닉 라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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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닉 라일리 (David Nicholas Reilly)
'''출생'''
1949년 12월 17일
'''출신지'''
영국 웨일즈 엥글 시
'''국적'''
영국 [image]
'''현재 소속'''
(주)한국델파이 부회장
'''가족관계'''
부인
'''학력'''
케임브리지 대학 경제학 학사(1974)
'''수상'''
2000년 대영제국 훈장 CBE
1. 개요
2. 유년기
3. 펀드 매니저에서 GM 직원이 되기까지
4. 입사 초
5. 복스홀 시절
5.1. 1998 복스홀 루튼 공장 인수문제
5.2. 그 후
6. GM대우 사장 시절
7. 현재
8. 둘러보기


1. 개요


'''Mr. Logic'''[1]

위기의 대우자동차지옥에서 구출해 낸 남자

제너럴 모터스의 전문 경영인. 초대 지엠대우 사장을 역임했다.

2. 유년기


닉 라일리는 1949년 영국 웨일스의 엥글 시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은 현지에서 중규모의 호텔을 운영하는 등 유복하게 자랐으며, 어렸을 적 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복스홀 자동차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는 후에 GM에 입사하는 동기 중 하나가 아버지의 복스홀 차였다고 할 정도로 아버지의 복스홀 차량이 그의 삶에 영향을 끼쳤다.
그는 나중에 1969년에 케임브리지 대학의 경제학부로 들어가 학업에 매진했고, 그 결과 1974년 대학을 졸업하자 마자 펀드 매니저로 뉴욕의 월 스트리트에 가게 된다.

3. 펀드 매니저에서 GM 직원이 되기까지


그러나 그는 마음 한 켠에 자동차에 대한 열정이 있었고, 당시 고수익의 직종이었던 펀드 매니저를 1년만인 1975년에 그만두게 된다.
그리고 그는 곧바로 GM에 입사했고, 그렇게 되어 근무하게 된 곳이 바로 디트로이트 디젤[2]의 엘리슨 사업부[3]였다.

4. 입사 초


입사 초 그는 1978년까지 디트로이트 디젤의 엘리슨 사업부에 있었고, 그 후 벨기에 사업부로 발령이 나 1980년까지 있다가 후에는 GM 본사로 돌아와 1982년까지 일하게 된다. 그런 그는 1982년에 GM 멕시코로 발령이 나게 되었고, 1984년까지 계속 멕시코에서 활동하게 된다.
그런 라일리의 근성과 활동을 높게 산 본사는, 1984년에 라일리를 그의 본국인 영국의 복스홀에 있는 애프터서비스 총책임자로 보낸다.

5. 복스홀 시절


1980년대 영국의 자동차 산업은 이전 1970년대와 비교하지 못 할 정도로 악화일로의 길을 걷고 있었다. 여러개의 자동차 회사들이 모여 국영기업이 된 브리티시 레일랜드는 이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는 중이었고, 라일리가 복스홀에 온 1984년만 해도 브리티시 레일랜드 소속의 재규어포드에 인수되었고, 모리스트라이엄프는 '''그냥 망했다.'''[4] 그나마 살아남았던 브랜드들 중 주요 브랜드였던 오스틴메트로 이후 등장했던 마에스트로몬테고의 상업적 실패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그나마 외국계 자본이 대주주로 있던 루츠 그룹[5], 모건 그룹, 그리고 라일리가 속해있는 복스홀은 그나마 나은 편이었지만 영국의 자동차 산업이 악화되면서 이러한 기업들도 상당히 분위기가 경직되게 된다.
그렇게 불안정한 상황에 들어온 라일리는 이러한 상황에 개의치 않고, 오히려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며 분위기를 고양시키고자 많은 노력을 했다.
부품 생산 공장에 직접 방문해 노동자들과의 대화로 노동자들이 원하는 것과 본사에서 원하는 것을 잘 조율하였고,애프터서비스 구조도 대거 개혁해 작업동선이 간단하고, 편해지도록 상당부분 개선하였다. 또한 이후 구매 담당 책임자로 재직한 후 1986년 3월에는 당사 이사로 발령을 받았으며, 1987년 라일리 사장은 GM-이스즈 합작 사업인 루톤 IBC Vehicles 법인(IBC Vehicles Limited in Luton, U.K.)에서 총괄 부사장이자 이사회 임원으로 재직하였고, 1990년 3월에는 엘리스미어 항구에 위치해 있는 복스홀의 제조 이사로 임명되었다. 
1994년 1월에 그는 스위스의 취리히에 위치한 GM 유럽 지사에서 품질 부문의 부사장을 역임했다. 그렇게 라일리가 품질부에서도 탁월한 업무해결을 보이자,당시 GM의 회장이었던 잭 스미스는 라일리를 1996년에는 복스홀의 사장에 내정한다. 그러나 2년 뒤,'''문제가 발생한다.'''

