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 아이아코카

 

'''리도 앤서니 "리" 아이아코카'''
Lido Anthony "Lee" Iacocca
'''국적'''
미국 [image]
''' 출생'''
1924년 10월 15일, 미국 펜실베이니아 앨런타운[1]
'''사망'''
2019년 7월 2일 (94세), 미국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 벨에어
'''직업'''
기업인, 전 크라이슬러 의장, 전 포드 부사장
1. 개요
2. 생애 및 상세
2.1. 생애
2.1.1. 포드에서의 활동
2.1.2. 크라이슬러에서의 활동
2.1.3. 그 이후
3. 여담


1. 개요


[image]
'''Lido Anthony "Lee" Iacocca'''
1924년 10월 15일~2019년 7월 2일
리도 앤소니 아이아코카, 줄어서 리 아이아코카(Lee Iacocca)는 미국의 전 기업가다.

2. 생애 및 상세




2.1. 생애


이탈리아 출신의 이민자 부부인 니콜라 아이아코카(Nicola Iacocca)와 안토니에타 페로타(Antonietta Perrotta)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인 "리도"는 아이아코카 부부가 베니스의 리도 디 베네치아(Lido di Venezia)로 신혼 여행을 가 있을때 임신 중이었기에 붙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리 아이아코카는 자서전을 통해 부친인 니콜라가 결혼 전에 리도 디 베네치아를 여행했다는 것을 근거로 "로맨틱하지만 사실이 아니다"라고 해명한 바 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의 철강 제조업 중심 도시인 앨런타운(Allentown) 시에서 태어난 그는 앨런타운 고등학교[2]를 1942년에 졸업해 베들레헴(Bethlehem) 시의 리하이 대학교(Lehigh University)의 산업기술과를 다녔고, 기술자 커뮤니티인 타우 베타 파이(Tau Beta Pi) 명예협회와 세타 치 사교클럽(Theta Chi Fraternity)의 회원으로 활동했다. 대학교 졸업 후에는 월래스 메모리얼 펠로우쉽(Wallace Memorial Fellowship) 상을 수여받은 뒤 프린스턴 대학교로 가서 정치학과 플라스틱 공학을 전공했다. 또한 이때부터 포드의 기술자로서 활동을 시작하기도 했다.

2.1.1. 포드에서의 활동


리 아이아코카는 1946년 8월부터 포드에서 근무하기 시작했으며, 기술자로 활동하기 시작한 지 얼마 안되어 판매 및 홍보 부처로 옮길 것을 제안받았다. 그는 이 때부터 필라델피아에서 보조 판매부장(assistant sales manager)으로 활동을 시작했고, 1956년식 차량을 출시할 때는 "56 for 56"이라는 이름 하에 1956년식 포드 차를 20% 할인가에 판매하고 3년간 매달 56달러씩 할부 구입을 할 수 있도록 해 이름을 널리 알린 적 있었다. 덕분에 이 캠패인은 전국으로 퍼져 나갔으며, 포드 본사가 있는 디어본으로 옮겨가 성적을 꾸준히 올려 왔다. 이러한 경력 덕분에 리도는 1960년 11월 10일에 포드 디비전의 부회장 겸 총지배인(general manager)으로 승진했고, 더 나아가 1965년에는 포드 부회장, 1967년에는 승용차 및 트럭 부서 부회장, 1970년 12월 10일에는 회사 부회장까지 올라갔다.
그는 포드에서 포드 머스탱, 링컨 컨티넨탈 마크 III, 포드 에스코트 등의 명차들을 개발해 왔고, 1960년대 말에 머큐리 쿠거마퀴스(Marquis)를 출시해 머큐리 브랜드를 되살리는 데 기여했다. 심지어 그는 포드 측에서 반기질 않아했던 아이디어들도 여럿 구상했고, 일본차 및 유럽차에 대응하기 위한 내수시장용 완전 신형 소형차인 포드 핀토를 개발하게 했다. 출시가 2천 달러 이하에 총중량 2,000파운드(약 0.9톤)을 목표로 잡은 이 소형차는 포드 측에서 내수용으로 직접 완전 신차로 만들고 싶어했기에, 유럽에서 팔던 에스코트 대신 핀토를 개발했다. 그렇게 등장한 핀토는 그럭저럭 잘 나갔지만, 비용절감을 시도할 때 사고 시의 보상금까지 계산해가면서 연료탱크 보호 장치를 빼 버리는 등으로 안전을 희생하는 바람에, 결국 1970년대 말에 인기를 크게 잃어버린 데다가 거액의 보상을 안기고 포드에 대한 평판을 흐리면서 아이아코카가 포드에서 쫓겨나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또한 혼다 소형차의 엔진을 들여와 소형차를 만들자는 제안[3]을 하는 등 당시 회장인 헨리 포드 2세와 갈등을 계속 빚다가, 회사에 수많은 이익을 남겨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1978년 7월 13일에 포드에서 해고되었다.

