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스 윈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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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아이들을 구하자
3. 종전 이후
4. 여담


1. 개요


Sir Nicholas Winton, MBE (1909년 5월 19일 ~ 2015년 7월 1일)
영국의 금융인, 군인, 체육인. 체코에서 나치에 의해 억류된 아동들을 구출하는 데에 앞장섰고, 그의 노력 덕에 1939년 한 해 동안 669명의 유대인 아이들이 안전하게 영국으로 옮겨졌다. 이에 윈턴 경은 '영국의 오스카 쉰들러'라고 불렸다.
1923년 잉글랜드 명문사립고등학교인 스토 스쿨이 개교하던 연도에 1기생으로 입학하였으며 후에 미드랜드 뱅크에 입사하여 은행원으로 재직하다가 독일 함부르크로 넘어갔고 다시 1931년에 프랑스로 넘어가서 BNC에서 일하다가 영국으로 돌아와 증권거래소에서 일하였다. 펜싱 선수로서도 좋은 활약을 펼쳐 1938년에는 1940년 올림픽 대표팀에 참가할 영국 펜싱 대표로 발탁되기도 했다.[1]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영국 공군에 복무하며 참전하기도 했다.
MBC 프로그램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관련 내용이 2015년에 방영되었다.

2. 아이들을 구하자


침례계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계 영국인 은행가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상당한 부자였던 니콜라스 윈턴 경은 1920년대 중반 은행원으로 재직하였으며 1938년에 그저 그런 증권거래소 직원으로 런던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휴가를 받아 스위스에 스키를 타러 갔는데, 친구 마틴씨는 그를 체코로 불렀다. 당시 체코는 나치 독일에 점령되어 있었고, 때문에 수많은 유대인들이 수용소에 갇혀 지냈다. 수용소의 참상을 본 윈턴 경은 인도적 행위를 하겠다고 결심했다.
당시 영국에선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유대인 아이들을 대거 양자양녀로 받아 이들의 목숨을 나치로부터 구하려는 행동이 한창이었지만 체코까지는 그 손길이 미치지 않고 있었다. 윈턴 경은 그의 어머니와 함께 영국에 유대인 아이들을 입양보내는 절차를 밟았다. 윈턴 경은 그와 뜻을 함께한 사람들인 도린 워리너, 트레버 채드윅[2], 나콜라스 스탑포드, 비틀릭 웰링톤, 조세핀 파이크, 빌 바라젯티와 함께 체코에서 사무실을 열고 나치의 위협을 받아가면서도 자신의 재산을 털어 나치 장교에게 거액의 뇌물을 주고 영국에서 법적 절차를 밟아 수용소에 갇혔던 669명의 유대인 아이들을 무사히 영국으로 입양보냈다. 윈턴 경은 마지막으로 250여 명의 아이들을 태운 기차를 보내려 했지만, 그때 나치가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그 아이들은 모두 행방불명되었고, 전후 조사 결과 두 명만이 살아남았다는 결론이 나오기도 하였다.

3. 종전 이후


1988년까지 거의 50년간 자신의 선행을 세상에 숨겼는데, 이는 자신이 마지막 250여 명의 아이들을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이었다. 그의 선행의 증거를 다락방에서 발견한 그의 아내가 자료를 없애자고 하는 그를 설득해 세상에 의로운 업적이 알려졌다.

1988년, BBC의 프로그램 《That's Life》

사회자: 여기 뒤에 모든 아이들의 목록이 있습니다. 여기에 Vera Diamant라는 아이도 보이네요. 지금 이 목록에서 찾은 이름인데, 그녀가 지금 여기에 나와있습니다. 안녕하세요 베라(고개를 끄덕이는 베라). 그리고 그녀가 니콜라스 윈턴씨 옆자리에 앉아 있다고 말씀 드려야겠네요. ... 스튜디오 안에 니콜라스 윈턴씨에게 도움을 받은 분이 있다면 일어서 주세요(윈턴씨 주변으로 30여 명 가량이 일어선다, 깜짝 놀라는 윈턴씨).

니콜라스 윈턴 경이 구한 669명의 아이들은 어른이 되고 가족을 이루어 6000여 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니콜라스 윈턴 경이 구한 이들 중엔 영화감독, 소설가, 이스라엘 공군 건립자 등도 있다.
니콜라스 윈턴 경은 영국에선 1983년 대영제국 훈장 5등급(MBE)을 수훈하고 2003년 기사작위(Knight Bachelor) 서임을 받았고, 체코에선 2014년 최고 권위의 백사자 훈장을 받았다. 니콜라스 윈턴 경의 생애는 그의 생전 3편의 영화로 만들어졌다.
물론 니콜라스 윈턴 경 자신이 유태인이니 당연한 일을 한 것뿐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당대에도 자신의 민족임에도 귀찮거나 무서워서 안 도와준 유태인이 훨씬 많았고, 니콜라스 윈턴 경처럼 본인 재산까지 써 가면서 목숨 걸고 도와준 사람은 더욱 드물었다. 니콜라스 윈턴 경은 "가능한 일이라면 방도가 있기 마련이다."라는 말을 남겼으며, 자신은 쉰들러보다 못하다며 쉰들러와는 달리 전쟁중에 목숨을 걸지는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더군다나 윈턴 경 본인은 부모 대부터 기독교인인 데다 조상이 유대인일 뿐이었고, 나치의 악행을 보고 나서는 큰 충격을 받아 신앙생활을 그만둔 무교인이었다.[3][4]

4. 여담


자녀론 2남 1녀가 있으며, 니콜라스 윈턴 경은 106세에 딸과 손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을 자다가 별세했다.
[1] 다만 올림픽은 이듬해 벌어진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취소되어 올림픽 참가 경험은 없다.[2] 이후 윈턴 경은 채드윅이 나치가 침공한 이후에도 그곳에 있었다며 그를 잊지 말아달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Chadwick did the more difficult and dangerous work after the Nazis invaded... he deserves all praise"[3] 유태인 항목에도 쓰여 있지만, 유태인의 정체성을 판단할 때 가장 중요한 부분은 유태교를 믿는지 여부이다. 다음으로 큰 요인은 가정교육을 통해 유태인의 정체성이 형성되는 면이 크기 때문에 가정교육에서 비중이 큰 모계, 즉 어머니의 유태인 여부를 보고 따지게 된다. 윈턴 경은 유태교를 믿지도 않았고 부모님 또한 그러했으니 유태인으로서의 정체성은 두텁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4] 유튜브에 한국어로 니콜라스 윈턴을 검색하면 가장 먼저 나오는 영상은 이런 전후 설명은 쏙 빼놓고 니콜라스 윈턴이 기독교인이었다는 것만 강조하면서 기독교 때문에 선행을 한 것처럼 왜곡하는 영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