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티시 레일랜드

 


[image]
British Leyland Motor Corporation, Ltd (1968~1975년)
British Leyland Limited (1975~1979년 국영화 시기)
British Leyland Public Limited Company (1982년, 흔히 BL 공사 라고 줄여 부른다)
1975년 그룹 CF. 이 역시 광고는 좋았다의 예시일 것이다.
1. 개요
2. 통합의 시작
3. 불협화음
4. 국유화
5. 비극의 끝
6. 관련 문서


1. 개요


1960~1980년대까지 존속한 영국자동차 회사.
영국의 제너럴 모터스를 꿈꾸웠지만 잦은 노사갈등과 비효율적 경영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면서 공기업 실패와 영국병의 전형적 표본이 되었다. 적기조례의 후유증을 극복하고 간신히 되살아나려 하던 영국의 자동차 산업 전체를 완벽하게 붕괴시킨 주범으로 지목된다.

2. 통합의 시작


1960년대의 영국 자동차 메이커들은 다양한 소형차 모델을 내놓으며 나름대로 잘나가고 있었지만, 영국의 자동차 시장은 다양한 메이커들에 비해 시장이 좁았기 때문에 툭하면 출혈 경쟁이 일어나기 일쑤였다. 특히 모리스를 합병시킨 오스틴, 즉 브리티시 모터 코퍼레이션(이하 BMC)[1]은 지나치게 박리다매 정책[2]에 매달리느라 차를 만들어 팔 때마다 손해를 보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미니나 BMC ADO16같은 베스트셀러가 나와도 팔 때마다 적자행진을 이어갔고, 여기에 불필요하게 공장과 직원 수를 불려서 화를 스스로 불러오다시피했다. 여기에 회사 내부에서 세력이 강한 딜러점 점원들[3][4]을 달랜다는 명분으로 배지 엔지니어링으로 자사 차를 상당부분 재탕하는데다가 대중차의 오스틴-모리스, 준고급의 라일리-울즐리, 스포티 지향의 MG-오스틴 힐리같이 차급별로 브랜드의 중복이 심해 마케팅 비용도 낭비가 심했다. 나아가 1964년의 중형차 라인인 BMC ADO17의 상업적 실패가 겹쳐 4년간 신차 하나 못 출시할 정도로, 회사가 재정적으로 취약해져 정부 지원을 자주 받는 상황이었다.
여기에 한때 정상을 찍었던 영국 전역의 자동차 생산대수도 서독, 프랑스, 일본에 밀려나기 시작하자, 결국 1968년 영국 노동당 정부가 과당(過當) 경쟁으로 인한 회사의 경쟁력 상실을 막고자 브리티시 모터 코퍼레이션의 부도위기를 계기로 최초의 가솔린 자동차 회사 가운데 하나였던(1907년 증기화차에서 재창업. 1968년 당시에는 상용차 및 로버/트라이엄프 고급차와 랜드로버를 소유하고 있었다.) 레일랜드라는 상용차 회사를 설득하기로 마음먹었다. 당시 레일랜드는 도널드 스톡스가 굴지의 상용차 기업으로 성장시킨 동시에 로버, 트라이엄프, 랜드로버 등도 하나 둘씩 인수하며 세력을 불려나가고 있었고, 여기에 대중차 시장에도 조금씩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도널드 스톡스 휘하 레일랜드와 영국 정부의 관심이 맞물림에 따라, 이들은 외국계 기업들[5]을 제외한 대다수 영국 자동차 메이커들을 레일랜드의 이름 아래 통합시켰고 회사명도 '''브리티시 레일랜드'''로 개명했다.
예외적으로 영국 국내 자동차 메이커들 중 애스턴 마틴모건, 그리고 삼륜차 전문업체 릴라이언트는 독립된 회사로 계속 남았으며, 롤스로이스는 자동차 분야 한정으로 레일랜드가 아닌 빅커스에 통합되었다.
당시 브리티시 레일랜드에 통합되었던 메이커들은 다음과 같다. (통합의 주축을 담당했던 레일랜드 제외)
  • 오스틴 (Austin)
  • 모리스 (Morris)
  • 울즐리 (Wolseley)
  • 란체스터 (Lanchester)
  • 대임러 (Daimler)[6]
  • 라일리 (Riley)
  • 스탠더드 (Standard)[7]
  • 반덴 플라 (Vanden Plas)
  • 알비스 (Alvis)
  • 미니 (Mini)
  • MG
  • 로버/랜드로버 (Rover/Land Rover)
  • 트라이엄프 (Triumph)
  • 재규어 (Jaguar)
이렇게 수많은 메이커들을 통합한 브리티시 레일랜드는 영국 자동차 시장의 36%를 차지하는 메이저 업체로 거듭나게 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은 이 회사의 장밋빛 미래를 점치곤 했었다. 또 당시에는 비슷한 과정을 걸쳐 설립된 제너럴 모터스가 미국시장 점유율 50%를 달성했던것처럼 브리티시 레일랜드도 마찬가지로 잘 나갈것이라고 생각하는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기도 했다.

