 과거 제정 러시아의 귀족 집안 출신. 한마디로 슈퍼 금수저. 할아버지 스벤 팔메와 아버지 군나르 팔메는 성공적인 사업가로, 보험회사를 운영했다. 6세 때 아버지의 사망으로 인해 청년 시절을 아버지 없이 성장했지만 전반적으로 팔메는 좋은 집안에서 풍족한 유년기를 보냈다. 어린 시절 가풍에 따른 다량의 독서와 가정교사의 훌륭한 교육은 그에게 독일어와 영어 등 다양한 언어 습득을 가능케 했고, 더 나아가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불어넣어 주었다.
팔메는 1945년 징병제로 스웨덴군에서 2년간의 복무를 마치고 스톡홀름 대학교에 진학, 경제학을 전공한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오하이오 주의 케년 대학에서 2년간 수학한다. 미국 유학의 경험은 그에게 새로운 생각과 사상의 길을 열어 주었다. 사회주의 학생운동권의 영향을 크게 받아 신자유주의 사상가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The road to surfdom(노예의 길)> 을 비판하는 논문을 쓰기도 했으며, 미국자동차노동조합(United Workers Union)과 월터 루서[1] 에 대해 쓴 논문은 학년 최우수 논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학부 과정을 마치고 그는 미국과 멕시코를 히치하이킹으로 여행한다. 그 과정에서 본인의 우상이던 노동운동가 월터 루서를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고, 북미 노동자들과 하층 계급의 열악한 처우와 인권을 직접 접하며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자본주의 리더 미국이라는 나라가 가진 모순과 엄청난 내적 불평등을 목격한 것은 젊은 올로프 팔메의 인생에서 중요한 경험이 되었다.
올로프 팔메는 후일 자신의 사회민주주의적 사상의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세 가지를 밝혔는데 첫째로 1947년 사회민주노동당의 에른스트 비그포르스와 보수당 야를 할마르손, 자유당 엘론 안데르손 간에 벌어진 세금에 대한 논쟁에 참여하게 된 것, 둘째로 위의 서술처럼 1940년대 미국에 머물며 인종차별과 사회적 양극화의 불평등을 목격한 것, 마지막으로 1953년 일본, 타이,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를 여행하며 전후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은 제국주의의 잔재와 식민지 문제를 목격하게 된 게 그것이다.
2.2. 정계 활동
2.2.1. 정계 입문
1949년 미국에서 돌아온 올로프 팔메는 스웨덴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한다. 다양한 교육을 받고 세계를 여행하며 몸에 체득한 경험은 그에게 강력한 사회민주주의자로서의 신념을 불어넣어 주었다.
1953년 당시 사민당의 당수이자 스웨덴의 총리였던 타게 에를란데르의 비서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정계에 입문하였다. 1955년 사민당 내부 조직인 스웨덴 사회민주주의 청년 연대의 요직을 차지했고 노동자 교육위원회 등 다양한 조직에 참여하면서 사민당 내부의 입지를 탄탄히 다져 갔다. 1957년에는 하원의원에 당선되어 정계의 중심으로 들어가게 된다.
1963년 새로이 구성된 내각에서는 무임소 장관[2] 으로 입각하였다. 당시 격화되어 가던 냉전 상황 속에서 팔메는 스웨덴이 지켜 오던 정치/외교적 중립 노선을 유지하는 것을 표방했고 내부적으로는 특히 학생운동과 사회의 혁신에 많은 관심을 가진 열정적 신진 정치인이었다. 1965년에는 교통/통신 부처의 장관직을 맡게 되었는데 언론이 국가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성과 정치적 중립성을 지켜야 한다는 강한 입장을 표출했다.
1967년 교육부 장관으로 임명되면서 팔메의 본격적 개혁 정책이 시작된다. 당시 그는 비싼 교육비로 인한 실질적 차등 교육과 그에 반발하는 강경 좌파 학생운동권의 표적이 되었는데, 집회 장소에 직접 나가 학생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력적인 방법은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설득하는 모습을 보여 국민적 인기를 얻는다. 팔메가 2년 간 교육부 장관으로 재임하며 이룬 대표적 업적은 학자금 대출 제도의 개선이 있는데, 특히 문턱을 낮추어 접근성을 강화하고 장기 대출을 가능케 하여 서민층의 고등교육 활성화에 실질적으로 기여했다는 평을 받는다.
그러던 와중 1968년의 총선은 사회민주노동당의 압승으로 끝났는데, 당시 1946년부터 24년간 총리로 재임하며 장기집권해 온 팔메의 정치적 멘토이자 동지 에를란데르 총리는 후임의 양성과 사민당의 쇄신을 위해 총리직을 사임한다. 사민당 내에서 이미 강한 입지를 구축한 올로프 팔메는 당 대표 선거에서 무난하게 승리하여 에를란데르의 후임으로 지명되고 1969년 '''스웨덴의 제 26대 총리'''로 취임하게 된다.