5.1. 1998 복스홀 루튼 공장 인수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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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들과 인터뷰를 가지는 라일리 회장)
당시 복스홀의 루튼(Luton) 공장은 인천대우차[6]처럼 별도의 법인화가 되어서 복스홀에게 완성차나 부품을 공급하는 식으로 되었었는데, 그 기한이 다 되어 지엠과 인수문제를 가지고 협상을 하였다. 하지만 이 때 노조의 임금체불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노동자들은 '''복스홀의 루튼 공장을 점거하고 파업시위를 벌였으며''', 주요 생산기지였던 루튼 공장에 헬게이트가 열리자 복스홀충공깽에 빠진다.
이에 마지막 협상에서는 미국의 본사에 가 있던 라일리 사장이 급하게 귀국해서 참여를 하였다. 어느 한 쪽이 쉽게 양보할 기미를 보이지 않자 라일리는 자신의 연봉인 '''3억'''을 공장이 안정화될 때까지 회사와 노조에 쓰겠다고 선언했고, 이에 노동자들과 지엠 본사가 수긍을 하며 '''극적으로 인수협정이 맺어지게 된다.'''
그렇게 라일리 사장은 노조와 공장에 GM이 복스홀의 영국 현지공장을 버리지 않겠다는 약속과 철저한 인권 보장을 약속하였고, 라일리 사장이 있던 1999년까지 이는 잘 보장되어 노동자들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5.2. 그 후


1999년 12월 발간된 지엠 유럽의 "미래전망 보고서"에서 '''복스홀의 영국 공장을 폐쇄'''한다는 부분이 발견되며 복스홀 사태는 다시 재점화되기 시작했고, 라일리의 약속과는 달리 본사가 비 협조적으로 나오자 '''라일리는 어느 곳에서도 지지받지를 못하게 되었다.'''
GM Closed UK Car Planet(BBC, 2000) 하지만 라일리는 두 노사간을 다녀가며 다시 협상을 타결시키는 데 성공했고, 영국의 자동차 문제를 잘 해결했다는 평가를 받아 그 공로를 인정받아 2000년에는 영국 왕실로부터 대영제국 훈장을 받게 된다.

6. GM대우 사장 시절


그렇게 GM 유럽으로 이동하여 활동을 이어가던 찰나, 라일리 회장은 대우자동차 인수건에 참여해 줄 것을 GM의 스미스 회장으로부터 부탁받게 되었고, '''그 길로 대우차 인수건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된다.''' 그리고 1년여간의 끈질긴 경쟁 끝에, 라일리 사장은 '''경쟁사인 포드를 이기고 대우차를 인수하는 데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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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대우차 인수 후 라세티 신차발표회때의 모습.[7]

GM대우 1주년 기념 광고.

기업광고 "열정이 미래를 만들다"
라일리 사장은 취임과 동시에 '''대우자동차에서 해고된 1,750명의 노동자들을 전원 복직'''시켰으며, 임원들도 아닌 '''일개 직원들과 회식''' 을 가지는 등, 친근하고 온화한 인상을 주었다. 또한 영어가 약한 4~50대 임원들을 위해 전담 통역사를 붙이는 등 기존의 임원진들에 대한 배려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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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주기적으로 사내 축구대회를 열어 직원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가지기도 했으며, V-250S3X의 개발을 진두지휘 하되 전문적인 면은 기존의 연구소 직원들이 자유롭게 제작ᆞ연구할 수 있도록 개방적인 분위기를 지향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자사의 광고에 '''자신이 직접 출연'''하는 등,[8] 소비자들에게도 자신의 친근함을 어필해 대우차가 실패하였다는 분위기를 점차 바꾸는 등, 많은 개혁을 단행했다. 반대 사례로는 사내하청 형식의 비정규직 파견으로 인해 유죄 판결을 받기도 하는 등, 그의 행보에는 명암이 모두 골고루 있었다.(#) 그리고 '''대우'''라는 이름도 유지하도록 해 옛 대우차 시절의 명성을 이어가려 했으며, 언론과 인터뷰를 할 때 뿐만이 아니라 사적인 자리에서도 '''GM대우는 한국 기업이다'''라는 주장을 하며 GM대우에 대한 애착을 보였다. 한국GM을 그저 'GM의 한국지사' 정도로 생각하는 세르지오 호사를 비롯한 후임 사장들에 비하면 회사에 대한 인식 자체가 다를 정도.(#/##)
그런 그의 노력 덕에 GM대우는 2006년 창사 이래 최고의 실적과 국내 시장 점유율(10.5%)을 달성하기도 했다.[9] 하지만 그는 그간의 성과를 인정받아 다시 유럽지사로 돌아가게 되었고, 그가 떠나게 되자 인천공장에서는 '''근로자 전원이 자발적으로 닉 라일리 사장에 대한 고별식을 열어''' 그와의 이별을 위로하기도 했다.(#)
2006년 하반기에 GM의 아태지역 본부장으로 승진해 GM대우ᆞGM 비담코ᆞ홀덴ᆞ뷰익ᆞ상해GM 등의 아태지역 브랜드와 마케팅을 총괄했었으며, 준중형ᆞ경형 차량 개발권한을 GM대우에게 가져다 주어 라세티, 마티즈, 쉐보레 아베오 등의 준중형ᆞ소형차량을 개발하도록 기여했다. 또한 토스카의 수출을 늘려 호주ᆞ싱가폴ᆞ러시아 등의 국가에도 GM대우의 중형차 라인을 확장하는데 기여하였다.[10]
그렇게 아태지역 본부장을 역임하고 있던 라일리는 GM 유럽의 러시아 컨소시엄 매각이 뒤집어지자 본사의 호명과 함께 2009년 GM 유럽의 새 CEO로 발탁된다. 이 당시 라일리는 언론과의 인터뷰를 적극적으로 가져 언론과 자신에게 호의적인 정치세력과 손을 잡았고, 침착하게 GM 유럽의 매각 실패에 따른 부담 비용을 어떻게 청산하고, 회사를 어떻게 복원할지 상세히 설명하여 회사의 복원비용을 투자받는데 성공한다.
또 GM대우의 사장으로 그의 뒤를 이은 마이클 그리말디 사장의 경영방식이 국내시장에서는 경쟁력이 없다고 생각한건지, 같은 해에 지엠대우의 회장을 마이크 아카몬으로 교체시키는 인사를 단행했다. 마이크 아카몬 사장은 유명 가수들을 고용해 GM대우의 새 슬로건이었던 '''New Ways, Always'''를 홍보하는 곡을 쓰도록 의뢰해 GM대우의 이미지 재고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으며, 소형차 개발에 집중하는 등의 행보를 보였다. 하지만 이러한 전략들이 통하지 않자, 결국 2011년에 쉐보레 브랜드를 도입하기에 이른다.