3. 불협화음


하지만 이렇게 수많은 메이커들을 합병했던 브리티시 레일랜드는 출범하자마자 이곳저곳에서 마찰음을 내며 삐그덕거렸다. 메이커들 간의 판매 간섭은 기본이었고, 이로 인해서 차기 자동차 개발계획 때 판매 간섭이라는 이유로 서로를 물어뜯는 개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재규어 XJ 시리즈를 밀어주기 위한 재규어 경영진의 횡포 때문에 아예 개발 계획을 접어야만 했던 로버의 P8같은 사례까지 있었다.링크
더군다나 회사 분위기도 보수적이라 전 뒷바퀴굴림 차종에 걸친 플랫폼 공용화를 구상했던 로이 헤인즈나, BMC 시절의 베스트셀러인 미니와 ADO16의 아버지였던 알렉 이시고니스, 계열사들 중 내내 적자였던 오스틴과 모리스의 1973년 흑자전환을 이끌어낸 조지 턴불[8][9] 등의 인재들이 이탈하는 일도 생겼다. 그나마 있던 경영진들도 무능하다는 평가가 다수였는데, 가령 1970년대에 불어닥치게 되는 해치백 붐에 대비하기 위한 전략으로, 알렉 이시고니스가 설계한 해치백 오스틴 맥시를 밀어주고자 한동안 차기 차종들 대다수에 해치백 구조를 확대 적용하지 않았던 사례가 있었고, 또한 저렴하고 단순한 뒷바퀴굴림 중형차를 의도한 모리스 마리나의 개발비가 앞바퀴굴림과 유압 서스펜션 등의 "첨단" 구성으로 무장한 준중형차 오스틴 알레그로의 그것을 뛰어넘었던 사실은 BL의 비용 관리가 매우 부실하다는 것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가 되기도 했다.[10]
또한 각 회사의 경영진과 노조, 그리고 다른 자회사들 간의 싱크로율은 거의 0에 수렴했고, 이로 인해서 회사 간의 감정싸움 같은 수많은 문제들이 발생했다. 딜러점 점주들의 세력을 잠재우려고 딜러점 여럿을 폐쇄했다가 점주들이 경쟁사로 넘어가버리는 경우가 대표적이었고,[11] 노동조합 역시 경영진과 함께 물량만 채우거나 생산물량만 많으면 되는 수준의 품질관리에 익숙해져 이에 변화를 주려고 할 때마다 노조부터 경영진까지 거부반응을 보이기 일쑤였다. 이러다보니 '''작업복 색깔이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파업을 할 정도로''' 악명이 높아진 노사문제로 인해서 개발에 들어가야 할 시간과 비용은 노조를 설득하는 데 들어가기 일쑤였다. 당시 독일(서독)차 업체들은 노조를 설득하는 데 매년 5%의 시간만 쓰면 됐지만, 브리티시 레일랜드는 무려 '''60% 이상을 노조를 설득하는 데 써야만''' 했고, 고로 자동차 업계에서의 최신의 트렌드와 디자인을 분석하는 데 실패하기 일쑤였다. 그나마 당시 영국이 파업이 빈번하게 일어나던 시절이라고는 하나, 루츠 그룹과 영국 포드, 복스홀과 같은 다른 업체들과 비교해도 브리티시 레일랜드의 노사 관계는 영국 전체를 통틀어 최악이었다.
결국 이렇게 개발 시간과 비용의 압박을 견디지 못한 브리티시 레일랜드는 한 모델을 만들면 개발 비용과 시간 문제로 인해서 10년 이상을 우려먹기 일쑤였다. 게다가 오스틴 알레그로, 모리스 마리나와 같이 당시에 개발된 차들은 처음부터 다른 경쟁 차종들에 비해서 저질에 품질마저도 형편없었으며, 다른 회사들이 새로운 모델을 줄기차게 내놓을 때, 브리티시 레일랜드에서는 한두 세대 전에 개발된 모델을 당시 트렌드에 맞게 쬐끔 손봐서 내놓을 정도로 막장가도를 달렸으며, 그나마 회사 내부에서 개발했던 차기 프로젝트들도 브랜드 간의 간섭이나 부족한 예산을 이유로 많은 수가 줄줄이 중단되기에 이르렀다. 때문에 창립 당시 세운 배지 엔지니어링을 철폐한다는 계획에도 1974년에 나온 중형차 라인인 오스틴-모리스 18-22와 울즐리 식스는 도로 배지 엔지니어링 모델로 출시되기도 했다.