2.2.2. 총리 재임 1기
올로프 팔메의 정치 활동은 '''혁명적 개혁가'''라는 그의 별명을 통해 요약적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인 복지 국가라는 스웨덴의 명성은 이전 사민당 총리 대부터 기반을 쌓은 것이긴 하지만 완성은 그의 집권기에 이뤄졌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런 급진적 개혁 정책은 임기 초부터 바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1969년 총리에 취임한 그는 우선 사민당 및 정계에서 이야기가 나오던 개헌 작업에 본격적으로 착수한다. 1971년과 1975년의 두 차례에 걸쳐 점진적으로 개정이 단행된다. 현대 입헌군주국들이 모두 그렇듯이[3] 개헌은 비록 명목상이나마 유지되고 있던 국왕의 권력을 개편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으며, 그 예시로 왕이 의제의 주도권을 쥐고 내각을 소집할 수 있던 제도를 없앤 것이 가장 대표적이다. 그의 재임 기간에 스웨덴은 비민주적인 귀족들의 정치체라는 비판을 받던 상원(추밀원)의 권한을 최소화하고 제도적으로 완전한 의회 민주주의를 확립하게 되었다.
스웨덴 사회를 본질적으로 뜯어고치고자 했던 팔메의 노력은 단지 제도적인 측면에만 그치지 않았다. 자신의 사회민주주의적 신념에 충실했던 그는 국가의 개입을 늘려나가는 혼합경제적 정책을 포함, 사회보장제도, 고용 및 노동시장의 개편, 노인과 여성, 장애인을 비롯한 약자의 인권 증진에 대한 폭넓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971년의 노동연금법 개혁과 1974년의 의료보험법 개혁으로 모든 국민이 연봉의 90퍼센트 이상 의료보험 보장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에 이어 1975년의 대학 등록금 전면 무료화[4] 는 앞서 교육부 장관 시절의 학자금 제도 개선과 더불어 스웨덴의 높은 고등교육 비율을 만든 대표적 제도로 손꼽힌다.
물론 이 과정에서 세금의 인상은 필연적인 것이었고 급진적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역시 급진적으로(...) 오른 세율은 스웨덴 국민들에게 염증을 주어 그가 한동안 실각하는 이유가 된다. 참고로 현재도 스웨덴의 세율은 유럽 최고 수준이며 그것이 '인민의 집' 이라는 복지 시스템을 돌리는 원동력임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장애인 인권 개선에도 관심이 많아 1975년에는 지적장애인 대상 불임수술을 폐지했다.
2.2.3. 야당 시절
2.2.4. 총리 재임 2기
2.3. 암살
한동안의 야당 시절을 거쳐 1982년 다시 총리로 재직한 팔메였지만, 1986년 2월 28일 저녁, 아내와 단둘이서 스톡홀름 시내의 극장에서 영화를 감상하고 지하철을 타러 가던 중 길에서 끝내 괴한의 총에 맞아 숨지고 말았다. 향년 59세.
본래 팔메 총리는 격식 차리는 것을 안 좋아해서 국왕 다음의 상서열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경호원 없이 다니는 걸 즐겼다고 한다. 그 날도 마침 경호원이 없었다. 그 탓에 속절없이 죽음을 당하고 만 것이다. 물론 지하철 타고 돌아다닐 정도면 경호원이 있어도 완벽한 경호는 불가능했겠지만.
더 놀라운 것은 현직 총리가 길에서 암살당한 사건인데도 현재까지도 범인이 잡히지 않은 미제 사건이라는 것이다. 추정 용의자들은 많이 거론되었지만 아직 해결되진 않았다. 자세한 것은 올로프 팔메 총리 암살사건 참조.
3. 기타
팔메는 국내정치뿐 아니라 국제외교에 있어서도 적극적인 목소리를 낸 정치인이다. 대표적으로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의 군사 행위를 비난하였고 이란 이라크 전쟁을 중재하는 등 세계평화를 위해 발 벗고 나서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소련의 동유럽 국가에 대한 내정간섭 문제나 스페인의 프랑코 정권, 남아공의 흑백분리정책, 칠레의 피노체트 정권 등에 대해선 강하게 비판했다. 이외에도 핵확산 방지 노력과 아프리카 민족회의,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폴리사리오 전선 등의 독립운동은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이렇게 꽃피운 스웨덴의 중재외교가 현재까지도 스웨덴의 전통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