7. 현재


2012년 3월, 고령의 나이로 인해 라일리 사장은 결국 GM에서 은퇴하게 되었다. 그가 입사한지 37년 만이었다. 그렇게 라일리 사장은 노후를 보내던 중, 한국 델파이[11]에서 사외이사와 기술고문 자리를 제안해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2015년에는 부회장으로 승진했으며, 현재까지 각종 자동차 부품업계들의 컨설턴트로서 현직으로 일하고 있다.(#)
2018년 3월 7일, 군산공장 폐쇄 소식과 한국지엠 철수 논란을 주제로 인터뷰를 했다. 닉 라일리는 해당 인터뷰에서 GM 본사에서 유럽 등의 수출시장을 통한 수익선을 대부분 없애버림으로서 수출지향 체질의 기업체인 한국GM을 잘못 다루고 있으며, 한국에서 완전히 철수할 가능성도 있으나 신차배정 제안을 기회 삼아서 협상을 이끌어내고 노조와 사측이 서로 합의해야 한다고 거론했다. 나아가 생산성에는 문제가 없다면서 수출기지 및 수출 중점 업체로서의 한국지엠의 지위와 경쟁력을 높게 평가하는 반면, 생존을 위해 한국지엠만이 만들어 수출하는 독점 라인업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2018년 11월에는 현대자동차의 판매량 저하가 경쟁력 부족에서 기인한다는 의견을 내비쳤다.

8. 둘러보기




[1] 복스홀 사태를 지혜롭게 해결한 그의 혜안에 호사가들이 붙인 별명. 대략 뜻풀이를 하면 '합리적 남자'라는 뜻이 된다.[2] 현재는 다임러로 매각[3] 상용차용 토크컨버터 자동변속기를 생산한다[4] 말 그대로, 이 두 브랜드가 사라질 당시에 남아 있던 라인업이 각각 1~2차종뿐이였다.[5] 1984년 당시에는 푸조-시트로엥 그룹 산하의 탈보로 존속하고 있었다. 1986년에 승용차 부문이 사라졌고, 1991년에 상용차마져 단종시킨 뒤 공장은 2006년까지 푸조 차량의 현지공장으로 유지했다.[6] 대우자동차 부평공장으로, 지엠대우가 인수를 한동안 망설이자 2005년까지 별도의 법인으로 독자생존했었다.[7] 10월 28일 GM대우 사장 취임 이후 한국에서 보이는 공식적인 첫 행보였다.[8] 1980년대 크라이슬러리 아이아코카 당시 회장이 이러한 마케팅으로 회사를 되살린 전적이 있었고, 호주 미쓰비시와 다임러크라이슬러도 이를 응용한 바가 있다.[9] 이 기록은 2013년이 되어야 제법 근접해진다.[10] 다만 북미에는 말리부, 세계시장에는 토스카로 시장을 이원화한 결과, 토스카는 상당히 참혹한 실패작이 되었다. 그리고 GM은 이를 반면교사 삼아 2011년 부터는 쉐보레 말리부가 토스카를 대체하는 모델로 삼아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11] 영국의 자동차 부품제조 업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