4. 국유화


그렇게 막장플래그를 선사하던 브리티시 레일랜드는 70년대 이후 오일쇼크와 지속적인 파업으로 채산성 악화가 발생, 부도 직전의 상황으로 치닫다가 1974년 12월에 파산했고, 결국 영국정부는 돈 라이더 경의 제안인 "라이더 리포트"를 받아들여 마침내 1975년 국유화를 결정했다. 국유화된 후에는 회사 경영진들의 전반적인 개편과 함께 로버 SD1을 비롯해 굉장한 품질디자인을 자랑하는 모델들을 만들어내는 등 노력이 있었고, 마거릿 대처 정부가 들어선 1970년대 말에도 마이클 에드워즈 신임 회장의 과감한 관리 하에 절반 이상의 공장과 인원을 감축하고 채산성이 적은 수많은 브랜드들을 폐기했으며 품질과 성능 항상을 위해 일본의 혼다와 기술제휴를 맺은 뒤 살아있는 메이커들도 특성에 따라 재분류하는 등 많은 노력을 했다. 하지만 1975년 당시의 점유율을 10여년간 유지할 수 있다는 가정하에 생산시설 확장을 적극 권유하는 라이더 리포트의 지나친 낙관주의적 전망을 한동안 받아들인 결과, 브리티시 레일랜드는 한동안 제대로 된 경영을 받지 못한 채 품질불량 등의 막장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오스틴 메트로 등의 일부 차종을 제외한 대부분 라인업의 판매량은 바닥을 기었다.
결국 보수당이 집권한 1979년에는 마거릿 대처 정부에 168억 상당의 지원금을 요청, 보수당 정권도 대량실업으로 인한 대규모 손실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나름 사실상 망했어요 상태의 이 회사를 살리려고 노력했다. 또한 이 시기에 수장이 된 마이클 에드워즈가 위에서 상술한데로 구조조정을 과감하게 단행해 그가 퇴임하는 1982년 기준으로 회사 상황을 어느 정도 호전시켰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브리티시 레일랜드의 막장상황에선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1984년을 기점으로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 영국정부는 (일종의 민영화신자유주의의 시범타로서) 마침내 이 돈먹는 하마를 분해시키기 시작한다.