2.1.2. 크라이슬러에서의 활동


포드에서 쫓겨난 아이아코카는 당시 폐업 직전이나 다름없었던 크라이슬러로 옮겨 회사를 재건하기 위한 시도를 시작했다. 아이아코카는 크라이슬러를 재건하기 위해 먼저 35명에 달하는 부사장급 임원 중 33명을 경질하고, 그가 일했던 포드 출신을 포함해 새로운 임원진을 구성하였다. 더불어 "1달러 연봉 선언"[4]을 하는 등으로 크라이슬러의 노동조합을 설득하여 2번이나 임금 삭감을 이끌어 냈으며 1980년 한 해만 1만 5천 명의 정규직원을 해고한 뒤 유럽 지사도 매각하는 구조조정을 단행하여 5억 달러에 달하는 비용 절감을 이루었다. 그리고 워싱턴 D.C.에 가서 상원, 하원 청문회에 불려 다니며 노력한 결과, 연방 정부로부터 15억 달러 규모의 융자금 보증을 얻어 냈다. 더 나아가 아이아코카는 유럽 지사인 생카루츠 그룹이 공동개발한 소형차를 활용해 전륜구동 소형차 기술을 가지고 새 차를 개발했으며, 포드에서 구상했다가 받아들여지지 못한 미니밴 라인업이나 전륜구동 플랫폼인 K-바디 플랫폼을 만들어 히트시켰다. 그 베이스가 된 소형차인 생카 호라이즌 역시 플리머스닷지의 소형차로 출시해 성공시켰다.
그렇게 융자 보증을 받아낸 아이아코카는 터빈 엔진[5]을 비롯한 비현실적인 계획들을 중단시켰고, 급한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1981년에 K-바디 플랫폼으로 만든 첫 차인 플리머스 릴라이언트/닷지 아리스 중형차 라인을 출시했으며, 1983년 말에는 그 플랫폼을 개량해 만든 플리머스 보이저/닷지 캐러밴 미니밴 라인도 출시해 수익을 거두었다. 특히 이때는 미국에서 불황이 시작되었던지라 소형차의 수요가 높아졌고, 아리스/릴라이언트는 넓은 실내공간으로 거둔 6인승 인증 때문에 중형차였다 뿐이지 상당히 작고 연비가 좋아 잘 팔렸다. 미니밴 역시 작으면서도 공간을 다양하게 사용할 수가 있어서, 당시의 대형 밴과 스테이션 왜건 사이의 틈새 수요를 잡아내는 데 성공하면서, 크라이슬러의 꾸준한 돈줄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또한 그는 회사의 기함으로 임페리얼을 부활시켰고, 완전 전자식 연료분사장치나 완전 디지털 대시보드같은 신기술들을 대거 적용했다. 프랭크 시나트라에게 첫 차를 주는 등의 시도로 흥행을 끌어 보려고 했던 것과 달리, 임페리얼은 품질 문제로 얼마 안 가 단종되어 수년 간 공백기를 맞이했다. 나아가 그는 회사 홍보의 일환으로 토크쇼, 광고, 발표회에 자주 참여해 자사 제품과 개발과정, 캠페인 등을 스스로 밝혀 미국 국민들의 신뢰를 사고, 회사 임원들에게 자부심을 안기기 위한 "자부심이 돌아왔다(Pride is Back)", "더 나은 차를 찾았다면 그걸 사라"는 모토를 활용한 캠페인도 주도했다.[6]
이런 노력 끝에 1982년 여름, 크라이슬러의 회장으로 된 지 만 7년이 되기 전에 아이아코카는 고질적인 부채 15억 달러를 일시에 갚고 7억 달러의 순이익을 남기는 신화를 이루어냈다. 5% 삭감했던 노동자 연봉도 원래 수준으로 올려 놓았고 해임했던 직원들의 상당수도 다시 불러들였다. 이렇게 회사가 커지다보니 아이아코카는 밥 루츠를 포함해 포드에서 일했던 회사 동료들을 크라이슬러로 데려왔으며, K-바디 플랫폼을 대거 활용해 수많은 신차들을 개발하게 하는 건 물론 평소 관심을 두어 왔던 AMC/지프, 람보르기니 등을 1987년에 인수했다. 그렇게 인수한 지프를 통해 크라이슬러의 돈줄로 삼은 건 물론, 지프 랭글러체로키, 그랜드 체로키 등의 히트작들을 개발해냈던 AMC 내의 인재들을 자사의 차량 개발 프로젝트에 투입하고 창의적인 제품개발 과정을 도입하기까지 했다.[7][8]
그런데 이 과정에서 무리한 인수합병으로 회사가 다시 재정난에 처한 건 물론 회사 라인업의 정리가 시급해졌고, 람보르기니의 운영[9]이나 마세라티와 합작 개발한 크라이슬러 TC 바이 마세라티, 새턴의 대항마로 기획한 리버티(Liberty) 브랜드와 이글 브랜드[10]같은 무리수들이 실패한 건 물론 아이아코카가 K-바디 플랫폼의 활용과 보수적인 디자인을 고집하는 점,[11] 공장별 생산대수 유지와 매출 극대화를 위한 적극적인 뱃지 엔지니어링,[12] 주가에 대한 집착도 걸림돌이 되기 시작했다. 게다가 "1달러 연봉 선언"의 진정성까지 논란에 휘말림에 따라, 아이아코카는 1992년 말 후계자로 로버트 이튼(Robert Eaton)을 지명하고 회장 자리에서 사임했다.