5. 비극의 끝


결국 브리티시 레일랜드는 공중분해되기 시작했다. 재규어1984년포드에 매각되었으며, 같은 해에 모리스는 마리나의 페이스리프트 버전인 이탈(Ital)을, 트라이엄프어클레임(Acclaim)이라는 혼다 시빅과의 플랫폼 공유 모델을 마지막으로 자동차 사업을 접었다. 통합의 중심이었던 레일랜드는 1986년네덜란드 트럭 제조사 DAF에 매각되었고 이후 버스 부문이 분리되어 스웨덴 볼보그룹으로 인수, 볼보버스에 합병되었으며, 그나마 경쟁력이 있었던 오스틴로버, 그리고 MG오스틴 로버 그룹아래 국영으로 운영되다가 마침내 브리티시 에어로스페이스(BAe)에 매각, 다시한번 재기의 기회를 노리려 했지만 이마저도 여러 차례 인수되는 과정에서 사실상 붕괴되었다.
결국 재규어와 로버[12]랜드로버(포드에 분리매각)는 두 차례의 매각 끝에 옛 식민지 기업인 '''타타'''[13]에 , 미니는 독일 BMW에, 오스틴을 비롯한 대다수의 브리티시 레일랜드 소속 브랜드들과 브리티시 레일랜드/오스틴 로버 그룹/로버 그룹/MG로버 그룹의 본체는 최종적으로 중국 상하이자동차(SAIC)에 분할 인수되었다. 이로써 영국 기업인 브리티시 레일랜드의 역사는 완벽하게 끝났다.
브리티시 레일랜드의 몰락은 곧 영국 자동차 산업의 붕괴와도 같았으므로,[14] 외환위기 이후 국내차 메이커가 현대자동차그룹 하나만을 중심으로 재편된 오늘날 한국에서도 반면교사로 회자되고 있다.[15][16]
참고로 브리티시 레일랜드의 이사였던 조지 턴불은, 이후 현대차에 의해 스카웃돼서 훗날 현대자동차 부사장에 오르기도 하였다. 그는 현대차의 첫 고유 모델 포니의 개발에 기여하였다.[17]

6. 관련 문서


'''생산 차종들. 브리티시 레일랜드 때는 뱃지 엔지니어링을 억제하려는 시도가 있었기 때문에, 프린세스 외에는 뱃지 엔지니어링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상용차 라인. 레일랜드 산하에서 건너온 차들이 대부분이다.'''
  • 레일랜드 셰르파
  • 레일랜드 테리어
  • 레일랜드 T45
  • 레일랜드 올림피안 [20]
  • 레일랜드 내셔널
  • 레일랜드 빅토리
  • 레일랜드 타이탄
  • 레일랜드 아틀란티안
  • 레일랜드 플리트라인
  • AEC 릴라이언스 [21]
  • AEC 머큐리
  • AEC 마셜
  • AEC 맘모스
  • AEC 맨데이터
  • AEC 스위프트
  • 스캐멜 루트맨[22]
  • 스캐멜 크루세이더
  • 스캐멜 트렁커
  • 스캐멜 하이웨이맨
  • 알비온 리버[23]
  • 알비온 바이킹 VK
  • 알비온 밸리언트 VL
  • 알비온 클라이즈데일
'''여기서부터는 BMC와 레일랜드 시절부터 만들던 차들로, 이때 출시된 차들까지만 뱃지 엔지니어링이 용인되었다. '''
'''구조조정 및 매각 이후.'''
  • 오스틴 로버 그룹
  • 로버 그룹
  • 레일랜드 DAF[26]
  • 레일랜드 버스[27]
  • MG로버 그룹
  • MG 모터로위[28]
이외에도 1975년 국유화 이후부터는 농기계와 냉장고, 지계차, 인쇄업, 소방펌프 등의 기타 제품들을 생산하는 업체들도 가지고 있었다. 링크[29]
[1] 미니의 극초기 모델을 만든 회사로도 유명하며 밑의 오스틴과 모리스가 합병 직전까지 이 회사 산하 브랜드였었다.[2] 당시 회장인 레오나드 로드는 차가 좋으면 무조건 잘 팔린다는 안일함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오스틴 시절의 판매전략에 집착하는 바람에, 차량 제조단가를 생각하지 않고 경쟁차들보다 무조건 싸게 팔아야 미니, ADO16같이 너무 튀고 진보적인 제품군이라도 거부감을 덜 수 있을거라는 생각에 손해를 보는 가격에 차를 팔았다. 여기에 미니와 ADO16의 초기 생산분은 품질문제에 시달린 탓에 보증수리 비용도 꾸준히 발생하였다.[3] BMC로 합병하기 이전의 오스틴, 모리스 시절부터 딜러점을 운영해왔고, BMC가 성립되자 오스틴과 모리스의 각 라인업을 유지할 것은 물론 딜러점 운영체계도 자율운영 체계로 갈 건을 요구했다. 브리티시 레일랜드 창립 초기까지 가면은 이들이 라인업 구성에도 관여할 정도로 세력이 커졌다.[4] 노동조합에 대해서도 파업을 할 때마다 요구사항을 안 들어줄 경우의 손해를 당장 걱정하여 노조원들의 요구 사항을 들어줄대로 다 들어주었다. 1956년 즈음부터는 레오너드 로드 본인도 파업에 질려서 휘하 직원인 조 에드워즈에게 노사 간 협상업무를 맡겼다가 에드워즈가 거절, 결국 에드워즈가 BMC에서 사임하는 일도 벌어졌다.[5] 영국 포드, 복스홀(GM 소속), 루츠그룹(크라이슬러 소속)[6]다임러 벤츠와는 다른 회사. 다임러 벤츠는 '다임-러'로 읽는데 반해 BL의 다임러는 '대임-러'로 읽는다. 한때는 꽤 잘 나가던 고급차 제조사였지만 BL 해체라던가 이래저래 거치면서 2008년까지 재규어사의 고급 브랜드로 남아있었다. 그래서 예전의 쌍눈이 재규어 중 매우 크고 고급스러운 모델의 뒤를 보면 Daimler 로고가 붙어있다. 이 로고. 2008년 재규어를 타타 자동차가 인수하면서 안 쓰이고 있다.[7] 트라이엄프 시절에 이미 폐기된 브랜드지만, 상표권은 보유중이었다.[8] 경영진들에게 모든 권한이 집중된 BMC 시절의 경영방침을 브리티시 레일랜드라는 대규모 기업에 적용하면 오히려 통제력이 떨어지고 적자를 이어간다며 회사의 탈집중화와 계열사 간 자율성 부여를 외쳐, 당시 브리티시 레일랜드의 회장이자 턴불을 기용한 상사 도널드 스톡스와 대립하곤 했다. 결국 도널드 스톡스는 조지 턴불의 경쟁상대이자 회사 권력을 집중시키면서 오스틴, 모리스같은 대중 브랜드 대신 로버나 트라이엄프같은 고급차 파이를 키우자고 주장(조지 턴불은 브리티시 레일랜드가 대량생산 대중차 기업으로 성장하기를 바랬다)한 존 바버를 자신의 후임으로 선택하였고, 턴불은 존 바버가 승진한 지 5개월만에 브리티시 레일랜드를 떠났다.[9] 존 바버도 영국 포드에서 10년간 일한 베테랑에 히트작인 포드 코티나를 개발한 경력이 있었기에 무능하지만은 않았다. 따라서 전신인 BMC로부터 물려받은 약점인 과잉고용된 직원들의 구조조정을 시행했고, 추가채용을 하지 않는다는 선언으로 시작해 큰 갈등 없이 약 20만명의 직원들 중 3만 명을 정리했다. 하지만 1973년 말의 석유파동으로 인해 수익성이 갑자기 나빠지고 1974년 말에 파산, 여기에 라이더 리포트에 기반한 국유화 과정에서 구조조정의 빛이 사라지고 말았다.