2.1.3. 그 이후


은퇴 후 아이아코카는 고급 이탈리아 식당을 설립하고 아내와의 사별을 계기로 당뇨병 치료 재단을 설립하는 등의 활동을 해 왔으며, 영화사 MGM의 이사진 중 한 명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다 1995년에는 자신의 억만장자 친구였던 커크 커코리언(Kirk Kerkorian)과 손을 잡고 크라이슬러의 회장으로 복귀하려고 했는데, 커코리언이 크라이슬러의 지분을 사들였다가 터진 논란과 갈등으로 인해 1996년에 인수한 지분을 도로 매각했고, 커코리언과 크라이슬러가 1996년부터 5년간 아이아코카가 크라이슬러에 대해 대중 앞에 언급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면서 사그라들었다.
그러다가 2005년 7월, 다임러크라이슬러에서 아이아코카를 홍보대사로 다시 기용하면서 다시 크라이슬러로 되돌아왔다. 그는 제이슨 알렉산더(Jason Alexander)와 스눕 독(Snoop Dogg)과 같이 크라이슬러의 직원 대상 캠페인을 홍보하는 데 참여했고, 한때 그가 제시했던 모토였던 "더 나은 차가 있다면 그걸 사라"는 멘트도 다시 사용했다. 다임러크라이슬러에서는 아이아코카를 기용하면서, 2005년 7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파는 차량에서 대당 1대씩의 수익을 아이아코카의 당뇨병 치료 재단에 기부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크라이슬러가 파산한 2009년 4월, 아이아코카는 인터뷰를 통해 크라이슬러의 회장이었던 시절을 회고하면서 아쉬워하는 발언을 남겼고, "다들 크라이슬러가 살아남기를 바라지 않는 현실을 받아들이고자 하며, 정 회사를 해체한다면 정부 관료 대신 전문가를 파견하라"는 입장도 같이 밝혔다.
현지 시간으로 2019년 7월 2일 오전 7시 반, 캘리포니아 벨 에어의 자택에서 작고했다. 사인은 파킨슨병 합병증. 7월 10일에 첫 아내 메리가 묻힌 미시건 주 트로이의 화이트 샤펠 묘지(White Chapel Cemetery)로 옮겨져 안장되었다.#