[10] 브리티시 레일랜드가 성립되었을 당시엔, 전신 시절에 차 하나를 개발해 손해를 보는 구조를 개혁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영국 포드에서 인력들이 많이 건너와 비용절감 시도를 했었지만, 그럼에도 생산규모 대비 고용인원과 공장 수가 과도한 BMC 시절의 비효율성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못해 차를 팔 때마다 손해를 보는 기존의 구조는 여전히 변하질 않았다. 게다가 도널드 스톡스는 레일랜드 시절의 성공에 취하여 브리티시 레일랜드가 만드는 차마다 무조건 팔릴 것이라고 믿었고, 따라서 불필요하게 많은 인원 수만큼 차량의 생산대수를 늘리면 비효율성도 개선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구조조정을 안일하게 받아들였다.[11] 특히 닛산자동차를 비롯한 수입차 업체들이 브리티시 레일랜드에서 빠져나간 점주들과 계약해 반사이익을 보았다.[12] 2000년 이후 로버 브랜드는 BMW에게 상표권이 있었으나, 상하이자동차가 MG로버 그룹을 인수한 뒤 로버 75를 재생산하려 하자 랜드로버 브랜드를 이유로 당시 모회사가 로버 브랜드의 상표권을 사들여 이를 저지하려고 했다.[13] 현재 타타대우상용차의 모기업인 그 회사 맞다.[14] 오늘날에도 영국 국적의 자동차 회사로 모건맥라렌, 애스턴 마틴 등이 있지만 레일랜드가 존재하던 시대에 비하면 정말 초라한 수준이라 볼 수 있다.[15] 현기차의 노사 관계가 상당히 나쁜 편이라 수많은 줄파업이 있었고, "삶의 질"을 외치며 임금인상과 근로시간 축소를 외치는 노조와 해외 공장에 비해서 능률이 낮고 인건비가 높아 반발하는 사측 간의 갈등이 상당하다. 특히 2017년 8월 31일에는 1심 판결에서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으로 포함하라는 결론이 나와, 거액의 소송이 걸려 있던 기아자동차가 적자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납품 업체들까지 나서서 판결에 큰 관심을 갖고 노조의 입장에 반발했고, 언론에서는 한국 자동차 산업에 큰 위기가 될 것이라 조명하기도 했다. 반대로 한겨레신문처럼한국 자동차산업의 위기는 첨단기술 인프라의 부족에서 비롯된 데에 가깝다고 보는 입장도 있고, 전 금속노조 위원장이 지역신문 사설을 빌려 끝없이 사익에만 신경을 써서 언론플레이를 일삼는다는 기업 책임론을 제기한 적도 있다.[16] 다만 소송으로 인한 배상 규모는 1심에서 당초의 1조에서 4천억원대 중반으로 절반 이상 축소되었다. 일단 회사에서는 잔업과 특근을 중단하는 식으로 비용유출을 최소화하고 있으나 대법원까지 가는 재소송을 예고하고 있다. 반면, 노조에서는 금전적 손해를 염려해 3차 소송을 포기했다.[17] # "...그 무렵 때마침 영국 유수의 자동차 회사인 BLMC(British Leyland Motors Corporation) 부사장 조지 턴불이 회사를 그만뒀다는 정보를 입수했다.정주영은 설득의 천재였다. 그는 턴불과 엔진, 액셀러레이터, 트랜스미션 등 주요 부품 제작 기술 계약을 체결했다. 이어 1974년 7월부터 1억 달러의 공사비를 들여 연산 5만6000대 규모의 종합 자동차 공장 건설에 들어갔다. 포드사와 완전 결별한 후 3년이 지난 1976년 1월, 현대자동차는 최초의 국산차 ‘포니’를 탄생시켰다."(기사 발췌)[18] 이쪽은 BMC 시절부터 개발되었으나, 출시는 브리티시 레일랜드 때인 1969년에 이루어졌다. 사실상 BMC 산하에서 개발된 마지막 차로, 1978년부터 단종 때까지는 “레일랜드 맥시“로 판매되었다.[19] 이때 나온 프린세스는 오스틴, 모리스, 울즐리의 3개 브랜드로 리뱃징되었으나, 얼마 안가 프린세스라는 단일 브랜드로 통합되었다.[20] 레일랜드 최후의 2층 버스 섀시였다. 레일랜드의 버스 부문이 볼보그룹에 인수된 이후 볼보 올림피안이라는 이름으로, 엔진만 볼보의 것으로 교체하여 2000년까지 생산되었다.[21] 영국의 아이콘인 AEC 루트마스터 2층버스를 만든 그 회사의 차량으로, 브리티시 레일랜드 성립 전의 AEC는 레일랜드 소속 업체였다.[22] 스캐멜 역시 레일랜드 소속의 상용차 회사이다.[23] 알비온도 레일랜드 산하 상용차 업체이다. 여기서의 리버는 "Reiver"로 표기.[24] 이때부터 미니가 독립 브랜드로 자리잡았다.[25] 여담으로 기아 니로의 광고에서, 스핏파이어가 견인되어 가는 스포츠카로 나왔다.[26] 레일랜드의 트럭 부서. 지금은 DAF 트럭의 생산기지로 운영되고 있다.[27] 레일랜드의 버스 부서. 1987년 민영화된 지 1년 만에 볼보그룹에 인수, 1993년까지 존속했다가 볼보버스에 흡수된다.[28] 중국 상하이자동차 산하에 있으며, 브리티시 레일랜드/오스틴 로버/로버/MG로버 그룹의 본체를 난징자동차가 인수한 뒤 상하이자동차가 다시 인수했다.[29] 당시 브리티시 레일랜드의 중장비 제조업체는 트럭 및 버스 부서와 분리된 이후, 2007년에 핀란드 측의 모회사와 같이 두산인프라코어로 인수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