3. 여담


아이아코카는 자동차 사업 외에도 정치, 대중문화, 요식업 등의 기타 분야에서도 얼굴을 자주 비추었고, 자서전도 여러 차례 써서 발간해왔다. 가령 1994년에 뮤지컬인 윌 로저 폴리스(The Will Rogers Follies)의 제작을 위해 제작자인 피에르 코제트(Pierre Cossette)와 손을 잡은 적이 있었고, 브랜슨 힐(Branson Hills)의 주택 건축 사업에 투자하거나 1993년에 커크 커코리언의 제안으로 MGM 그랜드(MGM Grand)의 이사진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1995년에는 레스토랑 체인인 코코루(Koo Koo Roo)의 이사진으로 들어왔으며, 1998년에 회장으로 일하면서 가족 식당 업체들을 합병하고 1999년까지 이사진으로 남아 있었다. 그곳에서 내려온 후에는 EV 글로벌 모터스(EV Global Motors)의 수장이 되어, 최고시속 15mph(약 24.1km)에 주행거리 32km를 목표로 하는 전기 바이크를 개발하는 데 참여했다.
가족으로는 1956년에 아내인 메리 맥클리어리(Mary McCleary)가 있었고, 캐서린과 리아라는 두 딸을 두었다. 1983년에 메리가 당뇨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아이아코카는 훨씬 나은 당뇨병 치료제를 위해 투자해야겠다는 생각에 재단을 설립하기도 했다. 1986년에는 페기 존슨(Peggy Johnson)과 혼인했다가 19달 후인 1987년에 이혼했고, 1991년에 다리엔 얼(Darrien Earle)과 결혼했다가 3년 만에 이혼했다. 이후 여생을 캘리포니아로스앤젤레스의 벨 에어(Bel Air)에 보냈다.
대한민국에서도 어느 정도 알려져 있는 인물로, 기아그룹김선홍 회장은 봉고로 거둔 성공으로 하여금 "한국의 아이아코카"로 평가된 적이 있다. 그의 자서전 중 "아이아코카"와 "진정한 리더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책이 1985년과 2008년에 한국어로 번역되어 출간되었고, "아이멘토 인물이야기" 위인전 시리즈 중에 리 아이아코카의 전기가 포함되어 있다.
허영만의 만화 "아스팔트 사나이"에서도 등장하는데, 그의 본 이미지와는 다르게 상당히 무능한 인물로 그려져 있으며 주인공의 기업인 천마모터스로 크라이슬러가 인수되는 내용까지 실려 있다.
영화 "포드 V 페라리"에도 젊은 시절의 리 아이아코카가 출연하며 존 번설이 배역을 담당했다.
당시 그와 같이 일했던 밥 루츠는 아이아코카에 대해 "자신과 상당히 닮아 있었던 사람이었으며, 동시에 각종 언론매체에도 당당히 등장해서 대중과의 소통에 신경 쓴, 미국 최고의 기업인 중 하나"로 회고했었다. 자신이 밥 이튼에게 밀려서 크라이슬러의 부회장으로 만족해야 했던 것도 상사인 리 아이아코카와 너무 여러 모로 닮은 탓에 견제되었던 것이라고 보았다. 아이아코카가 작고했을 때도 크라이슬러 시절에 부자관계같이 지냈었으며, 아이아코카에게 유치하고 애같이 굴었던 면이 있었던 걸 후회하며 좀 더 조심해서 다가섰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추모사를 올렸다.

[1] Allentown[2] 지금의 윌리엄 앨런 고등학교(William Allen High School).[3] 포드 피에스타에 사용하기 위해서 혼다 CVCC 엔진+변속기 세트 30만대를 도입해오려고 했다.[4] 사실 무임금 선언을 하면 법적 문제와 사회적 논란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에 최소한 서류상으로 남겨놓는 것이다. 실제로 다른 주제이긴 하지만 오늘내일 하는 회사를 인수시 공짜로 한다면 그에따른 행정적 문제가 엄청나지기 때문에 형식상으로 1달러에 인수하는 것이다. 물론 그 만큼 리 아이아코카의 강력한 의지를 표현한 것이기도 하지만.[5] 20년 이상 크라이슬러가 개발해 왔으며, 1979년에 선보일 예정이었다.[6] 또한 일각에서는 크라이슬러도 GM, 포드처럼 노골적인 뱃지 엔지니어링을 이용했음에도, 오히려 1977년 폐업위기 이후로 각 브랜드가 무의미해진 크라이슬러였기에 오히려 개별 브랜드보다는 크라이슬러 코퍼레이션이라는 그룹 자체를 강조하는 마케팅으로 뱃지 엔지니어링을 역이용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당시 크라이슬러에서 닷지와 플리머스 차량을 한 광고에 등장시키는 경우가 많았고, 이들을 "크라이슬러 미니밴"이나 "K-카"같은 표현으로 수식한 것이 그 근거.#[7] 그 중 아이아코카가 좋아했던 그랜드 체로키는 당시에 개발이 거의 다 되어 있었는데, 체로키의 후속이었던 게 너무 커지자 그 윗급 라인업으로 개조해 수년 뒤인 1992년에야 출시될 수 있었다. 또한 AMC의 제품기획을 물려받음에 따라 르노 기반 준대형차인 이글 프리미어의 세로배치 전륜구동 플랫폼 구성을 참조해 차기 대형차 플랫폼인 LH 플랫폼에 반영하거나, 당시 개발중이던 AMC의 소형차 기획을 크라이슬러의 자체 브랜드로 편입시켜 닷지 네온으로 출시한 사례도 있었다.[8] 당시 크라이슬러로 영입된 인재 중 하나가 르노/AMC 출신의 엔지니어인 프랑수아 카스탱(Francois Castaing)으로, 포드에서 넘어온 밥 루츠, 톰 스톨캠프(Tom Stallkamp)와 함께 제품개발에 적극 참여했다. 이렇게 AMC의 창의적이고 유연한 인재들과 제품개발과정이 1990년대 크라이슬러 내부에 널리 퍼짐에 따라, 1990년대의 크라이슬러는 오히려 AMC가 크라이슬러를 집어삼킨 거나 다름없었다는 평가도 나올 정도.[9] 아이아코카의 부하이자 회사의 상급 임원이었던 밥 루츠는 자서전을 통해 "람보르기니를 산 건 수익성보다 브랜드 때문이며, 크라이슬러 차를 람보르기니와 적절히 크로스오버해서 업그레이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식으로 크라이슬러 차종의 람보르기니 에디션을 만들라는 지시를 아이아코카가 내렸었다는 점을 회고했었다. 어떻게 보자면 람보르기니에 대한 아이아코카의 인식이나 이해를 엿볼 수 있는 대목.(###)[10] 리버티는 비용문제로 아예 개발 과정에서 취소되었고, 이글은 AMC의 승용차 부문을 개명한 뒤 과거 AMC의 모회사였던 르노 산하의 르노 기반 라인업과 미라쥬 세단, RVR, 갤랑, 이클립스같은 미쓰비시 차종들을 몰아넣는 데 그쳤기 때문에 판매가 부진했다.[11] 밥 루츠가 갓 크라이슬러로 넘어온 1980년대 중반, 리 아이아코카는 루츠에게 포드 토러스머큐리 세이블을 언급하면서 "어차피 실패할 차들인데 이들이 출시되기 전에 크라이슬러로 잘 넘어왔다"며 환영하기도 했다. 당시 크라이슬러에서 토러스 대항마로 준비한 차는 닷지 다이너스티크라이슬러 뉴요커였으며, 아이아코카는 디자인에 대한 고객조사 점수의 평균이 포드가 10점 만점에 5, 자사가 7.5점이었다며 자신만만해했다. 밥 루츠는 자서전에서 고객조사의 허점을 이야기하며 평가가 극과 극이었던 토러스/세이블, 중간 점수로만 들이찬 다이너스티/뉴요커의 평점을 설명했다. 즉 토러스와 세이블은 확실히 좋아하는 고객들 반+확실히 싫어하는 고객들 반이었다면 뉴요커와 다이너스티는 "생각은 해보겠지만 가장 먼저 살 차는 아니다"같은 그저 그런 평가로 가득했다고 설명했다. 이어서 밥 루츠는 같은 자서전에서 아이아코카를 "시대에 대한 감이 떨어지기 시작했던 1980년대까지는 무적"이라고 코멘트를 해 아이아코카가 1980년대의 시대변화를 잘못 읽은 부분이 있었다고 자평하기도 했다.[12] 밥 루츠의 자서전에 따르면, 지프 그랜드 체로키를 닷지 브랜드로 공급하는 계획이 있었다고 한다. 그 외에 플리머스 호라이즌의 지프 브랜드 버전이 계획되는 등, 지프로도 뱃지 엔지니어링 라인업을 도입하려다가 지프 측의 반대로 무산된 적도 있었다고 전해진다.